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대외적인 계약 관계에 합의한 뒤, 두 사람은 호텔 비즈니스 라운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 앉았다.
태성 법무팀이 준비한 두툼한 서류철 대신, 차서록은 아주 얇은 서류 봉투 하나를 직접 테이블 위로 밀어주었다.대외적인 파트너, 그리고 공식적인 계약 부부로서 두 사람이 지켜야 할 내부적인 선을 규정하는 문서였다.해림은 건조한 표정으로 서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비용 부담, 대외 활동 범위, 비밀유지 등 재벌가 정략결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계적인 조항들이 주를 이루었다.해림에게 이런 조항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녀가 이 관계에서 진정으로 경계하는 것은, 강유헌에게서 벗어나 다시 차서록이라는 거대한 남자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는 끔찍한 종속뿐이었다."수정할 부분은 직접 기입하시죠."
차서록이 테이블 위에 만년필을 올려놓았다.해림은 망설임 없이 만년필을 쥐고 여백에
해림의 지시가 떨어진 그날 밤, 전략팀은 넘겨받은 자료들의 검증 작업에 매달렸다.그리고 다음 날 오전. 전략팀 실장이 두꺼운 파일철을 들고 대표실로 들어왔다."대표님. 차 대표 측의 설명은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하게 확보된 기록들만으로 시간순 동선을 다시 맞춰봤습니다."실장이 파일철을 해림의 책상 위로 펼쳤다.해림은 서론을 잘라냈다."결론부터요.""기록상 확인되는 첫 번째 결론은 이렇습니다. 차서록 대표 측 직속팀은 '21시 37분 12초' 이전부터 이미 연구소 인근에 있었습니다. 기존에 확보했던 동선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그건 차서록이 전날 해림에게 털어놓았던 말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하지만 해림은 그 사실 하나에 안도하거나, 그의 진실성을 다시 믿어주려 하지 않았다."그 사람 말이 맞았다는 뜻이 아니에요."해림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저 이 한 가지 주장이 기록으로 확인됐을 뿐이죠."말이 아니라 검증.해림은 차서록이 내놓는 진실조차 철저하게 의심하고 분리하기 시작했다."그럼 두 번째 결론은 뭐죠?""대표님의 동선과 차 대표 측 직속팀 동선의 첫 번째 접점입니다."실장이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확인 가능한 첫 접점은, 화재 발생 이후 대표님이 비상 통로를 통해 스스로 건물을 빠져나온 뒤입니다."그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그럼, 적어도 현재까지 확인된 기록에서는 내가 빠져나오기 전에 그 팀이 날 구조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네요."해림이 건조하게 사실을 짚었다."현재 기록상으로는 그렇습니다.""화재를 미리 알고 대기했다는 정황은요.""그걸 입증할 만한 사전 조치나 통신 기록 역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습니다."단순히 의혹이
"이게 전부예요?""차서록.""…아닙니다."오랜 침묵 끝에 무겁게 떨어진 차서록의 목소리가 서늘한 대표실 안을 갈랐다.해림은 그 짧고 단호한 부정 앞에서도 동요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그럼 더 말해요."그녀의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서록은 책상 위로 시선을 내린 채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이윽고 그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그날 제 직속팀은, 21시 37분에 처음 연구소 근처에 도착한 게 아닙니다."순간, 해림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서늘해졌다."무슨 뜻이에요?""화재가 나기 전부터 근처에 있었습니다."그 한마디에 해림은 이전에 확인했던 연구소 인근 CCTV 기록을 다시금 떠올렸다.화면에 찍혀 있던 '21:37:12'라는 타임스탬프와 차서록 직속팀의 차량 사진.당시 확보했던 기록만으로는 그들이 정확히 언제부터 그곳에 머물고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그런데 그 파편적인 단서의 진짜 의미가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뒤집혔다."그럼 21시 37분 12초에 찍힌 그 차량은, 그때 막 도착한 차량이 아니었네요.""네."짧고 건조한 인정.그 사실은 단순한 시간의 차이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해림에게 전달된 최초의 자료 속에서 사건의 시작점 자체가 통째로 잘려 나가 있었다는 뜻이었다.누락된 건 단순한 서류 한 장의 기록이 아니라, 그녀가 마땅히 쥐고 있어야 했을 판단의 출발선이었다.해림은 그 사실이 품고 있는 거대한 공백을 냉정하게 마주했다."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왜 아무것도 몰랐어요?""화재를 감시하던 게 아닙니다."서록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해림을 향했다."당시 별도의 이상징후를 확인 중
