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엘리제는 살아남았다.
문제는 그 사실이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형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녀는 블레이크 공작가의 검은 마차에 실렸다. 손목의 쇠사슬은 풀렸지만, 문밖에는 공작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창문은 작고 두꺼웠으며, 마차 안의 공기는 가죽과 차가운 금속 냄새로 가득했다. 맞은편에는 칼릭스 블레이크가 앉아 있었다. 그는 방금 사람의 처형을 멈춘 사람답지 않게 고요했다. 접시 위에서 처음 맛을 느낀 사람답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제를 보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 시선이 불편했다. 먹는 사람의 시선은 익숙했다. 평가하는 시선, 기대하는 시선, 실망하는 시선. 전생의 강서진은 그런 시선들 위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칼릭스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음식이 아니라, 음식을 만든 사람의 구조를 읽으려는 것처럼 보았다. "공작님." "말해라." "제 얼굴에 소스라도 묻었습니까?" "아니." "그런데 왜 계속 보십니까?" 칼릭스는 대답하기 전 잠시 침묵했다. "확인 중이다." "무엇을요?" "네가 방금 한 일이 우연인지." 엘리제는 헛웃음을 삼켰다. "우연히 고기를 익히고, 우연히 공작님의 미각을 깨웠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능성은 있다." "그 가능성, 아주 맛없네요." 칼릭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넌 모든 것을 맛으로 말하는군." "셰프니까요." "그럼 내 상태도 맛으로 설명할 수 있나." 엘리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방금 주방에서 생긴 아주 작은 균열이 남아 있었다. "공작님은 오래 식은 접시 같습니다." 마차 안이 조용해졌다. 기사들이 밖에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칼릭스는 낮게 물었다. "식은 접시?" "한때 뜨거운 것이 담겼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접시요. 문제는 본인이 비어 있다는 것도 오래 잊고 사신 것 같다는 점이고요." "무례하군." "정확한 맛평입니다." 칼릭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계속해라." 엘리제는 조금 놀랐다. 보통 귀족이라면 모욕이라며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칼릭스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미각 상실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공작님은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감정도 같이 눌려 있어요. 좋은 음식은 단순히 혀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 몸 전체에 반응을 줍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그 반응이 끊긴 사람처럼 보여요." 칼릭스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아주 조금 굳었다. "넌 의관인가." "셰프입니다." "그런데 의관보다 더 불쾌한 말을 하는군." "불쾌함을 느끼셨다면 좋은 신호입니다." "불쾌함이 좋은가?" "무감각보다는요." 칼릭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차가 흔들렸다. 엘리제는 균형을 잡으려다 좌석 손잡이를 붙들었다. 손목에 남은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칼릭스가 포크를 든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순간. 차갑고 단단한 손. 죽음 앞에서 이상할 만큼 선명했던 감촉. 엘리제는 괜히 손목을 문질렀다. 칼릭스의 시선이 그곳으로 내려갔다. "아픈가." "아닙니다." "거짓말." 엘리제가 멈칫했다. "뭘 근거로요?" "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 감정은 모르지만 관찰은 지나치게 잘한다. *** 블레이크 공작가의 임시 집무실은 황궁 별채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처형이 유예된 악녀를 곧장 공작가로 데려가기엔 절차가 남아 있었다. 그 절차를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칼릭스는 엘리제를 자신의 임시 집무실에 앉혔다. 테이블 위에는 계약서가 놓였다. 엘리제는 양피지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계약서입니까?" "그렇다." "제가 아직 피의자라는 건 아시죠?" "그래서 계약한다." "보통은 조사부터 하지 않나요?" 칼릭스는 펜을 들었다. "조사는 한다. 하지만 네가 죽으면 조사도, 내 미각도 끝이다." "제 생존 가치가 드디어 올라갔군요." "너는 내 미각을 깨웠다." 칼릭스는 그 사실을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내 곁에 둔다." 엘리제는 양피지를 끌어당겼다. "그 표현은 좀 위험합니다." "왜지." "사람을 물건처럼 두겠다는 말 같아서요."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지." "계약 관계라고 하세요." "좋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고쳤다. "그럼 너는 내 계약자다." 엘리제는 잠시 그를 보았다. 묘하게 이상한 남자였다. 위압적이고 차갑고, 분명 위험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엘리제는 펜을 집었다. "조건은 제가 먼저 적겠습니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라." 엘리제는 양피지 위에 또박또박 적었다. "첫째, 사형 유예가 아니라 정식 신변 보장.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저를 감금하거나 고문하지 않을 것." 칼릭스는 말했다. "허락한다." "둘째, 공작가 주방 내 조리 권한. 제가 맡은 음식은 제 방식으로 합니다." "허락한다." "셋째, 식재료 예산 제한 없음." 