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얀 눈이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CF 촬영 현장.
지희는 새하얀 코트를 입고 조명 아래 섰다.
“하나, 둘, 셋— 액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조명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갑자기 칼로 찌르듯한 통증이 복부에서 폭발했다. “으—!” 지희가 비명을 억누르며 몸을 굽혔다. “컷! 컷! 지희 씨!” 깜짝 놀란 스탭들이 우르르 지희에게로 달려왔다. 부축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순간에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지아는 "언니!"언니!"를 외치며 지희에게 달려갔다. 지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점점 의식이 흐려지더니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 서울의 어느 큰 병원. 하얀 병실 안에서 기계음이 일정하게 울렸다. 지희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 주변에는 의사 한명이 난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CT도, MRI도, 혈액 검사도 전부 정상이에요. 통증의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일수 있으니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시는게 좋을겁니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후, 지아는 의자를 끌어와 지희의 손을 잡았다. 그 기척에 지희는 힘겹게 눈을 떴다. “지아야, 여기 병원이야? 촬영은?” "촬영은 취소됐어요. 언니가 쓰러졌는데 촬영은 무슨..." "의사는 뭐래?" "저번이랑 똑같은 소리 하고 갔어요. 다 정상이라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일수 있으니 정신과 상담 받아보라고 하면서요." "뭐 들으나마나 그 소리겠지." "죽이라도 사올까요? 언니, 오늘 한끼도 안먹었잖아요." "그럴래? 뭐라도 삼켜야 힘이 날거 같아."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언니." 지아는 서둘러 옷을 입고 병실 안을 나갔다. 창밖은 벌써 캄캄해진 밤이었다. 지아가 병원을 나서고 얼마 후, 조용하던 그곳의 정적을 깨는 건, 병실에서 터져 나온 지희의 비명소리였다. “아아아아악!”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비명소리에 놀란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문을 여는 순간, 병실 안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의료기기와 침대 시트가 뒤엉켜 있었고, 지희는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그녀는 다른 한손으로 복부를 움켜쥐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강지희 씨! 진정하세요!” 간호사 둘이 그녀를 붙잡았지만 지희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날 만지지 마!!” 간호사는 급히 호출 버튼을 눌렀다. “진정제 준비해요!” 잠시 후, 주사바늘이 그녀의 팔에 꽂혔다. 곧, 천천히 몸의 긴장이 풀리며 지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제발 그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지아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간호사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강지희씨 보호자분 되시죠?" "네 맞아요. 언니한테 무슨일 있어요?" “그게...방금 강지희씨가 난동을 피우셔서...침대랑 장비 다 부서질 뻔했어요.” 그 말을 듣고 지아의 얼굴이 굳었다. “네? 언니가요?” “네. 진정제랑 수면제 투여했어요. 지금은 주무시고 계세요.” 지아는 복도 창가에 기대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내일 대문짝만한 기사가 나올 것다는 그녀의 직업적인 감각이 작동했다. 병원에 오래 있을수록, 불안이 커질 것이다. “언니 깨어나면 퇴원수속 할게요.” 그녀가 단호하게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해가 뜨려고 하는 새벽쯤에 지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놀랍게도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지아야…” “언니, 괜찮아요?” 지희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말했다. “이상하게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프네.” 지아는 조심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병원보단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점심때쯤, 지아가 우려하던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배우 강지희, CF 촬영 중 실신 후 병원 이송. 병실에서 발작 증세 보여...약물 중독일수도...> <강지희, 아랫배 통증 호소. 임신일 가능성 있어...> 기자들은 톱스타 강지희를 핑계로 어그로를 끌기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바빴다. 또, 팬들은 커뮤니티에서 댓글로 추측을 쏟아내며 가십거리로 삼았다. 기사를 대충 확인한 지아는 진지한 얼굴로 지희에게 말했다. “언니, 이건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면 안될거 같아요. 더 큰일나기 전에 명옥님한테 다시 가보는게 어때요? 그때 상담을 제대로 받았다면...” 지희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아야, 또 그 소리야?” “병원에서도 결국 원인을 못 찾잖아요. 언니, 고집부릴때가 아니에요. 뭐라도 해봐야죠." 그 말에 지희는 냉소를 흘렸다. “그만해. 나 그런 거 믿지 않아. 차라리 의사 말대로 정신병원에 가고 말지...” "언니! 정신과 상담은 몇번이나 받았잖아요! 그때도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언니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나요?" "됐어. 사람들이 뭐라하든 난 신경쓰지 않으니까." 무신경한 그녀의 말에 지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새벽, 지아는 서둘러 명옥의 집을 찾아 갈수밖에 없었다.주미와 통화를 끝낸 지희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아, 결국 서울로 가야겠네."남은 휴가가 아직 이틀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쉬울 상황이 아니었다.지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바라봤다.독고춘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잘도 자네."지희는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꼬춘씨."그녀가 살짝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대답이 없었다."꼬춘씨, 일어나요."지희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평소엔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왠일이래."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던 순간,덥석.독고춘의 손이 지희의 손목을 붙잡았다."...어?"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당겼다."아앗!"푹!지희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로 넘어졌다.그리고 잠결에 움직인 독고춘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어머머..."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독고춘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누워버린 상태였다.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독고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꼬춘씨? 지금 뭐하세요?"지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이익... 하! 진짜 꼼짝도 못 하겠네. 힘이 얼마나 쎈 거야. 이봐요! 얼른 일어나라고요!"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지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아니, 하... 이게 무슨 꼴이야."그때,철컥.