"당신 인생이잖아요."가장 평온한 축하로 강유헌과의 관계에 마지막 선을 그은 지 며칠 뒤.해림은 제로파트너스 대표실에서 지난 화재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다시 한번 면밀히 검토하고 있었다.에이온과 태성을 둘러싼 복잡한 자금 흐름, 그리고 화재 당시의 기록들.자료를 넘기던 해림의 시선이 특정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차서록이 지난번 그녀에게 넘겼던 자료와, 이번에 해림 측에서 새롭게 교차 검증을 거친 보안 기록 사이에서 미세한 어긋남이 발견된 것이다.[태성 측 내부 이상징후 사전 추적 기록]문서의 작성 일자는 분명 연구소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이었다.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그 시점부터 차서록 측이 태성 내부의 이상징후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였다.그가 무엇을 어디까지 추적했는지는 이 기록만으로 단정할 수 없었다.진짜 문제는, 이 사전 추적 기록 자체가 해림에게 넘겨진 최초의 자료 세트 안에서는 감쪽같이 빠져 있었다는 점이었다.해림은 그 어긋난 빈칸을 두고 혼자서 섣부른 추리나 오해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그녀는 곧바로 문서를 들고 차서록의 사무실로 향했다."이 기록, 언제 작성된 거예요?"인사도 없이 들어선 해림이 책상 위로 서류를 내려놓았다.서록의 시선이 서류의 날짜와 내용을 스치듯 훑었다."…화재 전입니다.""그런데 왜 이건, 내가 당신에게 받은 자료에는 없었죠?"해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명백한 날이 서 있었다."맞습니다."서록은 별다른 변명부터 늘어놓지 않았다."제가 뺐습니다.""알고 있었네요."해림이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럼 화재가 일어날 것도 알았습니까?""아닙니다."서록이 즉각 선을 그었다."태성 내부에서 평소와 다른 움직임이 반복되고 있어서 추적 중이었을 뿐, 연구소 화재 발생 자체를 미리 알았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약 그가 화재를 알고도 방관했다면, 그건 단순한 정보 은폐를 넘어선 명백한 배신이었다.그 대답의 진위는 따로 확인할 문제였다.지금 해림이 확인하려는 건 따로 있었다."화재를 알았냐
"제 대답이 그렇게 궁금하신가요?"해림의 평온한 물음에, 플래시 세례를 터뜨리던 기자들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네. 법적 배우자로서 두 분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기자의 노골적인 재촉에도 해림의 얼굴에는 어떠한 불쾌감이나 당혹감도 스치지 않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채령과, 그 옆에 선 강유헌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보도대로 두 분이 다시 가까워진 게 사실이라면, 축하드릴 일이죠."순간, 행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카메라 셔터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췄다.예상치 못한, 너무도 차분하고 건조한 축하.기자가 당황한 듯 반문했다."축하… 말씀이십니까?""네."해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분이 어떤 관계를 선택하시든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니까요."분노도, 비꼬는 기색도 없는 완벽한 평온함이었다.질투에 눈이 멀어 분노하는 '비참한 법적 아내'라는 그 교묘한 프레임은 해림의 그 담담한 한마디 앞에서 완벽하게 힘을 잃었다.민채령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샴페인 잔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지만, 해림은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에서 굳이 승리의 쾌감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진짜 무너져 내린 것은 민채령이 아니었다."아니야."낮고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강유헌이었다.그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잃지 않던 오만한 여유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그가 다급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저 기사, 사실 아니야."그의 눈빛이 요동치고 있었다."나랑 민채령, 그런 관계 아니라고 했잖아."그의 절박한 해명 앞에서도 해림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알아요.""&he
