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첫눈은 CF 촬영 현장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겨울 한정 화장품 광고였다. 인공 눈을 준비해 두었던 스태프들은 때맞춰 내리는 진짜 눈에 환호성을 질렀다. 새하얀 코트를 입은 지희가 조명 아래에 섰다. 한 달 가까이 통증 없이 지내 온 터라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하나, 둘, 셋— 액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조명이 부드럽게 얼굴을 비추고 눈송이 하나가 속눈썹 위에 내려앉는 순간,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아랫배에서 터져 나왔다. "으—!" 지희는 비명을 삼키며 몸을 굽혔다. 잊고 있던, 아니 잊었다고 믿고 있던 바로 그 통증이었다. 그것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날카로웠다. "컷! 컷! 지희 씨!" 놀란 스태프들이 우르르 달려왔지만 누가 부축할 새도 없이 다리가 풀렸다. 지희는 하얗게 눈이 쌓인 바닥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언니! 언니!" 아수라장이 된 촬영장을 헤치고 지아가 달려왔다. 지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의식은 점점 흐려져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서울의 어느 큰 병원. 하얀 병실 안에서 기계음이 일정하게 울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지희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 오는 동안 지아는 한 번도 지희의 손을 놓지 않았다. 침대 곁에 선 의사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검사 결과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과거 스트레스나 심리적인 요인이 통증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으니 정신건강의학과 상담도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뒤 지아는 의자를 끌어와 다시 지희의 손을 잡았다. 그 기척에 지희가 힘겹게 눈을 떴다. "지아야, 여기 병원이야? 촬영은?" "취소됐어요. 언니가 쓰러졌는데 촬영은 무슨…" "의사는 뭐래?" "저번이랑 똑같은 소리 하고 갔어요. 다 정상이라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 수 있으니까 정신과 상담 받아 보라면서요." "뭐, 들으나 마나 그 소리겠지." 지희는 천장을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죽이라도 사 올까요? 언니, 오늘 한 끼도 안 먹었잖아요." "그럴래? 뭐라도 삼켜야 힘이 날 것 같아." "금방 다녀올게요, 언니." 지아는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 창밖은 어느새 캄캄한 밤이었고,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었다. 혼자 남은 병실은 조용했다. 낮에는 그토록 북적이던 병동도 밤이 되자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지희는 이불 위로 가만히 아랫배를 쓸었다. 그때, 손바닥 아래에서 무언가가 꿈틀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지난번 소파에서 느꼈던 미세한 떨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에서부터 밀어 올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말도 안 돼.' 숨을 들이쉴 틈도 없이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아아아아악!" 정적을 찢는 비명에 놀란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복도로 몰려나왔다. 문을 열었을 때 병실 안은 이미 엉망이었다. 의료 기기와 침대 시트가 뒤엉켜 있었고, 지희는 한 손으로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 웅크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강지희 씨! 진정하세요!" 간호사 둘이 양쪽에서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지희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만! 그만해! 날 만지지 마!!" 마른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거센 힘이었다. 통증 때문만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에 겁을 먹은 사람의 몸부림이었다. "진정제 준비해요!" 잠시 뒤 주삿바늘이 팔에 꽂혔다. 팽팽하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고, 지희는 바닥에 힘없이 늘어졌다. "제발, 그만…" 마지막 말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 죽을 사 들고 돌아온 지아를 간호사 한 명이 불러 세웠다. "강지희 씨 보호자분 되시죠?" "네, 맞아요. 언니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방금 강지희 씨가 난동을 피우셔서요. 침대랑 장비가 다 부서질 뻔했어요. 진정제랑 수면제를 투여해서 지금은 주무시고 계세요." "네? 언니가요?" 지아의 얼굴이 굳었다. 손에 든 죽 봉지가 바닥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지아는 복도 창가에 기대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복도 끝에서 휴대폰을 든 채 이쪽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내일 대문짝만한 기사가 날 것이 뻔했다. 병원에 오래 머물수록 말은 더 불어날 터였다. "언니 깨어나는 대로 퇴원 수속 밟을게요." 지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희가 눈을 뜬 것은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놀랍게도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지아야…" "언니, 괜찮아요?" "응. 이상하게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프네."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병원보다는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점심 무렵, 지아가 우려하던 기사들이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 <배우 강지희, CF 촬영 중 실신해 병원 이송… 병실에서 발작 증세, 약물 중독 의혹도> <강지희, 아랫배 통증 호소… 임신 가능성 제기> 기자들은 톱스타의 이름을 앞세워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커뮤니티에는 온갖 추측이 댓글로 달리며 가십거리가 되어 갔다. 소속사 전화는 아침부터 불이 났고, 지아의 휴대폰에도 모르는 번호가 쉴 새 없이 찍혔다. 지희는 소파에 누운 채 태블릿을 엎어 놓았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무슨 말들이 오가고 있을지는 뻔했다. 기사를 훑어본 지아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니, 이건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 더 큰일 나기 전에 명옥님한테 다시 가 보는 게 어때요? 그때 상담을 제대로 받았더라면…" "지아야, 또 그 소리야?" "병원에서도 결국 원인을 못 찾잖아요. 언니, 지금 고집부릴 때가 아니에요. 뭐라도 해 봐야죠." 지희는 냉소를 흘렸다. "그만해. 나 그런 거 안 믿어. 차라리 의사 말대로 정신병원에 가고 말지." "언니! 정신과 상담은 몇 번이나 받았잖아요! 그때도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언니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요?" "됐어.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난 신경 안 써." 무심하게 돌아누운 등을 보며 지아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지희가 손도 대지 않은 죽 그릇을 치우는 내내, 안개 낀 산속의 한옥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지희의 고집은 하룻밤을 넘기지 못했다. 그날 새벽, 지아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희를 차에 태우고 눈 내리는 산길을 달려야 했다."...그럼 은정이의 한이라는 게 대체 뭐죠?"조심스럽게 입을 연 주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독고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릅니다."주미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독고춘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박도윤.""