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짜잔! 지아 등!...장..."지아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지아는 눈을 껌뻑껌뻑 거린 뒤, 소파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잠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러브러브 일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그 말에 지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아니, 아니야!""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럼 이만 즐거운 시간 되시길.""지아야! 잠깐만!"지희가 황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헉...!"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꿈이었다.분명 꿈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하아..."주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은정이의 뒷모습과 자신을 휘감던 검은 연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까지 모든 장면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그때였다."주미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주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엄마?""왜 그렇게 놀라? 계속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고. 악몽이라도 꿨어?""...아니, 아니야."주미의 어머니 한정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너,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픈거야?""괜찮아, 엄마. 지금 몇 시지?"주미는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평소라면 이미 출근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아, 회사 가야지."주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휘청.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정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주미야!"주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끝까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그녀는 딸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오늘 회사 가지 마.""엄마, 나 정말 괜찮아.""괜찮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주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섰다.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뒤 의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검사 결과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정말 괜찮은 건가요? 애가 쓰러질뻔 했는데.""네. 다만 최근에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면서 수액 치료를 받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바닷물에 젖은 발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먼저 씻고 나온 지희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을 손에 들었지만 화면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SNS를 확인하거나 연예 쪽 기사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따라 손가락만 괜히 화면 위를 움직였다.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욕실 쪽을 바라봤다.아직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지희는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지금까지 독고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었고, 촬영장에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오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 앞에 그에게 안겨 호텔 로비까지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가장 어색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지희는 괜히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았다."...왜 이러지."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철컥.욕실 문이 열리고 독고춘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지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독고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해졌다."..."독고춘 역시 지희를 잠시 바라봤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잠시 동안 눈이 마주치자 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독고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직도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뭐, 그렇긴 한데...아 몰라요, 몰라."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벌러덩 누웠다.독고춘은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지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이번에도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껐다.옆에 있는 독
저녁 노을이 바다 위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호텔 레스토랑 창가. 붉게 물든 석양이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희는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땅 꺼지겠군." "아, 진짜!" 지희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 "그럼 안 쓰이겠어요?" 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이 엄마 친구잖아요.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아오, 진짜." 지희는 결국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꼬춘씨는 걱정도 안돼요? 분명 주미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는 별일 없을거다." "하아,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짙푸른 밤하늘 위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던 지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독고춘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한숨이군." "안 쉬게 생겼어요?" 지희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원래 휴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되잖아요." "...음." "근데 오늘은 머릿속이 엉망이에요." 지희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툭 걷어찼다. "고은정씨 일도 그렇고... 주미 씨도 계속 신경 쓰이고." "...신경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텐데." "알아요." 지희는 피식 웃었다. "근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예요." "..." "꼬춘씨처럼 뭐든 무덤덤하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잔잔한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 후, 나지
