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하필이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 한참을 달려온 산길 위에서, 지아는 운전대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입술은 바짝 말랐고 머릿속은 새하얬다. 조수석의 지희가 그야말로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눈을 밀어냈지만 앞은 좀처럼 트이지 않았다. 옆자리에서 이를 악문 신음이 새어 나올 때마다 지아의 발끝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지희의 본가에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지희는 본가에 연락하면 평생 얼굴을 안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옥신각신한 끝에 겨우 타협한 곳이 명옥의 집이었다. 새벽녘의 산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지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지희를 부축해 눈 쌓인 산길을 올랐다. 지난가을에는 투덜거리면서도 제 발로 오르던 길이었다. 그 길을 지희는 이제 지아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한 걸음씩 떼어 놓았고, 두 사람은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대문 앞에 닿았다. 지아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대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이른 시간에 죄송하지만 도와주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마침 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있던 독고춘이 그 소리를 듣고 대문을 열었다. 문밖에 선 것은 지난번에 화를 내며 돌아갔던 바로 그 여자였다. 조만간 다시 찾아올 거라던 명옥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언니가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명옥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지아는 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지아야, 호들갑 그만 떨어. 나 안 죽어. 윽… 좀 아프긴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야." 독고춘은 빗자루를 든 채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잘라 말했다. "지금 여기에 안 계십니다." "네? 어디 가셨는데요? 금방 오시겠죠?"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옆에서 간신히 서 있던 지희가 그 팔을 붙들었다. "됐어, 지아야. 병원으로 가자. 가서 수면제 맞고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 크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고통이 아랫배를 덮쳤다. 숨을 쉴 때마다 살갗이 찢기는 것 같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무릎이 꺾이는 지희를 독고춘이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말없이 빈방으로 향했고,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지아도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독고춘은 지희를 방에 눕히고 그녀의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연기가 선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을에 보았을 때는 희미한 아지랑이 같던 것이, 이제는 살아 있는 그림자처럼 지희의 배를 휘감고 있었다. 스무 해 전 부모의 몸을 감던 그 연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독고춘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명옥에게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써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지희의 아랫배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잠깐,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지아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만 독고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이 닿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울렸다. 찰나의 정적 뒤에 지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으… 으흑…"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오더니, 일그러져 있던 표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찌푸린 눈썹이 펴지고 얕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바뀌어 갔다. "이게 무슨… 어떻게 하신 거예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더 깊이 집중하듯 눈을 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할 즈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 눈부신 흰빛 속에서 낯선 장면들이 스쳐 갔다. 좁은 원룸에서 젊은 여자가 울고 있었다. 바닥에는 임신 테스트기가 나뒹굴었고, 여자의 손에는 초음파 사진이 구겨져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여자의 울음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나왔다. "아, 씨발. 그냥 없애. 나 아직 준비 안 됐어." "그게 말이 돼? 나보고 애를 지우라고?" "그럼? 네가 키울 수 있겠어? 미리 말하지만 난 절대 못 키운다. 잘난 네가 잘 키워 보던가." 남자는 비릿하게 웃었고, 방 안에는 여자의 울음만 남았다. 날이 갈수록 여자는 말라 갔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지만, 뱃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질 때마다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자는 울지 않았다. 조금씩 불러 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고, 가끔은 웃기도 했다.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지는 날이면 여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의 좁은 골목길. 멀리서 거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여자가 고개를 든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흩어진 비닐봉지와, 끊기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여자는 흐려지는 눈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제 배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어둠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저 태어나고 싶었던 아기의 울음이 독고춘의 귓가를 맴돌았다. 이윽고 그 어둠 속에서 작은 영혼이 푸른 불꽃으로 깨어났다. 불꽃은 엄마를 찾아 오래도록 떠돌았다. 아무리 울어도 엄마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 빛은 조금씩 탁해졌다. 불꽃 가장자리에 검은 기운이 번졌고, 끝내 그 빛마저 삼켜 버렸다. 남은 것은 검은 연기뿐이었다. 끝내 태어나지 못한 아기의 영혼은 스스로를 태우며 한없이 울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검은 연기는 한 여자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 독고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번쩍 떴다. 찰나였지만 그의 두 눈동자가 파랗게 빛나는 것을 지아는 똑똑히 보았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독고춘은 한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다. 차가운 아스팔트의 감촉과 끊기지 않던 벨소리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지희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져 있었고, 배를 휘감던 검은 연기도 잠시 고요해졌다. 잠자코 지켜보던 지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독고춘은 손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 "…뱃속에 '원귀'가 있습니다." "원귀…라고요? 그게 뭔데요? 설마 귀신 같은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인지 그 눈빛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지아는 저도 모르게 지희의 배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고르게 오르내리는 숨결뿐이었다. "…그럼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 원귀라는 건 없앨 수 있는 거죠?" 