LOGIN검은 차량이 사라진 뒤에도 꽃집 앞 골목은 한동안 고요했다. 차바퀴가 남긴 물자국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점점 흐릿해졌고, 간판 아래 걸린 풍경이 찰랑거리며 애써 아무 일도 없던 듯한 밤의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꽃집 안의 두 사람은 그 침묵을 다르게 느꼈다. 마치 소리 없는 발자국이 방금까지 코앞에 있었다가 사라진 듯한 느낌, 은 보조 카운터 윗면에 손을 올려 조용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강혁 씨… 방금 그 차, 여기 그냥 지나간 게 아니에요.” 그 목소린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강혁은 말없이 창밖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나도 알아. 헤드라이트 각도, 속도… 잠깐 멈춘 타이밍까지. 우리를 보고 간 게 맞아.”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은 이미 둘 사이에서 절대적인 결론이었다. 배신구, 흑거미, 혹은 그 중간에 위치한 누군가가 이미 ‘해남의 작은 꽃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 수진은 고개를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이제… 여기 더 오래 못 있어요.” “알아.” 강혁은 멀리 바다가 있는 방향을 가만히 바라봤다. 말없이 시선만 움직였는데도 속내는 선명해 보였다. 그는 이 마을에서 모든 걸 잃은 뒤 어렵게 다시 살아온 사람이었다. 매일 갯바람을 쐬며 버티고, 배 위에서 혼자 시간을 견디며 마음을 조금씩 회복했던 곳. 이곳을 떠난다는 건, 다시 과거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수진은 그의 조용한 흔들림을 알아보고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여기를 떠난다는 게… 망설여지면 말해요. 내가 대신” “아니야.” 강혁은 짧게 끊어 말했다. 단호하면서도 의외로 부드러운 음. “이제는 떠나야 해. 더 늦기 전에. 네가 말했잖아.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그 말이 닿자 수진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는 강혁의 ‘결심’을 보기 원했지만 이렇게 빨리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강혁은 그녀 쪽으로 걸어와, 카운터 모서리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의 손 사이 거리는 손
문이 닫히며 꽃집이 다시 고요를 되찾았지만,이전의 고요와는 전혀 다른 결이 깔려 있었다.무언가가 무너지고, 동시에 새로 세워지는 이상한 정적이었다.숨소리 하나, 의자 다리 하나의 위치,심지어 창밖에서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간판의 미세한 소리까지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들려왔다.강혁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여진의 메모를 곧게 편 채 시선에서 떼지 않았다.그는 글자 하나하나를 다시 읽고 또 읽으며 여진이 어떤 얼굴로 이 글을 썼을지,얼마나 급했고, 얼마나 두려웠고, 왜 하필 지금 이 말을 남겼을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런 강혁의 옆얼굴을 수진은 오래 바라봤다.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슬픔,말해버리면 부서질 것 같은 마음,그 속에서 기어이 버티고 있는 사람의 어둡고 단단한 무게.그 무게를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이렇게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건 처음이었다.수진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강혁의 팔 위에 손끝을 조용히 올렸다.그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강혁의 어깨가 아주 살짝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그의 숨이 깊게 떨어지고, 시선이 메모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그녀에게 향했다.“수진.”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목소리는 이전과 달랐다.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는 음.누군가를 의지하려 애쓰는 음.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가겠다는 결심이 녹아 있는 음.수진은 그 음을 피하지 않았다.“이제… 정말 혼자 가려고 하지 말아요.”그녀는 낮게 말했다.숨처럼, 속삭임처럼,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힘으로.“여진 씨가 죽은 이유도, 그 사람이 남긴 말도…다 당신 혼자 짊어지라고 남긴 게 아니에요.”강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아니었다.그녀의 말을, 그녀의 숨결을, 그녀의 마음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듣고 있었다.수진은 말을 이어갔다.“나도… 당신이 혼자 가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요.”그 말은 조용했지만,그 아래엔 오랜 시간 눌러왔던 감정이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는 유난히 천천히,마치 누군가 일부러 시간을 늘리려는 것처럼 여유롭게 울렸다.수진과 강혁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두 사람 모두 숨조차 깊게 들이쉬지 못한 채,세상에서 가장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고요하게 굳어 있었다.철컥. 문손잡이가 완전히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고, 꽃집 안에 희미한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공기,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흐릿한 온도.그 공기를 먼저 알아보고 불길함을 감지한 쪽은 수진이었다.“……여기, 사람이 있었네.”문틈이 천천히 벌어지고, 검은 트렌치코트 깃을 세운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비수처럼 가느다란 시선, 심연처럼 텅 빈 미소.강혁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일순간 하얘졌다.양도일.해남 인근에서 보이스피싱 하부 조직을 관리하던 중간책.배신구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흑거미의 명령이 전달되는 가장 마지막 고리였다.그리고 무엇보다 여진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었다.강혁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 쪽으로 내려갔지만, 지금 그에게 무기가 있을 리 없었다.그저 습관처럼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수진은 강혁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필요 이상의 위협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양도일이 문을 닫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걸음은 느렸지만 그 안에는 묘한 침착함과 냉기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그는 주변의 꽃들, 물병, 작은 화분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향기가 좋네. 죽기 전엔 늘… 이런 냄새가 따라다니던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혁의 이마 사이 근육이 바짝 당겼다.수진은 숨소리 하나 바꾸지 않았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 바람이 꺾였다.양도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 장난을 치듯 가볍게 말했다.“강혁 요원, 오랜만이네. 국정원 떠난 사람치고는… 얼굴에 아직도 나라 냄새가 남아 있어.”그 말에 강혁은 차갑게 답했다.“네가
