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판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유리는 처음으로 알람 없이 눈을 떴다.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낯설 만큼 따뜻했고,창 밖의 소음은 더 이상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오랜만에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듯했지만,그 고요함이 그녀에겐 불편한 정적처럼 느껴졌다.‘끝났다는 게… 이토록 텅 비어 있을 줄은 몰랐어.’오전엔 강남구청 민원실을 찾았다.상담센터 개소 관련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유리는 낡은 검정 서류가방을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사복을 입고 앉아 있는 지금,더는 검사의 얼굴이 아닌 ‘상담사 유리’로 서 있는 자리였다.그러나 몸 어딘가에 아직 그때의 서늘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조유리 검사님… 아, 아니. 상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고개를 들자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눈매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깊었고,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무언가를 미리 계산한 듯했다.“윤시훈입니다. 법무법인 신율 소속 변호사이고요. 조유진 씨 재판 관련 언론 보도에서 이름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유리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거죠?”“센터 개소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재단이 심리상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데, 조유리 님이 함께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요.”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그의 말을 조용히 흘려들었다.재단의 이름도, 그가 소속된 법무법인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이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일정까지 파악한 상대는 처음이었다.“죄송하지만, 저를 찾으신 이유가 단순한 협업 때문은 아니겠죠?”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시훈은 억지 미소 없이,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맞습니다. 이건 단순한 제안이 아닙니다.검사직을 내려놓고 지금처럼 상담사로 방향을 트신 이유 그게 궁금했습니다.”유리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법 안에 있었을 땐, 진실보다 증거가 먼저였어요.사람이 아니라, 수치로 판단됐죠
그날, 유리는 법정에서 울지 않았다.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은 알았다.그녀가 무너졌다는 걸. 다만, 무너진 상태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이우는 방청석 가장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하지만 시선은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았다.그가 유리를 바라보는 건 동정도, 사랑도 아닌 존재에 대한 경의에 가까웠다.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 자기 목소리를 써서 세상에 말을 거는 순간.그건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복수이자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죄였다.그날 유리는 법정을 나서며 자신이 무언가를 끝냈다는 확신을 하지 않았다.그런 건 없었다. 그저 지나온 시간을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평온함만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게, 지금의 그녀에겐 전부였다.법정을 나왔을 때, 바람이 불고 있었다.이상하리만큼 따뜻한 바람이었다.사람들이 말하는 ‘후련함’은 없었다.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다.그런데도유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처음으로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그전까지는 모든 호흡이 언니를 향한 죄책감, 말하지 못한 진실, 감당하지 못한 분노로 뒤엉켜 있었으니까.이제야 가슴 한 켠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텅 빈 자리가 비로소 '살아남은 자리'라는 것도.“끝났네요.”목소리는 이우였다.그는 그녀를 따라 법정을 나서면서 단 한 발자국도 옆으로 다가서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그랬다.유리를 지켜보되, 닿지는 않았다.“아니요,”유리는 조용히 대답했다.“끝난 게 아니라…그냥, 놓은 거예요.”둘은 근처 조용한 카페에 들어갔다.창가 쪽 자리에 마주 앉았지만 시선은 맞닿지 않았다.테이블 위엔 따뜻한 물만 놓여 있었다.커피도, 차도 아니었다. 그 날의 감정은 향기조차 낼 수 없는 투명한 무언가였다.“왜 안 물어봤어요?”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입술이 약간
법정에 서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정의의 시작일 수도 있지만,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내장을 꺼내어 보는 일에 가까웠다.유리는 지금 그 가운데에 있었다.검찰청 지하 회의실. 형사6부 증인 면담실.유리는 수사관 앞에 앉아 유진이 남긴 유언, 녹음, 상담 기록,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황을 진술하고 있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하지만 입을 다물고 나서는 순간마다, 손끝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직접 증언대에 서시겠습니까?”김도환 부장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제 언니의 말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그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엔 아무도 대신 들어줄 수 없는 울음의 뒷면이 있었다.퇴근 시간 무렵, 로비를 지나 나오는데 낯익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검은 코트, 손에 들린 커피,그리고 아직도 끝내 다 담지 못한 듯한 눈빛. 이우였다.유리는 놀란 표정도, 반가움도 보이지 않았다.단지 멈춰 섰고, 이우는 말없이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오늘, 서 있는 걸로도 충분히 잘한 날 같아서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숨을 쉬었다.그리고 커피를 받아들었다.둘은 근처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한참을 있었다.그러다 이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날 이후, 당신이 무너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무너졌죠.”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근데요, 무너졌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어떻게든 다시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혼자요?”“처음엔요. 근데 지금은…혼자이길 원하진 않아요.”이우는 그 말에 긴 숨을 내쉬었다.그건 안도도, 후회도 아닌 작은 확신처럼 들렸다.“그럼…옆에 있어도 되나요?”유리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 눈빛엔 용서도, 원망도 없었다.단지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작은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있어요. 다만… 그때처럼 말없이 사라지진 말아요.”밤이
