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눈은 아침나절이 되어서야 완전히 그쳤다.
창호지를 건너온 부드러운 햇살이 눈꺼풀을 스치자, 지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과 낯선 공기 속에서, 본 적 있는 남자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희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자 독고춘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를 진정시켰다. 몇 시간째 그 자리를 지킨 듯 조금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긴 어디죠? 당신 집인가요?" 독고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희는 두리번거리다가 옆자리에서 웅크린 채 곤히 잠든 지아를 발견했다. 그제야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무심코 아랫배로 손을 가져간 지희는 숨을 멈췄다.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대신 다른 것이 남아 있었다. 좁은 방에서 혼자 울던 여자와 차가운 아스팔트, 그리고 어둠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던 아기의 울음소리.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해서, 꼭 누군가의 기억을 통째로 들여다보고 나온 것만 같았다. '…그게 다 뭐였지.' 독고춘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 하자 지희가 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아, 저기요?" 독고춘이 무뚝뚝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지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독고춘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 순간 "으음…" 하는 소리와 함께 지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언니! 깨어났어요?" 지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아는 그대로 달려들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진짜 다행이에요… 전 언니가 죽는 줄 알았다고요!" "이제 괜찮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 "언니 잘못될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엉엉." "그래, 그래. 이제 괜찮으니까 집에 가서 좀 더 쉬자. 응?" "네, 언니. 훌쩍…" 지희는 들썩이는 등을 한참 두드려 준 뒤에야 지아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 마루에는 명옥이 앉아 있었다. 처마 끝에는 아직 하얀 눈이 매달려 있었고, 찬 공기 사이로 은은한 차 향이 퍼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독고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지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지난번과 다름없이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그 흐릿한 눈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얘기는 들었다. 고생했겠구나." 그 한마디에 지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꾸짖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목소리였다. 지희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죄송했어요, 할머니. 용서해 주세요." 명옥은 대답 대신 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짓했다. "앉아 보거라." 지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명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름진 손이 천천히 아랫배 위로 내려왔다. 오래 볕을 쬔 돌처럼 따뜻하고 느린 손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손은 조금도 싫지 않았다. 명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지아가 물었다. "그저 울 뿐이야. 세상에 나오지 못한 한의 울음이지.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지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잠결에 본 그 여자와 아기의 울음이, 지금도 손바닥 아래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이 아기를 구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명옥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의 사랑과 정성으로 길을 열 수는 있겠지. 원귀라 해도 한때는 사람으로 태어나려 했던 아이니. 부모의 따뜻함을 느낀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가야 할 곳을 찾을지도 모르겠구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희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럼, 그렇게 해 볼게요." 명옥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그 방법이 전부는 아니야. 고통 없이, 깨끗하게 없애는 길도 있지." 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태어나지 못한 아기를 또 그렇게 둘 순 없어요." 찻잔을 들던 독고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언니… 그 말 진심이에요?" 귀신 같은 건 절대 안 믿는다던 사람이었다. 지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진심이야.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는 않는데… 분명히 느꼈어." 지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때 지희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근데… 엄마의 사랑은 내가 줄 수 있겠는데, 아빠의 사랑은 어떡하지?"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독고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구겼다. "…잠깐. 왜 날?" "방금 아기가 그쪽 보고 '아빠'라고 부른 것 같은데요?" 지희가 농담 섞인 어조로 말하자 명옥이 슬쩍 웃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아이야, 이번에는 너에게 맡기마. 달리 믿을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명옥님이 허락하셨네요? 그러고 보니 언니랑 저 사람, 의외로 잘 어울리는데요? 뭔가… 묘하게 균형 잡힌 느낌?" "넌 좀 조용히 해!" 지희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독고춘은 시큰둥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음, 일단은 우리 집 근처에 방 하나 잡아 줄 테니까 당분간 거기서 지내면 되겠네요." "…?" 독고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명옥이 웃으며 거들었다. "아이야, 네가 함께 가지 않으면 저 아이는 또 고통을 참으며 이곳까지 와야 할 게다. 네가 곁에서 상태를 살펴보거라.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바깥에 나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야." "맞아요! 거기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많은 언니랑 같이 아기한테 사랑을 주는 경험이라니, 이거 꽤 괜찮은 제안 아니에요?" "…눈앞에 명옥님을 두고도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독고춘의 혼잣말에 명옥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지희는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얼마나 예쁘셨길래요?" 지아는 폭소를 터뜨렸고 명옥은 기분 좋은 듯 조용히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 즈음, 명옥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원귀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임을 명심하거라. 부디 몸조심하렴." 지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랫배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독고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아기가 행복하게, 스스로 가야할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조금 전까지 농담을 던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독고춘은 결심한 듯한 지희의 눈을 한참 마주 보았다. 