칼릭스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제한 없음?" "미각 회복을 원하시면 투자하셔야죠." "허락한다." 엘리제는 살짝 놀랐다. "정말요?" "북부 전선 보급보다 비싸지만 않으면 된다." "그 정도까진 안 할 겁니다. 아마도." "아마도?" "셰프에게 재료비는 늘 상대적인 개념이라서요." 칼릭스는 이해한 듯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다시 적었다. "넷째, 독살 혐의 조사 과정에서 제 진술권과 방어권 보장." "허락한다." "다섯째, 제가 만든 요리를 멋대로 독이라 부르지 않을 것." 칼릭스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건 감정적인 조항이군." "중요합니다." "허락한다." 엘리제는 펜을 내려놓았다. "좋아요. 이제 공작님 조건은요?" 칼릭스는 양피지를 돌려받았다. 그는 아주 단정한 글씨로 적었다. "첫째, 엘리제 폰 라벤느는 칼릭스 블레이크의 미각 회복을 위해 매일 최소 한 끼를 조리한다." "예상했습니다." "둘째, 조리와 시식 중 관찰되는 내 신체 반응을 기록한다." "의학 기록 비슷하네요. 좋습니다." "셋째, 독성이 의심되는 음식 검수 시 내 허가 없이 먼저 섭취하지 않는다." 엘리제의 손이 멈췄다. "잠깐만요. 그건 왜 들어갑니까?" "네가 방금 먼저 먹었다." "그건 목숨을 건 증명이었고요." "다시 하지 마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면요?" 칼릭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다른 방법을 찾는다." 엘리제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 조항은 이상하게 불편했다. 그녀는 전생에서 늘 자신의 몸으로 증명했다. 잠을 줄이고, 손목을 갈아 넣고, 혀를 혹사했다. 완벽한 접시를 위해 자신을 도구처럼 썼다. 그런데 이 남자는 첫 계약부터 그것을 막았다. "공작님." "말해라." "제 몸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미각 회복 도구가 망가질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칼릭스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 "모르겠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먼저 먹겠다고 했을 때 불쾌했다." 엘리제는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사랑도, 걱정도 아닌 낯선 거부감. 하지만 칼릭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변화였다.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넷째." 엘리제는 경계했다. "또 뭡니까?" 칼릭스는 양피지 위에 천천히 썼다. "하루 한 끼는 네가 직접 내 앞에서 시식한다." 엘리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독살범이라 의심해서요?" "아니." "그럼 뭔데요?" 칼릭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먼저 먹고, 그다음 내가 먹었을 때 맛이 더 선명했다." 엘리제는 한순간 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건 기분 탓입니다." "나는 십수 년 동안 기분이라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생긴 기분이 착각일 수도 있죠." "그럼 착각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저더러 매일 앞에서 먹으라고요?" "그렇다." 엘리제는 이마를 짚었다. "공작님, 이건 요리사 계약입니까, 시종 계약입니까?" "미각 계약이다." "그런 단어는 처음 듣습니다." "지금 만들었다." 너무 진지해서 반박하기가 더 힘들었다. 엘리제는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하루 한 끼 직접 시식. 식사 중 신체 반응 기록. 독 검수 시 허가 없이 선섭취 금지. 이 계약은 단순한 고용계약이 아니었다. 식사와 감각, 생존과 신체 거리가 묶인 이상한 계약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이 남자와 매일 식탁을 마주해야 한다. '위험한데.' 그 위험이 단지 목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엘리제는 더 불편했다. 칼릭스가 물었다. "거절하나?" 엘리제는 계약서를 보았다. 거절하면? 다시 단두대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 "아니요." "그럼 서명해라." "대신 하나 추가합니다." "말해라." 엘리제는 마지막 조항 아래에 적었다. "칼릭스 블레이크 공작은 엘리제 폰 라벤느의 조리 방식을 무시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것." 칼릭스가 물었다. "내 성에서도?" "제 주방에서는요." "내 성의 주방이다." 엘리제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제가 요리하는 순간부터 제 주방입니다." 조용해졌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깊어졌다. 그는 한참 그녀를 보았다. "좋다." 그리고 서명했다. 칼릭스 블레이크. 엘리제도 서명했다. 엘리제 폰 라벤느. 그 이름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이름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계약서가 완성되자 칼릭스가 말했다. "첫 식사는 오늘 밤이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오늘 밤요?" "네가 직접 시식한다." "공작님, 저는 방금 사형장에서 살아나왔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식사로 한다." "문제는 식사의 무게가 아니라 제 정신 상태인데요." 칼릭스는 그녀를 보았다. "배고프지 않나." 그 질문에 엘리제는 멈췄다. 사형장, 낡은 주방, 계약서. 그 모든 것을 지나고 나니, 갑자기 속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배고팠다. 아주 선명하게. 칼릭스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말했다. "그럼 먹어라." "제가요?" "네가 먹어야 내가 확인한다." 엘리제는 작게 웃었다. "공작님, 정말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을 먹이시네요." "그런가." "네." 