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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로 잡혀왔는데 가주님이 자꾸 목덜미를 뭅니다.
담보로 잡혀왔는데 가주님이 자꾸 목덜미를 뭅니다.
작가: 칼퇴크루

제1화 — 사람값

작가: 칼퇴크루
last update 게시일: 2026-09-30 15:39:33

# 제1화 — 사람값

빚 문서.

내 손에 든 종이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사천이백만 원.

아버지가 남긴 셈이다.

그 옆에 작은 글씨로 한 줄 더 붙어 있다.

사람값으로 환산함.

이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이 차 안에 나뿐일 것이다.

차창 밖으로 어두운 목재 담장이 끝없이 흘러간다.

겨울 초입의 정원은 색을 다 죽인 채로 검다.

그 너머에서 밤 냄새 같은 게 밀려온다.

풀도 흙도 아니다.

짐승의 냄새다.

나는 본 적도 없는 그 냄새를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

그냥 등 뒤가 곤두선다.

차가 멈춘다.

운전석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내려. 인계."

나는 가방을 끌어안는다.

짐은 거의 없다.

옷 몇 벌, 아버지가 남긴 낡은 함 하나.

그리고 머릿속에 외워 온 문장들.

별채 1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별채 7번.

먼저 말하지 않는다.

별채 11번.

냄새를 죽인다.

표구 공방에서 같이 일하던 언니가 종이에 적어 줬다.

그 언니도 누군가에게 끌려갔던 적이 있다고 했다.

짐승의 집에 들어갈 거면 이걸 외워, 라고.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묻는 사람부터 사라진다고 했으니까.

본저 정문이 열린다.

* * *

천장이 높다.

사람이 살라고 지은 집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두려고 지은 집 같다.

검은 목재 기둥이 사람 키의 세 배쯤 솟아 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통지서를 받아 든다.

> 연대 담보 인계 통지 — 율성 자산관리.

>

> 채무자 한정수, 소재 불명.

>

> 연대 담보 한세아.

>

> 환산 사람값, 노동 예속.

>

> 기한, 익년 봄.

읽는 남자는 표정이 없다.

종이를 한 번 훑고, 나를 한 번 훑는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들여온 물건을 검수하는 눈이다.

나는 시선을 발끝으로 내린다.

별채 1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별채는 안쪽이야. 따라와."

따라간다.

복도가 길다.

벽에는 낡은 서화가 걸려 있다.

한 점은 귀퉁이가 찢어진 채로 그대로다.

손이 근질거린다.

저건 뒷배접만 새로 대면 살릴 수 있는데.

종이가 산 거라 누렇게 떴다.

그러니 약풀을 묽게 쑤고.

종이 올을 거스르지 않게 한 방향으로만 쓸어 펴면.

공방에서 삼 년을 그 일만 했다.

찢긴 걸 잇고, 바랜 걸 살리고, 사라질 뻔한 걸 붙잡아 두는 일.

손끝이 기억하는 일이다.

나는 곧 그 생각을 접는다.

그건 내 셈에 없는 일이다.

나는 갚으러 왔지, 고치러 온 게 아니다.

저 그림은 저 집의 것이고, 내 손은 내 빚의 것이다.

기한까지만 버티면 된다.

숨만 죽이고.

봄까지.

복도가 꺾이는 자리에서, 앞서가던 남자가 멈춘다.

멈춘 게 아니다.

굳었다.

등이 곧게 펴지더니 한쪽 무릎이 살짝 꺾인다.

누군가에게 절을 하려다 만 자세다.

"가주님."

그 단어에 공기가 바뀐다.

복도 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온다.

키가 크다.

내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얼굴이 있다.

검은 짧은 머리, 검은 옷,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는 얼굴.

걷는 소리가 거의 없다.

사람이 그렇게 조용히 걸으면 안 되는데.

별채 1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더 숙인다.

신발코를 본다.

그의 신발이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와 멈춘다.

가깝다.

너무 가깝다.

숨을 멈춘다.

냄새를 죽여야 한다.

별채 11번.

향도, 음식도, 감정도.

나는 어릴 때부터 이걸 잘했다.

아버지가 가르쳤다.

눈에 띄지 마.

냄새도 내지 마.

그게 우리 식구가 사는 법이라고.

그래서 나는 폐에 든 공기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둔다.

심장 소리까지 줄일 수 있다면 줄이고 싶다.

그런데 그가 허리를 숙인다.

내 어깨 옆으로, 목 쪽으로.