우우우웅ㅡ띵.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춰 섰다.문이 열리고 중년 부부와 젊은 커플 몇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서다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음?""...어머."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독고춘과 지희에게 향했다.정확히는 대낮에 멀쩡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여자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든 채 덤덤하게 서 있는 독고춘에게로.그 기묘한 광경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곧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묘하게 어색해졌다.젊은 커플은 쿡쿡거리며 웃음을 흘렸고, 중년 부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다.지희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아랫배를 찌르는 고통보다도 몰려오는 민망함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차라리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반면 독고춘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온해 보였다.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마지막 사람까지 내리고 나서야 지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아아...""...땅 꺼지겠군."독고춘의 말에 지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뭐요?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아니, 하...사람들 보는 데서 이게 뭐냐고 진짜...""...뭐 잘못됐나?"독고춘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지희는 결국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아, 됐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띵.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독고춘은 지희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 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침대에 지희를 조심스럽게 눕혔다.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지희의 아랫배에서 다시금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읏..."지희가 침대 시트를 꽉 쥐며 허리를 웅크렸다.고통 때문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오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독고춘은 말없이 침대 옆에 앉았다.그리고 지희의 아랫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곧 독고춘의 손
"...은정이가...그렇게 가 버릴 줄...정말 몰랐어요..."주미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흩어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꽉 쥔 두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일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갑작스럽게 걸려왔던 은정이의 전화.그리고 다음 날 들려온 부고.자신이 조금만 빨리 눈치챘더라면.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은정이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주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결국 그녀의 가슴속에 남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 후회뿐이었다.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희는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친구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주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독고춘을 바라봤다.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근데."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이어졌다."정말 은정이를 봤다는 거예요?"지희도 순간 독고춘을 바라봤다.주미는 마치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아까 분명히 봤다고 했잖아요.""...""...은정이가 지금 제 옆에 있는 건가요?"바닷바람이 세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독고춘은 잠시 말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확히는...아닙니다."그 말에 주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그게 무슨 소리죠?""...제가 본 건...그분의 기억입니다.""...기억이라고요?"주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독고춘은 그 말을 끝으로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어이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그럼 그렇지..."주미는 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그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훔쳤다."...잠시나마 기대했던 제가 바보였네요."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조명 아래에 깃든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오빠, 저쪽.” 지아가 손으로 안내하자, 독고춘은 굳은 얼굴로 뒤따랐다. 그의 시선은 계속 천장과 벽을 오갔다. 일렁이는 희미한 그림자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작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이때까지 독고춘은 아직 검은 연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지아가 문을 열자, 따뜻한 조명이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지희는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앉았다. 스탭들과 작가들이
달빛이 한옥 처마 끝을 스치며 흩어졌다. 바람은 차고, 공기는 맑았다. 산 아래의 세상은 이미 잠들었지만,이 깊은 산속 한옥만은 아직 깨어 있었다. 명옥은 등불을 들고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그녀의 발끝마다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그 불빛은 마치 작은 생명체처럼 흔들리며 그녀를 따라왔다. “아이야, 보이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울렸다. 독고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빛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명옥은 깊고 고요한 눈으로 독고춘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날 저녁, 촬영을 마친 세 사람은 촬영장 근처의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나눴다. 밖엔 소복히 눈이 쌓이고 있었다. 지아는 독고춘을 보며 말했다. “오빠, 오늘 진짜 고생했어요.” "...너도." “오, 뭐야?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지희가 웃으며 말했다.“...피곤하군.” 독고춘은 한숨을 쉬며 커피를 내려놨다. 눈이 살금살금 내리는 창밖을 보니 문득 명옥이가 생각났다. 식사는 잘 하고 계시는지. 분명 눈이 쌓일텐데. "지금 무슨 생각해요?"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독고춘을 보며 지희가 물었다
다음날, 아직 해가 뜨기 전, 새벽의 공기가 투명했다. 도시의 골목 사이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 묵직한 눈빛. 독고춘이었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먼지 냄새가 스쳤다. 그는 말없이 현관에 신발을 벗고, 한참을 집안을 둘러봤다. 먼지 낀 거실 창문, 설거지되지 않은 식기, 널브러진 옷가지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그는 낮게 중얼거리고 곧장 움직였다. 정확하고 빠르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