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설연은 문고리를 붙잡고 멈췄다. 문이 조금만 더 열리면 실에 매달린 등잔이 떨어진다. 바닥의 기름에 불이 붙으면 묶인 노인은 달아날 수 없었다.
“내가 잡고 있을게. 등잔부터 꺼.”
백현이 옆창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그는 약한 창살 하나를 부러뜨리고 몸을 밀어 넣었다. 옷이 못에 걸려 찢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백현이 등잔을 받친 뒤 심지를 껐다.
“됐어.”
설연이 문을 놓았다. 실이 풀리며 빈 고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불이 붙지도 않았는데 손바닥의 옛 흉터가 아픈 것 같았다.
백현이 그녀를 보았다.
“나 여기 있어. 불도 껐어.”
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갔다. 조금 전 무강도 문을 열어 달라며 몸을 떨었다. 자신처럼 불을 기억하는 사람일까. 궁금해하던 생각은 노인의 다급한 소리에 끊겼다.
“뒷방에 사람이 있소!”
설연이 돌아섰다. 문 뒤에 숨었던 사내가 뒷문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작업대의 집게를 집어 던졌다. 집게가 빗장에 걸려 문을 막자 사내가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설연은 팔목을 밀어 칼끝을 기둥 쪽으로 돌렸다. 이어 명치를 차고 바닥에 넘어뜨렸다. 백현이 노인을 묶었던 밧줄을 가져와 사내의 팔을 잡았다.
그의 허리띠 안쪽에 모란꽃이 수놓여 있었다. 살수의 은패와 같은 꽃이었다.
노인이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장석입니다. 귀비마마를 모시는 내관이오.”
“입 닫아!”
장석이 소리쳤다. 설연은 칼부터 멀리 치웠다.
“패를 만들라고 한 사람도 이자야?”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은 돈을 빼돌린 장인을 벌하려던 것뿐이라고 우겼다.
“그 벌이 산 채로 태우는 거야?”
설연이 바닥의 기름을 가리켰다. 장석이 입을 다물었다. 백현이 노인의 의자를 불붙을 자리에서 멀리 옮겼다.
“설명은 앉아서 하세요. 오늘 서 있을 사람은 충분히 많습니다.”
노인이 겨우 숨을 골랐다. 설연은 은패를 보여 주었다.
“열두 개 만들었지? 모서리를 갈던 아이가 알려 줬어.”
노인의 눈이 커졌다.
“그 애들이 살아 있소?”
“넷을 구했어. 여기 더 있어?”
“없소. 어제 넷을 모두 데려갔소.”
설연은 목 안에 걸렸던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놓고 온 아이는 없었다. 백현도 어깨를 조금 내렸다. 그들은 먼저 사람 수를 확인하고 나서야 종이를 찾았다.
장석의 소매에서 기름병과 대금을 치른 종이가 나왔다. 은패 열두 개 값이었다. 귀비의 처소에서 쓰는 도장도 찍혀 있었다.
노인이 궤짝을 가리켰다.
“처음 받은 주문서는 저 안에 있어요. 본보기로 맡긴 진짜 패도.”
설연이 오래 쓴 은패와 종이를 꺼냈다. 주문은 간단했다. 낡은 출입패 두 개를 새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백현이 두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주문은 두 개. 만든 건 열두 개.”
설연이 장석에게 몸을 돌렸다.
“남은 열 개는 누가 달라고 했지?”
대답이 없었다. 귀비가 시킨 일인지, 그 이름을 몰래 빌린 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패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귀비가 살수를 보냈다고 정할 수는 없었다.
설연은 두 종이를 따로 접었다. 무강이 말했다. 물건부터 만든 사람을 찾으라고. 그 말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자, 별채에 누워 있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아 있는지 묻고 싶었다. 지금 달려갈 수 없으니, 돌아갈 이유를 하나 더 품었다.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백현이 창으로 보니 붉은 휘장을 내린 수레가 서 있었다. 무장한 호위들이 문으로 다가왔다.
