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정은 생각뿐이었다.가정부가 와서 현빈을 부를 때, 그는 마침 서재에서 나왔고,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정은이 오늘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빈은 특별히 회사에 가지 않고 이원에 왔다.딱 여기서 정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식탁으로 가 보니, 확실히 정은을 보았지만 기뻐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옆에 있는 재석과 진일을 보았다.현빈은 웃음이 굳어지며 표정이 축 쳐졌다.“조 교수님도 왔어요?”재석은 고개를 들어 웃음을 머금었다.“네, 정은이 초대를 해서 거절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한동안 어르신들을 뵈러 오지 않아서 이렇게 왔어요.”정은이 초대했다는 말은 칼날처럼 현빈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현빈은 지금 아파 죽을 것 같았다.봉수진이 말했다. “현빈아, 어서 앉아서 밥 먹어.”“네.”정은의 왼쪽은 봉수진이었고, 오른쪽은 재석이었다. 지금 식탁에는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았다.현빈은 그녀 맞은편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밥을 먹는 동안, 봉수진은 열심히 정은 그들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진일은 산처럼 쌓인 고기와 요리를 보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그냥 먹자. 어르신의 호의를 거절할 순 없잖아!’재석도 마찬가지였지만, 진일보다 좀 더 똑똑했다. 그는 남이 쓰지 않는 젓가락을 들어 봉수진에게 음식을 집어주기 시작했다.그렇게 봉수진은 사양하면서 음식을 먹었고, 더 이상 그들에게 음식을 집어줄 겨를이 없었다.정은은 묵묵히 재석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물리학자의 머리는 참 좋다니깐.’식사를 마친 후, 봉수진은 신이 나서 사람들을 데리고 딸기밭으로 갔다.진일이 문에 들어섰을 때 본 그 비닐하우스는 바로 딸기밭이었다.그리고 지금은 마침 딸기가 익는 계절이었다.“잘 열렸네! 크고 또 빨갛고,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재배한 것이니, 농약도 치지 않았어. 깨끗하고 싱싱해서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지.”“이따가 너희들 바구니 하나 들고 실컷 따. 그리고 돌아가서 먹어. 실험실에도 좀 가져가, 어차피 냉장고 있잖아.
재석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유치해.’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난 달콤한 것만 골라서 땄는데... 운이 나빠서 신 것을 먹었나?’재석과 현빈은 딸기 두 바구니나 땄고, 마지막에 모두 정은에게 주었다.잘 포장한 후, 세 사람은 되돌아갔는데, 진일과 봉수진이 멀지 않은 곳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가까이 다가가니, 진일은 작은 호미를 들고 흙을 매고 있었다. “딸기는 토양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지 않지만, 비옥하고 푸석푸석하며 배수가 좋은 모래땅이 가장 좋고, 수소이온 농도지수가 5.5~6.5이면 가장 적합해요. 지금 이런 토양도 사실 괜찮지만, 배수성은 조금 떨어져서...”“어쩐지 전에 뿌리가 이렇게 많이 썩었더라니.” 봉수진은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전에 이 흙 살 때, 그 사람은 이게 모래땅이라고 그렇게 맹세했는데, 뜻밖에도 날 속였던 것이었어! 진일아, 너 예전에 딸기를 재배한 적 있는 거야? 어쩜 그렇게 잘 알아.”“저희 집은 재배한 적이 없는데, 전에 이웃이 딸기를 심은 적 있었어요. 그리고 책까지 샀길래 저도 빌려서 좀 봤고요.”“아, 그렇구나... 호미를 이렇게 능숙하게 쓰는 걸 보니 평소에 농사일을 자주 도운 건가?”“네, 저희 어머니는 몸이 안 좋으시거든요. 아버지 혼자서 하시면 너무 힘드시니, 봄에 심고 가을에 수확하는 일 모두 도왔죠.”“정말 좋은 아이구나...”봉수진은 예리해서, 진일이 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 아이의 집안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진일의 말을 듣고, 또 손가락에 있는 두꺼운 고치를 보니 봉수진은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가오더니 누군가 찾아왔다고 전했다.봉수진은 의아해했다. “누구지?”“장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 같아요.”‘장씨 가문?’봉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두 집안은 친분이 있었고, 이춘재의 생신 날에 장씨 가문 일가족 모두 왔었다.이 작은 도련님은 그의 아버지에게 이끌려 이춘재와 봉수
