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블레이크 공작가의 성은 검은 돌로 지어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산맥의 그림자가 그대로 굳은 것 같았다. 높은 성벽, 좁은 창, 차가운 탑. 화려한 귀족 저택이라기보다 오래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에 가까웠다. 엘리제는 마차에서 내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찬 바람과 젖은 돌 냄새 사이로, 아주 희미한 고기 육수 향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육수 냄새가 너무 얕아.' 오래 끓였지만 깊지 않은 냄새였다. 뼈에서 맛을 뽑기보다, 그냥 물에 오래 담가 둔 느낌. 소금으로 덮어 버린 듯한 끝향. 엘리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성, 주방부터 갈아엎어야겠네.' 칼릭스는 그녀보다 먼저 성문 안으로 걸어갔다. 기사들과 하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시선은 곧 엘리제에게로 옮겨왔다. 독살 누명을 쓴 악녀, 처형장에서 살아 돌아온 여자, 공작의 미각을 깨웠다는 소문의 영애. 그 모든 이름이 그녀를 따라붙는 듯했다. 엘리제는 턱을 들었다. 두려운 척하면 잡아먹힌다. 주방에서도, 귀족 사회에서도, 그리고 이 세계에서도. 칼릭스가 말했다. "먼저 주방으로 간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방부터 주는 게 아니라요?" "첫 식사는 오늘 밤이라고 했다." "저 진짜 방금 사형장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식사로 한다." "공작님이 생각하는 가벼움과 제가 생각하는 가벼움이 다른 것 같은데요." 칼릭스는 그녀를 보았다. "배고프지 않나." 그 질문에 엘리제는 또 말문이 막혔다. 배고팠다. 정말로. 마지막으로 제대로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전생의 마지막 날에도 그녀는 커피와 차가운 빵 한 조각으로 버텼다. 이 몸으로 깨어난 뒤엔 감옥의 물뿐이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럼 먹어라." "먹는 김에 요리도 하라는 뜻이죠?" "그렇다." "참 효율적이네요." "북부에서는 효율이 미덕이다." 엘리제는 작게 웃었다. 위험한 남자다. 그런데 대화가 된다. 그게 더 위험했다. *** 공작가 주방은 컸다. 문을 열자 열기와 기름 냄새가 밀려왔다. 벽면에는 냄비와 팬이 걸려 있었고, 중앙에는 긴 조리대가 놓여 있었다. 화구는 여러 개였고, 물도 충분했다. 감옥 옆 조리실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하지만 엘리제의 눈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칼은 무뎠다. 도마는 재료별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끓는 냄비는 지나치게 센 불에 방치돼 있었고, 고기 손질대 옆에는 생채소가 놓여 있었다. '위생 점수 0점.' 주방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넓은 어깨, 굵은 팔, 오래 칼을 잡은 손. 얼굴에는 자부심과 불쾌함이 함께 있었다. "베른 하르트. 블레이크 공작가의 주방장입니다." 그는 엘리제를 위아래로 훑었다. "듣자 하니 영애께서 전속 셰프가 되셨다지요." "엘리제 폰 라벤느입니다." "라벤느 영애가 주방에 들어오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사형장 옆 조리실에서 고기를 굽게 될 줄은 몰랐어요." 주방 안의 견습들이 움찔했다. 베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귀족 영애의 농담은 주방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저도 쓸모없는 농담은 싫어합니다." 엘리제는 조리대를 훑었다. "그런데 이 도마 배치는 더 싫네요." 순식간에 주방 공기가 굳었다. 베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 오자마자 우리 주방을 지적하시는 겁니까?" "처음이라 더 잘 보이네요." "영애께서 칼질이나 할 줄 아십니까?" 엘리제는 대답 대신 가까운 칼을 집었다. 무뎠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걸 칼이라고 부릅니까?" 견습 하나가 작게 웃었다. 베른은 팔짱을 꼈다. "블레이크 공작가 주방에서 쓰는 칼입니다." "그럼 블레이크 공작가 주방은 고기와 싸우는군요. 자르는 게 아니라." 베른의 얼굴이 굳었다. 칼릭스는 주방 문가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끼어들지 않았다. 다만 엘리제의 손끝과 베른의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 엘리제는 도마 위에 놓인 뿌리채소 하나를 집었다. "갈아도 됩니까?" 베른은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엘리제는 칼날을 조리대 옆 숫돌에 가져갔다. 슥. 슥. 소리가 주방을 채웠다. 그녀의 손은 빠르지 않았다. 대신 정확했다. 날이 살아나는 각도를 알고 있었다. 몇 번 문지른 뒤, 그녀는 채소를 도마 위에 올렸다. 칼이 내려갔다. 탁. 탁탁탁. 일정한 두께의 조각들이 줄지어 생겼다. 손목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의 관절만으로 채소를 밀어 넣었다. 칼끝은 도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주방의 웃음이 사라졌다. 베른의 눈이 변했다. 엘리제는 칼을 내려놓았다. "칼질은 합니다." 베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칼질만으로 셰프가 되는 건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공작 전하께서 왜 영애를 데려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작가 주방은 장난감이 아닙니다." "저도 장난칠 생각 없습니다." "그렇다면 증명하십시오." 엘리제는 고개를 들었다. 베른은 주방 전체가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내일 아침, 귀족 손님과 기사단을 포함해 50인의 조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50인분." "그 조식을 영애께서 총괄하십시오. 혼자." 마리가 있었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직 없었다. 