다음 날 오후, 서울 도심의 대형 호텔 연회장.산업 파트너 포럼의 시작이 한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대표님. 입장 동선이 에이온 측과 일부 겹칠 수 있습니다.주최 측에 요청해 동선을 따로 분리할까요?"제로파트너스 전략팀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정대로 가세요.제가 동선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잖아요."해림은 차분하게 대답했다.기사로 시작된 얄팍한 프레임 게임에 말려들어, 제 발로 숨거나 도망치는 역할 따위를 맡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연회장 안은 이미 수많은 산업계 인사들과 기자들로 북적였다.ZERO의 사업 비전만큼이나 기자들의 카메라는 다른 한쪽에도 집요하게 향하고 있었다.강유헌, 민채령.그리고 도해림.조작된 관계 기사로 얽힌 세 사람이 이 공개적인 자리에 처음으로 함께 모인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자극적인 먹잇감이었다.연회장 한가운데,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강유헌과 민채령이 나란히 서 있었다.민채령은 노골적으로 팔짱을 끼거나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진 않았다.그저 강유헌의 옆에 아주 자연스럽게 머물며 행사 자료를 건네고, 몇몇 질문에 업무적으로 대신 답하는 정도였다.하지만 그 적당한 거리가 오히려 기사가 씌워둔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연인'이라는 프레임을 현실처럼 완성해 주고 있었다.해림은 그 장면을 스치듯 한 번 보았을 뿐,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다가오는 투자자의 인사를 받았다."ZERO 공개 이후, 제로파트너스의 자문 구조가 본격적으로 에이온과 합쳐지는 건가요?"투자자의 질문에 해림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아닙니다.공개된 건 제 이름이지, 회사의 독립적인 의사결정 원칙이 바뀐 건 아니니까요."강유헌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해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받지 않는 선택이 제 말 때문이면, 그건 대표님 선택이 아니니까."차서록은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대표실을 나섰다.문이 닫힌 뒤에도 해림은 잠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질투와 불쾌감을 투명하게 드러내면서도 끝내 해림의 선택권을 침범하지 않았던 그 선명한 절제력.해림은 그 대답이 결코 싫지 않았다.그렇다고 그 한마디에 흔들려, 지난 화재 사건의 정보 은폐 문제까지 덮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선택을 존중하는 태도와, 정보를 통제하고 미리 쥐려는 위험한 습관은 차서록이라는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했다.해림은 어느 한쪽의 매력 때문에 다른 한쪽의 결함을 모른 척 지워주거나 용서할 여자가 아니었다.아주 짧은 여운을 뒤로한 채, 해림은 다시 차갑게 식은 얼굴로 책상 위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오후 내내, 앞서 터졌던 강유헌과 민채령 관련 기사 추적 결과가 속속 보고되기 시작했다."대표님."전략팀 실장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추적 보고서를 내려놓았다."최초 기사를 낸 매체가 사진을 직접 촬영한 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제공받은 사진에 관계 프레임만 씌워 송출한 형태입니다.""제공처는요.""사진 메타데이터와 송부 시간을 대조해 본 결과, 오늘 오전 에이온 본사 로비에서 촬영된 대외협력 측 행사 기록용 사진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중간 유포 과정에 에이온 대외협력 라인에서 자주 사용하는 외부 홍보대행사 계정이 하나 끼어 있습니다."에이온 대외협력 라인.민채령의 공식적인 입김이 닿는 곳."민채령 씨 쪽에서 직접 지시한 게 아닐까요?"실장이 조심스럽게 추측했다.하지만 해림은 서류를 덮으며 차갑게 선을 그었다."가능성과 증거는 달라요.""…….""이 프레임이 민채령 씨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