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
“엄살 좀 그만 부려.”
“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
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
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
“가만있어.”
“아프다고.”
“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
“생채기?”
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
“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
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
“엄살 맞아.”
“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
“닥치고 치료나 받아.”
“내 편이 한 명도 없냐?”
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
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
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
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
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
“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
“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
태겸이 피식 웃었다.
“원래 그런 새끼잖아.”
“잡히기만 해봐.”
“잡아서 뭐 하게?”
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
“경찰에 넘겨.”
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
“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
“조금?”
“뒤질래?”
“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
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
“됐어.”
“끝?”
“응.”
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오.”
“아프다며.”
“갑자기 괜찮아졌어.”
“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
“…….”
해온이 손을 내밀었다.
“다음.”
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
“뭘.”
“뭘이 아니라 너.”
“난 괜찮아.”
“입술.”
“이 정도는 놔둬도 돼.”
“그러다가 또 터지면?”
“안 터져.”
해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도.”
이헌의 시선이 자기 손으로 내려갔다.
예상대로였다.
아까 옥상에서 내려다봤을 때부터 불안했다.
어제 해온이 다시 정리해준 붕대가 또 엉망으로 풀려 있었다.
“봐.”
해온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어제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는데.”
“손 좀 아끼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거짓말.”
이헌이 미세하게 웃었다.
해온이 그걸 보고 더 인상을 썼다.
“웃지 말고 손 줘.”
이헌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야.”
해온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한마디만 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할 얼굴이야.”
“눈치가 빨라졌네, 공주님.”
“닥쳐.”
세라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
“권태겸, 쟤한테 계속 공주님이라고 했다간 진짜 한 대 쳐 맞는다.”
“그것도 나름 추억이지.”
“미친놈.”
해온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이헌의 손을 살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풀린 붕대를 정리해 다시 감아주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이번에는 좀 얌전히 있어.”
“노력해볼게.”
“노력이 아니라 그냥 하면 되잖아.”
“쉽지 않은데.”
“뭐가.”
“쟤들이 자꾸 찾아오니까.”
해온의 손이 잠시 멈췄다.
“백승모?”
“어.”
“왜 그렇게 너희한테 시비 거는 거야?”
순간 거실이 조용해졌다.
태겸과 세라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해온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세라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또 나만 모르는 거 있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 말 진짜 싫어.”
“알아.”
“그럼 말해.”
“싫어.”
“류세라.”
“왜.”
“죽을래?”
“어우, 무서워.”
세라가 일부러 해온에게서 몸을 멀리했다.
해온이 한숨을 쉬었다.
더 물어봤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씻고 나온 뒤에는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헌과 태겸의 교복이 엉망이었다.
먼지가 묻은 재킷과 셔츠를 세탁기에 넣으면서 해온이 중얼거렸다.
“너희 집 세탁기 쓸 줄은 알아?”
이헌이 뒤에서 말했다.
“알아.”
“근데 왜 설명서가 이렇게 깨끗해.”
“별로 안 써.”
“그럴 줄 알았어.”
세라가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얘 혼자 사는데 빨래 누가 해줘?”
“사람 오겠지.”
태겸이 거실에서 대답했다.
“주기적으로 관리해주는 분 와.”
해온이 세탁기 문을 닫았다.
“역시 부잣집.”
이헌이 눈썹을 올렸다.
“뭐.”
“아무것도.”
잠시 후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베란다에 잔잔하게 퍼졌다.
네 사람은 이헌이 내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세라는 여벌로 있던 검은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고, 해온은 이헌이 건네준 옷을 들고 한동안 바라봤다.
“이거 네 거야?”
“어.”
“클 것 같은데.”
“제일 작은 거야.”
“……네 옷 중에서?”
“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해온을 본 세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푸흡.”
해온이 눈을 흘겼다.
“웃어?”
“아니.”
“방금 웃었잖아.”
“진짜 아니야.”