견습들이 다시 수군거렸다. "혼자?" "말도 안 돼." "주방장님이 제대로 찍었네." 엘리제는 베른을 보았다. 도발이다. 하지만 불가능은 아니다. 혼자 요리한다는 건, 모든 과정을 혼자 손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스템을 설계하면 된다. 전생의 주방은 혼자 버티는 공간이 아니었다. 좋은 주방은 손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과정을 나눈다. 엘리제는 웃었다. "좋아요." 베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입니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주방의 모든 사람이 제 지시를 따를 것." 베른의 얼굴이 굳었다. "영애가 지시를?" "내일 아침까지요. 실패하면 제가 물러납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엘리제는 주방을 둘러보았다. "주방장님은 제 칼을 갈아주세요." 순간 주방이 조용해졌다. 베른의 입가가 굳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엘리제에게로 향했다. 베른은 낮게 웃었다. "건방지군요." "주방에서 건방짐은 접시로 처벌받으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엘리제는 그 손을 잡았다. 베른의 손은 굳은살이 박인, 주방장의 손이었다. 엘리제는 그 손을 잡는 순간 알았다. 이 남자는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오래된 방식 안에서 굳어버린 사람이다.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먼저 깨야 한다. *** 그날 밤, 엘리제는 공작가 주방을 뒤집었다. "채소는 크기별로 나눠요. 삶을 것, 구울 것, 장식할 것 따로." "계란은 깨지 말고 물에 담가두세요. 온도 맞춰야 합니다." "고기는 지금 손대지 마요. 내일 아침 바로 굽습니다." "빵은 두께 일정하게. 너무 얇으면 소스에 죽어요." 견습들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베른은 팔짱을 낀 채 지켜봤다. 그러나 엘리제의 지시는 이상할 만큼 구체적이었다. 아무 재료도 그냥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재료에 이유가 있었다. 어떤 것은 미리 삶고, 어떤 것은 물에 담가 향을 낮추고, 어떤 것은 차갑게 보관했다. 칼릭스는 문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엘리제는 사형장에서 막 살아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방 중앙에 선 순간, 그녀는 달라졌다. 말투도, 눈빛도, 호흡도. 그녀는 명령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명령은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공작님." 엘리제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칼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말해라." "거기 서 계시면 동선 막힙니다. 공작님도 주방 안에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어요." 주방 전체가 호흡을 붙들었다. 공작에게 동선 막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칼릭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견습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엘리제는 당연하다는 듯 다시 지시했다. "좋아요. 물 끓여요." 칼릭스는 자신이 물러났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았다.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선명했다. *** 문제는 손끝이었다. 낯선 몸으로 오래 칼을 잡은 탓인지, 엘리제의 손가락이 조금 굳어 있었다. 피곤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일 아침 조식은 그녀가 공작가 주방에서 살아남는 첫 관문이었다. 그녀는 허브 줄기를 다듬다가 손끝을 살짝 베었다. 작은 상처였다. 피 한 방울이 맺혔다. 엘리제는 익숙하게 손을 털고 천을 찾으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이 붙잡혔다. 칼릭스였다. "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주방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내 식사는 네 손에서 나온다." "그래서요?" "그 손이 다치면 곤란하다." 처음엔 이기적인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칼릭스는 정말로 그녀의 손끝을 보고 있었다. 미각 회복 도구를 확인하는 눈이라기엔 너무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하인에게 깨끗한 천을 가져오라 명했고, 직접 그녀의 손끝을 감쌌다. 엘리제는 당황했다. "공작님, 사람들 봅니다." "보라지." "공작님 체면은요?" "네 피보다 중요한가." 그 말에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손끝의 상처는 작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아픈 것 같았다. 아니, 아프다기보다 뜨거웠다. 칼릭스의 손은 차가웠는데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이 잦군." "셰프들은 원래 그럽니다." "그럼 믿지 않겠다." 엘리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작님." "말해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제가 꼭 걱정받는 사람 같잖아요." 칼릭스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가." "네." "그럼 그렇게 해석해도 된다." 엘리제의 심장이 순간 이상하게 뛰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천을 매듭짓기 전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 아침." "네." "손을 다치지 마라." "명령입니까?" "계약 유지 조건이다." "참 낭만 없네요." "낭만?" 그는 처음 듣는 조리법처럼 그 단어를 되뇌었다. 엘리제는 웃음을 삼켰다. "됐습니다.