코끝이 내 목덜미 가까이에서 멈춘다.

닿지는 않는다.

그런데 닿은 것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의 숨이 내 목 뒤 잔머리를 흔든다.

들이쉬는 숨.

길게.

냄새를 맡고 있다.

나는 숨을 더 깊이 가둔다.

더, 더.

냄새를 없애려고.

그러자 그가 잠깐 멈춘다.

그리고 다시 들이쉰다.

아까보다 더 길게.

이상하다.

내가 숨을 죽일수록 그가 더 또렷이 읽는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덮으려 할수록.

덮으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코에 박히는 것처럼.

"……익었네."

낮은 목소리다.

혼잣말에 가깝다.

나는 그 단어를 모른다.

익었다.

과일에나 쓰는 말 아닌가.

매뉴얼 어디에도 이 단어는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든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이 내 시야 위쪽으로 들어온다.

보면 안 되는데, 본다.

눈을 마주친다.

별채 1번 위반.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다.

사람 눈은 둥글다.

그의 눈동자는, 가운데가 세로로 좁아져 있다.

빛 속에서 가늘게 찢긴 금빛 선.

짐승의 눈이다.

그리고 그가 입을 살짝 벌리는 순간, 윗니 자리에서 무언가가 자란다.

송곳니다.

사람의 것보다 길고, 끝이 뾰족하다.

자라는 게 보인다.

도망쳐.

머리 어딘가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다리가 안 움직인다.

도망치면 빚이 부른다.

보증인이 없으니 빚은 어디로 가지.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은.

지금은.

"내 짝이다."

그가 말한다.

* * *

내 짝이다.

문장은 짧은데 뜻이 안 들어온다.

짝.

양말 한 짝, 신발 한 짝.

짝이 맞는다.

그런 말.

그런데 그가 그 단어를 쓰는 방식은 그게 아니다.

그는 그 단어를 입에 넣고 한 번 굴린 다음에 뱉었다.

셈을 끝낸 사람처럼.

매뉴얼을 떠올린다.

들켰을 때.

별채 17번.

웃는다.

죄송합니다.

동요 없이.

나는 입꼬리를 만든다.

떨린다.

그래도 만든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목소리가 작게 나온다.

그래도 끝까지 뱉는다.

"저는 그냥 빚입니다. 채무자 한정수, 연대 담보 한세아. 사람값으로 환산된 담보예요. 기한은 봄까지고요. 더 드릴 건 없어요."

그가 나를 본다.

세로로 좁아진 눈동자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읽는다.

표정은 여전히 없다.

그런데 그 무표정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불쾌함 같기도 하고, 호기심 같기도 한 것.

그가 천천히 묻는다.

"왜."

질문이 그게 끝이다.

왜.

무엇이 왜인지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답해야 할지 모른다.

"……뭐가요."

"네 목덜미."

그가 자기 코를 가리키듯 턱을 든다.

"짝 냄새가 나. 익은 냄새. 그건 평생 한 명한테만 나는 냄새야. 거짓말을 못 하는 냄새다."

그의 목소리에 쉼표가 없다.

칼처럼 끊어진다.

"근데."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다시 허리를 숙인다.

이번엔 내 목이 아니라 내 손목 쪽이다.

가방을 쥔 내 손.

손등에는 겨울마다 트는 자국이 있다.

풀과 종이를 만지느라 거칠어진 마디도 있다.

그가 그 손을 본다.

그리고 다시 냄새를 맡는다.

"사람 냄새는 빚이네."

낮게.

거의 웃음 같은 숨이 섞인다.

"왜."

* * *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할 말이 없다.

짝 냄새가 뭔지 모른다.

익었다는 게 뭔지 모른다.

내 목덜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나는 평생 맡아 본 적이 없다.

나는 나한테서 아무 냄새도 안 나게 하려고 평생을 살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눈에 띄지 마.

냄새도 내지 마.

그런데 이 짐승은 내가 죽인 냄새 아래에서 죽이지 못한 무언가를 맡았다.

심장이 뛴다.

빠르게.

매뉴얼에는 심장을 줄이는 법까지는 없다.

그가 그 소리도 들었을까.

들었을 것이다.

사람보다 모든 게 또렷한 짐승이니까.

나는 손가락을 가방끈에 더 깊이 건다.

셈을 한다.

빚 사천이백.

기한 봄.

나는 노동으로 갚는다.

그러면 사라진다.

그게 전부다.