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항상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젖은 아스팔트, 말라붙은 눈물처럼 끈적이는 하늘, 그리고 침묵.유리는 이현의 고백을 듣고도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텅 빈 방처럼 메워지지 않았다.‘그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그 말은 책임도 후회도 아니었다.그건 두려움의 기록이었다.그리고 그 두려움이 유진을 진짜로 외롭게 했다는 걸,이제서야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유리는 언니의 다이어리 마지막 장을 다시 펼쳤다.그리고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던, 희미하게 번진 연필 자국 하나를 발견했다.‘반포 6길… 11-2…’‘P.S. 여기서 처음 울었고, 마지막으로 웃었어.’그 문장은 주소도, 추억도, 유언도 아니었다.그건 그저 유진이라는 사람의 감정이 마지막으로 멈춘 장소였다.다음 날, 유리는 그곳으로 향했다.반포 6길. 지나가는 이들조차 발걸음을 줄이는 낡은 원룸 건물, 그리고 그 옆 좁은 골목.주소지의 ‘11-2’는 건물 지하 공간이었다.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철문은 오래된 나무처럼 소리를 냈다.그리고 그 안, 한 켠에 작고 낡은 철제 사물함이 있었다.표면엔 ‘정서연’이라는 이름표.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택배 상자가 하나 그 앞에 놓여 있었다.박스를 열었다. 그 안엔 봉투 두 장과 잘 접힌 흰색 블라우스,그리고 녹음기 하나.첫 번째 봉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이건 혹시, 그 애가 와서 열게 된다면.”그 애 유리였다.녹음기를 틀었다.“이건 유리를 위한 거야. 그 애가 나를 정말로…끝까지 따라오게 된다면, 내가 말해주고 싶은 마지막이기도 해.”“난 이현을 원망하지 않아. 그 사람은 그냥… 나처럼 약했을 뿐이야.”“그 사람을 미워하지 마. 그 감정은 내가 이미 충분히… 끝냈어.”유리는 더 이상 듣지 못했다.녹음기는 계속 재생되고 있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그 안에 담긴 말들은 자기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겨진 사랑이었다.두 번째 봉투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거기서 문장이 끊겨 있었다.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상담사의 메모.‘말을 멈췄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왜 말하지 않았을까요.”유리는 고개를 들었다.상담사의 눈빛은 고요했고, 묘하게 슬펐다.“그 말이 자신을 더 쉽게 죽게 만들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죠.어떤 이름은,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칼이 되니까요.”상담실을 나서며, 유리는 복도 끝 창문에 멈춰 섰다.햇빛이 찬란했지만 그 안엔 슬픔도, 분노도,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가득했다.유진은 끝까지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하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더 확실한 증언처럼 느껴졌다.말하지 못한 고백. 남기지 못한 단어.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유리를 만들고 있었다.사람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누구를 만났는가.그 질문은 유리에게 단순한 수사 절차가 아니었다.그건 언니가 꺼내지 못한 이름을 대신 밝혀내는 일이었다.상담기록 마지막 줄.2024년 2월 7일 오후 3시.유진이 심리상담을 마친 직후, 기록엔 없지만 그녀가 ‘누군가와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정황이 있었다.‘오늘… 그 사람을 다시 만나요.’직접적으로 지칭된 인물은 없었다.하지만 문장은 확실히 갈피를 남겼다.그리고 그날, 심리상담센터 인근에서이현의 차량 GPS 기록이 짧게 포착되어 있었다.이름은 없지만, 거리와 시간은 존재했다.유리는 택시에 올라탔다.목적지는 상담센터 뒷골목. 그날 유진이 상담 후 사라지기 전, 30분을 머물렀던 그 장소.“조용한 주차장이 하나 있습니다. 주변 CCTV는 모두 민간이라 공식 기록이 없죠.”정보는 이우에게서 왔다.여전히 그림자처럼 연락을 주고받던 그였지만,진실을 좇는 방향만큼은 분명히 같았다.낮은 언덕 아래, 벚나무 가지 사이로 빛이 비스듬히 드리우던 곳.유리는 그 주차장 한켠에서 중고차 정비소 직원 하나를 붙잡았다.“2월 7일이요? 그날이면…밤에 한 차가 멈춰 있었죠.외제차였는데… 번호는 기억 안 나도
숫자 421. 누군가에겐 무의미한 나열일지 몰라도,유리의 손끝에서 그것은 언니가 남긴 유일한 문장처럼 느껴졌다.그것은 열쇠였고, 지도였고, 마지막 숨소리 같았다.숨이, 어딘가 어긋나는 느낌.가슴 안 어딘가에서 묵직하게 뭉쳐 있던 것이이 숫자를 보는 순간부터 조용히 뻗어나오기 시작했다.유진이 살았던 오피스텔 앞,유리는 한참 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그 문이 열리면, 언니의 시간과 죽음 사이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자신에게 밀려올 것 같아서였다.오래된 관리실 직원은 유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그 눈빛 속엔 묘한 연민과 당혹이 섞여 있었고, 그 말투는 조심스럽고 느렸다.“그 분… 생전 마지막 방에 못 연 짐이 하나 있었어요.”“뭐였죠?”“철제 박스 하나요. 열리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두고 있었죠.”박스를 품에 안고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심장이 아니라 손끝이 먼저 떨렸다.유리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계단을 한 칸씩 올라가며 머릿속으로 지난 기억들을 끄집어냈다.유진이 마지막으로 웃던 순간,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남았던 달콤한 향.무언가를 애써 잊으려 애쓰던 눈빛.그리고 그 모든 걸 자신이 ‘몰랐다’는 죄책감.그 박스를 열어야만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열쇠패드에 421을 눌렀다.‘삐’ 뚜껑이 열리는 소리.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소리는유리의 안쪽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였다.박스 안엔 다이어리 두 권, 녹음기 하나,그리고 하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봉투엔 언니의 필체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언젠가 네가 이걸 열게 된다면.”종이를 펼치는 손이 땀이 차도록 젖어들었다.종이는 말라 있었지만, 그 속에 적힌 글자들은마치 오래된 울음을 품은 듯 뻣뻣했다.“그 사람을 사랑했던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믿고 싶었던 것뿐이었어.”믿고 싶었다. 사랑이 아니라.유리는 그 문장을 가만히 입속으로 되뇌었다.그리고 입술이 떨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사랑은 실패해도 다시 할 수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