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자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말했다.“성 비서님께서 아까 사모님 유품을 가져왔더라고요. 그리고 둘째 도련님께서는 지금 응급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습니다.”임혜자는 강지한이 너무 걱정되었고 혹시나 그에게 일이 생기면 아무것도 모르는 강준형이 그들을 탓하지는 않을지도 걱정되었다.“네...”강준형을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순간 본가 쪽도 아수라장이 되어 집사들은 그를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의사와 간호사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강준형은 깨어날 수 있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김준혁은 그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어르신,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강준형은 겨우 침상에서 일어나 앉더니 온 힘을 다해 집사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성 비서한테 전화해서 그 팔찌를... 가져오라고 해.”성무진도 마침 병원에 있었기에 빠르게 그의 병실로 오게 되었고 오자마자 주머니에서 그 팔찌를 그에게 넘겨줬는데 조명 아래 비치니 더욱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했다.강준형은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건네받고 만져보다가 익숙한 촉감에 결국에는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문득 심미연의 해맑은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녀의 것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강준형은 마음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팔찌를 움켜쥐고 몸을 잘게 떨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칼로 찌르기라도 한 듯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순간 그는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 끝없는 공허함과 절망에 빠져버렸다.김준혁은 그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어르신,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너무 흥분하시면 심장에 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잠깐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떠세요?”그러나 강준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가 그토록 아끼던 심미연이 이렇게 떠나버렸다.시신도 남기지 않고 가버린 사실을 강지한이 깨어나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3일 후, 강지한이 드디어
성무진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뻗어 신하린을 붙잡았다.“신하린 씨,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신하린은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성무진의 손을 한입 물었다.“놔요!”성무진이 아파서 손을 놓자 신하린은 또 강지한을 덮쳤다.순간 강지한이 갑자기 그녀를 노려보았다.그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신하린은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신하린 씨, 지금 하린 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일은 우리 강 대표님과 무관해요.”성무진은 황급히 입을 열어 강지한을 대신해서 설명했다.신하린은 몸을 곧게 펴고 머리카락이 국에 젖은 강지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강지한 씨가 온지유를 밑도 끝도 없는 포용하지 않았다면 온지유가 어떻게 감히 미연이 앞에서 그렇게 날뛰고 방자할 수 있겠어요? 강지한 씨가 미연이를 믿지 않은 게 아니었다면 미연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억울함을 당할 수 있었을까요!”“강지한 씨, 그거 알아요? 미연이는 강지한 씨를 꼬박 10년 동안 사랑했어요!”심미연은 26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러니 계산해 보면 심미연은 정말 강지한을 10년 동안 사랑했다.결국 그녀는 10년 동안 자신을 다른 세계로 보내버렸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강지한의 차가운 표정이 마침내 흔들렸다.심미연이 그를 10년 동안 사랑했다니, 이것은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성무진도 놀란 표정이었다.강 대표님의 부인이 강 대표님을 10년 동안 사랑했다니.10년이란 시간은 참 긴 세월인데 말이다.“강지한 씨, 나도 알아봤어요. 온지유가 안에서 맛있는 걸 먹으며 잘 지낸다는데 이렇게 하면 미연이게게 미안하지 않아요?”신하린은 화가 난 나머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그 악독한 여자가 미연이와 외할머니를 죽였는데 어떻게 멀쩡하게 살아있단 말인가! 빌어먹을!강지한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그는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온지유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성무진은 그제야 반응하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요.”그는 온지유를 잘 모시라고 당부했었다.설마...그들이
짝! 짝!맑은 따귀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서 터져 마치 여름에 갑자기 닥친 천둥소리처럼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신하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머금은 두 눈엔 억울함과 한이 반짝이였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흐느낌을 참으며 마치 모든 억울함과 고통을 이 간단한 동작을 통해 털어놓으려는 것 같았다.강지한은 눈앞에 별이 보이도록 얻어맞았지만 그 따가운 통증이 뺨에 번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히려 했다. 머릿속에는 꽃처럼 예쁘게 웃고 있는 심미연의 모습이 떠올랐고 심미연의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함께 보낸 따스한 시간이 조수처럼 밀려와 그를 파묻었다.“만약 심미연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런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끝없는 슬픔과 후회를 품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멍한 눈빛으로.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많은 장애물을 뚫을 수 있는 것처럼 이미 멀어졌지만 영원히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그 모습을 보았다.