그녀는 계약서를 접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습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나쁘지 않다." 그는 그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마치 처음 맛본 단어처럼. 엘리제는 이상하게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문밖에서 기사가 말했다. "전하. 공작가로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칼릭스가 일어났다. "가자." 엘리제도 일어났다. 사형수에서 계약 셰프로. 악녀에서 공작의 미각을 깨운 여자. 그 변화가 너무 빨라 현실감이 없었다. 문 앞에서 칼릭스가 멈췄다. 그는 엘리제를 돌아보았다. "엘리제." "네." "도망치지 마라." 그 말은 위협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이상하게 달랐다. "네가 도망치면, 오늘 느낀 맛이 사라질 것 같다." 엘리제는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그건 미각 회복 문제입니다." "그럴지도." 칼릭스는 문을 열었다. "그러니 확인하겠다." 그렇게 엘리제는 블레이크 공작가로 향했다. 계약서는 품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사형 집행문보다 더 무거웠다.제국 북부의 거대한 설산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몰아치던 동토의 새벽바람이 마침내 잔인한 비명을 거두고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블레이크 공작성의 가장 높은 탑 위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자, 수십 년간 얼어붙어 있던 성벽의 성에들이 투명한 보석처럼 부서지며 눈부신 황금빛을 사방으로 반사해 내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황궁의 더러운 암투도, 마차 안과 귀빈실을 거쳐 이곳 공작가의 대침실까지 이어지던 파괴적이고도 농밀한 탐닉의 밤도 마침내 잿빛 안개 속으로 완전히 녹아내린,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운 아침이었다.그러나 오직 두 사람만의 숨소리와 맥박으로 가득 찬 공작의 대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듯, 낮고 진득한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순백의 예복 실크 조각들과 뜯겨 나간 은색 단추들, 지난밤의 격렬했던 신체적 마찰을 증명하듯 기괴하게 뒤틀린 채 젖어 있는 침대 시트, 그리고 공간을 가득 메운 짙은 샌달우드 향과 달콤한 무화과 향의 잔향이 뇌리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방 안의 밀도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으음…….”엘리제는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가녀린 신음을 입술 사이로 흘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뼈마디 하나하나를 타고 무겁게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단 한 순간의 유예도 없이 그녀의 살결을 탐닉해 들어왔던 칼릭스의 잔인한 소유욕이 남긴 흔적이었다. 전생의 강서진으로서 그 어떤 혹독한 주방의 노동과 폭군 같은 선배들의 압박도 버텨냈던 그녀였지만, 모든 감각을 회복한 북부의 괴물이 밤새도록 쏟아부은 원초적인 집착을 받아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파멸적인 피로였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려 하자마자,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한 악력이 다시금 들어왔다.“깨웠나.”낮고 진득하게 잠긴, 낮의 태양마저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서늘하고도 뜨거운 목소리가 엘리제의 뒷덜미를 거칠게 긁어내렸다.칼릭
수도에서 북부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밤의 질주가 마침내 끝을 고했다.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블레이크 공작성의 거대한 대문이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필들의 더운 숨결을 흩날리며 안뜰 정중앙에 멈춰 섰다. 북부의 한밤동을 지배하는 동토의 차가운 바람이 마차 외벽을 사정없이 때려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 서늘한 냉기조차 마차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지독하고 끈적한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달각.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칼릭스는 무릎 위에 늘어져 있던 엘리제를 단 한 순간도 바닥에 디디게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두꺼운 모피 망토로 그녀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아침에 드레스룸에서 그토록 정성스럽게 채웠던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이미 마차 안에서 벌어진 난폭한 탐닉으로 인해 단추가 전부 뜯겨 나가고 옷깃이 처참하게 찢어진 상태였다. 다른 하녀들이나 성 안의 기사들에게 아내의 노출된 살결과 자신이 새겨놓은 붉은 낙인들을 단 한 자락도 보이지 않겠다는 괴물의 철저한 구속이자 독점욕이었다.“공작 전하를 뵙습니…….”성 문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과 하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칼릭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본관의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와 제압감은 전장으로 향하는 총사령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서슬 퍼런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두 팔을 감아쥔 채, 모피 망토 안쪽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골랐다. 셔츠 자락 틈새로 느껴지는 그의 우람한 가슴팍 근육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맥박치고 있었다.복도를 지나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허락된 성의 가장 깊숙한 안동, 공작의 대침실 문이 열렸다. 칼릭스는 발끝으로 문을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닫아걸었다.쿵! 철컥.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히고 묵직한 금속 걸쇠가 완전히 잠기는 순간, 엘리제는 비로소 자신들이
