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대문 앞에 멍하니 서서 유강후가 내민 손을 보았다.그는 검은색 양털 코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기품이 흘러넘쳤다. 눈이 내려도 그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아 어깨에 눈꽃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고귀하던 그에게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그 순간, 그녀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다연아, 이리와.”몇 년 전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남자도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그녀는 유강후를 빤히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빠르게 뛰면서 아프기도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더니 그대로 얼굴을 그의 코트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보고 싶었어요.”‘너무도!'차가운 눈꽃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져 녹아버렸다. 그 탓에 눈가가 촉촉해져 꼭 그녀가 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주한아, 보여? 첫눈이 내리고 있어.'유강후는 고분고분한 그녀의 모습에 아주 흡족해하고 있었다.그녀가 입고 나온 옷도 검은색 양털 코트였다. 머리를 올려 묶은 탓에 하얀 그녀의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연약하면서도 활력이 있는 모습이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고 있다가 몸을 돌려 차 안에서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쇼핑백을 꺼내 안에서 두 개의 체크 무늬 목도리를 꺼냈다.그중 조금 짧은 것은 그녀의 목에 따듯하게 둘러주었고, 남은 하나는 자신의 목에 둘렀다.두 사람은 분명 체형 차이가 있었지만, 나란히 서 있으니 이상하게도 어울렸다.꼭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가 없는 그런 분위기도 흘러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게 얽히고 얽혀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더 깊이 얽혀들 것이 분명했다.온다연은 부드러운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아저씨, 왜 자꾸 나한테 이렇게 좋은 걸 줘요. 난 아저씨한테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유강후는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나한테 선물 아니었어?
온다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확 들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유강후의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이따가 내 옆에 앉아. 다른 데 앉지 말고.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너랑 함께 물건 가지러 가줄게.”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는 그저 유강후가 갈 곳이 없는 온다연을 불쌍히 여겨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었고 온다연과 나이가 비슷한 여자들은 질투에 휩싸였다.다만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유강후의 관심과 편애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특히 유하령은 질투에 휩싸여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원래 오늘 그녀는 유강후와 오해를 풀고 다시 전처럼 친하게 지낼 생각이었고 그 김에 유강후에게 온다연을 내쫓으라고 설득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유강후가 온다연을 본가로 데리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다정하게 대하며 온다연을 챙겨주고 있었다.유강후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챙겨주고 아껴주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심지어 나은별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녀가 어릴 때부터 우러러보던 작은 아빠는 의자를 빼내며 온다연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 모습과 태도는 너무나도 다정했고 그녀조차도 받지 못한 대우였다.그런데 그 대우를 온다연 같은 천박한 사람이 받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한참 지켜보던 유하령의 안색이 점차 보기 흉하게 구겨졌다.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려던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하령아, 참아.”말을 꺼낸 사람은 이화평의 손녀 이효진이었다. 지금은 유민준의 약혼 상대이기도 했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힐끗 보곤 소곤거렸다.“저런 사람 하나 때문에 네 작은 아빠랑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잖아.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참아.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이따가 우리 함께 시도해보자.”비록 유하령과 이효진은 온다연의 사선 방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온다연의 머리만 쓰다듬고 서재로 갔다.유강후가 가버리자 장화연이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 씨, 우리 가요.”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유민준이 다가오며 말했다.“다연아, 눈이 많이 안 좋았다며. 지금은 괜찮아?”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말을 마친 뒤 장화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유민준은 그녀가 나가려 하자 다소 마음이 급해졌다.온다연이 집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온다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오늘 그녀가 입은 옷 때문인지, 아니면 유강후의 곁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더 많이 예뻐진 것 같았고 보면 볼수록 그녀가 더 좋았다.하지만 가족들과 이효진이 곁에 있었기에 아무리 온다연이 좋아도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온다연과 장화연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따라갔다.“다연아!”유민준은 온다연의 옷깃을 잡았다.“다연아, 나 너한테 따로 할 말이 있어.”유민준은 다소 급박한 얼굴로 말했다.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온다연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졌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온다연이 그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말이다.