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당장이라도 무언가 부술 것 같은 분노가 서린 얼굴이었다.전에는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그의 기세에 연화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네가 감히 나를 떠나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고저 없는 그의 목소리는 먹잇감을 앞에 둔 산군의 모습과도 같았다.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를 망칠 수도 있기에.“제가 사라져야 전하께서 살시고, 전하께서 사셔야 제가 살 수 있습니다.”“안 된다.”“……”“불허한다.”“이번만은 소인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연화야!"“전하께서는 이 관계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그래. 제가 많이 힘들었겠지.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방법을 찾지 못해서… ”치솟았던 분노가 어느새 죄책감으로 변해, 그는 애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소인을 놓아주십시오. 떠나고 싶습니다. 전하.”그녀의 단호한 태도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나는 절대 너를 떠나보낼 수는 없어. 네가 원해서 동궁전으로 너를 보내주었다.그것만으로도 내겐 힘든 결정이었어. 더는 안 된다.더 멀리는 안돼. 나는 너를 보낼 수는 없어.”“전하. 사사로운 감정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감정일 뿐입니다.”“아니다! 네가 없으면 나는 당장… 나는… 살 수 없단 말이다. 연화야.”작아진 그의 어깨를 보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럴수록 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이제 지쳤습니다. 누군가의 그늘인 채로,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지쳐버렸습니다. 전하를 연모하는 그 마음하나로 버틴 세월입니다. 더 이상… 더 이상은 힘이 들어 버틸 수가 없습니다.”“그래. 힘들었겠지.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으냐? 당장이라도 너를 내 후궁으로 들이면 되는 것이냐”“전하! 어찌 그런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 말 한마디에 닥칠 파장들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그렇겠지. 폭풍이 몰아칠 테지, 하지만 네가 나를 떠나는 고통만 하겠느냐
"소인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홍연의 굴복에 정귀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쩔 도리가 없을 테지.화산처럼 폭발하던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잘 생각했다. 전하께 내 얘기는 하지 말고, 알아서 떠나거라. 입을 잘못 놀려 전하께서 오늘 너와 나의 일을 알게 되는 날에는, 나 혼자 죽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잘 판단하여 처신하거라.”연화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리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상상을 해왔던 일이다.그러나 막상 이 순간이 닥치자,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다.물러나야 했다. 그를 위해서.“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귀인 마마께서도 꼭 약조를 지켜주십시오. 전하께서 고초를 겪지 않게 하시겠다고요.”“당연하지. 주상 전하께서는 내 지아비신데, 어찌 그리되길 바라겠느냐.그리고 이제 그것은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니, 어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거라.”자신의 처소를 나서는 그녀를 보자 입술이 휘어지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당당하던 품이 한낱 볼품없는 여인이 되었다.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신이 난 적은.‘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구나. 이제 저것이 사라졌으니 전하께서는 분명, 나를 찾게 되실 거야. 이번에 정말 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놓치서는 안돼.’정귀인은 왕의 옆에서 서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꽉 찬 달은 밝고 아름다웠다.그런 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화의 마음은 어두웠다.‘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이내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언젠가는 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비밀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애써 외면해 왔던 그 일이 닥치고야 말았다.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자신이 떠나야만 겸이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떠나는 자신을 겸이 쉽게 보내줄 리도 만무했다.슬픔도 잠시, 연화는 그에게 어떻게 떠나야 할지 막막한