황제와의 숨이 막힐 듯한 공식 오찬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황궁 안동의 깊숙하고 창백한 대리석 통로를 지나 마침내 블레이크 공작가의 대형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장내를 압박하던 화려하고 가식적인 금빛 세계는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마차 내부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호흡할 수 있는 지독하리만치 은밀하고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마차 바퀴가 수도의 거친 돌길을 짓이기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둔탁한 소음이 정적을 흔들었으나, 그 소음마저 마차 안을 가득 채운 칼릭스의 파괴적인 살기와 소유욕 앞에서는 한 자락의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다.철컥, 철컥.마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육중한 차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칼릭스는 엘리제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채 그녀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그는 오찬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황제가 엘리제에게 호의 어린 손을 내밀며 “조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던 그 찰나의 순간부터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제복 상의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은 평소의 침착함을 완전히 잃은 채, 폭주하는 마법 엔진처럼 거칠고 폭력적으로 맥박치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박동이 엘리제의 둔부를 통해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칼릭스…… 하아,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요.”엘리제가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그녀가 입은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드레스는 목끝까지 촘촘하게 은색 단추가 채워져 있어 레이스가 턱밑까지 감싸 안고 있었지만, 남자의 거친 호흡이 깃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맨살 위로 소름 끼치는 열기가 전해졌다. 목을 죄어오는 굵은 은색 사슬과 핏빛 루비 초커가 그의 악력에 들려 올라가며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가락이 초커의 날카로운 테두리를 따라 피부를 파고들 듯 강하게 짓눌렀다.“황제의 눈빛이 네 쇄골 라인이 시작되는 그 깃 끝에 머물렀다.”칼릭스의
황궁의 정오를 알리는 거대한 청동 종소리가 제국의 심장부를 무겁게 울렸다.블레이크 공작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열린 황실 안동의 귀빈 대기실은 대연회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순금 문양의 휘장들과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백색의 불빛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고, 바닥에 깔린 붉은 벨벳 카펫은 발소리 하나조차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은밀한 정적을 자아내고 있었다.“공작부인 전하, 예복의 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황실 최고위 하녀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리제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칼릭스가 직접 골라 입힌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레이스가 목끝까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단 한 치의 살결도 밖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완벽한 폐쇄성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과 유려하게 떨어지는 골반의 곡선을 노골적으로 부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을 옥죄듯 감싸 안은 블레이크 가문의 핏빛 루비 초커는, 그녀가 제국의 구원자이기 전에 오직 한 사내의 지독한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사슬과 같았다.엘리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단추를 목끝까지 채운 드레스는 주방의 화구 열기를 견디던 전생의 가운보다 훨씬 더 답답하게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 답답함의 진짜 원인은 옷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에서부터 마차, 그리고 이 황궁의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자신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쥔 채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의 파괴적인 독점욕 때문이었다.스윽.그때, 대기실 안쪽의 대리석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황실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국의 검이자 북부의 지배자다운 오만한 아우라가 공간을 단숨에 압도하자, 황실 하녀들은 공작의 서슬 퍼런 기운에 질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칼릭스의 투명하면서도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엘리제에게로 향했