수진은 순간적으로 강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궜다. 그러나 그 눈동자의 움직임 속에는 도망치려는 기색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 다짐하려는 듯한 자잘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자전거 바퀴 한쪽에 비스듬히 걸려 있던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며 가볍게 흔들렸고, 그 미세한 움직임마저도 방 안 공기의 긴장을 따라 흔들리는 듯 보였다. 수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그 숨이 그녀의 어깨선을 타고 내려가며 아주 얕게 흔들렸다.“여진… 그 사람은 죽을 자리에 다가가고 있었어요.”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닥에 내려앉는 꽃잎처럼 조용히 떨어지되, 떨어지는 순간마다 작은 울림을 남겼다.“강혁 씨가 뭘 보고 느꼈는지… 나도 알아요. 그 사람은 마지막에 누군가를 따라갔어요. 그 누군가가, 여진 씨를… 그리고 당신을 동시에 노리고 있었어요.”강혁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그는 수진이 말하는 ‘누군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배신구.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목 뒤가 쓸릴 듯 서늘해졌다.여진은 그의 손에 이용된 사람이다.그녀의 감시, 그녀의 사랑, 그녀의 흔들림 수진의 말은 그 사실을 조용히 확인하고 있었다.“여진 씨가 남긴 건… 단순한 죽음이 아니에요.”수진은 손을 조심스레 합쳐 쥐었다.마치 쥐고 있는 그 두 손 사이에 여진이 남긴 조각 하나가 얇게 끼어 있는 듯한 손짓이었다.“그 사람은… 끝까지 강혁 씨를 의심하지 않았어요.”강혁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그 흔들림은 고통이자 위로였다.누군가 자신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동시에 그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맞닿아버렸기 때문이다.“수진… 너 지금 그걸 어떻게”“여진 씨가… 날 만났어요.”순간, 공기가 바람의 방향을 잃은 듯 정지했다.강혁의 들숨이 얇게 끊겼다.“언제.”그는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말을 한다기보다 숨을 내뱉으며 내놓은 단어였다.“어제… 그리고 그저께. 여진 씨는… 내가 뭘 하려는지 알
강혁은 여진의 방을 떠난 뒤에도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한 채 건물 바깥 계단 아래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습기가 귓볼을 스쳐 지나갔고, 그 습기가 몸을 식히는 동안 그의 안쪽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과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번갈아가며 뒤섞여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여진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그 눈동자 속에 무엇인가를 읽어내야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뒤늦게 깨달았고, 그 깨달음이 늦어버렸다는 사실이 작은 비수처럼 가슴에 파고들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갑작스레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이 전하기 위해 남긴 빈자리였고, 그 빈자리가 바로 강혁을 지금 이곳에 붙잡아두고 있었다.그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졸음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골목이 길게 뻗어 있었다.바람이 밀어낸 구름 사이로 달빛이 바닥을 희미하게 비추며 끊어진 그림자들을 이어 붙였다.그 그림자들이 마치 안내하듯 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고, 그는 생각보다 덜 망설이며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 끝에는 수진이 있었다. 여진이 남긴 흔적이 결국 향한 자리 역시 수진이었다. 그는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이 관계에서 도망칠 구석은 존재하지 않았다.걸음을 옮기며 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숨이 막히는지 이해하려 했다.여진의 마지막 표정 때문일까,수진의 숨겨진 그림자를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일까,혹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해온 감정 때문일까.정답을 찾기보다는 그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을 가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그 방향은 똑같이 수진을 향해 있었다.해남의 밤거리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어부들이 내일 출항을 준비하느라 희미한 불빛을 켜놓은 창고 앞에는 그릇들이 포개져 있었고, 바람에 부딪히는 철제 문이 덜컹거리며 고요를 흔드는 소리를 냈다.그 작은 소리마저도 강혁에겐 심장을 짓누르는 신호처럼 들렸다.여진의 죽음은
수진은 손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휴대폰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화면은 아직 잠금 해제조차 되지 않았는데, 그 화면 뒤편에 숨어 있는 무게가 손가락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강혁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가 숨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조차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한 결심이 펼쳐지는 듯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잠금 화면을 밀어 올리려다 멈추었고, 그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강혁은 보았다. 그는 손을 뻗지도, 끌어안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그녀가 스스로 말의 문을 열 때까지, 그녀가 도망가지 않도록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로 시선을 유지했다.수진은 마침내 화면을 열었다. 메시지 앱 하나만이 새 알림을 가지고 있었고, 발신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그러나 번호의 패턴, 앞자리에 붙은 특수 회선, 접속 방식…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보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진.’ 그녀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한 번 더 불렀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미 모든 것을 끝냈다고 생각했던 사람. 하지만 끝은 끝이 아니었고, 여진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남겼던 것이다.수진이 메시지를 열자, 대화창에는 단 하나의 파일만이 남아 있었다. 파일 이름은 없다. 제목도 없다. 그저 날짜와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전송됨: 사망 추정 전 3시간.” 그 시간표는 여진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순간들에 무엇이 있었는지 가늠하게 해 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강혁이 낮게 말했다. “여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고, 부탁이 아닌 간청이었으며, 간청의 표면 아래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각오가 있었다.수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파일을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는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영상이 재생되었다.여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배경이 어둡고 흔들려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