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알겠다."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엘리제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섰다. 손끝의 천이 거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천 때문에 손이 조금 덜 떨렸다. 베른은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 달랐다. 엘리제는 모른 척했다. 내일 아침, 50인분 조식. 이제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리고 주방장 베른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영애." "네?" "내일 실패하면, 이 주방은 다시 제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엘리제는 웃었다. "성공하면요?" 베른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는…… 칼을 갈아드리겠습니다." 엘리제는 손끝의 천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시작됐다.제국 북부의 거대한 설산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몰아치던 동토의 새벽바람이 마침내 잔인한 비명을 거두고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블레이크 공작성의 가장 높은 탑 위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자, 수십 년간 얼어붙어 있던 성벽의 성에들이 투명한 보석처럼 부서지며 눈부신 황금빛을 사방으로 반사해 내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황궁의 더러운 암투도, 마차 안과 귀빈실을 거쳐 이곳 공작가의 대침실까지 이어지던 파괴적이고도 농밀한 탐닉의 밤도 마침내 잿빛 안개 속으로 완전히 녹아내린,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운 아침이었다.그러나 오직 두 사람만의 숨소리와 맥박으로 가득 찬 공작의 대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듯, 낮고 진득한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순백의 예복 실크 조각들과 뜯겨 나간 은색 단추들, 지난밤의 격렬했던 신체적 마찰을 증명하듯 기괴하게 뒤틀린 채 젖어 있는 침대 시트, 그리고 공간을 가득 메운 짙은 샌달우드 향과 달콤한 무화과 향의 잔향이 뇌리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방 안의 밀도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으음…….”엘리제는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가녀린 신음을 입술 사이로 흘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뼈마디 하나하나를 타고 무겁게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단 한 순간의 유예도 없이 그녀의 살결을 탐닉해 들어왔던 칼릭스의 잔인한 소유욕이 남긴 흔적이었다. 전생의 강서진으로서 그 어떤 혹독한 주방의 노동과 폭군 같은 선배들의 압박도 버텨냈던 그녀였지만, 모든 감각을 회복한 북부의 괴물이 밤새도록 쏟아부은 원초적인 집착을 받아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파멸적인 피로였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려 하자마자,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한 악력이 다시금 들어왔다.“깨웠나.”낮고 진득하게 잠긴, 낮의 태양마저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서늘하고도 뜨거운 목소리가 엘리제의 뒷덜미를 거칠게 긁어내렸다.칼릭
수도에서 북부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밤의 질주가 마침내 끝을 고했다.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블레이크 공작성의 거대한 대문이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필들의 더운 숨결을 흩날리며 안뜰 정중앙에 멈춰 섰다. 북부의 한밤동을 지배하는 동토의 차가운 바람이 마차 외벽을 사정없이 때려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 서늘한 냉기조차 마차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지독하고 끈적한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달각.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칼릭스는 무릎 위에 늘어져 있던 엘리제를 단 한 순간도 바닥에 디디게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두꺼운 모피 망토로 그녀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아침에 드레스룸에서 그토록 정성스럽게 채웠던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이미 마차 안에서 벌어진 난폭한 탐닉으로 인해 단추가 전부 뜯겨 나가고 옷깃이 처참하게 찢어진 상태였다. 다른 하녀들이나 성 안의 기사들에게 아내의 노출된 살결과 자신이 새겨놓은 붉은 낙인들을 단 한 자락도 보이지 않겠다는 괴물의 철저한 구속이자 독점욕이었다.“공작 전하를 뵙습니…….”성 문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과 하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칼릭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본관의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와 제압감은 전장으로 향하는 총사령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서슬 퍼런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두 팔을 감아쥔 채, 모피 망토 안쪽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골랐다. 셔츠 자락 틈새로 느껴지는 그의 우람한 가슴팍 근육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맥박치고 있었다.복도를 지나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허락된 성의 가장 깊숙한 안동, 공작의 대침실 문이 열렸다. 칼릭스는 발끝으로 문을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닫아걸었다.쿵! 철컥.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히고 묵직한 금속 걸쇠가 완전히 잠기는 순간, 엘리제는 비로소 자신들이