“네.”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이 거실로 들어왔다.“할머니, 절 부르셨어요?”“정은아, 소개해주지. 이 아이는 장씨 가문의 도련님 장은혁이라고, 네 할아버지 생신 잔치에서 본 적이 있을 거야.”“안녕하세요.” 정은은 먼저 인사를 했다.그녀는 확실히 은혁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은혁은 현장에서 이춘재에게 마술을 선보였는데, 사과 하나로 두 마디의 축하말을 변했던 것이다.하나는 이춘재, 다른 하나는 봉수진에게 줬다.확실히 신경을 써서 준비한 선물이었다.“안녕하세요!” 은혁은 정은이 들어오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기대하는 동시에 또 긴장을 하고 있어 동작이 많이 뻣뻣했다.이때 정은이 먼저 자신과 인사를 하자, 은혁은 더욱 긴장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봉수진이 입을 열었다.“은혁이가 너에게 묻고 싶은 일이 좀 있다네.”정은은 은혁을 바라보았다.은혁은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톡 좀 추가할 수 있어요? 우리 동생에게 알려주려고요. 그럼 더 편리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잖아요. 안심해요, 우리 여동생은 절대로 정은 씨를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말을 이렇게까지 한 이상, 정은은 핸드폰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친구를 추가한 후, 은혁은 즉시 정은의 톡을 사촌 동생에게 알려주었다.곧 그 사촌 동생의 친구 추가 신청이 떴다.보아하니 정말 사촌 동생을 위해 정은을 추가한 것 같다.정은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난 대부분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서, 바쁘면 핸드폰을 볼 겨를이 없거든요. 그래서 제때에 답장을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괜찮아요! 정은 씨는 볼일부터 챙기고, 시간이 날 때 답장을 하면 돼요. 그 실험실은... 학교 실험실인가요?”“아니요.”그렇게 화제는 또 무한 실험실로 되었고, 실험실이 어떻게 왔는지까지 설명해야 했다.은혁은 질문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이 질문이 끝나면 또 다음 질문이 있었다...정은은 예의상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이때, 기다리다 지친 재석과 현빈은 더 이상 가만히
그러나 돌이켜보면, 현빈은 정은의 오빠였고, 자신의 의도를 간파하여 기분이 불쾌한 것도 정상적이었다.‘자기 여동생을 감싸는 것도 당연하지...’은혁은 얼른 미소를 지었다.“현빈이 형 말 맞네요. 초대장도 다 보냈으니 먼저 가볼게요.”은혁은 눈치 있게 작별을 고했다.봉수진은 은혁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이때 진일도 떠나려 했다.“할머니의 초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음식도 맛있었고 딸기도 아주 달콤했어요. 저도 이만 돌아갈게요.”“어? 남아서 저녁 안 먹을래?”“아니에요.” 진일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저... 저 아직 일이 있어서요.”“그래, 그럼 앞으로 자주 와!”“네.”진일은 몸을 돌려 신발을 갈아 신었다.정은은 기사에게 분부했다.“기사 아저씨, 진일 선배 좀 데려다 주세요.”“아니야, 나 혼자 실험실로 돌아가면 돼.”“누가 실험실로 데려다준다고 했죠?”“어?”“아저씨, 선배를 서비대학교 대문까지 데려다 주세요. 그리고 선배가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시고요.”‘실험실로 돌아가? 계속 밤새워 일하려고? 그런 생각 하지도 마!’진일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풀이 죽은 채로 나온 다음 조용히 차 안으로 들어갔다.현빈은 속으로 생각했다.‘남진일은 눈치가 그렇게 빠른데, 이 사람은 왜 아직도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정말 눈에 거슬리네.’“조 교수님은 요즘 아주 한가하나 봐요?”사람을 내쫓는 의미가 분명했다.재석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프로젝트가 다 끝나서 별로 바쁘지 않아요.”“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교수님 집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현빈은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재석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먼저 돌아갈게요. 마침 냉장고에 남은 음식이 좀 있어서 저녁에 데워 먹으면 딱이네요. 할머니, 오늘 수고하셨어요. 요즘 환절기에 몸 조심하시고, 전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왜 가려고 그래!” 봉수진은 이 말을 듣자마자 재석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남은 음식을 왜 먹어? 우리 집에 먹을 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이춘재와 재석은 여전히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바둑알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정은은 의심이 생겼다.