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음식이란 그저 에너지를 보충하는 수단일 뿐, 맛이 좋고 나쁨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 씻었어요.”
유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씻어 둔 붉은 피망과 청경채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누가 봐도 강박에 가까운 정리 습관의 소유자였다.
“왜 웃어요?”
민준은 이유를 몰라 물었다.
유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나가 계세요.”
“네.”
그는 물기를 닦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
전체적으로 담백한 맛, 대부분이 심 교수가 좋아하고 또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심 교수는 감회에 젖어 중얼거렸다.
식사가 끝나자, 유진은 먼저 그릇을 정리했다.
민준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와 도왔다.
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 남자의 뒷모습이 길게 늘어졌다.
유진의 시선에서 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마치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선이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심 교수가 문틀에 기대서서 물었다.
“유진, 네 선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
민준은 그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자였고, 유진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연은 먼저 그들 스스로 이어져 있었다.
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심 교수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심 교수는 거실로 나왔고, 소파에서 한 여자가 웃으며 일어섰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장은아예요. 전에 병원에 문병 갔었고, 올해 대학원 모집에 대해서도 여쭤봤었죠.”
심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하고 있어요. 앉아요.”
은아의 미소는 한층 더 밝아졌다.
“요즘 집에서 요양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몸에 좋은 것들 좀 가져왔어요…”
심 교수는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무심히 훑어보았다.
인삼, 제비집, 동충하초…
그녀의 미소는 자연스레 옅어졌다.
“전에 말씀드린 대학원 정원 말인데요…”
은아가 다시 말을 꺼냈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어요.”
심 교수가 말을 끊었다.
“이건 다시 가져가세요. 대학원은 매년 모집하고, 경쟁도 치열합니다. 붙을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실력에 달렸어요.”
은아는 얼어붙었다.
지난번 병실에서 교수는 분명 이렇게까지 단호하지 않았었다.
‘기회가 있다’, ‘도전해 볼 수 있다’, ‘열심히 해라’고 했었으면서, 오늘은 왜…?
“교수님, 저는…”
“학생, 미안하지만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요.”
심 교수는 정중하지만 분명히 선을 그었다.
“물건은 우리 집 도우미 분이 차에 실어 줄 겁니다.”
명백한 퇴짜였다.
은아는 이유도 모른 채, 혼이 빠진 상태로 나가다 그만 누군가와 부딪혔다.
“유진 언니?”
그녀가 놀라 외쳤다.
“언니가 왜 여기 있어?”
눈앞의 유진은 흰 티셔츠 차림에, 촌스러운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검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었다.
“우연이네.”
유진도 잠시 놀랐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녀는 은아를 싫어하지 않았다.
재벌가 아가씨 특유의 도도함과 자존심은 있었지만, 무례하거나 못되지는 않았고,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만, 태리처럼 가까워질 사이는 아니었다.
“언니…”
은아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왜 남의 집 가사도우미 같은 걸 하고 있어?”
“…?”
“우리 오빠가 돈 안 줘?”
“…??”
“세상에! 너무 싸구려잖아! 진짜 못 봐주겠어!”
은아는 참다못해 소리쳤다.
“아 진짜 못 참겠네…”
은아는 하이힐을 쿵쿵 울리며, 미친 듯이 밖으로 나갔다.
걸어가면서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유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오빠의 행동이 너무 수준 이하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서양식 레스토랑에서 팁도 안 주는 것 같은 수준. 너무 창피했다.
“오빠! 나 진짜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어서 말하는데!”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녀는 퍼부으려 했다.
“나 바빠. 네 짜증 받아줄 시간 없어.”
“아니, 누가 짜증을 낸대? 지금 문제는 오빠잖아! 사람이 왜 이렇게 쪼잔해? 쪼잔한 남자는 쥐처럼 역겨운 거 몰라?”
“헛소리 그만해.”
은아는 멈추지 않았다.
“유진 언니가 오빠 빨래하고 밥하고, 놀아주고, 잠도 같이 자 줬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한 푼도 안 써? 사람을 가사도우미로 내몰아서 돈을 벌게 해? 이거 소문나면 오빠 체면은 어쩔 건데?”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누구라고?”
“유진 언니.”
“가사도우미… 그게 무슨 말이야?”
은아는 방금 본 걸 전부 말했다.
