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지훈은 웃으며 말했다. “형, 언제부터 그렇게 가십거리를 좋아했어?”염지호는 그를 걷어차며 정색해서 말했다.“기억해, 오늘 일을 망치면 안 돼. 망치면 널 죽여 버릴 거야.”“알았어, 형!”탕비실에서 은은한 차 향기가 피어오르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국내 최고 대기업의 기술 재개 생사가 결정되었다.이야기가 거의 무르익자 염지훈은 담배를 핑계 삼아 탕비실을 나섰다.유강후의 사옥은 작지 않았다. 족히 수백 평은 되어 잠시 둘러보던 중 염지훈은 온다연의 작은 베란다에서 그녀를 보았다.온다연은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고양이를 안은 채 베란다 의자에 앉아 그를 지켜봤다.날씨가 추워서 그녀는 하얀 캐시미어 담요를 두르고 있는데 검은 머리와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이 유난히 빛났다.그녀는 고양이를 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염지훈을 지켜보다가 그가 가드레일을 뛰어넘어 베란다에 들어서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괜찮아졌어요?”염지훈은 쯧쯧 하다가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걱정하는 거야?”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하얀 손가락으로 품에 안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새끼 고양이는 처음 데려왔을 때보다 좀 컸는데 그래도 아직 약해 보여서 야옹야옹할 때 매우 귀여웠다.남자의 큰 몸집에 조금 위험을 느꼈는지 고양이는 고개를 들어 염지훈을 향해 몇 번 야옹야옹하다가 온다연의 품에서 불안한 듯 발을 움직였다.염지훈이 앞으로 나아가 고양이를 그녀의 손에서 들어 올려 손으로 쿡쿡 찌르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요 작은 것이 널 좀 닮았어.”고양이가 그의 손에 들려 허공에 매달려 계속 울며 발버둥 치는 모습이 좀 불쌍하다.온다연은 초조한 마음에 일어나 고양이를 빼앗아 오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내 것이니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요!”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담요가 바닥으로 미끄러지면서 원피스만 입은 얇은 몸매가 드러났다.염지훈은 허리를 굽혀 담요를 주워 그녀의 몸에 걸쳐주었다.“이렇게 입으면 안 추워?”온다연은 아까의 찬 공기에
갑자기 귓가에 불어온 따뜻한 바람에 온다연은 간지러워서 무의식적으로 반감을 가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염지훈과의 거리를 벌린 후 경각심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았다.“뭐 하려는 거예요?”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와 강제로 그녀의 손가락을 휴대폰 잠금화면에 가져다 댔다.그러자 휴대폰 잠금이 곧바로 풀렸다.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다시 그 번호에 전화를 건 뒤 그는 자신의 카톡을 추가했다.이 모든 걸 다 마친 후 그는 휴대폰을 침대에 던졌다.온다연은 고양이를 안고 염지훈과 반메터 떨어진 곳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얇은 앞머리가 이마를 덮어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염지훈의 시점에서는 온다연의 붉고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 옆에 있는 작고 연한 점만 보였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염지훈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온다연을 보면서 말했다. “감히 내 카톡을 삭제한다면 그날 저녁에 우리 둘이 같이 있었던 거 네 삼촌한테 말할 거야.”온다연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염지훈 씨, 유하령이랑 사귀면서 제 카톡을 몰래 추가하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그녀의 말을 들은 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난 이것보다 너와 네 삼촌의 사이가 더 이상한 것 같은데.”그의 말에 놀란 온다연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냥 제 삼촌일 뿐이에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염지훈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고양이와 노는 시간까지 제한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고?”온다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고양이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염지훈은 점점 앞으로 다가가 온다연을 벽까지 밀어붙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온다연, 그 사람이 정말 네 삼촌 맞아?”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온다연은 하는 수 없이 바닥을 보며 대답했다. “제 삼
그녀는 정말 예뻤다. 눈동자도 까매서 지금처럼 한 사람을 진지하게 응시할 때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 같아 보였고, 깊은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마치 눈앞의 사람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염지훈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그녀의 허리를 끌어 자신의 곁에 붙게 한 다음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누가 너한테 이런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보라고 했지?”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억울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속눈썹을 약간 떨면서 망설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언니의 남자친구잖아요. 그러니까 이러지 마세요. 이거 놔요.”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꼬리를 올렸다.“이렇게까지 선 그을 필요 있어?”온다연은 바닥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유씨 가문의 사람들은 절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남자친구를 빼앗을 생각은 없어요.”염지훈은 눈을 가늘게 뜬 뒤 온다연을 놓아줬다.그는 키가 매우 컸다. 유강후와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이렇게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온다연은 그가 부담됐다. 온다연은 머리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하지도, 염지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염지훈은 그런 그녀를 주시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감히 못 빼앗는 거야, 아니면 빼앗기 싫은 거야?”