황제와의 숨이 막힐 듯한 공식 오찬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황궁 안동의 깊숙하고 창백한 대리석 통로를 지나 마침내 블레이크 공작가의 대형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장내를 압박하던 화려하고 가식적인 금빛 세계는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마차 내부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호흡할 수 있는 지독하리만치 은밀하고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마차 바퀴가 수도의 거친 돌길을 짓이기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둔탁한 소음이 정적을 흔들었으나, 그 소음마저 마차 안을 가득 채운 칼릭스의 파괴적인 살기와 소유욕 앞에서는 한 자락의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다.철컥, 철컥.마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육중한 차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칼릭스는 엘리제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채 그녀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그는 오찬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황제가 엘리제에게 호의 어린 손을 내밀며 “조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던 그 찰나의 순간부터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제복 상의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은 평소의 침착함을 완전히 잃은 채, 폭주하는 마법 엔진처럼 거칠고 폭력적으로 맥박치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박동이 엘리제의 둔부를 통해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칼릭스…… 하아,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요.”엘리제가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그녀가 입은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드레스는 목끝까지 촘촘하게 은색 단추가 채워져 있어 레이스가 턱밑까지 감싸 안고 있었지만, 남자의 거친 호흡이 깃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맨살 위로 소름 끼치는 열기가 전해졌다. 목을 죄어오는 굵은 은색 사슬과 핏빛 루비 초커가 그의 악력에 들려 올라가며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가락이 초커의 날카로운 테두리를 따라 피부를 파고들 듯 강하게 짓눌렀다.“황제의 눈빛이 네 쇄골 라인이 시작되는 그 깃 끝에 머물렀다.”칼릭스의
황궁의 정오를 알리는 거대한 청동 종소리가 제국의 심장부를 무겁게 울렸다.블레이크 공작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열린 황실 안동의 귀빈 대기실은 대연회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순금 문양의 휘장들과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백색의 불빛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고, 바닥에 깔린 붉은 벨벳 카펫은 발소리 하나조차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은밀한 정적을 자아내고 있었다.“공작부인 전하, 예복의 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황실 최고위 하녀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리제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칼릭스가 직접 골라 입힌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레이스가 목끝까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단 한 치의 살결도 밖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완벽한 폐쇄성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과 유려하게 떨어지는 골반의 곡선을 노골적으로 부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을 옥죄듯 감싸 안은 블레이크 가문의 핏빛 루비 초커는, 그녀가 제국의 구원자이기 전에 오직 한 사내의 지독한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사슬과 같았다.엘리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단추를 목끝까지 채운 드레스는 주방의 화구 열기를 견디던 전생의 가운보다 훨씬 더 답답하게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 답답함의 진짜 원인은 옷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에서부터 마차, 그리고 이 황궁의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자신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쥔 채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의 파괴적인 독점욕 때문이었다.스윽.그때, 대기실 안쪽의 대리석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황실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국의 검이자 북부의 지배자다운 오만한 아우라가 공간을 단숨에 압도하자, 황실 하녀들은 공작의 서슬 퍼런 기운에 질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칼릭스의 투명하면서도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엘리제에게로 향했