“이번엔 진짜 오빠가 너무했어. 아무리 핥는 개라도 개는 개잖아. 동물 학대는 하지 말자.”
그 뒤에 그녀가 뭐라고 더 말했는지, 은호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유진, 가사도우미, 돈.
그녀는 그 100억짜리 수표를 현금화하긴 했지만, 감히 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깊고 어두운 눈빛을 드리웠다.
기분이 나쁜 것도 같고,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은, 묘한 표정이었다.
‘하… 그때 그렇게 단호하게 떠나길래, 진짜로 독해진 줄 알았더니…’
그가 없으니,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운 모양이었다.
“은호, 뭐 해? 네 차례야.”
효성이 주사위 컵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 해.”
은호는 재킷을 집어 들고, 차 키를 챙겨 일어났다.
“아니, 모이자고 한 건 너잖아?”
효성은 어리둥절했다.
“취소야. 급한 일 있어.”
‘이제 슬슬, 데리러 와 달라고 빌 때가 된 거겠지?’
……
은호는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업무 전화 두 통과 메시지 몇 개를 제외하면, 그가 기다리던 전화는 끝내 오지 않았다.
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곧장 태리의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유진은 이 도시에 연고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늘 그 집으로 갔고, 그는 그곳에 데리러 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길은 굳이 내비게이션을 켤 필요도 없을 만큼 익숙했다.
“은호?”
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불렀다.
뒤돌아보니, 태리가 젊은 남자 하나의 팔을 끼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여긴 왜 왔어?”
그녀의 눈빛엔 경계가 묻어 있었다.
“유진은?”
“뭐 하려고?”
“유진 어디 있냐고.”
그의 말투엔 짜증이 스며들었다.
태리는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여자였다.
은호는 원래부터 그녀를 썩 좋아하지 않았고, 유진에게도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유독 이 문제만큼은, 늘 말을 잘 듣던 유진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 탓에 태리에 대한 인상은 더 나빠졌다.
태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신 차려. 너희는 이미 헤어졌어. 지금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찾는 거야?”
은호는 냉소했다.
“우리가 헤어진 게 몇 번이지? 두 손으로 다 셀 수 있어?”
“그래서?”
“지금 나 막아 봤자 소용없어. 괜히 악역 맡지 마.”
‘어차피 마지막엔, 유진이 먼저 고개 숙일 테니까.’
태리는 그의 오만함에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너한테 유진은 개만도 못한 존재야? 필요하면 갖고, 싫어지면 버려도 되는 존재냐고. 중요하지도 않고, 아낄 가치도 없는?”
“헛소리 그만해.”
은호는 말하며 몸을 돌렸다.
“말 안 해도, 내가 직접 올라가서 찾지.”
그때, 옆에서 조용히 있던 어린 남자가 한 걸음 나서, 그의 앞을 막았다.
“저기요, 무단침입은 불법입니다.”
은호는 그를 보지도 않고, 시선을 태리에게 꽂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억해 둘게. 그래 봤자 소용없어.”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결국엔 유진은, 개처럼 나한테 기어와서 빌게 될 테니까.”