독고춘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아는 것은, 저 아이가 아직도 울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그럼 은정이의 한이라는 게 대체 뭐죠?"조심스럽게 입을 연 주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독고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릅니다."주미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독고춘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박도윤.""...네?""...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지도.""오빠가요?""...확실한 건 아닙니다."독고춘의 말에 주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은정이와 자신의 오빠가 얽혀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지희가 주미의 손을 잡았다."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또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아, 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잠시 후, 세 사람이 병실을 나갔다.철컥.문이 닫히자 다시 조용한 적막이 병실 안을 채웠다.주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박도윤."설마...?"주미는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은정이에게 무언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얼마 뒤, 병원에서 퇴원 수속을 마친 그녀는 곧장 H금융으로 향했다.---H금융 본사.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선 주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높은 건물을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주미는 굳은 얼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미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문 앞에 멈춰 섰다.부사장실.주미는 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곧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똑똑."들어오세요."문
서울의 OO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주미가 문자로 알려준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멈춰 선 지희는 문에 붙은 '박주미' 이름표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주미씨?"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발견한 주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 오셨어요?" "아니, 아니. 그냥 누워 있어요." 지희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왜 일어나려고 해요?" "괜찮아요. 아까 수액 맞고 나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주미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진짜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 저는 지희 언니 매니저 이지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초면에 누워 있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언니. 아참, 주미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야, 주미씨가 너보다 어리면 어쩌려고." "...지희 언니? 잘 못들었습니다?" "주미씨가 너보다 어려 보인다고. 안 그래요, 꼬춘씨?" "...음." "허! 형부까지 이러면 저 섭섭해요?" "푸흣..." 지희와 지아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주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나마 무거웠던 병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 사이, 독고춘은 조용히 주미의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주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왜 그러세요?" 그제야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젯밤부터 꿈을 꾼 겁니까?" "아, 네. 꿈이야 자주 꿨지만... 그런 이상한 꿈은 분명 어젯밤부터였어요." 지희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주미가 그런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자신들과 만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꼬춘씨. 뭔가 보여요?" 독고춘은
주미와 통화를 끝낸 지희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결국 서울로 가야겠네." 남은 휴가가 아직 이틀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쉬울 상황이 아니었다. 지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바라봤다. 독고춘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잘도 자네." 지희는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꼬춘씨." 그녀가 살짝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대답이 없었다. "꼬춘씨, 일어나요." 지희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왠일이래."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던 순간, 덥석. 독고춘의 손이 지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앗!" 푹! 지희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잠결에 움직인 독고춘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어머머..." 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춘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누워버린 상태였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독고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꼬춘씨? 지금 뭐하세요?" 지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익... 하! 진짜 꼼짝도 못 하겠네. 힘이 얼마나 쎈 거야. 이봐요! 얼른 일어나라고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지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아니, 하... 이게 무슨 꼴이야." 그때,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짜잔! 지아 등!...장..." 지아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 지아는 눈을 껌뻑껌뻑 거린 뒤, 소파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잠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러브러브 일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그 말에 지희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헉...!"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꿈이었다.분명 꿈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하아..."주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은정이의 뒷모습과 자신을 휘감던 검은 연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까지 모든 장면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그때였다."주미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주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엄마?""왜 그렇게 놀라? 계속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고. 악몽이라도 꿨어?""...아니, 아니야."주미의 어머니 한정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너,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픈거야?""괜찮아, 엄마. 지금 몇 시지?"주미는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평소라면 이미 출근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아, 회사 가야지."