‘나 정말 잠 잔 거 맞아?’“정은아, 일어났어? 빨리 와서 나 좀 도와줘!” 이춘재는 정은을 향해 손짓했다.“재석이 정말 대단해. 날 두 판이나 이겼어!”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할아버지도 저를 이기셨잖아요?”“그래도 네가 이긴 횟수가 더 많지!”정은은 다가가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저도 바둑을 잘 하는 편은 아닌데, 그냥 좀 볼 줄 알아요.”“넌 똑똑히 볼 수 있을 거야! 정은아, 이것 좀 봐줘, 내가 여기에 바둑알을 두면 이길 수 있을까?”“어디 보자...”정은은 진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사실 여긴...”“정은아.” 재석이 갑자기 입을 열어 정은의 말을 끊었다.“바둑을 볼 때 말이 없어야 돼.”정은은 즉시 소리를 멈추며 이춘재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 않는 게 아니에요.’이춘재는 흠칫 놀랐다.‘재석이 이 자식 좀 봐! 어르신한테 양보할 줄도 모르다니!’하지만 이춘재는 이런 솔직한 사람과 바둑을 두기를 좋아했다.‘양보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까놓고 말하면 다 날 속이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은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보였다.이춘재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졌군, 재석아, 너도 실력이 좀 있네!”“과찬이세요.”마침 이때 현빈이 위층에서 내려왔다.“내가 조 교수와 함께 한판 둘까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영광이죠.”두 사람이 눈빛을 마주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춘재는 자리를 내주며 현빈을 앉았다.재석이 물었다.“흑알 아니면 백알 둘래요?”흑알은 먼저 낼 수 있었기에 우세가 있었다.현빈은 앞에 있던 백알을 집어 들었다.“그냥 이렇게 하죠. 번거롭게 바꾸지 말고.”이춘재는 전에 백알을 두었고, 현빈이 그의 자리에 앉았으니 당연히 백알을 둬야 했다.‘그런데 꼭 이렇게 물어보다니, 허.
바둑에서 무승부가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처음 두 판을 포함하면 두 사람은 정말 비긴 셈이었다.재석이 먼저 말했다.“심 대표 실력이 대단하네요.”“칭찬은 무슨, 그건 교수님 자신을 칭찬하는 것과 같잖아요.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말을 마치고 현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재석은 어이가 없었다.봉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끝냈군, 빨리 가서 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정은아, 재석아...”“네! 가요!”이춘재는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현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현빈이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야? 평소에 나랑 전혀 바둑을 두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와 달리 독하게 바둑을 두다니. 재석과 무슨 깊은 원한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이춘재는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아이고!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애들 다 식탁에 앉았는데, 당신이 오지 않으면 애들도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잖아요!”봉수진은 소리를 높여 재촉했다.“빨리요!”“아.”저녁을 먹고 재석은 또 어르신들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시간이 다 되자, 재석은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정은도 따라서 일어섰다.“그럼 나도 선배님과 같이 갈게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 줄게.”이춘재와 봉수진은 두 사람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현빈은 입을 삐죽거렸다. ‘두 사람 다 운전하고 왔는데, 가는 길에 데려다 주는 거라고? 웃기네!’봉수진은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 현빈의 눈에 비친 조롱과 적의를 발견했다. 그녀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현빈아...”“네? 할머니, 말씀하세요.”“너... 재석이에게 무슨 편견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비록 봉수진은 바둑을 구경하지 않았지만, 점심 때 현빈이 재석에게 떠나라고 권하는 암시는 너무 분명했다.봉수진은 그게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편견이 있을 리가요.” 현빈은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왜 다