해온이 입은 티셔츠는 반팔인데도 소매가 팔꿈치 가까이 내려왔고 트레이닝 바지 역시 허리를 한번 접어야 겨우 흘러내리지 않았다.
태겸이 감탄했다.
“의류수거함에서 주워서 입은 것 같네.”
“죽을래?”
“왜? 귀여운데?”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죽인다.”
“무서워라~”
해온이 태겸의 정강이를 발끝으로 툭 찼다.
“아!!!!!!”
“엄살.”
“아까 다친 사람한테 또 그러기냐?”
“멀쩡하잖아.”
세라는 소파에 누워 낄낄거렸다.
“둘이 진짜 잘 논다.”
“누가 쟤랑 놀아!?”
해온과 태겸이 동시에 세라를 쳐다봤다.
잠시 정적뒤에 세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똑같은데?”
“안 똑같거든.”
해온이 투덜거리며 소파 구석에 앉았다.
그 모습을 이헌이 조용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삐이익―.
한참 뒤 세탁 종료음이 울렸다.
“다 됐다.”
해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널게.”
이헌도 뒤따라왔다.
베란다 문을 열자 저녁 공기가 훅 들어왔다.
며칠 전보다 날이 풀렸다지만 해가 지고 나니 여전히 차가웠다.
해온이 젖은 셔츠 하나를 꺼내 탁탁 털었다.
옷걸이에 걸려고 하자 옆에서 이헌이 손을 내밀었다.
“줘.”
“너 손 다쳤잖아.”
“이 정도는 해.”
“또 풀리면 나 안 해준다.”
“알았어.”
해온이 옷걸이를 건넸다.
이헌이 건조대에 걸었다.
그다음 옷.
또 그다음 옷.
해온이 털어주면 이헌이 받아 널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거실에서는 세라와 태겸이 게임을 하며 싸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베란다에는 젖은 옷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 똑똑 울렸다.
마지막 교복까지 걸고 나자 해온의 손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추워.”
손을 비비자 이헌이 베란다 문을 먼저 열었다.
“들어가.”
“명령하지 마.”
“그럼 계속 있어.”
“들어갈 거거든.”
해온이 먼저 거실로 들어갔다.
“엄마.”
세라는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거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나 해온이랑 친구 집인데.”
해온의 시선이 바로 세라에게 향했다.
‘또 거짓말.’
세라가 손을 휘저으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응. 애들 다 알아. 응.”
잠시 후 세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진짜?”
해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응, 알았어. 내일 학교 바로 갈게. 걱정하지 마.”
전화가 끊겼다.
세라가 양팔을 번쩍 들었다.
“됐다!”
“뭐래?”
“자고 오래.”
“이모가?”
“응.”
“너 뭐라고 했어?”
“친구들이랑 공부한다고.”
해온이 주변을 둘러봤다.
게임기를 쥔 태겸.
소파에 기대 핸드폰을 보고 있는 이헌.
테이블 위에 널린 과자 봉지와 배달 음식.
“어딜 봐서 공부야.”
“엄마가 여기 와서 확인할 것도 아니잖아.”
“걸리면?”
“그때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미친년.”
“칭찬 고마워.”
세라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아무튼 오늘 여기서 자고 가자. 교복도 덜 말랐고.”
해온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 학교까지 여기에서 더 가까웠다.
시간이 늦어지자 네 사람은 배달 음식을 더 시켜 먹으며 게임을 했다.
태겸이 자꾸 해온까지 끌어들이려 했지만 해온은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어.”
“한 판만.”
“싫다고.”
“너 미국에서 이런 게임 안 했냐?”
“했는데.”
“그럼 잘하겠네.”
“왜 내가 너랑 해야 돼.”
“사람이 넷인데 두 명만 하면 재미없잖아.”
“세라랑 해.”
“쟤 못해.”
“야! 내가 왜 못해!”
결국 세라가 게임기를 낚아챘다.
그리고 10분 뒤.
“아, 씨발! 권태겸! 왜 나 버리고 혼자 가!”
