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강태혁.
분명 아는 이름 같기는 했다.
문제는 대체 어디서 아는 이름인지 죽어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제 손님이라고요?”
―네. 1층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수화기 너머로 안내 데스크 직원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이재는 모니터 한쪽에 띄워둔 사내 메신저를 확인했다. 오늘 예정된 외부 미팅은 없었다.
애초에 있을 리가 없었다.
입사한 지 이제 나흘.
한국에 돌아온 지도 고작 열흘이었다.
그런 사람을 회사까지 약속도 없이 찾아올 인간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
아주 가까운 사이거나.
아주 눈치가 없는 사이거나.
강태혁이라는 이름은 안타깝게도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대요?”
―따로 말씀은 안 하셨어요. 성함만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네.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고 속으로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봤다.
강태혁.
역시 모르겠다.
한국을 떠난 지 십 년이었다.
그동안 잊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었고, 굳이 기억하며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은 더 많았다.
그중 하나겠거니 했다.
적어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로비는 한산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탓인지 오가는 직원도 많지 않았다. 이재는 외부 손님 전용 라운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누구든 얼굴을 보면 기억나겠지.
라운지 창가에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검은 정장.
길게 뻗은 다리.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의 회사 로비치고는 지나치게 편해 보였다.
이재는 걸음을 늦췄다.
저런 인간을 알았던가.
그때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알았다.
동시에 속이 뒤집혔다.
이재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화장실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칸막이 문을 열고 변기를 붙잡자마자 헛구역질이 터졌다.
“욱…….”
나오는 것은 없었다.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이 전부였으니 당연했다.
그런데도 몸은 자꾸만 무언가를 뱉어내려 했다.
심장이 뛰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
냄새가 났다.
피 냄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은 호텔 본사 1층 화장실이었다.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고, 코끝에는 고급스러운 방향제 냄새만 맴돌았다.
그런데도 분명했다.
쾅.
어디선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문고리가 흔들렸다.
누군가 울부짖었다.
숨을 죽여야 했다.
소리를 내서는 안 됐다.
들키면―
이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한동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남아 있는 것은 환풍기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뿐이었다.
이재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나.
둘.
셋.
괜찮다.
여기는 회사였다.
낮이었고, 문밖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열여덟 살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되뇌고 나서야 손끝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재는 세면대 앞으로 갔다.
찬물로 입을 헹궜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야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여자의 눈가가 붉었다.
꼭 울고 난 사람 같았다.
꼴사나웠다.
그리고 이제야 이름이 완전히 기억났다.
강태혁.
목소리도 잊었다.
이름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은 몸이 먼저 알아봤다.
참 대단한 기억력이었다.
이재는 젖은 손끝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십 년 전의 그 형사.
가장 끔찍했던 밤의 끝에서 자신을 구한 사람.
그리고 보는 순간 그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이재는 한동안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도망치고 싶었다.
정확히는 그냥 사무실로 올라가버리고 싶었다.
안내 데스크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전해달라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십 분 가까이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 얼굴만 보고 도망치는 건 영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재는 이제 열여덟 살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오늘 벌써 몇 번이나 되뇌는지 모르겠다.
“……진짜 짜증 나네.”
작게 중얼거린 이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립스틱도 다시 발랐다.
눈가의 붉은 기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럭저럭 사람 꼴은 돌아왔다.
괜찮았다.
이 정도면.
이재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강태혁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
“…….”
남자의 시선이 이재의 얼굴에 잠시 멎었다.
문을 닫고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괜찮아요?”
십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또 짜증이 났다.
“네.”
이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멀쩡해요.”
누가 봐도 멀쩡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태혁의 시선이 붉어진 눈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재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저 찾으러 오신 거예요?”
“오래 걸리길래.”
“화장실 앞까지요?”
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이 인간이었다.
말을 하다 말아서 사람 기분 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던 인간.
기억 하나가 돌아오니 다른 것들도 줄줄이 딸려 나왔다.
썩 반갑지는 않았다.
태혁이 이재를 바라봤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자는 기억 속보다 선이 짙어져 있었다.
소년 같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훨씬 서늘하고 단단한 인상이 자리 잡았다.
유감스럽게도 잘생긴 건 여전했다.
아니.
그것만큼은 십 년 전보다 심해진 것 같았다.
저 얼굴을 보고 화장실로 뛰어가 헛구역질까지 했다는 사실이 조금 자존심 상했다.
“십 년 만이네요.”
반가워해야 하나.
이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만 살짝 숙였다.
“그러네요.”
그걸로 끝이었다.
십 년 만에 만난 사람들의 재회치고는 몹시 건조했다.
그럴 만도 했다.
둘 사이에는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한쪽은 피해자였고.
한쪽은 형사였다.
이재가 먼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태혁이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직원 몇 명이 로비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그 말에 이재의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좋은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 시간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고 하고 싶었다.
십 년 만에 나타난 남자를 보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까지 했으니, 오늘치 재회는 이미 차고 넘쳤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근처 카페로 가요.”
이재가 먼저 걸었다.
태혁이 뒤를 따랐다.
***
카페에는 이른 점심을 나온 직장인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이재는 가장 구석진 자리를 골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재는 빨대 포장지를 벗겼다.
정작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태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시켰나 싶었다.
짧은 침묵 끝에 이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말씀하세요.”
태혁이 이재를 바라봤다.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또 저 침묵이었다.
상대가 말할 때까지 가만히 쳐다보는 버릇.
십 년이 지나도 사람 버릇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재가 빨대 끝을 만지작거렸다.
“사건이요?”
“정확히는 두 건이고.”
손이 멈췄다.
십 년 만에 찾아온 형사.
두 건의 사건.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일 리가 없었다.
“무슨 사건인데요?”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태혁이 말했다.
“십 년 전과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