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은 밤새 잠을 설쳤다. 몇 번을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심지어 약을 먹었지만 위장은 여전히 불편했다.
몸이 이미 윤슬이 해준 음식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별것도 아닌데, 괜히... 속이 더 쓰리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강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깐 거실로 나가려던 순간, 맞은편 문이 딸깍 열리며 윤슬이 나왔다.
두 사람은 딱 마주쳤다.
“뭐 하게?”
강현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윤슬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아침 준비.”
말을 마치자마자 살짝 절뚝이며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강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매일 일어났을 때 식탁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걸 누가 몇 시에 준비하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시간에 늘 혼자 깨서 이렇게 움직였던 거야?’
그 뒷모습이 어딘가 작고 힘없어 보였다.
“그만해. 안 해도 돼.”
강현의 말에 윤슬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2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야. 그만하라는 말...’
‘난 여태 고열에 시달릴 때도, 몸살이 났을 때도 밥은 꼭 해야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의미지?’
잠시 착각했다.
윤슬은 고개를 숙인 채 다친 발을 바라보며, 강현이 미안한 마음이라도 든 줄 알았다.
하지만 강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저녁도 안 해도 돼. 신아랑 나가서 먹을 거니까.”
그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차 키를 들고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윤슬은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난 뒤,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하... 내가 또 착각했네. 양심이란 게 있을 리 없지.’
‘그 사람한테 그런 거...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주방 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잘 됐어. 차라리 안 하는 게 편해. 이젠 나도 지쳤으니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윤슬은 조금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전 8시쯤.
일어나자마자 상처 부위에 다시 연고를 바르려 약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늘 있던 위장약이 보이지 않았다.
‘어라? 다 쓴 건 아닐 텐데.’
문득 어젯밤 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새벽에 강현이 왔다 간 걸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때 제대로 잠갔는지 확신이 없었다.
‘설마... 들어와서 가져간 거야? 아무 말 없이?’
뭐라고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노트북을 들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오전엔 온라인 학습 플랫폼에 접속해 대학 때 공부했던 전공과목을 복습했고, 오후엔 직접 코딩을 해보며 디지털 드로잉도 병행했다.
그래픽 태블릿 위엔 한 캐릭터가 점점 살아 움직였고, 배경 스케치는 디테일하게 완성되어 갔다.
‘복잡한 이론은 좀 잊었지만, 손은 그림을 기억하고 있네.’
2년 동안 윤슬은 외출을 제한당했고, ‘부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은, 그저 집 안에 머무는 이유로 작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그림만은 놓지 않았다.
가끔 익명으로 작업을 올렸고, 소소하게 수익도 챙겼다.
팔로워도 조금씩 늘어났다.
‘하긴... 나는 그렇게라도 버텨왔었지.’
...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황빛 햇살이 창가를 스쳤다.
윤슬은 컵에 물을 따르며 간단히 외식을 주문하려 핸드폰을 들었다.
바로 그때, 현관 도어락에서 소리가 났다.
삑-
윤슬의 눈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이 ‘딸깍’ 열리더니 가장 먼저 들어온 얼굴은 신아였다.
“윤슬아! 나 왔어! 몸은 좀 어때? 많이 괜찮아졌지?”
활짝 웃으며,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강현은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윤슬은 아무런 말도 없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고개를 숙인 채 다시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게 무슨 코미디야? 나 때문에 다친 척하던 사람이 이젠 집까지 찾아와? 보아하니 여우짓 하러 온 거네.’
신아는 윤슬이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과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윤슬아... 아직도 화났어? 나 진짜 그런 뜻 아니었어.”
그 목소리는 한없이 순하고, 한없이 억울한 듯했지만, 윤슬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그때 강현이 나섰다.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윤슬, 뭐 하는 거야? 신아가 널 걱정해서 찾아온 건데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되지.”
‘걱정? 정말이지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부터가 진심인지 모르겠네.’
