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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Autor: 홍피코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03 12:16:40

“십 년 전과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슷한 사건.

굳이 무엇과 비슷한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강태혁이 십 년 만에 자신을 찾아와 할 만한 이야기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어떻게 비슷한데요?”

“주거 침입입니다.”

태혁이 말했다.

“둘 다 성림동에서 발생했고, 범인은 신분을 속여 피해자의 집에 들어갔어요.”

이재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첫 번째는 사흘 전. 집주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서 별다른 피해 없이 끝났고.”

“두 번째는요?”

“어제.”

짧은 대답 뒤로 침묵이 붙었다.

“피해자가 다쳤습니다.”

빨대 끝을 만지작거리던 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

“많이요?”

“죽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태혁이 덧붙였다.

“죽이려고 한 건 맞지만.”

이재는 방금 전의 생각을 곧바로 취소했다.

빨대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십 년 전이랑 비슷하다는 거예요?”

“현재까지는.”

“주거 침입이라서?”

“그것만은 아니고요.”

“그럼요?”

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또 저 침묵이었다.

아까부터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데 아주 재주가 있었다.

“범인은 검침원을 사칭했습니다.”

검침원.

듣는 순간 익숙한 단어가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

이재는 애써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수법, 흔하지 않아요?”

“흔하죠.”

순순히 인정하는 대답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이재가 미간을 좁혔다.

“성림동에 도둑이 드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닐 테고요.”

“그렇죠.”

“그럼 별로 비슷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태혁이 이재를 바라봤다.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뭔데요?”

“확인 중이에요.”

이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확인도 안 된 걸 가지고 저한테 오신 거예요?”

“네.”

망설임 없는 대답이 더 황당했다.

“왜요?”

태혁은 대답 대신 물었다.

“언제 귀국했어요?”

“네?”

“한국에 언제 들어왔냐고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열흘 전이요.”

태혁은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이재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첫 번째 사건이 언제라고 했죠?”

“사흘 전.”

“…….”

귀국하고 일주일 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기분 나쁜 숫자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재는 천천히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래서 저한테 오신 거예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고.”

“제가 한국에 들어온 뒤에 사건이 시작돼서?”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뭘요.”

“제가 언제 들어왔는지.”

태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확인했습니다.”

“어디서요?”

“입국 기록.”

이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 입국 기록까지 확인했어요?”

“필요해서요.”

참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십 년 전에도 그랬다.

필요한 것은 물었고, 필요한 것은 확인했다.

상대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늘 그다음이었다.

“여전하시네요.”

“뭐가요?”

“사람 기분 나쁘게 말하는 거.”

태혁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기분이 나빴는지, 십 년 만에 만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태혁이 말했다.

이재는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는 거네요.”

“아직 판단할 단계는 아니에요.”

“그럼 판단하고 오셨어야죠.”

“판단하고 나면 늦을 수도 있으니까요.”

말문이 막혔다.

저런 식이었다.

말을 예쁘게 하는 재주는 없는데, 반박하기 어렵게 하는 재주는 있었다.

이재는 결국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녹아 밍밍했다.

“십 년 전 범인은 죽었어요.”

“알아요.”

“강태혁 씨가 더 잘 아시겠죠.”

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같은 사람일 리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럼 모방범이거나, 그냥 우연이거나. 둘 중 하나네요.”

“현재로서는요.”

“그런데 왜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세요?”

태혁의 시선이 이재에게 멈췄다.

“위험하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지금까지 한 얘기가 전부 그 얘기 아니었어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죠.”

“그게 그거잖아요.”

“다릅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재는 기가 막혔다.

“뭐가 다른데요?”

“윤이재 씨가 위험하다고 확정할 만한 근거는 아직 없어요.”

태혁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렇다고 안전하다고 확정할 근거도 없고.”

그 말이 싫었다.

정확히는 너무 익숙해서 싫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기다려야 한다.

혼자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경찰이 확인할 때까지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

십 년 전 지겹도록 들었던 말들이었다.