온다연은 재빨리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본 후에 다시 피했다.눈을 피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수줍음이 어려있었다.염지훈은 마음이 간질거려 그녀의 턱을 잡고는 단호하게 말했다.“대답해. 못 빼앗는 건지, 안 뺏는 건지.”온다연은 그를 보지 않고 아래를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제 방에 언제까지 머물 생각이세요?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요?”그녀의 물음에 염지훈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몇 번 더 만졌다.“나는 누가 봐도 괜찮은데, 넌?”온다연은 그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간이 얼마 지났는지도 모르고 그녀는 괴로움이 사그라진 다음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창가 옆의 소파에 앉아있는 유강후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유독 날카롭고 차가웠다. 온다연은 그 시선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 몸 둘 바를 몰랐고 소름이 끼쳐 뒤로 작게 물러섰다.처음부터 지금까지 유강후는 그녀의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뼛속까지 스며든 것이고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 듯 유강후 앞에서의 온다연은 모든 것을 드러내놓는 벌거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마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사람처럼 무력했다.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등 뒤로 숨겼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저씨, 일 얘기를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얘기가 다 끝난 거예요?”그녀의 손에 머무른 유강후의 시선은 더 침울해졌고 그는 얼음이 맺힐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누가 네 방에 들어왔었어?”온다연은 깜짝 놀라 몸을 퍼뜩 떨었고 등 뒤에 숨긴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저씨가 다 알게 된 건가? 아니면 염지훈 씨가 뭐라고 얘기를 한 건가?’하지만 그녀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온다연은 고개를 젓고는 살짝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이를 꽉 물고 있어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고 주변의 공기조차 냉랭한 기운을 띠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유강후가 화를 낸다는 전조였다. 온다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위험한 기운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고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이리 와!”유강후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또 거짓말을 하고 있어!’방금 염씨 가문의 둘째가 30분 정도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유강후는 그의 몸에서 익숙한 냄새를
유강후는 말없이 온다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강후가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온다연은 그의 기분을 느낄 수 있어 그의 행동과 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뚫어지게 쳐다만 보고 있을 때는 무척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다.유강후가 말하지 않을 때면 마치 조금의 숨결도 들키지 않은 채로 어두운 은신처에 숨어있지만, 행동을 개시했을 때는 신속하게 덮쳐와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야수와 같다고 온다연은 생각했다. 유강후의 이런 모습이 온다연을 두렵게 했다.온다연은 어떻게 해야 유강후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몰랐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유강후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온다연은 쭈뼛쭈뼛 고개를 들고 유강후를 보더니 다가가 천천히 그의 무릎에 앉았다.온다연은 그의 목에 손을 두르고 그를 보고 있었다. 지금 유강후의 얼굴은 냉랭하고 단단한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고 얇은 입술까지도 견고한 막을 친 것 같았다.온다연은 어찌할 줄 몰라 몸을 움직이다가 눈을 감고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그녀는 어떻게 입을 맞추는지 몰랐고 그저 그가 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가볍게 그의 입술을 머금고 조심스레 더듬었다. 하지만 유강후는 꿈쩍하지 않았고 몸이 살짝 굳은 것 빼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참 입을 맞추다가 유강후가 여전히 반응이 없자 온다연은 두려운 마음이 더 커졌다. 어쩔수 없이 입을 떼어낸 온다연은 고개를 숙였고 작은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해?”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온다연, 설명할 기회를 줄게. 만약 한마디라도 함부로 한다면 그 결과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할 거야.”유강후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짙은 분노를 눌러 담아 내뱉었고 이를 들은 온다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거짓말 한 적 없어요.”그녀는 잘못을
온다연은 가슴이 철렁하였지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없어요.”유강후는 꼼짝 않고 온다연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그녀의 생각을 모두 꿰뚫기라도 하듯 한참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짜 없어?”온다연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서러움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는 왜 자꾸 저랑 염지훈 씨를 함께 엮는 거예요? 제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잠깐 멈췄다가 그녀는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염지훈 씨는 하령의 남자친구잖아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할 일은 없어요.”유강후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다.“어디 한번 좋아해 봐!”유강후는 온다연의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물었다.