시는 겁니까?”연화는 오히려 강하게 그녀에게 반박을 하기로 했다. 감히 입에 담지 못한 말을 한 그녀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다.“예? 어찌 그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말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혹여, 누가 들을까 저어 되옵니다. 마마께서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그의 당당한 태도에 정귀인은 살짝, 겁이 났다.설마 아니라면, 그의 말대로 어마어마한 뒷감당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하지만 그녀는 이미 잃을것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생각이 꼭 맞을 것 같은 어떤 확신이 있었다.정귀인은 그의 겁박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더 궁지에 몰 생각이었다.“그렇다면... 그대가 여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까?”바닥에 내다 꽂혔던 심장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바스러지기 시작했다.연화는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다.‘말리면 안 돼. 정신 차려, 홍연화!’“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아까는 전하의 정인이 아니냐 물으시더니, 여인이라니요!”홍연의 목소리는 변함없는 듯했지만, 정귀인은 더욱 확신했다.표정을 읽히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꽉 쥔 모습은 평소에 보던 당당한 홍연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홍 판서 대감댁에는 서자가 없다 하더이다.”“!”“그리도 그대가 당당하다면, 내 앞에서 옷을 벗어보세요. 그렇게 결백을 증명해 보세요!”“……”“못하겠으면, 아랫것들을 시켜 벗겨드릴까?”비웃는 입매와 서슬 퍼런 눈빛에 연화는 더 이상 제정신을 바로 붙잡을 수 없었다.“마마… 어찌… 외간 사내의 옷을 벗으라 하십니까?”정귀인은 그녀의 연극에 진저리를 쳤다. 이미 너는 표정에서 다 들켰어!“그 뒷감당은 내가 하겠습니다. 간통으로 나를 쳐 죽인데도 감당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어쩌시렵니까?”연화는 들지 못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여기서 모든 걸 인정하고 그대가 물러난다면, 그대를 욕
명화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정귀인은 뒤죽박죽 얽혀 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명화의 이야기로 자신이 품었던 의구심이 하나씩 아귀가 맞아가는 것 같았다.생각이 정리되자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휘어졌다.정귀인의 표정을 읽고 명화가 물었다.“마마, 뭐 짚이시는 거라도…?”“그래, 이제야 알겠다. 홍양 대감의 서자라는 호위무사… 하지만 홍양 대감댁에는 세 아들 외에 다른 사내는 없는데.. 의문의 여인이 있었다라...그렇다면 전하의 호위무사가 홍양 대감의 서자가 아닌 서녀라면?""예?""그렇다면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느냐? 전하께서 홍양 대감의 서녀를 호위무사로 들이셨고, 그 전이든 그 후든 간에 전하께서 그 여인을 연모하게 되셨다면… 중전이나 내가 없어도 되셨겠지. 밤마다 침소로 그 년을 데려오면 되니 말이다.”"홍연대장이 여인이라는 말씀이세요? 말도 안 됩니다!""이제 보니 몸도 무인치고는 여리하고 얼굴도 곱상하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그것이 아니라 여인이 어찌 호위무사를..""그거야 더 알아보면 되겠지. 앙큼한 년이 아니냐?"정귀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로 늘어놓자 사실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점점 화가 오르기 시작했다.'비천한 서녀주제에 성별까지 바꿔가며 전하옆을 꿰차고 앉아있던 거야?'화가 내기기 위해 정귀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벌컥벌컥 올라오는 분노에 찬물을 들이켰다.이야기를 듣던 명화도 말이 안 된다 싶으면서도, 논리적으로는 너무 들어맞는 이야기여서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마, 증좌가 없지 않습니까? 옷을 벗겨볼 수도 없고, 전하께 직접 여쭐 수도 없고요…”“맞아. 증좌가 없지. 그러니 도박을 하는 수밖에… 명화야, 네가 홍연을 만나고 오너라.” “예? 소인이요? 가서 뭐라 해야 할까요?”“네가 뭐라 할 수 있겠느냐? 그저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하거라. 지금 당장!”“예, 마마.”명화는 상전의 불호령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잽싸게 동궁전으로 발걸음을 재촉
처소로 돌아온 정귀인이 자리에 앉아 좀 전에 후원에서의 장면을 떠올렸다.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며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그런 정귀인에게 명화가 슬며시 말을 걸었다.“마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명화야, 홍연이 말이다.”“예, 마마.”“그 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예? 홍연 대장이라면… 전하께서 세자 시절부터 함께하시던 호위무사가 아닙니까?”“그것은 나도 안다. 그 외에는?”“그야… 인기가 많으시죠. 특히나 나인들한테 인기가 많으십니다.전하와 홍연 대장이 대련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궁 안의 모든 나인이 구경하러 갈 정도니까요.그 고우신 얼굴로 칼을 휘두르실 때 또 얼마나 멋지신지…”“그런 얘기 말고! 다른 건 없느냐?”“예… 워낙 다른 궁인들과 교류가 없으셔서… 호조판서인 홍양 대감 댁 서자라는 건 아시지요?”“뭐? 홍양 대감의 서자?”“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관시험을 따로 보지 않고, 전하께서 세자 시절에 특별히 데려오셨답니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별다른 직책도 없으셨고…”“근데 아까 보니 세자와 함께 있던데?”“예, 최근에 동궁전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합니다.”“갑자기 왜?”“글쎄요. 거기까지는 잘…”잠시 생각에 잠긴 정귀인이 눈을 번뜩이며 명화에게 이야기했다.“명화야, 은밀히 홍연 그 자에 대해 알아오너라.”“예? 갑자기 홍연 대장님은 왜…”“그 자… 뭔가 있다.”“무엇이 말입니까?”정귀인은 그들 사이에 오가던 미묘한 감정들을 떠올렸다.“홍연을 바라보던 전하의 눈빛 말이다.”“눈빛이요?”“그래. 전하의 그런 눈빛, 미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건 중전과 있을 때도 마찬가지셨고…”명화는 눈을 끔뻑 거리며 정귀인의 말을 해석하려 했지만, 도무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예? 마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내가 잘 알지. 연모하는 이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빛과 행동 말이다. 사가에 있을 때, 뭇 남성들이 나에게 보내던 그 수많은 눈빛과 행동들… 모