예전에 온다연은 심하게 다친 적도 있고 사라진 적도, 며칠 동안 본가로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가 찾으려고 하면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그녀가 사라졌었던 동안 그는 그녀의 소식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온다연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그녀를 너무도 좋아해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때 마음이 불안해졌고 쉽게 잠을 이루지도 못했고, 그녀를 너무도 좋아해 가족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녀를 찾아가 함께 있고 싶었다.온다연의 출신이 아직 문제였던지라 지금의 그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몸을 돌린 온다연은 담담하게 말했다.“할 말이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빤히 보았다.그녀의 두 눈은 원래부터 예뻤다. 머루알 같은 두 눈으로 유민준을 빤히 보고 있었다.그 눈빛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꼭 오래전부터 그를 원망하고 있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유민준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다연아, 너 사실은 날 좋아하고 있는 거지? 방금 한 말은 홧김에 일부러 한 말이지, 그렇지? 내가 다른 여자랑 약혼한다니까, 내 약혼자가 계속 널 괴롭히니까 화가 나서 그런 거지?”어두운 불빛이 유민준의 잘생긴 얼굴에 내려앉았다.사실 그와 유강후는 조금 닮아 있었다. 두 사람 전부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유민준에게선 유강후와 같은 범접할 수 없는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고 상위 포식자 같은 위압감도 없었다.간단히 말해 유민준은 유강후의 질 낮은 버전이었다.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온다연은 아이러니했다.유강후와 유민준은 외모가 닮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이 많은 성격도 닮아 있었다.분명 약혼자가 있음에도 두 사람 모두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비뚤어진 감정이 생겨났다. 그 감정은 빠르게 그녀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이용해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다.‘그래, 마음껏 좋아하고 있어. 네가 날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넌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될 테니까!'온다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앞머리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려버린 탓에 유민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은은한 불빛 아래 고개를 숙이며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선을 보니 유난히도 예쁘고 가늘어 보였다.유민준의 시선에서 마침 그녀의 예쁜 목선과 살짝 흔들리는 속눈썹을 볼 수 있었다.하얗고 예뻐 그의 소유욕을 자극했고 당장이라도 괴롭혀 울려주고 싶었다.유민준은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제일 가치가 없는 것이에요. 나를 좋아한다면서 어릴 때부터 괴롭히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
온다연은 두 눈을 꼭 감고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을 꺼냈다.이렇게 해야 그녀는 더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고, 더 괴로워해야 더 많은 힘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방금 한 말이 진실 반 거짓 반이었다면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전부 그녀의 상처이자 괴로운 악몽일 것이다.“이효진은 사람을 시켜 절 골목으로 끌고 가 남자 세 명이 내 옷을 찢어버렸어요. 만약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해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골목에서 그 사람들에서 치욕스러운 짓을 몇 번이나 당했을지 모르죠.” “어디 그뿐일까요? 전교생이 있는 앞에서 한겨울에 얼음물을 저한테 부었어요. 그 덕에 전 고열에 시달렸고 폐렴도 걸려 3개월 동안 치료해서야 나을 수 있었어요.”“사람을 시켜 때리고 배를 걷어찬 탓에 전 지금도 자주 피를 토해내요. 전부 이효진이 한 짓 때문에요!”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유민준은 괴로웠고 결국 입을 열었다.“그만해, 다연아. 제발 그만 말해.”온다연의 눈빛은 너무도 냉랭한 나머지 꽁꽁 얼어버린 얼음 같았다.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을 뿐 아니라 주한까지 건드려 죽게 했다.가해자들이 잘살고 있는 꼴을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란 말인가. 그녀에게 유일하게 잘해주었던 사람마저 죽여버렸는데...그녀에게 치욕을 안겨준 사람과 주한을 죽게 만든 사람 전부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복수할 생각이다.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민준은 다시 불안해져 그녀를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다연아, 난 전혀 몰랐어. 널 괴롭히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렇게 심하게 괴롭힐 줄은 정말로...”온다연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괴롭히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심한 줄은 몰랐다니요.”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촉촉해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민준 오빠, 전 오빠를 이해할 수 있어요. 오빠는 제 이모가 오빠 어머니를 죽게만 든 것 같아 저한테 화풀이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전 이해해요. 시간이 흐르면 오빠를 용서해줄 수 있을