그런 그의 모습에도 신하린의 마음속 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용솟음쳤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서 두 손을 주먹으로 꼭 쥐었다. 손끝은 너무 힘을 주어 하얗게 질렸지만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확고했다.“강지한 씨, 무슨 자격으로 미연이를 언급해요? 강지한 씨가 뱉는 모든 글자가 미연이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에요!”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그 순간 더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 것처럼 극도로 팽팽해졌다.그러나 바로 이 긴장된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강지한이 갑자기 웃었다. 그것은 일종의 씁쓸하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그래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내가 미연이를 죽였어요.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신하린은 모든 슬픔을 삼킨 것 같은 강지한의 얼굴을 보고 입가에 시큰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풍자와 경멸이 숨어 있었는데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졸렬한 연기를 비웃는 것 같았다.“허, 정말 가소롭네
신하린의 눈빛은 마치 두 개의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조금의 온도도 없이 이진영의 깊은 눈동자를 찔렀다. 그 눈빛에는 의외와 분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가 가득했다.“무슨 일이 있어요?”그녀의 말은 나지막하고 힘차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이 사이로 비집고 나온 듯 거부할 수 없는 무거움을 띠고 있었다.이진영은 몸을 살짝 움직였다. 그녀가 이 한마디를 뱉는 순간 그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암울하게 변했고 마음속에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는 한 걸음 천천히 앞으로 내디디며 꿈에도 그리지만 아득히 먼 이 그림자에 접근하려 했지만 신하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담함과 거부감은 보이지 않는 장벽처럼 그를 격리했다.“괜찮으시다면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가 나중에 들어오세요!”그녀가 계속 말했다. 말투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확고함과 결단만이 있었다.그녀의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핏줄이 하얀 손등에 내비쳐 그녀의 마음속 거친 정서를 드러냈다.이 순간, 그녀는 더는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복수의 사신으로 변신하여, 죽은 절친을 위해 따지려는 듯했다.이진영의 마음이 아프게 조여왔다. 그는 신하린의 증오로 가득 찬 두 눈을 바라보며 전례 없는 무력함과 고통을 느꼈다.그는 앞으로 나가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위로해주고 싶고그녀와 얘기도 하고 싶었지만 신하린의 눈빛은 너무 차가웠다.두 사람은 이렇게 대치하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긴장과 억압이 가득 차 있어 마치 시간조차 이 순간에 정체된 것 같았다.“왜 아직도 안 가?”신하린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더는 이 남자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는 복수의 불길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진영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충격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이왕 만났으니 우리 얘기 좀 할까?”신하린은 가슴이 아파지는 걸 느끼며 입을 벌리고 그를 불렀다.“진영 씨.”그녀의
그는 후회했다.몹시 후회하다.하지만 이 세상에 후회 약은 없다!신하린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풍자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마치 여름 오후에 갑자기 들이닥친 소나기처럼 차갑고 격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곧바로 쳤다.“미연이는 이미 한 줌의 흙이 되었는데 강지한 씨의 이런 능청스러운 태도는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어 주위의 공기를 굳힌 것 같다.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을 감빨며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으니 그 강렬한 통증은 조수처럼 세차게 밀려와 그를 삼킬 것 같았다.그는 두 손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고 손끝은 너무 힘을 주어 하얗게 질렸지만 마치 이렇게 해야만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는 것 같았다.신하린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더니 시큰둥하고 비참함으로 가득 찬 어투로 말했다.“뒤늦은 정은 길가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들풀보다 더 비천해요.”강지한의 마음은 이 순간 유난히 무거웠다.신하린은 그런 그를 보고 또 계속 말을 이었다.“온지유의 일에 더는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우레와 같이 그의 귓가에 폭발했고, 글자마다 천근 무게로 대처할 수 없는 힘을 띠고 있었다.그녀의 눈빛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단지 확고함과 냉혹함만이 있었는데 마치 이미 온지유의 비참한 미래를 예견한 것 같았다.“난 끼어든 적 없어요. 온지유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에요. 신하린 씨가 어떻게 상대하든 상관없어요.”강지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쌀쌀하게 말했다.신하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심미연을 향한 끝없는 그리움과 슬픔이 만들어낸 불꽃이었다.“말한 대로 하기를 바라요!”또박또박 말하고 난 그녀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신하린이 문을 나서자마자 성무진이 초조한