셈을 하면 무서운 게 조금 덜 무섭다.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그가 몸을 편다.

어느새 송곳니가 들어가 있다.

눈동자도 다시 둥글어졌다.

방금 본 게 헛것이었나 싶을 만큼.

다시 무표정한 남자가 거기 서 있다.

키가 크고, 조용하고, 사람을 들여온 물건처럼 보는 남자.

그가 절을 하다 만 자세로 굳어 있던 인계 남자에게 시선을 옮긴다.

"별채 말고."

남자가 고개를 든다.

당황한 얼굴이다.

"예?"

"이건 본저에 둬."

그가 나를 턱으로 가리킨다.

"내 눈 닿는 데."

"가주님, 담보는 규정상 별채에…"

"내가 둔다고 했어."

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냥 끊는다.

그게 더 무섭다.

그리고 그가 돌아선다.

걸어온 만큼 조용히 멀어진다.

복도 끝에서 사라지기 직전, 한 번 고개를 돌린다.

어깨 너머로.

나를 본다.

"내일도 와. 그 목덜미 가지고."

그가 사라진다.

* * *

복도가 다시 길어진다.

인계 남자가 한숨을 쉰다.

작게, 누가 들을까 봐.

그리고 나를 데려간다.

별채가 아니라 본저 안쪽 어딘가의 방으로.

가는 내내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를 보는 눈이 아까와 다르다.

검수하는 눈이 아니다.

거리를 두는 눈이다.

위험한 물건을 옮기는 사람의 눈.

방은 좁다.

창이 하나 있고 침구가 있다.

별채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채에 가고 싶었다.

별채는 숨을 데가 있다.

눈에 안 띌 데가.

본저는, 가주가 사는 집은, 숨을 데가 없다.

가주의 눈 닿는 데에 두라고 했으니까.

그건 내 셈에서 가장 나쁜 경우다.

보이지 않게 갚고 사라지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였다.

문이 닫힌다.

밖에서.

잠기는 소리는 안 난다.

잠글 필요가 없는 거겠지.

도망치면 빚이 부르니까.

율가의 비밀을 본 담보가 살아 나간 적이 없다고.

종이를 적어 준 언니가 그랬으니까.

나는 오늘 송곳니가 자라는 걸 봤다.

사람 아닌 눈동자를 봤다.

본 이상, 이제 나는 그냥 갚고 사라질 수 있는 담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는다.

손이 떨려서 두 번 만에 끈을 푼다.

안에서 아버지의 함을 꺼내 무릎에 올린다.

낡은 나무함.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

절대 남한테 주지 말라던 것.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는 끝까지 열어 보여 주지 않았다.

다만 이걸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만 했다.

나는 그걸 끌어안고 벽에 등을 댄다.

그리고 셈을 한다.

빚은 사천이백.

기한은 봄.

나는 노동으로 갚는다.

눈에 안 띈다.

냄새를 죽인다.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봄에는 끝난다.

끝나면 나는 사라진다.

아무도 나를 못 찾는 곳으로.

그게 내 계획의 전부고, 이 계획에는 변수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계획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나는 손등의 거친 자국을 만진다.

그가 봤던 손.

목덜미에 손을 가져간다.

그가 냄새를 맡았던 자리.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자국도, 표시도 없다.

나는 그냥 나다.

빚으로 잡혀 온 담보, 사람값으로 환산된 숫자.

그런데 그 짐승은 거기서 무언가를 맡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짝.

나는 그 단어를 입속으로만 굴려 본다.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모른다.

모르는데, 무섭다.

짝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조차 모르겠어서.

담보 매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외운다.

별채 1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오늘 어겼다.

별채 7번.

먼저 말하지 않는다.

오늘은 지켰다.

별채 11번.

냄새를 죽인다.

죽였다.

죽였는데, 그가 맡았다.

별채 17번.

들켰을 때 웃는다.

죄송합니다.

동요 없이.

오늘 웃었다.

떨면서.

매뉴얼을 다 외워도 답이 안 나온다.

매뉴얼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주인이 나를 물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나는 함을 더 세게 끌어안는다.

창밖에서 짐승의 냄새가 다시 밀려온다.

검은 정원, 검은 밤, 그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깨어 있는 냄새.

그게 그의 냄새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아니면 내 안에 있는, 내가 평생 죽이려 했던 무언가의 냄새인지.

내일도 와, 라고 그가 말했다.

그 목덜미 가지고.

봄까지.

봄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런데 봄은, 너무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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