“온다연, 대체 왜 네 이모를 밀어버린 거야? 네 이모는 임신 중이었잖아. 꼭 그렇게 밀었어야 했어?”온다연은 고개를 확 들어 이효진을 보았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이효진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온다연, 너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가 있어? 그분은 네 친이모잖아!”그녀의 웃음에 온다연은 이효진이 악마처럼 느껴졌다.예전에도 그들은 오늘처럼 그녀를 괴롭히고 치욕을 안겨주었고 옆에서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겁게 웃었다.꼭 다른 사람의 목숨은 그들의 눈에 별것 아닌 장난감처럼 여기고 있었다.이때 심미진이 소리를 내었다.“피, 피가 나. 어떡해 내 아기...”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보았다. 심미진은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다리 사이엔 붉은 피가 새어 나와 바닥을 적셨다.“배, 내 배!”“내 아기, 내 아기 살려줘!”깜짝 놀란 온다연은 바로 몸을 굽혀 심미진의 배를 만지며 다급하게 말했다.“이모, 괜찮을 거예요! 제가 지금 바로 구급차 부를게요!”심미진의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했고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온다연은 다급하면서도 행여나 심미진의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웠다. 핸드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때 유하령과 이효진이 내려왔다.유하령은 온다연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확 던지며 차갑게 웃었다.“온다연, 만약 네 이모가 유산하게 되면 우리 아빠가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 이모의 아기는 우리 아빠의 아들이거든!”온다연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핸드폰을 다시 주운 뒤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액정이 망가져 작동되지 않았다.소란을 들은 사람들이 전부 거실로 나왔다.유민준도 달려 나왔다.강해숙도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언성을 높였다.“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얼른 병원에 보내야지 멍청하게 서서 뭣들 하는 거니? 얼른 구급차 불러!”장화연이 온다연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기며 작게 물었다.“다
유하령이 차갑게 웃으며 비꼬았다.“온다연, 네 이모도 네가 밀었다고 말하잖아. 그런데도 아니라고? 그럼 설마 네 이모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니?”온다연은 유하령을 보지 않았다. 그저 심미진만 빤히 보고 있었다.그녀는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처럼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손으로 막아도 피는 계속 흘러나왔다.갈라진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모, 그러면 좋은 거예요?”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온다연의 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허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일어날 수가 없었고 그저 배만 감싸 안은 채 고통 속에서 구급차만 기다렸다.구급차가 오고 도우미가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그녀의 다리 사이에선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구급차로 가는 도중에도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온다연은 그녀가 흘린 피를 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모,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로 이모가 편해질 수 있다면 내가 한 거로 할게요. 이 일로 앞으로 더는 이모한테 빚진 거 없는 거예요. 앞으로 이 집안에서 이모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길 바랄게요.”말을 마치자마자 강해숙이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어. 이런 일을 벌이고 자기 이모한테 더 이상 빚진 거 없다고? 하, 넌 우리 집안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굶어 죽었을 애야!”강해숙은 지팡이로 바닥을 쾅쾅 치면서 화를 냈다.“자기 친이모마저 계단에서 밀어버리는 악랄한 인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당장 경찰에 신고해!”“미진이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넌 바로 감방에 가는 거야!”“다들 뭐해, 얼른 쟤 잡아!”말을 마치자마자 도우미 두 명이 다가오며 온다연을 잡으려 했다.장화연은 온다연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말했다.“세 사람의 말로만 다연 씨가 밀었다고 확신하는 거예요? 증거도 없이요?”강해숙은 분노에 휩싸여 온다연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쟤 이모가 직접 말했잖아, 쟤가 밀었다고. 설마 우리가 누명을
장화연의 안색이 변했다. 입을 열려던 순간 이미 도착해버린 경찰이 대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빨간색과 파란색 등이 번쩍번쩍 빛나면서 온다연은 눈이 따가워 저도 모르게 찌풀 했다.그녀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 되었다. 귀에서는 알 수 없는 이명이 들려오고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과 이마엔 식은땀이 났다.빠르게 제복을 입은 경찰이 다가오며 현장은 시끄러워지게 되었다.온다연은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꼭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여러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와 따져 묻는 말을 듣고 있으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다만 그녀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고 주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장화연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과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있잖아요. 도련님께선 절대 다연 씨를 감방에 보내지 않을 거고 저도 지금 다연 씨랑 함께 갈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장화연의 그녀의 손을 얼마나 세게 잡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은 경찰차 옆까지 끌려오게 되었고 장화연도 다른 차량에 올라탔다.이때 유민준이 달려 나오며 온다연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다연아, 왜 밀었어? 네 친이모잖아!”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유민준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빠는 제가 그러지 않았다는 거 알잖아요, 맞죠?”그녀는 이토록 유민준이 미웠던 적이 없었다. 그가 너무도 미워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기를 바랐다.그를 빤히 보는 그녀의 두 눈엔 원망이 가득했다.“민준 오빠는 이모 아기가 태어나지 않길 바랐잖아요. 이모가 유산하면 제일 큰 이익을 얻게 될 사람은 누굴까요? 사실은 제가 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모든 걸 제가 뒤집어쓰길 바라는 거죠, 그렇죠?”유민준은 온다연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다소 놀란 표정을 지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