앞장선 상궁이 묶인 장석을 보았다.
“귀비전의 사람이다. 우리가 데려가겠다.”
설연이 앞을 막았다.
“노인을 태워 죽이려 했어. 먼저 관청에 넘길 거야.”
“그 일을 우리가 조사하겠다는 뜻이다.”
상궁의 손짓에 호위들이 들어왔다. 백현은 문옆에 서서 밖에서도 안이 보이게 했다.
“손님이 많으니 문은 열어 두죠. 누가 뭘 가져가는지 다 같이 보게.”
상궁의 얼굴이 굳었다. 설연은 품속의 검은 패를 만졌다. 황제가 준 패를 꺼내면, 자신의 조사도 황제에게 곧 전해질 것이다.
그때 수레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물러서라.”
호위들이 고개를 숙였다. 붉은 휘장이 걷히고 귀비가 설연을 내려다보았다.
“내 물건을 훔쳐 놓고, 어찌 그리 당당할까.”
“시연?”설연이 글자를 손끝으로 짚었다.정문익은 수불부의 앞뒤 장을 넘겼다. 다른 비품에도 같은 용도가 적혀 있었다. 죄인을 묶는 붉은 끈, 빈 형틀, 연회장으로 보낼 등잔.백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사람 죽이는 걸 구경거리로 삼겠다는 거네.”“그 문서가 실제로 그 용도였는지는 아직 모릅니다.”정문익이 말했다.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 종이의 출처가 곧 명령의 출처는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자리로 길이 모이고 있었다.그들은 번호와 날짜를 옮겨 적었다.대군부에 돌아왔을 때는 등불을 켤 시각이었다. 황제가 정한 첫날이 저물고 있었다.무강은 침상에 앉아 있었다.아란이 문턱에서부터 말했다.“일어난 횟수.”“한 번.”“거짓말하면 집사께 묻습니다.”“세 번.”백현이 감탄했다.“제국의 실권자가 이렇게 빨리 자백할 줄은 몰랐는데.”무강은 그를 보지 않고 설연을 보았다.그녀의 눈가가 부어 있었다. 손가락에는 지워지지 않은 먹이 남았고 소매 끝은 누군가의 피로 굳어 있었다.“만났나.”“응.”그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설연은 서류만 내려놓았다. 무강은 묻지 않았다.아란이 약을 먹이고 밖으로 나갔다. 백현도 윤칠의 장례를 챙겨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임경이 저녁상을 들였다.그릇이 둘이었다.“하나는 왜.”설연의 물음에 집사는 차분하게 답했다.&ld
아란이 장석의 턱을 붙잡았다.“붙들어!”설연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백현은 뒤에서 팔을 잡았다. 피가 소매에 번졌다.장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라는 뜻인지, 제발 놓아 달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숨 쉬어. 지금은 그것만 해.”아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한치수가 시선을 피했다.정문익은 피 묻은 바닥을 보고 붓을 내려놓았다.“의원이 진료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십시오.”“심문을 중단할 사유가…….”“증인이 말을 할 수 없습니다.”정문익이 한치수를 똑바로 보았다.“그 사실부터 기록하겠습니다.”장석은 옆방으로 옮겨졌다. 아란은 피를 닦고 상처를 확인했다. 깊게 베였지만 숨길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한동안 말은 어려울 터였다.설연은 문 앞에 섰다.손가락을 접어 보였던 서리가 보이지 않았다.백현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찾아볼게.”그가 나가자 설연은 장석의 곁으로 돌아왔다.“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돼.”종이와 붓을 내밀었다.장석의 눈에 두려움이 다시 찼다. 그는 손을 몸 아래로 숨겼다.아란이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안 돼.”설연은 붓을 거두었다.장석은 그녀가 물러난 뒤에도 한참 입을 가렸다. 피 묻은 손끝이 부들거렸다. 설연은 방금 그가 혀보다 먼저 삼키려 했던 이름을 생각했다. 