그리고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고요하기만 하던 마음 한구석이 낯설게 흔들리고 있었다."...그럼 은정이의 한이라는 게 대체 뭐죠?"조심스럽게 입을 연 주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독고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릅니다."주미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독고춘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박도윤.""...네?""...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지도.""오빠가요?""...확실한 건 아닙니다."독고춘의 말에 주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은정이와 자신의 오빠가 얽혀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지희가 주미의 손을 잡았다."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또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아, 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잠시 후, 세 사람이 병실을 나갔다.철컥.문이 닫히자 다시 조용한 적막이 병실 안을 채웠다.주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박도윤."설마...?"주미는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은정이에게 무언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얼마 뒤, 병원에서 퇴원 수속을 마친 그녀는 곧장 H금융으로 향했다.---H금융 본사.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선 주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높은 건물을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주미는 굳은 얼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미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문 앞에 멈춰 섰다.부사장실.주미는 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곧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똑똑."들어오세요."문
서울의 OO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주미가 문자로 알려준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멈춰 선 지희는 문에 붙은 '박주미' 이름표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주미씨?"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발견한 주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 오셨어요?" "아니, 아니. 그냥 누워 있어요." 지희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왜 일어나려고 해요?" "괜찮아요. 아까 수액 맞고 나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주미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진짜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 저는 지희 언니 매니저 이지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초면에 누워 있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언니. 아참, 주미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야, 주미씨가 너보다 어리면 어쩌려고." "...지희 언니? 잘 못들었습니다?" "주미씨가 너보다 어려 보인다고. 안 그래요, 꼬춘씨?" "...음." "허! 형부까지 이러면 저 섭섭해요?" "푸흣..." 지희와 지아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주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나마 무거웠던 병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 사이, 독고춘은 조용히 주미의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주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왜 그러세요?" 그제야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젯밤부터 꿈을 꾼 겁니까?" "아, 네. 꿈이야 자주 꿨지만... 그런 이상한 꿈은 분명 어젯밤부터였어요." 지희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주미가 그런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자신들과 만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꼬춘씨. 뭔가 보여요?" 독고춘은
주미와 통화를 끝낸 지희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결국 서울로 가야겠네." 남은 휴가가 아직 이틀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쉬울 상황이 아니었다. 지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바라봤다. 독고춘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잘도 자네." 지희는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꼬춘씨." 그녀가 살짝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대답이 없었다. "꼬춘씨, 일어나요." 지희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왠일이래."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던 순간, 덥석. 독고춘의 손이 지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앗!" 푹! 지희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잠결에 움직인 독고춘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어머머..." 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춘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누워버린 상태였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독고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꼬춘씨? 지금 뭐하세요?" 지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익... 하! 진짜 꼼짝도 못 하겠네. 힘이 얼마나 쎈 거야. 이봐요! 얼른 일어나라고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지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아니, 하... 이게 무슨 꼴이야." 그때,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짜잔! 지아 등!...장..." 지아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 지아는 눈을 껌뻑껌뻑 거린 뒤, 소파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잠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러브러브 일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그 말에 지희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헉...!"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꿈이었다.분명 꿈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하아..."주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은정이의 뒷모습과 자신을 휘감던 검은 연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까지 모든 장면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그때였다."주미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주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엄마?""왜 그렇게 놀라? 계속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고. 악몽이라도 꿨어?""...아니, 아니야."주미의 어머니 한정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너,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픈거야?""괜찮아, 엄마. 지금 몇 시지?"주미는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평소라면 이미 출근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아, 회사 가야지."주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휘청.