송영한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작년 국내 연구진이 에 게재한 논문 수 좀 확인해 봐.”부총장은 곧바로 노트북을 열었다.5분 뒤.“작년에 국내 연구진이 해당 저널에 발표한 논문은 총... 6편입니다.”그리고 정은 팀은 그 중 2편을 게재했다.지난해 국내 전체 논문 중 3분의 1이 그들 손에서 나온 셈이었다.“어쩐지...”송영한은 작게 중얼거렸다.잠시 억눌러 뒀던 부총장의 생각이 다시 튀어나왔다.“총장님, 올해 ‘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은 혹시...”송영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미 늦었어...”부총장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이 6월 4일에 개막하는데,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담당자를 교체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내년에 소정은 팀을 보냅시다.”송영한은 쓴웃음을 지었다.“지난번에 교무처 통해서 포스터 붙이고, 공식 홈페이지에도 안내글 올려서 홍보까지 해줬는데... 그 애들이 언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 적 있었나?”부총장은 코를 긁적이며 약간 난처해했다.“에헴! 그건... 그냥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 그랬죠. 아이들이 받아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송영한은 가볍게 웃었다.“그 아이들은 성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끈기까지 있어. 학교 측은 전에 비록 그들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건 아이들을 무시한 것과 다름없어.”“당초 소방 점검 그 일이 터질 때, 우리가 적극적으로 간섭해 처리했다면, 송지혜를 방임했다고 그 아이들의 미움을 사지도 않았겠지. 그럼 소정은 팀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을 거야. 하지만...”그때 학교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이 일을 무시하며 넘어갔다.그러나 송영한은 말머리를 돌렸다.“이번 ‘국제 산학연 협력 포럼’에서 반드시 지는 건 아니야. 그래도 그동안 그렇게 많은 준비를 했잖아.”부총장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길 수 있다면 제일 좋죠.”...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대신 수업을 하러 온 교수님은 낯선 얼굴이었다.40,50대에 머리가 반쯤 벗겨졌고, 강의도 그저 자료를 따라 읽었다.질문도, 유머도 없으며 ‘외모’조차 갖추지 못하자, 아래의 학생들은 흥미를 잃게 되었다.“조 교수님은?” 민지는 작은 소리로 서준에게 물었다.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네가 모르면 나 더 모르지.”“널 믿은 내가 바보지.”“나 방금 정은 누나에게 문자 보냈는데...”“언니가 뭐래?!”“아직 답장 안 했어.”정은은 자연히 답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와 오미선은 M시로 향하는 비행기에 있었기 때문이다.오후 2시,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두 사람을 마중하러 온 차에 올라탄 뒤, 50분 후에 그녀들은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밖의 팻말에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제13회 학제 간 융합연구 포럼]한쪽에는 체크인을 안내하는 VIP 통로까지 있었다.그렇다, 정은은 오미선과 함께 M시에 와서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했던 것이다.민지와 서준에게 알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처 말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아침에 정은은 깨어나자마자 오미선의 전화 한 통에 공항으로 급히 불려갔고, 오미선은 심지어 그녀에게 짐을 챙기라고 당부했다. 정은은 도착한 후에야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되었다.이어 탑승, 이륙, 착지 후 또 쉬지 않고 차에 올라 호텔로 갔다.정은은 가는 길 내내 자신을 잘 돌봐야 할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오미선을 챙겨야 했다.오미선은 지난달에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는데, 몸이 그리 좋지 않았다.융합연구 포럼이었기에, 이번에 온 사람들은 생물학의 거물들뿐만 아니라 기타 관련 연구 분야의 선배들까지 있었다.정은이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오미선의 덕을 본 것이었다.두 사람은 프론트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우연히 두 지인을 만났다.“교수님, 정은아! 교수님도 여기에 오신 거예요? 언제 오셨어요?” 재석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