겁이 사람을 거짓말하게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끝내기 위해 자기 입부터 찢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장석이 안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불쾌했다. 이자는 아이들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팔아넘기는 데 가담했다. 그럼에도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는 얼굴은 월희와 닮아 있었다.불쌍하다는 감정이 죄를 지우지는 않았다.그러나 죽게 두면 죄를 묻지도 못했다.정문익이 들어왔다.“의원께서 보신 상태를 서면으로 남겨 주십시오. 두 차례 진술도 함께 보존하겠습니다.”설연이 물었다.“이자의 말만으로 대군을 잡으실 겁니까?”“그럴 만큼 충분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조사에서 제외할 수도 없습니다.”“참 반듯하게만 말하는군요.”정문
“무강이 시켰다고?”설연이 서찰을 다시 읽었다.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아란이 약상자를 닫았다.“형조에서 증인의 상처를 살펴 달래. 진술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라고.”“진술은 벌써 받았는데?”“그러니까 가 봐야지.”둘은 궁문을 나섰다. 형조 앞에는 백현이 먼저 와 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계단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내가 넘긴 놈이 반나절 만에 다른 사람이 됐더라.”“장석이 맞아?”“얼굴은 같아. 겁내는 사람이 달라졌지.”안으로 들어가자 형조참의 한치수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 아래에 젊은 관원 하나가 기록을 살피고 있었다.백현이 낮게 소개했다.“사간원 정언 정문익. 말 안 듣는 사람으로 유명해.”“누구 말을?”“일단 내 말은 한 번도 안 들어 줬어.”정문익이 고개를 들었다.“길드장께서는 압수 물품부터 제출하십시오.”“거봐.”백현은 품에서 사본을 꺼냈다. 원본도 가져왔지만 바로 내놓지 않았다.한치수의 시선이 설연에게 닿았다.“대군께서 보증한 의녀라지.”“지금은 열람 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그녀가 검은 패를 놓았다.한치수는 패를 읽고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이름을 알아보는 눈인지 단순히 의심하는 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장석이 들어왔다.걸음이 이상했다. 아침에 묶인 손목보다 등과 어깨를 더 움츠렸다
설연은 얼굴을 떼었다.강옥의 손이 허공에 남았다. 유모는 손을 내리는 데 오래 걸렸다.“무슨 뜻이야.”“대문 밖에 군사들이 왔어. 장부를 확인하면 돌아가겠다고 했지. 안주인께서는 아이들부터 뒤채로 보내라 하셨고…….”“그래서 열었다고?”강옥이 고개를 끄덕였다.“밖에서 열쇠로 여는 소리가 나면 놀라실까 봐. 내가 열면 덜 거칠게 들어올까 봐.”설연은 유모의 손을 보았다.솥을 받치던 손. 자기 이마의 열을 짚던 손. 그 손이 문을 열었다.“그 뒤에는.”“칼을 뽑았어.”짧은 대답이었다.진료실 밖에서 쟁반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설연의 어깨가 굳었다. 강옥도 같은 소리에 움찔했다.두 사람은 서로의 반응을 보았다.아란이 약장 앞에 섰다. 밖에서는 팔을 씻는 것처럼 보일 자리였다.“기억나시는 만큼만 말씀하세요.”강옥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내가 열지 않았어도 들어왔을 거야. 대문 밖만 있던 게 아니었으니까.”“어디에 또 있었는데?”“서쪽 담. 종들이 달아나던 쪽에도.”설연은 눈을 감았다. 불길 사이로 보았던 창끝이 떠올랐다. 밖에서 안으로 향했던 창. 도망치는 사람을 밀어 넣던 손.그때는 경황이 없어 세지 못했다.“유모는 어떻게 나왔어?”강옥이 시선을 내렸다.“뒷마당에서 붙잡혔어. 다른 하인들과 묶여 관노청으로 갔지.”“설호는?”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유모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찾으러 갔지만 못 봤어.”