“그러니까 따라오랬잖아.”
“네가 존나 빨리 갔잖아!”
“류세라 게임 존나 못하네.”
“죽을래?”
해온은 소파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시끄러워.”
“그럼 네가 해!”
세라가 게임기를 해온에게 던졌다.
“싫다니까.”
“쟤 좀 이겨줘. 존나 꼴 보기 싫어.”
“내가 왜 네 복수를 해.”
“가족 좋다는 게 뭐냐.”
결국 해온은 한 판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게임기를 받아 들었다.
한 판은 세 판이 됐고.
세 판은 어느새 한 시간이 됐다.
“윤해온.”
“왜.”
“너 게임 존나 잘하네?”
“시끄러워. 집중 깨지잖아.”
“아까 안 한다던 사람 누구?”
“닥쳐.”
태겸이 옆에서 웃었다.
“점점 한국에 적응하는 것 같은데?”
해온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한국에 적응한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그러고 보니 한국으로 돌아온 뒤 처음이었다.
이렇게 여러 명이 한 공간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싸우고. 웃고.
내일 또 학교에서 만날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
해온은 다시 화면을 봤다.
“권태겸.”
“응?”
“왼쪽.”
“왜?”
“뒤에 있어.”
태겸이 황급히 캐릭터를 돌렸다.
“와, 살았다.”
“집중 좀 해.”
“예, 공주님.”
“죽인다.”
평범했다.
이상할 정도로.
그래서 더 낯설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하나둘 지치기 시작했다.
세라는 소파 한쪽을 차지하고 누웠고 태겸은 바닥에 쿠션을 베고 드러누웠다.
해온 역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졸려.”
세라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방 들어가서 자.”
“넌?”
“여기서 잘래.”
“허리 나가.”
“이미 움직이기 싫어.”
해온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학교에서 싸움까지 보고.
이헌과 태겸의 상처를 신경 쓰고.
낯선 집에서 몇 시간을 떠들고.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친 것 같았다.
“윤해온.”
이헌이 해온을 불렀다.
“왜.”
“방에서 자.”
“너는?”
“소파.”
“네 집인데.”
“상관없어.”
해온은 잠시 망설였지만 졸음이 이겼다.
“그럼 빌릴게.”
“어.”
해온은 전에 한번 잤던 이헌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낯설지 않았다.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눈이 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헌은 물을 마시기 위해 방 근처를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
처음에는 잠꼬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이헌이 방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침대 위에서 해온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이불을 두 손으로 꽉 쥔 채였다.
“Don't…….”
이헌의 눈이 좁아졌다.
“Don't touch me…….”
작은 목소리.
평소의 해온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겁에 질려 있었다.
이헌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윤해온.”
반응이 없었다.
“Don't come near me…….”
해온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Please…….”
이헌은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함부로 잡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이헌이 침대 옆에 앉았다.
“윤해온.”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It's okay.”
해온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헌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 말에 해온의 숨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I'm not going to touch you.”
손을 뻗지 않은 채.
조금 떨어진 곳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안 건드려.”
이번에는 한국말이었다.
“괜찮아.”
해온의 손에서 이불을 쥐고 있던 힘이 조금씩 빠졌다.
이헌은 잠든 해온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평소에는 누가 뭐라고 하든 바로 욕부터 튀어나오고.
자기보다 훨씬 큰 남학생에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덤비는 애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달랐다.
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동안 이상했던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순간적으로 굳던 모습.
갑작스럽게 손목을 잡으면 유난히 크게 놀라던 반응.
이헌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알고 싶었다.
하지만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해온이 직접 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들춰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헌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얼마 뒤 해온의 호흡이 완전히 잔잔해졌다.
이헌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가려다가 다시 한번 돌아봤다.
“윤해온.”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이헌이 아주 낮게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 잠시 후.
“아무도 너한테 함부로 못 하게 할게.”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이헌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차이헌의 눈에 윤해온은 더 이상 단순히,
골목에서 자신을 주워간 이상한 전학생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