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필이면 눈이 내린다.
서울 외곽에서 한참 벗어난 산길.
지아는 운전대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조수석에 앉은 지희가 그야말로 죽어가고 있었기때문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새벽녘 산속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지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지희를 부축해 명옥의 집 대문 앞까지 도달했다. 처음엔 지희의 본가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지희가 본가에 연락하면 평생 안보겠다고 협박하여 그만 두었다. 결국 옥신각신 끝에 둘이 명옥의 집으로 가는걸로 타협하여 서둘러 이곳으로 온 것이다. 지아는 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이른 시간에 죄송하지만 도와주세요! 문좀 열어 주세요!"마침 마당에서 쌓인 눈을 쓸고 있던 독고춘이 그 소리를 듣고 대문을 열어 주었다.
지아는 독고춘을 보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언니가 죽을것 같아요. 제발 명옥님좀 만나게 해주세요.” "지아야, 호들갑 그만 떨어. 나 안죽어. 윽...좀 고통스럽긴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야." 독고춘은 빗자루를 멈추고 조용히 그녀들을 바라보다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네? 어디 가셨는데요? 금방 오시겠죠?" "모릅니다." 독고춘의 말에 크게 실망한 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 앉았다. 옆에서 간신히 서 있던 지희가 지아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됐어, 지아야. 병원으로 가자. 가서 수면제 맞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지겠지...크윽!"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고통이 지희의 아랫배를 순식간에 덮쳤다.
숨을 쉴 때마다, 살갗을 찢는 고통에 정신이 나갈것만 같았다. 그 고통에 지희가 정신을 잃을때 쯤, 독고춘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빈 방으로 향했다. 들어오라는 소리는 없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지아도 따라 들어갔다. 독고춘은 대충 방에 지희를 눕힌후, 천천히 그녀의 아랫배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기엔, 검은 연기가 선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독고춘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였다. 마치 살아 있는 그림자처럼, 지희의 아랫배를 휘감고 있었다. 그 순간, 독고춘의 표정이 굳었다. 머릿속에 잊혀진 기억이 번쩍 떠올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신날, 그 때도 이런 검은 연기가 부모님 몸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조심스레 지희의 아랫배에 오른손을 얹었다. 독고춘의 돌발행동에 화들짝 놀란 지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깐,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독고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이 지희의 아랫배에 닿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울렸다. 찰나의 정적 후, 지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으…으흑…”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지만, 곧 표정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지희의 눈썹이 펴지고, 얕은 숨이 점점 고르게 바뀌었다. 불규칙하던 심박수도 안정되어 갔다. 지아는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어떻게 하신 거에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더 깊이 집중하듯 눈을 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할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 눈부신 흰빛 속에서, 독고춘은 낯선 장면들을 마주했다. 젊은 여자가 절규하며 울고 있었다. 좁은 원룸, 부서진 거울, 바닥에 나뒹구는 임신 테스트기. 그녀의 손엔 초음파 사진이 구겨져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그녀의 울음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나왔다. “아, X팔! 그냥 없애. 나 아직 준비 안 됐어.” 여자는 소리쳤다. “그게 말이 돼? 나보고 애를 지우라고?" “그럼? 네가 키울 수 있겠어? 미리 말하지만 난 절대 못 키운다. 잘난 네가 잘 키워 보던가.” 남자는 비릿하게 비웃었다. 여자의 울음은 점점 커지고, 방 안에는 욕설과 절망만이 남았다. 날이 지나며 여자는 점점 말라갔다.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그녀의 뱃속에서 작은 생명이 움찔거릴 때마다 그녀는 오히려 더 크게 울었다. “미안해…미안해…” 그러던 어느 날, 흰 병원복을 입은 여자는 차가운 수술실 불빛을 올려다봤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입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게 멈췄다. 아기의 울음소리, 그리고 어둠. 그저 태어나고 싶었던 아기의 울음만이 독고춘의 귓가에 맴돌았다. 곧 그 어둠 속에서, 작은 영혼이 푸른 불꽃으로 깨어났다. 시간이 흐르며 푸른 불꽃은 검은 연기로 변했다. 사랑 받지 못한 아기의 영혼은 스스로를 태워 한없이 울기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검은 연기는 지희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순간, 독고춘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을 번쩍 떴다. 한순간이지만 파랗게 변해버린 두 눈동자를 지아가 쳐다보고 순간 흠칫했다. 지희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졌고, 그녀의 복부 위를 감싸던 검은 연기는 잠시 고요해졌다. 잠자코 지켜보던 지아가 꿀꺽 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독고춘은 손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 “...뱃속에 '원귀'가 있습니다” 지아가 눈을 크게 떴다. “원귀...라구요? 그게 뭔데요? 설마 귀신 같은건가요?” 그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르게 눈빛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지아는 편안한 얼굴로 곤히 자고 있는 지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언니는 어떻게 되는거에요? 원귀라는건 없앨수 있는거죠?” 독고춘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주미와 통화를 끝낸 지희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아, 결국 서울로 가야겠네."남은 휴가가 아직 이틀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쉬울 상황이 아니었다.지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바라봤다.독고춘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잘도 자네."지희는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꼬춘씨."그녀가 살짝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대답이 없었다."꼬춘씨, 일어나요."지희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평소엔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왠일이래."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던 순간,덥석.독고춘의 손이 지희의 손목을 붙잡았다."...어?"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당겼다."아앗!"푹!지희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로 넘어졌다.그리고 잠결에 움직인 독고춘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어머머..."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독고춘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누워버린 상태였다.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독고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꼬춘씨? 지금 뭐하세요?"