...네?""...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지도.""오빠가요?""...확실한 건 아닙니다."독고춘의 말에 주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은정이와 자신의 오빠가 얽혀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지희가 주미의 손을 잡았다."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또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아, 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잠시 후, 세 사람이 병실을 나갔다.철컥.문이 닫히자 다시 조용한 적막이 병실 안을 채웠다.주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박도윤."설마...?"주미는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은정이에게 무언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얼마 뒤, 병원에서 퇴원 수속을 마친 그녀는 곧장 H금융으로 향했다.---H금융 본사.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선 주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높은 건물을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주미는 굳은 얼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미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문 앞에 멈춰 섰다.부사장실.주미는 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곧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똑똑."들어오세요."문
서울의 OO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주미가 문자로 알려준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멈춰 선 지희는 문에 붙은 '박주미' 이름표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주미씨?"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발견한 주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 오셨어요?" "아니, 아니. 그냥 누워 있어요." 지희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왜 일어나려고 해요?" "괜찮아요. 아까 수액 맞고 나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주미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진짜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 저는 지희 언니 매니저 이지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초면에 누워 있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언니. 아참, 주미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야, 주미씨가 너보다 어리면 어쩌려고." "...지희 언니? 잘 못들었습니다?" "주미씨가 너보다 어려 보인다고. 안 그래요, 꼬춘씨?" "...음." "허! 형부까지 이러면 저 섭섭해요?" "푸흣..." 지희와 지아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주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나마 무거웠던 병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 사이, 독고춘은 조용히 주미의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주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왜 그러세요?" 그제야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젯밤부터 꿈을 꾼 겁니까?" "아, 네. 꿈이야 자주 꿨지만... 그런 이상한 꿈은 분명 어젯밤부터였어요." 지희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주미가 그런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자신들과 만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꼬춘씨. 뭔가 보여요?" 독고춘은
주미와 통화를 끝낸 지희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결국 서울로 가야겠네." 남은 휴가가 아직 이틀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쉬울 상황이 아니었다. 지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바라봤다. 독고춘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잘도 자네." 지희는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꼬춘씨." 그녀가 살짝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대답이 없었다. "꼬춘씨, 일어나요." 지희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왠일이래."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던 순간, 덥석. 독고춘의 손이 지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앗!" 푹! 지희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잠결에 움직인 독고춘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어머머..." 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춘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누워버린 상태였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독고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꼬춘씨? 지금 뭐하세요?" 지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익... 하! 진짜 꼼짝도 못 하겠네. 힘이 얼마나 쎈 거야. 이봐요! 얼른 일어나라고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지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아니, 하... 이게 무슨 꼴이야." 그때,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짜잔! 지아 등!...장..." 지아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 지아는 눈을 껌뻑껌뻑 거린 뒤, 소파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잠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러브러브 일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그 말에 지희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헉...!"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꿈이었다.분명 꿈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하아..."주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은정이의 뒷모습과 자신을 휘감던 검은 연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까지 모든 장면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그때였다."주미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주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엄마?""왜 그렇게 놀라? 계속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고. 악몽이라도 꿨어?""...아니, 아니야."주미의 어머니 한정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너,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픈거야?""괜찮아, 엄마. 지금 몇 시지?"주미는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평소라면 이미 출근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아, 회사 가야지."주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휘청.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정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주미야!"