황궁 귀빈실의 높은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가늘고 길게 조각되어 쏟아졌다.수도 위를 수놓은 창백한 새벽안개가 황금빛 태양에 녹아내리는 시간이었지만, 두꺼운 암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어둡고 진득한 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순백의 실크 드레스 자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공작의 제복 훈장들, 그리고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의 매캐한 잔향이 방 안의 밀도를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으음…….”엘리제는 얕은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마디마디를 타고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던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온전한 감각을 되찾은 괴물이 십수 년의 굶주림을 보상받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탐닉해 온 결과물은 엘리제의 하얀 피부 위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뒤틀자마자, 허리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더 누워 있어라.”낮고 잠긴, 짐승의 르누아르 같은 목소리가 엘리제의 귓가를 긁어내렸다.칼릭스는 언제나처럼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 야성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실크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와 흉판에는 엘리제가 쾌감에 겨워 가늘게 긁어내린 손톱자락 자국이 붉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거울처럼 투명해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직 엘리제 한 사람만을 담은 채 기묘한 포만감과, 여전히 가시지 않은 지독한 독점욕으로 일렁였다.“칼릭스, 날이 벌써 다 밝았어요. 황실 시종들이나 하녀들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 팔 좀 놓아주세요.”엘리제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올렸으나, 칼릭스는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붙잡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검은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 지문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손
황궁의 온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은 두 사람의 엉킨 그림자를 은밀하게 비추고 있었다.온실 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장미 향은 엘리제의 가쁜 숨결과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차가운 대리석 돌벽에 등이 밀착된 엘리제는 전면에서 저돌적으로 밀려드는 칼릭스의 거대한 신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칼릭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조리대 벽 위로 거칠게 잡아 내리누른 채, 마치 사냥감을 온전히 가두어둔 맹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칼릭스…… 하아, 사람들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요. 제발 이 손 좀……”엘리제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려 했으나, 칼릭스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열망은 이미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숙이 숙여, 엘리제의 새하얀 목덜미와 핏빛 루비 초커가 닿아 있는 그 예민한 경계선을 사정없이 입술로 핥아 내렸다. 쪽, 소리와 함께 질척한 점막의 마찰음이 온실의 정적을 집요하게 깨부수었다.“흐읏……! 아, 칼릭스……!”엘리제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거칠게 살을 파고드는 남자의 맨손 악력과,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구는 배덕감이 그녀의 척추 뼈마디를 타고 뇌수까지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모든 미각과 감각을 회복한 칼릭스에게 엘리제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맛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원색을 뛰어넘어, 자신의 피와 살을 통째로 지배하는 지독한 마약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칼릭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엘리제의 붉게 퉁퉁 부어오른 입술 점막을 강하게 비벼대며, 가쁜 숨을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했을 텐데, 엘리제. 세상이 선명해질수록 내 식욕은 너 하나만을 향해 폭주한다고. 저 연회장에 서 있는 천박한 놈들이 네 어깨와 등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제국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뇌리를 긁어내렸다. 칼릭스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엘리제의 허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