“온다연, 네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걸 언젠가 내가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너도 잘 알 거야.”그 말속에는 엄중한 경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온다연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아저씨, 그럴 일은 없어요.”유강후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머리는 왜 또 안 말린 거야?”문득 그는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의 손목을 보고 눈빛이 변했다.“손은 왜 그래?”온다연은 손을 한번 보았다. 방금 염지훈이 잡았던 곳을 그녀가 세게 문지른 탓에 껍질이 살짝 벗겨져 있었다.“방금 구월이한테 긁혔어요.”유강후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앉힌 뒤 드라이기를 꺼내와서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은은한 로즈 향이 밀폐된 공간에서 퍼져 두 사람의 코끝을 맴돌았고 분위기도 점점 더 야릇해졌다. 지금 이 야릇한 느낌은 시작에 불과했다.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보름 사이에 겨울이 서서히 다가왔다. 경원시의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유강후의 집은 아주 따뜻했는데 꽃방에까지 보일러를 설치했다. 며칠 전에 온다연은 스치듯 해바라기와 붓꽃을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이튿날에 바로 열몇 개나 되는 최상급의 해바라기와 붓꽃 화분이 배송되었고 이들은
무언가 그녀를 일깨워주는 듯한 기분이었다.온다연은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그녀는 확실히 유씨 가문으로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그곳에서 챙겨야 할 그녀의 물건도 있었고 심미진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집사는 멍해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동안 잘 보살핀 덕에 살이 조금 붙은 모습이었지만 멍을 때리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가끔 이젤 앞에 앉아 두세 시간 멍을 때리기도 했다. 아무런 말도, 그림도 그리지 않고 그저 가만히 멍 때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집사는 온다연이 겉으론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긴 해도 멘탈은 훨씬 더 나약해졌다고 생각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와 집사가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네요. 다연 씨, 혹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도련님께 물어보세요.”말을 마친 집사는 꽃병을 들고 거실로 갔다.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고급스러운 마이바흐 한 대가 대문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기세가 남다른 남자가 내렸다.남자는 재질이 아주 좋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도 키가 커 보이고 차가운 분위기도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들어 꽃방이 있는 곳을 힐끗 보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온다연은 펜을 내려놓고 유리문을 열어 그대로 달려나갔다.몇 걸음 만에 그녀는 유강후의 품에 안겼다.집안은 아주 따듯했고 그녀는 품이 좀 너른 편안한 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다. 조금 얇은 옷감이었던 탓에 추운 한기가 그대로 옷을 뚫고 들어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추위에 몸을 덜덜 떨게 되었다.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품으로 안긴 그녀를 보더니 단번에 들어 올려 성큼성큼 꽃방으로 들어왔다.그녀를 커다란 책상 위로 내려놓은 뒤 다소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이렇게 얇게 입고 밖으로 달려 나온 거야? 네 몸 상태가 어떤지 정말 몰라서 그래?”온다연은 이미 그의 환심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팔을 뻗어 그의 목에 감으면서 나긋나긋 말했다.
역시나 그가 꽉 끌어안았던 곳에 빨간 손자국이 나 있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빨간 손자국을 보았다.“피부가 이렇게나 연약해서야. 또 붉어졌네.”온다연은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또 욕구가 들끓기 시작했다.가느다랗고 보드라운 그녀의 허리를 만지며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허리도 작고, 정말 부러뜨리고 싶게 만드네.”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가워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온다연은 그가 정말로 자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것만 같아 작게 중얼거렸다.“아저씨는 하나도 다정하지 않아요.”나른한 목소리에 유강후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빛마저 변했다.“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온다연은 더는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저씨라고 부르거나 가끔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평소에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들으니 묘하게 욕구가 끓어올라 그녀를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생겨났다.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작게 말했다.“아저씨, 유강후 씨.”유강후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겁도 없이.”하지만 목소리엔 다정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고 그녀를 혼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사실 지금 이런 순간에 온다연도 무감각한 것은 아니었다.유강후는 예전에 그녀가 제일 힘들었을 때 빛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고 이름만 들어도 감격스러웠다.그의 이름은 그때 그 시절 그녀에게 엄청난 희망을 안겨주었다.만약 두 눈으로 직접 어린 시절의 유강후를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그녀 같은 사람은 절대 이 세상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피라미드의 정상에 앉았을 뿐 아니라 외모도 훌륭하고 능력도 아주 좋았다.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 수 있었다.반면 그녀는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인이었다. 이런 사람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