지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이익... 하! 진짜 꼼짝도 못 하겠네. 힘이 얼마나 쎈 거야. 이봐요! 얼른 일어나라고요!"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지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아니, 하... 이게 무슨 꼴이야."그때,철컥.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짜잔! 지아 등!...장..."지아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지아는 눈을 껌뻑껌뻑 거린 뒤, 소파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잠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러브러브 일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그 말에 지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아니, 아니야!""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럼 이만 즐거운 시간 되시길.""지아야! 잠깐만!"지희가 황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헉...!"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꿈이었다.분명 꿈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하아..."주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은정이의 뒷모습과 자신을 휘감던 검은 연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까지 모든 장면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그때였다."주미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주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엄마?""왜 그렇게 놀라? 계속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고. 악몽이라도 꿨어?""...아니, 아니야."주미의 어머니 한정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너,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픈거야?""괜찮아, 엄마. 지금 몇 시지?"주미는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평소라면 이미 출근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아, 회사 가야지."주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휘청.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정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주미야!"주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끝까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그녀는 딸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오늘 회사 가지 마.""엄마, 나 정말 괜찮아.""괜찮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주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섰다.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뒤 의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검사 결과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정말 괜찮은 건가요? 애가 쓰러질뻔 했는데.""네. 다만 최근에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면서 수액 치료를 받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바닷물에 젖은 발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먼저 씻고 나온 지희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을 손에 들었지만 화면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SNS를 확인하거나 연예 쪽 기사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따라 손가락만 괜히 화면 위를 움직였다.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욕실 쪽을 바라봤다.아직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지희는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지금까지 독고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었고, 촬영장에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오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 앞에 그에게 안겨 호텔 로비까지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가장 어색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지희는 괜히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았다."...왜 이러지."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철컥.욕실 문이 열리고 독고춘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지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독고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해졌다."..."독고춘 역시 지희를 잠시 바라봤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잠시 동안 눈이 마주치자 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독고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직도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뭐, 그렇긴 한데...아 몰라요, 몰라."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벌러덩 누웠다.독고춘은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지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이번에도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껐다.옆에 있는 독
저녁 노을이 바다 위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호텔 레스토랑 창가. 붉게 물든 석양이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희는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땅 꺼지겠군." "아, 진짜!" 지희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 "그럼 안 쓰이겠어요?" 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이 엄마 친구잖아요.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아오, 진짜." 지희는 결국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꼬춘씨는 걱정도 안돼요? 분명 주미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는 별일 없을거다." "하아,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짙푸른 밤하늘 위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던 지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독고춘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한숨이군." "안 쉬게 생겼어요?" 지희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원래 휴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되잖아요." "...음." "근데 오늘은 머릿속이 엉망이에요." 지희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툭 걷어찼다. "고은정씨 일도 그렇고... 주미 씨도 계속 신경 쓰이고." "...신경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텐데." "알아요." 지희는 피식 웃었다. "근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예요." "..." "꼬춘씨처럼 뭐든 무덤덤하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잔잔한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 후, 나지