주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끝까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그녀는 딸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오늘 회사 가지 마.""엄마, 나 정말 괜찮아.""괜찮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주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섰다.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뒤 의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검사 결과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정말 괜찮은 건가요? 애가 쓰러질뻔 했는데.""네. 다만 최근에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면서 수액 치료를 받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바닷물에 젖은 발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먼저 씻고 나온 지희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을 손에 들었지만 화면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SNS를 확인하거나 연예 쪽 기사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따라 손가락만 괜히 화면 위를 움직였다.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욕실 쪽을 바라봤다.아직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지희는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지금까지 독고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었고, 촬영장에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오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 앞에 그에게 안겨 호텔 로비까지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가장 어색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지희는 괜히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았다."...왜 이러지."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철컥.욕실 문이 열리고 독고춘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지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독고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해졌다."..."독고춘 역시 지희를 잠시 바라봤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잠시 동안 눈이 마주치자 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독고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직도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뭐, 그렇긴 한데...아 몰라요, 몰라."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벌러덩 누웠다.독고춘은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지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이번에도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껐다.옆에 있는 독
저녁 노을이 바다 위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호텔 레스토랑 창가. 붉게 물든 석양이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희는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땅 꺼지겠군." "아, 진짜!" 지희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 "그럼 안 쓰이겠어요?" 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이 엄마 친구잖아요.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아오, 진짜." 지희는 결국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꼬춘씨는 걱정도 안돼요? 분명 주미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는 별일 없을거다." "하아,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짙푸른 밤하늘 위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던 지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독고춘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한숨이군." "안 쉬게 생겼어요?" 지희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원래 휴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되잖아요." "...음." "근데 오늘은 머릿속이 엉망이에요." 지희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툭 걷어찼다. "고은정씨 일도 그렇고... 주미 씨도 계속 신경 쓰이고." "...신경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텐데." "알아요." 지희는 피식 웃었다. "근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예요." "..." "꼬춘씨처럼 뭐든 무덤덤하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잔잔한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 후, 나지
촬영을 마친 밤,아파트 안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창밖엔 도시의 불빛이 깜빡이며 비쳤다. 부엌에서는 식용유가 부드럽게 튀는 소리가 났고,냄비에서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독고춘은 조용히 양파를 썰고 있었다. 소파 위에는 지아가 잡지를 들고 누워 있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 나직이 말했다. “아… 오늘은 진짜 체력 바닥이에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을것 같은 그런 나약한 기분?” “...뭘했다고.” 독고춘이 짧게 중얼거렸다. 지아가 피식 웃으며 몸을 뒤척였다. “오빠는 참 대단하단
다음날 드라마 촬영장, 오전. 지희의 대기실 공기는 분주하면서도 묘하게 서늘했다. 화장대 조명 아래, 지희는 메이크업 브러시의 감촉을 느끼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완벽하게 꾸며진 얼굴이었지만, 그 안의 표정은 어딘가 낯설었다. “언니, 피곤해 보여요.” 지아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냥 어제 일이 좀… 잊히질 않아서.” 그때 ,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강지희 배우님께 전달하라는 물건입니다.”
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조명 아래에 깃든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오빠, 저쪽.” 지아가 손으로 안내하자, 독고춘은 굳은 얼굴로 뒤따랐다. 그의 시선은 계속 천장과 벽을 오갔다. 일렁이는 희미한 그림자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작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이때까지 독고춘은 아직 검은 연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지아가 문을 열자, 따뜻한 조명이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지희는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앉았다. 스탭들과 작가들이
다음날, 아직 해가 뜨기 전, 새벽의 공기가 투명했다. 도시의 골목 사이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 묵직한 눈빛. 독고춘이었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먼지 냄새가 스쳤다. 그는 말없이 현관에 신발을 벗고, 한참을 집안을 둘러봤다. 먼지 낀 거실 창문, 설거지되지 않은 식기, 널브러진 옷가지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그는 낮게 중얼거리고 곧장 움직였다. 정확하고 빠르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