성무진은 신미연이 정말 바다에 빠졌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 생각했지만 이런 말을 그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그렇지 않으면 강 대표님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니 말이다.“빨리 가서 이 일을 처리해. 난 기사를 불러 집에 갈 거야.”성무진은 서둘러 갈 수밖에 없었다.강 대표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강지한은 이불을 들치고 일어나 욕실로 갔다.손으로 얼굴의 손자국을 어루만지며 신하린의 당시 슬프고 분노하던 모습을 떠올렸는데 연기하는 것 같지 않았다.만약 심미연이 죽지 않았다면 신하린에게 알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심미연이 죽었다면...강지한은 감히 더는 생각하지 못하고 재빨리 수도꼭지를 틀고 물로 얼굴을 씼었다.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확 들었다.씻고 옷 갈아입고 나니 기사도 도착했다.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침실은 이미 깨끗이 청소되어 공기 중에 은은한 향기가 났다.강지한은 또 그 넥타이를 보고 마음이 뒤숭숭해졌다.심이연이 그리웠고 그가 전에 했던 일도 떠올라 알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다.오후가 되자 육현성이 찾아왔는데 얼굴이 초췌하고 수염도 깎지 않아 의기소침해 보였다.강지한은 소파에 앉아 눈앞의 육현성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온지유는 이미 체포되었으니 절차가 끝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육현성이 온지유의 도주를 도운 일에 대해 그는 결코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넌 분명히 이미 모든 것을 안배했는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육현성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온지유가 체포된 일에 대해 그는 사람을 찾아 경위를 똑똑히 묻고 나서야 자신이 철두철미한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강지한의 눈에는 그가 아마 우스운 꼬락서니였을 것이다.집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그는 강지한을 찾아 분명히 묻기로 했다.“내가 너에게 말했으면 너는 온지유를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강지한은 찻잔
“지한아,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온지유를 놓아줄 수 있는 거야?”육현성은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또 한마디 물었다.강지한은 눈빛을 그의 얼굴에 떨어뜨렸다.“이것이 바로 온지유의 결말이야. 아무도 바꿀 수 없어. 너는 그만 가봐.”강지한이 내쫓자 육현성의 안색은 극도로 나빠졌다.“너는 왜 이렇게 정이 없는 거야!”강지한은 그의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예전에 심미연도 같은 말을 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세계에는 냉랭한 사람만 존재했고 감정은 없었다.육현성은 그곳에 앉아 그의 모습이 2층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모든 감정을 누르고 천천히 일어섰다.이 순간 그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정을 깨달았다.원래 강하지 못하면 발밑에 밟힐 수밖에 없다.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그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어디 갔어?”오미경은 분노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이다은과 결혼할게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만약 그가 이다은과 결혼할 수 있다면 이씨 가문의 세력이 생길 것이고 그는 서서히 강해질 것이다....신하린은 흐리멍덩하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멀쩡하던 심미연이 왜 이렇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두 아이도...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얼마나 울었을까, 그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꿈속에서만 그녀는 심미연을 볼 수 있다.얼마나 지났는지 그녀의 침대 옆에 그림자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신하린, 넌 왜 나에게 사랑을 좀 나누어 줄 수 없는 거야? 젠장, 넌 양심이 없는 년이야!”이진영의 목소리는 침대 위의 여자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들려왔다.욕을 한 후 그는 옷을 벗고 이불을 젖히더니 이불 속에 누웠다.그가 눕자마자 여자의 몸은 습관적으로 그에게 다가와 두 손으로 그를 껴안고
이진영은 땅에서 일어나더니 침대 옆에 서서 분노한 신하린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심미연은 이제 없어. 나마저 밀어내면 너의 곁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을 거야.”신하린은 침대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난 혼자가 되더라도 다시는 진영 씨와 함께 있지 않을 거예요!”약혼녀가 있는 남자에게 매달리다가 결국 자신만 다칠 것이니 마지막에 엉망진창으로 지는 것보다 좀 일찍 떠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신하린, 나한테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 다른 여자와 함께 있지 않았어.”이진영은 설명하려 했다.“나를 믿어줘.”신하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진영 씨가 그 여자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약혼한 사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거잖아요! 다른 여자가 있는데도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나를 죽이려는 거에요? 미연의 결말로 내가 정신 차리기에 충분하지 않아요?”만약 심미연이 조금 일찍 강지한을 떠났더라면 온지유가 그녀에 대한 적의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심미연의 외할머니도 죽이지 않을 것이고 그녀도 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 세상에는 만약이 없다.이런 사실 앞에서 그녀가 어떻게 이진영과 계속할 수 있겠는가.“심미연은 심미연이고 너는 너야! 나는 너를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이진영은 맹세하며 말했다.“진영 씨, 나는 진영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구아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진영 씨가 나를 곁에 둔 이유는 단지 내가 구아정이랑 조금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일 뿐이잖아요. 진영 씨, 난 이제 대역이 되고 싶지 않아요. 우리 그만 헤어지고 더는 나를 방해하지 말아요.”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말을 마침내 뱉고 나니 신하린은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이진영은 놀라서 멍하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신하린...”그는 입을 벌리고 설명하려 했지만 신하린이 먼저 입을 열어 그의 말을 끊었다.“진영 씨, 그만 가요.”예전에는 그의 마음속에 사람이 있었고, 지금은 그의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