우우우웅ㅡ띵.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춰 섰다.문이 열리고 중년 부부와 젊은 커플 몇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서다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음?""...어머."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독고춘과 지희에게 향했다.정확히는 대낮에 멀쩡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여자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든 채 덤덤하게 서 있는 독고춘에게로.그 기묘한 광경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곧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묘하게 어색해졌다.젊은 커플은 쿡쿡거리며 웃음을 흘렸고, 중년 부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다.지희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아랫배를 찌르는 고통보다도 몰려오는 민망함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차라리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반면 독고춘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온해 보였다.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마지막 사람까지 내리고 나서야 지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아아...""...땅 꺼지겠군."독고춘의 말에 지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뭐요?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아니, 하...사람들 보는 데서 이게 뭐냐고 진짜...""...뭐 잘못됐나?"독고춘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지희는 결국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아, 됐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띵.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독고춘은 지희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 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침대에 지희를 조심스럽게 눕혔다.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지희의 아랫배에서 다시금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으읏..."지희가 침대 시트를 꽉 쥐며 허리를 웅크렸다.고통 때문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오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독고춘은 말없이 침대 옆에 앉았다.그리고 지희의 아랫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곧 독고춘의 손
"...은정이가...그렇게 가 버릴 줄...정말 몰랐어요..."주미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흩어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꽉 쥔 두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일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갑작스럽게 걸려왔던 은정이의 전화.그리고 다음 날 들려온 부고.자신이 조금만 빨리 눈치챘더라면.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은정이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주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결국 그녀의 가슴속에 남은 것은 지워지지 않는 후회뿐이었다.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희는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친구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주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독고춘을 바라봤다.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근데."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이어졌다."정말 은정이를 봤다는 거예요?"지희도 순간 독고춘을 바라봤다.주미는 마치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아까 분명히 봤다고 했잖아요.""...""...은정이가 지금 제 옆에 있는 건가요?"바닷바람이 세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독고춘은 잠시 말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확히는...아닙니다."그 말에 주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그게 무슨 소리죠?""...제가 본 건...그분의 기억입니다.""...기억이라고요?"주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독고춘은 그 말을 끝으로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어이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그럼 그렇지..."주미는 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그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훔쳤다."...잠시나마 기대했던 제가 바보였네요."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촬영장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이 지희의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지희의 표정에는 묘한 긴장이 스며 있었다. “컷! 방금 좋았는데 지희씨 표정이 살짝 굳었어! 자자, 다시 한번 갈게요!”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희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배 안쪽에서 찌릿하고 통증이 올라왔다. 손이 본능적으로 아랫배로 향했다. “지희 씨 괜찮아요?” 조명팀의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네, 괜찮
밝은 조명들이 환히 비춰주는 서울의 밤 열한 시. 지희의 아파트 창밖으로 고속도로 차량의 불빛이 물결처럼 번졌다. 거실 한쪽엔 트로피와 화보, 광고 포스터가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것에도 따뜻함은 없었다. 지희는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눌렀다. 또다시 따끔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며칠 전보다 더 자주, 더 깊이. '그 아이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였느니.계속해서 네 속을 찌를게야.' “말도 안 돼. 그딴 소리 들으려고 내가...” 지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
그날은, 평소보다 안개가 더 짙었다. 산 입구에서 낯선 차 한 대가 멈춰섰다. 그리고, 두 여자가 내렸다. 한 명은 마치 화면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했다. 도시의 공기 대신 향수를 두른 듯한 여인. 긴 다리, 완벽한 비율, 그리고 어디서든 시선을 잡아끄는 도도한 분위기. 그녀의 이름은 강지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이자, 대기업의 자녀로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여자였다. 그 뒤를 따라 내리는 또 한 사람, 조심스럽게 안경을 고쳐쓰며 뒤따르는 매니저 이지아. 작고 말랐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으로 가득찼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7월의 어느 날.하얀 형광등이 냉랭하게 빛나는 병원 장례식장 한켠에, 아홉살 짜리 소년이 혼자 앉아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독고춘.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그의 부모가… 죽었다. 정면의 제단 위에는 나란히 놓인 두 장의 영정사진이 있었다.춘은 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눈물은 나오지 않았다.오히려 모든 감정이 말라붙은 듯,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 불과 하루 전 아침이었다.아직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춘은 현관 앞에서 부모를 배웅했다.그러다 문득 이상한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