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정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주미야!"주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끝까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그녀는 딸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오늘 회사 가지 마.""엄마, 나 정말 괜찮아.""괜찮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주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섰다.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뒤 의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검사 결과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정말 괜찮은 건가요? 애가 쓰러질뻔 했는데.""네. 다만 최근에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면서 수액 치료를 받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바닷물에 젖은 발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먼저 씻고 나온 지희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을 손에 들었지만 화면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SNS를 확인하거나 연예 쪽 기사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따라 손가락만 괜히 화면 위를 움직였다.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욕실 쪽을 바라봤다.아직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지희는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지금까지 독고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었고, 촬영장에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오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 앞에 그에게 안겨 호텔 로비까지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가장 어색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지희는 괜히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았다."...왜 이러지."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철컥.욕실 문이 열리고 독고춘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지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독고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해졌다."..."독고춘 역시 지희를 잠시 바라봤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잠시 동안 눈이 마주치자 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독고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직도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뭐, 그렇긴 한데...아 몰라요, 몰라."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벌러덩 누웠다.독고춘은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지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이번에도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껐다.옆에 있는 독
저녁 노을이 바다 위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호텔 레스토랑 창가. 붉게 물든 석양이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희는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땅 꺼지겠군." "아, 진짜!" 지희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 "그럼 안 쓰이겠어요?" 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이 엄마 친구잖아요.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아오, 진짜." 지희는 결국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꼬춘씨는 걱정도 안돼요? 분명 주미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는 별일 없을거다." "하아,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짙푸른 밤하늘 위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던 지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독고춘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한숨이군." "안 쉬게 생겼어요?" 지희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원래 휴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되잖아요." "...음." "근데 오늘은 머릿속이 엉망이에요." 지희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툭 걷어찼다. "고은정씨 일도 그렇고... 주미 씨도 계속 신경 쓰이고." "...신경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텐데." "알아요." 지희는 피식 웃었다. "근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예요." "..." "꼬춘씨처럼 뭐든 무덤덤하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잔잔한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 후, 나지
비가 세차게 내리던 7월의 어느 날.하얀 형광등이 냉랭하게 빛나는 병원 장례식장 한켠에, 아홉살 짜리 소년이 혼자 앉아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독고춘.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그의 부모가… 죽었다. 정면의 제단 위에는 나란히 놓인 두 장의 영정사진이 있었다.춘은 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눈물은 나오지 않았다.오히려 모든 감정이 말라붙은 듯,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 불과 하루 전 아침이었다.아직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춘은 현관 앞에서 부모를 배웅했다.그러다 문득 이상한 말을
촬영을 마친 밤,아파트 안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창밖엔 도시의 불빛이 깜빡이며 비쳤다. 부엌에서는 식용유가 부드럽게 튀는 소리가 났고,냄비에서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독고춘은 조용히 양파를 썰고 있었다. 소파 위에는 지아가 잡지를 들고 누워 있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 나직이 말했다. “아… 오늘은 진짜 체력 바닥이에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을것 같은 그런 나약한 기분?” “...뭘했다고.” 독고춘이 짧게 중얼거렸다. 지아가 피식 웃으며 몸을 뒤척였다. “오빠는 참 대단하단
다음날 드라마 촬영장, 오전. 지희의 대기실 공기는 분주하면서도 묘하게 서늘했다. 화장대 조명 아래, 지희는 메이크업 브러시의 감촉을 느끼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완벽하게 꾸며진 얼굴이었지만, 그 안의 표정은 어딘가 낯설었다. “언니, 피곤해 보여요.” 지아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냥 어제 일이 좀… 잊히질 않아서.” 그때 ,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강지희 배우님께 전달하라는 물건입니다.”
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조명 아래에 깃든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오빠, 저쪽.” 지아가 손으로 안내하자, 독고춘은 굳은 얼굴로 뒤따랐다. 그의 시선은 계속 천장과 벽을 오갔다. 일렁이는 희미한 그림자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작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이때까지 독고춘은 아직 검은 연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지아가 문을 열자, 따뜻한 조명이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지희는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앉았다. 스탭들과 작가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