주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휘청.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정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주미야!"주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끝까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그녀는 딸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오늘 회사 가지 마.""엄마, 나 정말 괜찮아.""괜찮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주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섰다.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뒤 의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검사 결과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정말 괜찮은 건가요? 애가 쓰러질뻔 했는데.""네. 다만 최근에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면서 수액 치료를 받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바닷물에 젖은 발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먼저 씻고 나온 지희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을 손에 들었지만 화면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SNS를 확인하거나 연예 쪽 기사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따라 손가락만 괜히 화면 위를 움직였다.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욕실 쪽을 바라봤다.아직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지희는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지금까지 독고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었고, 촬영장에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오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 앞에 그에게 안겨 호텔 로비까지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가장 어색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지희는 괜히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았다."...왜 이러지."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철컥.욕실 문이 열리고 독고춘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지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독고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해졌다."..."독고춘 역시 지희를 잠시 바라봤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잠시 동안 눈이 마주치자 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독고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직도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뭐, 그렇긴 한데...아 몰라요, 몰라."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벌러덩 누웠다.독고춘은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지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이번에도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껐다.옆에 있는 독
저녁 노을이 바다 위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호텔 레스토랑 창가. 붉게 물든 석양이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희는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땅 꺼지겠군." "아, 진짜!" 지희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 "그럼 안 쓰이겠어요?" 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이 엄마 친구잖아요.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아오, 진짜." 지희는 결국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꼬춘씨는 걱정도 안돼요? 분명 주미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는 별일 없을거다." "하아,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짙푸른 밤하늘 위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던 지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독고춘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한숨이군." "안 쉬게 생겼어요?" 지희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원래 휴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되잖아요." "...음." "근데 오늘은 머릿속이 엉망이에요." 지희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툭 걷어찼다. "고은정씨 일도 그렇고... 주미 씨도 계속 신경 쓰이고." "...신경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텐데." "알아요." 지희는 피식 웃었다. "근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예요." "..." "꼬춘씨처럼 뭐든 무덤덤하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잔잔한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 후, 나지
하얀 눈이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CF 촬영 현장. 지희는 새하얀 코트를 입고 조명 아래 섰다. “하나, 둘, 셋— 액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조명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갑자기 칼로 찌르듯한 통증이 복부에서 폭발했다. “으—!” 지희가 비명을 억누르며 몸을 굽혔다. “컷! 컷! 지희 씨!” 깜짝 놀란 스탭들이 우르르 지희에게로 달려왔다. 부축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순간에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지아는 "언니!"언니!"를 외치며 지희에
촬영장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이 지희의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지희의 표정에는 묘한 긴장이 스며 있었다. “컷! 방금 좋았는데 지희씨 표정이 살짝 굳었어! 자자, 다시 한번 갈게요!”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희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배 안쪽에서 찌릿하고 통증이 올라왔다. 손이 본능적으로 아랫배로 향했다. “지희 씨 괜찮아요?” 조명팀의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네, 괜찮
밝은 조명들이 환히 비춰주는 서울의 밤 열한 시. 지희의 아파트 창밖으로 고속도로 차량의 불빛이 물결처럼 번졌다. 거실 한쪽엔 트로피와 화보, 광고 포스터가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것에도 따뜻함은 없었다. 지희는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눌렀다. 또다시 따끔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며칠 전보다 더 자주, 더 깊이. '그 아이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였느니.계속해서 네 속을 찌를게야.' “말도 안 돼. 그딴 소리 들으려고 내가...” 지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
그날은, 평소보다 안개가 더 짙었다. 산 입구에서 낯선 차 한 대가 멈춰섰다. 그리고, 두 여자가 내렸다. 한 명은 마치 화면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했다. 도시의 공기 대신 향수를 두른 듯한 여인. 긴 다리, 완벽한 비율, 그리고 어디서든 시선을 잡아끄는 도도한 분위기. 그녀의 이름은 강지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이자, 대기업의 자녀로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여자였다. 그 뒤를 따라 내리는 또 한 사람, 조심스럽게 안경을 고쳐쓰며 뒤따르는 매니저 이지아. 작고 말랐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으로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