“싫어요.”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살짝 발끝을 들었다.“오빠랑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요.”그녀가 더 다가오기 전에, 은호가 먼저 움직였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와아!”주변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졌다.“세상에! 얼마나 사랑하면 저럴까?”“완전 드라마네!”유진은 그 장면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책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아직도…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거의 무감각에 가까웠다.‘담배를 끊어도 금단 현상이 있는데, 하물며 6년을 사랑했던 사람인데.’유진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 공부해야 했다.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은호는 문득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어딘선가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 끝을 스쳤다.하지만 그 순간, 수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얽혔다.“뭘 보고 있었어요?”은호는 시선을 거두었다.“…아무것도 아니야.”수아를 기숙사 건물 아래까지 데려다준 뒤 돌아가려 했지만, 수아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아직 이른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요?”은호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역광 속에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수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달콤한 유혹이 섞였다.“오빠… 오늘 저, 오빠 집에 가도 될까요?”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은호는 잠시 멈칫했다.“넌 아직 어려. 조금 더 기다리자.”수아는 놀랐지만 마음 한편이 오히려 따뜻해졌다.그가 자신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나 이제 가볼게. 할 일이 있어.”수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아침에 좁쌀죽 가져다줄게요.”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멍해진 듯 서 있을 뿐이었다.……방 안.컴퓨터 화면이 켜져 있었지만 유진의 타이핑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머릿속에 두 사람이
은호는 말을 끝내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가속 페달을 세게 밟아 그대로 떠나버렸다.남겨진 태리는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을 퍼부었다.“저게 사람이야? 사람이냐고!”“쓰레기 같은 자식! 잡놈! 개보다 못한 자식! 아, 진짜 열받아 죽겠네!”그녀는 옆에 서 있던 연하남의 옷깃을 붙잡았다.“내가 말하는데, 이번엔 유진 절대 안 돌아가! 절대!”남자는 연신 달래듯 말했다.“그래 그래, 맞아. 화 좀 가라앉혀…”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저 남자는 이미 결과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태연해 보였다.그는 슬쩍 태리를 바라봤다. 순간, 그녀도 유진처럼 한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헌신해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아니지… 아니야.’그는 고개를 저었다. 꿈에서도 감히 그런 걸 바라진 못했다.……차 안에서 은호는 전화를 받았다.기분이 좋지 않은 탓에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무슨 일이야.”“자기, 요즘 완전 보물 같은 가게 찾았어요! 게가 진짜 살이 꽉 찼대요. 마침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우리 가서 먹을까요? 응?”수아의 밝고 발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그가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취향에 맞춰 제안한 것이었다.게다가 은호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 침묵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예전에는 대부분 은호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했고, 그녀는 수줍게 한 번 사양한 뒤 받아들이면 됐다.하지만 요즘은 달랐다.그가 먼저 연락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메시지도 짧아졌다. 가끔은 읽고도 답을 하지 않았다.이유를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뿐이었다.“바빠.”지금도 마찬가지였다.“토요일? 바빠. 시간 없어.”“토요일이 안 되면… 일요일은 어때…요?”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시간 없다니까. 끊는다.”전화는 그대로 끊겼다.끊긴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수아의 가슴에 불안이 다시 파고들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에게 음식이란 그저 에너지를 보충하는 수단일 뿐, 맛이 좋고 나쁨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다 씻었어요.”유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씻어 둔 붉은 피망과 청경채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누가 봐도 강박에 가까운 정리 습관의 소유자였다.“왜 웃어요?”민준은 이유를 몰라 물었다.유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나가 계세요.”“네.”그는 물기를 닦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전체적으로 담백한 맛, 대부분이 심 교수가 좋아하고 또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심 교수는 감회에 젖어 중얼거렸다.식사가 끝나자, 유진은 먼저 그릇을 정리했다.민준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와 도왔다.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 남자의 뒷모습이 길게 늘어졌다.유진의 시선에서 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마치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선이 또렷하고 날카로웠다.심 교수가 문틀에 기대서서 물었다.“유진, 네 선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민준은 그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자였고, 유진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아주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인연은 먼저 그들 스스로 이어져 있었다.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심 교수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심 교수는 거실로 나왔고, 소파에서 한 여자가 웃으며 일어섰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장은아예요. 전에 병원에 문병 갔었고, 올해 대학원 모집에 대해서도 여쭤봤었죠.”심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억하고 있어요. 앉아요.”은아의 미소는 한층 더 밝아졌다.“요즘 집에서 요양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몸에 좋은 것들 좀 가져왔어요…”심 교수는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무심히 훑어보았다.인삼, 제비집, 동충하초…그녀의 미소는 자연스레 옅어졌다.“전에 말씀드린 대학원 정원 말인데요…”은아가 다시 말을 꺼냈다.