황궁 귀빈실의 높은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가늘고 길게 조각되어 쏟아졌다.수도 위를 수놓은 창백한 새벽안개가 황금빛 태양에 녹아내리는 시간이었지만, 두꺼운 암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어둡고 진득한 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순백의 실크 드레스 자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공작의 제복 훈장들, 그리고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의 매캐한 잔향이 방 안의 밀도를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으음…….”엘리제는 얕은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마디마디를 타고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던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온전한 감각을 되찾은 괴물이 십수 년의 굶주림을 보상받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탐닉해 온 결과물은 엘리제의 하얀 피부 위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뒤틀자마자, 허리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더 누워 있어라.”낮고 잠긴, 짐승의 르누아르 같은 목소리가 엘리제의 귓가를 긁어내렸다.칼릭스는 언제나처럼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 야성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실크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와 흉판에는 엘리제가 쾌감에 겨워 가늘게 긁어내린 손톱자락 자국이 붉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거울처럼 투명해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직 엘리제 한 사람만을 담은 채 기묘한 포만감과, 여전히 가시지 않은 지독한 독점욕으로 일렁였다.“칼릭스, 날이 벌써 다 밝았어요. 황실 시종들이나 하녀들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 팔 좀 놓아주세요.”엘리제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올렸으나, 칼릭스는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붙잡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검은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 지문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손
황궁의 온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은 두 사람의 엉킨 그림자를 은밀하게 비추고 있었다.온실 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장미 향은 엘리제의 가쁜 숨결과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차가운 대리석 돌벽에 등이 밀착된 엘리제는 전면에서 저돌적으로 밀려드는 칼릭스의 거대한 신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칼릭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조리대 벽 위로 거칠게 잡아 내리누른 채, 마치 사냥감을 온전히 가두어둔 맹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칼릭스…… 하아, 사람들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요. 제발 이 손 좀……”엘리제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려 했으나, 칼릭스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열망은 이미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숙이 숙여, 엘리제의 새하얀 목덜미와 핏빛 루비 초커가 닿아 있는 그 예민한 경계선을 사정없이 입술로 핥아 내렸다. 쪽, 소리와 함께 질척한 점막의 마찰음이 온실의 정적을 집요하게 깨부수었다.“흐읏……! 아, 칼릭스……!”엘리제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거칠게 살을 파고드는 남자의 맨손 악력과,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구는 배덕감이 그녀의 척추 뼈마디를 타고 뇌수까지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모든 미각과 감각을 회복한 칼릭스에게 엘리제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맛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원색을 뛰어넘어, 자신의 피와 살을 통째로 지배하는 지독한 마약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칼릭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엘리제의 붉게 퉁퉁 부어오른 입술 점막을 강하게 비벼대며, 가쁜 숨을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했을 텐데, 엘리제. 세상이 선명해질수록 내 식욕은 너 하나만을 향해 폭주한다고. 저 연회장에 서 있는 천박한 놈들이 네 어깨와 등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제국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뇌리를 긁어내렸다. 칼릭스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엘리제의 허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