전부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그래서요?”

이재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태혁은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당분간 신변 보호를 받았으면 합니다.”

“싫어요.”

생각보다 빠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이재가 먼저 물었다.

“왜요?”

“아니.”

태혁이 천천히 말했다.

“생각은 해보고 대답한 건가 해서.”

“네.”

“제가 말 끝낸 지 삼 초도 안 됐는데.”

“충분했어요.”

태혁은 한동안 이재를 바라봤다.

이재도 피하지 않았다.

“필요 없어요.”

“그건 아직 모릅니다.”

“제 일인데 제가 모르고 강태혁 씨가 알아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요?”

태혁이 미간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

처음으로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혹시라도 사건과 관련이 있으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혹시.”

이재가 그 말을 되받았다.

“지금 전부 ‘혹시’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혁도 부정하지 않았다.

“십 년 전 사건과 비슷할 수도 있고, 제 귀국과 관련 있을 수도 있고, 제가 위험할 수도 있고.”

“맞아요.”

“그럼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네요.”

“그래서 확인하는 겁니다.”

“그건 형사님이 하시면 되고요.”

태혁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형사님.

십 년 전에는 입에 달고 살았던 호칭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괜히 기분이 더 나빠졌다.

“저는 제 생활 할게요.”

“윤이재 씨.”

“저 이제 열여덟 살 아니에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태혁이 입을 다물었다.

“알아요.”

“모르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태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차갑던 손끝은 어느새 멀쩡해져 있었다.

“혼자 다닐 수 있고, 혼자 살고, 직장도 다녀요.”

말을 이어갈수록 이상하게 화가 났다.

“누가 옆에서 지켜줘야 하는 사람 아니에요.”

“그건 나이와 상관없는 문제예요.”

“저한테는 상관있어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태혁의 입이 다물렸다.

이재는 그제야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 잘 살고 있어요.”

“…….”

“보셨잖아요.”

말해놓고 나니 조금 우스웠다.

오늘 처음 마주친 순간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까지 해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잘 살았다.

정말로.

학교도 졸업했고, 취직도 했다.

혼자 집을 구하고, 운전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웃을 일에는 웃었다.

잠들기 전에 약이 필요한 날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그 정도는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는 흠이었다.

십 년 전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아도 하루는 흘렀다.

그렇게 하루씩 쌓다 보니 어느새 십 년이었다.

그걸 잘 사는 게 아니라고 하면 대체 뭐가 잘 사는 건지, 이재는 몰랐다.

“그러니까 신변 보호는 필요 없어요.”

태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이재가 그를 바라봤다.

“이 사건, 모르고 있었겠죠?”

“그렇겠죠.”

“앞으로도 모르고 지내고 싶어요?”

묘한 질문이었다.

이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태혁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그 침묵이 싫었다.

스스로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사람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

십 년 전에도 그랬다.

결국 이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건 제가 결정할게요.”

의자를 뒤로 밀었다.

“저 올라가봐야 해요.”

태혁은 붙잡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재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한 걸음 옮긴 뒤 멈췄다.

“그리고.”

태혁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부터는 회사로 찾아오지 마세요.”

“왜요?”

“싫으니까요.”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

이재는 그대로 카페를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한낮의 햇빛이 눈부셨다.

회사까지는 걸어서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별일 아니었다.

정말로.

성림동에서 주거 침입 사건이 두 건 발생했다.

그중 하나는 살인미수였다.

범인은 검침원을 사칭했다.

그리고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자신이 한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 뒤였다.

이재는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성림동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돈 많은 집을 노리는 인간이 그 동네를 고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검침원을 사칭하는 수법도 흔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십 년 전 그 사람은 죽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경찰이 확인했다.

강태혁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이재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길을 건넜다.

괜찮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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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정한 지옥   14화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 다정한 지옥   13화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 다정한 지옥   12화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 다정한 지옥   11화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 다정한 지옥   10화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 다정한 지옥   9화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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