유진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남자는 반 걸음 뒤따랐다.어젯밤의 불안함에 비하면, 그녀는 눈에 띄게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민준이 차를 몰고 왔고, 유진은 조수석에 앉았다.가는 길에 과일 가게를 하나 지나치자,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세워주실 수 있을까요? 3분이면 돼요. 과일 좀 사려고요.”“과일?”“네. 교수님 드릴 거예요.”민준은 핸들을 잡은 채,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굳이 그렇게 번거로울 필요가 있나요?”“…?”유진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설마 늘 빈손으로 남의 집에 가시는 건 아니죠?”민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은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하네, 정말.’‘아마도, 진짜 대단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소한 건 신경을 안 쓰는 걸까?’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웠다.……심수희 교수의 집은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한국식과 양식이 조화를 이룬 단독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고, 소박하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었다.단풍나무 숲을 지나면서 아담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6년…’유진은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발치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민준은 그녀의 변화를 느꼈다.“안 내려요?”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잠깐만요. 조금만 있다가요.”남자는 그녀를 몇 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아무것도 묻지 않는 배려에, 유진은 마음속으로 감사했다.그가 먼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에야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계절은 온갖 꽃이 한창 피어나는 때였다.마당에 들어서자, 옅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져왔다.울타리 옆에는 푸릇푸릇한 채소들이 심어져 있었지만, 주인이 아파서 돌보지 못했는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의 심장이 살짝 떨렸고, 그녀는 서둘러 민준을 따라 들어갔다.“교수님.”심 교
유진은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은호와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손만 뻗으면 다 해결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육체적인 일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심지어 몇 년 전, 그가 막 창업을 시작해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집안의 주기적인 청소는 늘 시간제 도우미를 불러 맡겼다.페인트 한 통을 다 쓰고 나자, 유진은 뻐근해진 허리를 짚었다.편하게만 지내온 세월이 길어서인지, 몸이 금세 투덜거렸다.그녀는 복도로 나가 남은 페인트를 들여놓으려 했다.그런데 발이 조금 빨랐던 탓에, 그만 페인트 통을 걷어차고 말았다.재빨리 붙잡긴 했지만, 결국 옆집 현관 앞에 페인트가 조금 쏟아졌다.급히 걸레를 가져와 닦고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고개를 들며 사과하려던 순간,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여기 사세요?”“왜 그쪽이 여기에…?”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민준은 바닥을 한 번 보고, 이내 그녀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그럼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당신이었군요?”유진도 이렇게까지 우연일 줄은 몰랐다.“보시는 대로예요. 오늘부터 이웃이 됐네요.”민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연구실과 학교가 모두 가까워 학생들 수업과 실험을 오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진은 왜 이곳일까?누가 봐도 이 환경은 젊은 여성이 살기엔 썩 적합하지 않았다. 다른 걸 떠나,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건물은 보통 선택지에서 제외되기 마련이었다.유진은 그가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복도를 더럽힌 걸 신경 쓰는 줄 알았다.“죄송해요. 페인트가 좀 쏟아졌는데, 금방 다 치울게요.”그녀는 서둘러 마무리했고, 금세 바닥은 깨끗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가며, 그녀는 그의 옆에 놓인 쓰레기를 가리켰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이것도 같이 버려드릴까요?”민준은 사양하지 않았다. 대신 집 안으로 들어가 접이식 사다리를 하나 꺼내왔다.“벽 칠할 거면 이
은호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아차렸다.여자의 아름답던 웨이브 머리는 말끔하게 펴져 있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도 다시 순수한 검은색으로 돌아가 있었다.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도 신지 않았다.하얀 티셔츠 한 장과 청바지. 지나칠 정도로 수수한 차림이었다.다만… 그 눈빛만은 예전보다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 실연의 그늘이나 침체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은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유진은 연기를 아주 잘하고 있었다.너무 잘해서, 그의 신경을 완벽히 건드려 버릴 정도로.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저 표정은 분노가 터지기 직전의 신호였다.“후.”남자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근데 안목이 진짜 별로네. 내 옆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으면, 그래도 기준이라는 게 좀 있어야 하지 않아? 개나 소나 다 괜찮다는 식이면, 나 같은 전 남친 체면은 어디다 두라는 거지?”“체면?”유진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그 웃음 속엔, 희미한 비애가 스며 있었지만, 아쉽게도 은호는 그걸 보지 못했다.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유진이 다른 남자에게 옅게 웃어 보이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 감정을 수컷의 ‘영역 본능’ 탓으로 돌렸다.유진이라는 이 영역은, 한때 자신이 점령했던 곳이었다. 이제 필요 없어진 땅일지라도, 하찮은 개나 소 따위가 와서 표시를 남기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나 바빠. 먼저 갈게.”유진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긴 어딜 가? 태리 집 말고는 갈 데도 없잖아. 그래도 이번엔 제법 독해졌네? 수표랑 서류까지 다 챙겨서 나가고. 뭐야, 이제 장난 좀 쳐보겠다는 거야?”유진의 가슴이 찔끔 아려왔다.그의 성질이 고약하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비뚤어지고 난폭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상처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는, 그녀가 그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