설연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못 봤다.죽었다는 말도, 살았다는 말도 아니었다. 거기에 매달리고 싶은 자신이 싫었다.“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흩어졌어. 이름을 바꾸기도 했고. 난 침전에 들어온 뒤로 아무것도…….”강옥이 말을 끊었다.목 언저리로 손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설연은 그 움직임을 보았지만 바로 묻지 않았다.유모가 먼저 몸을 기울였다.“아가. 이제 나를 찾지 마.”“왜.”“나는 잘 살았어. 밥도 먹고, 따뜻한 데서 자고. 네가 내 걱정할 필요 없어.”설연의 입술이 비틀렸다.“그
“직접 듣겠어.”설연은 쪽지를 접었다. 모서리를 맞추는 데 두 번 실패했다.백현이 아무 말 없이 종이를 받아 반듯하게 접어 주었다.아란은 일어섰다.“그럼 네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부터 보자.”무강은 설연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임경에게 가마를 준비하게 했다. 그녀가 거절하려 하자 아란이 먼저 타며 말했다.“내가 못 뛰어. 밤새 네 환자 살렸잖아.”설연은 결국 맞은편에 앉았다.궁문까지 가는 동안 바퀴 소리가 계속되었다. 길가에서 떡을 파는 목소리,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 평범한 아침이 얄미울 만큼 또렷했다.아란이 소매 끝을 정리해 주었다.“아는 척 안 할 수도 있어.”“들었어.”“너를 미워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야.”설연은 창밖을 보았다.“미워해도 돼. 살아만 있으면.”아란은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궁문에서 허가서를 확인한 내관이 두 사람을 내의원으로 데려갔다. 새 신분패를 받는 동안 설연은 담 너머 지붕을 세었다. 침전까지 담 세 겹, 문 두 개. 지붕으로 가면 활에 걸렸다.아란이 발등을 밟았다.“지금 도망갈 길 말고 진료 순서를 외워.”침전 궁인들의 진료는 따로 마련된 회랑에서 했다. 낮은 발을 사이에 두고 손목만 내밀도록 되어 있었다.설연은 붓을 들었다.첫째는 두통, 둘째는 불면. 아란이 묻는 말과 궁인들의 대답을 적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만은 견딜 만했다.네 번째 이름이 불렸다.“강옥.”붓끝에서 먹이 떨어졌다.
“어제…….”설연은 날짜를 손톱으로 눌렀다. 먹이 번지지 않았다. 꿈이라면 문질러 지워질 것 같았는데, 종이는 손끝에 걸릴 만큼 선명했다.“동명이인일 수도 있어.”백현이 말했다.설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노려보려던 눈에 물기가 차 있었다. 백현은 못 본 척하지 않았다.“번호까지 같으니 가능성은 낮아. 그래도 네가 다치기 전에 확인하자.”“다친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네.”“더 다치지 말자는 소리야.”무강이 침상 끝을 짚었다. 아란의 눈이 즉시 그 손으로 내려갔다.“일어나면 묶습니다.”“집사를 부르려는 거다.”“입으로 부르십시오. 귀도 다리에 달리셨습니까?”무강은 손을 거두었다.백현이 문밖에 사람을 불렀다. 잠시 뒤 집사 임경이 들어왔다. 쉰을 넘긴 사내는 서류 꾸러미를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강옥이라는 궁인을 직접 보았나?”설연이 물었다.“아닙니다. 내시부의 물품 수령 명부와 궁인 배속 기록을 대조했습니다.”“어제 근무했다는 표시는 누가 남겼지?”“침전 담당 상궁의 수결입니다. 본인이 물품을 받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설연은 종이를 내려놓았다.쪽지가 손에서 떨어지자 이상하게 더 무서워졌다. 다시 집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덮었다. 무강은 그 손을 보며 집사에게 의자를 내오라 했지만, 앉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설연이 스스로 다리에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