“허나… 전하께서는 중전마마의 침소에도 합궁일 이외에는 찾지 않으신다 들었습니다.”“알고 있다. 중전마마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더욱 궁금하지 않으냐?”“마마, 어쩌시려고요?”제 상전의 성품을 아는지라 명화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일단, 대전 나인들에게 아는 것이 없는지 물어보거라.”“안 그래도 소인이 여러 번 채근하여 전하의 근황을 물었습니다.허나… 대전 나인들이 입이 어찌나 무겁던지… 대전 안에서의 일은 입도 뻥긋 안 하지 뭡니까.”“뭐라도 좀 찔러 주면서 하란 말이야! 이 맹충아!”정귀인은 장을 열어 옥반지 몇 개를 그녀 앞에 툭 던졌다.“예… 마마…”“그리고 전하께서 후원으로 산책을 자주 나가신다지?”“예, 그렇다 들었습니다.”“전하께서 언제 산책을 나가시는지 그것도 알아보거라.”“그것은 왜…”“뭐라도 해야 하니 그렇지! 모르겠으면 그냥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묻기는 뭘 그리 묻는 게야?”“예… 마마…”“왜 그리 앉아 있어? 굼떠가지고는…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 해?”상전의 불호령에 명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예, 마마. 바로 나가보겠습니다.”정귀인에게 혼쭐이 난 명화가 빠르게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누군가를 마음에 품지 않고서야… 내가 아니더라도 여인에게 일절 관심이 없으시니… 분명 뭔가 있어…’점심 수라를 마친 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김 내관! 이 시간에 세자도 후원에서 산책을 한다지?”“예, 전하. 지금쯤 동궁전 후원에 나와 계실 겁니다.”“그래. 그럼 과인도 세자도 볼 겸 산책을 좀 해야겠어.”그는 설레는 마음은 안고 대전을 나서 후원으로 향했다.세자도 보고 싶고, 연화도 보고 싶었다.그 마음이 발걸음에서 드러났다. 겸의 걸음은 평소보다 빠르고 가벼웠다.머지않아 멀리 세자와 연화가 그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세자를 불렀다.“세자!”한참 꽃구경을 하던 세자가 겸의 부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아바마마.”달려오는 세자를 겸이
쿵쿵쿵- “또 밥을 다- 남기셨네! 이러다 정말 죽는다니까요!” 문 앞의 밥상 앞에 앉아 막둥어멈이 큰 소리를 쳤다. 누군가가 꼭 들으라는 듯이. “안 먹을 테니 헛수고 말고 가져가!” 방 안쪽에서도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그들의 바람이 통하기라고 한 듯, 홍양이 연화의 방 앞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막둥어멈이 자리를 비켜서자, 홍양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풀었다. 덜컹-문을 잡아당겼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당황한 홍
"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실언을 했다 하지 않았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연화는 순식간에 영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화야!" 놀란 홍문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칼은 영도에게 겨눠지고 있었다. 영도는 재빠르게 다시 칼을 뽑아 그녀의 칼을 막아냈다. 챙! "받아주는 건 여기까지요. 이제 그만하시오. 더는 나도 참지 않겠소!" 영도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다. 무슨 여자가 이리도 드센지… 그렇다고 해도 여인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그렇소." 겸 또한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여기 보다 높으신 분?” 턱으로 관리를 가리키며 묻는 연화를 향해 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요. 여기! 여기 좀 보십시오." 연화는 꼬깃해진 벽보를 겸 앞에 들이밀었다. "여기 누. 구. 나. 무술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소만?" "헌데 왜 저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합니까?" 겸은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관찰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
이곳은 고립된 전장이며, 그의 곁에 선 유일한 여인이기에 그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다짐했으며, 신실한 약조를 했으니까. 그를 위해 무엇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기에 망설이지 않았다.겸은 자신의 팔에 연화를 뉘었다. 그리고 팔을 감아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득 안았다. 숨을 고르는 그들의 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겸은 담요를 끌어와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체온이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