‘근데 더 웃긴 건... 이 사람이... 아직도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구분도 못 한다는 거야.’
윤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젠 설명할 힘도, 억울해할 이유도 모두 바닥났다.
윤슬은 고개를 돌려 미소도 감정도 없이 말했다.
“편하게 있다 가. 난 입맛 없어서 안 먹을래.”
말을 다 하고 나서 천천히 거실 테이블 위에 있던 노트북을 챙기기 시작했다.
강현의 얼굴에 금세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또 저 표정이야. 요즘은 대놓고 날 무시하는 게 느껴져.’
그때, 신아가 그의 팔에 살짝 매달리듯 다가왔다.
“강현아, 윤슬이는 아프잖아.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줘야지. 우리 먼저 요리하자.”
“다 만들고 나면 윤슬이도 같이 먹어줄 거야, 그렇지?”
말투는 달콤했고, 목소리는 일부러 낮게 꺾여 있었다.
윤슬은 그 ‘애교 섞인 걱정’이 진심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허... 자기 손으로 날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인제 와서는 챙기는 척까지 하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노트북과 태블릿을 품에 안고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강현이 물었다.
“그거 가지고 뭐 하게?”
윤슬은 뒤도 안 돌아보고 짧게 대답했다.
“심심해서 드라마나 좀 볼까 해.”
강현의 시선이 그녀 품 안의 태블릿으로 향했다.
“근데, 이건 뭐야? 판때기 같은 거?”
“손목 받침.”
“USB 케이블까지 달린 손목 받침?”
강현의 말투엔 의심이 섞여 있었다.
‘거짓말이네. 근데 왜? 뭘 그렇게 감추고 있는 건데?’
윤슬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강현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묘하게 답답해졌다.
그 순간, 신아가 주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강현을 불렀다.
“강현아, 나 손 다 젖었어. 야채 좀 다듬어줘.”
목소리는 가볍게 흘러나왔고, 강현은 무심히 대답하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윤슬은 그 광경을 지켜보지 않았지만, 문 너머로 들리는 모든 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어때? 나 좀 잘하지?”
“괜찮네.”
둘의 대화에 윤슬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네. 부강현이 주방에 들어가다니.’
‘내가 해준 밥은 숟가락 들 시간도 아깝다고 했지?’
‘그런데 사랑 앞에선 밥도 하고, 야채도 씻네? 정말 웃기지도 않아.’
그녀는 천천히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다.
이젠, 누가 사랑받고 누가 버려졌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
방은 원래 방음이 꽤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윤슬은 신아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강현아, 물 좀...”
“이거 너무 안 익은 거 같지 않아?”
“어머, 깜짝이야!”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며 일부러 들리게 말하는 줄 알았을 터였다.
그 외에도 수저 부딪히는 소리, 도마 두드리는 소리, 그야말로 소음 폭격이었다.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두 명이 된 느낌이네.’
‘오히려 내가 세 들어 사는 사람 같아.’
윤슬은 노트북 속 강의에 다시 집중하려 했지만, 갑자기 들려온 것은 신아의 비명.
“아악...!”
놀랄 틈도 없이 이어지는 문 두드리는 소리.
“윤슬아, 나와봐.”
강현의 목소리였다. 낮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인데 왠지 거슬렸다.
윤슬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28일, 딱 28일만 더 견디면 돼.’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한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강현은 다짜고짜 말했다.
“신아가 아직 한국 조리도구에 익숙하지 않아서 접시 하나를 떨어뜨렸어. 손까지 베일 뻔했으니까 네가 가서 좀 해.”
말투는 차분했지만, 내용은 전혀 말이 안 됐다.
윤슬은 어이가 없었다.
‘한신아가 접시를 떨어뜨린 게 왜 내가 나가서 밥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된 거지?’
“나도 다쳤거든?”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강현의 시선이 그제야 아래로 향했다.
붕대로 감긴 발과 조심스레 딛고 선 자세가 보였다.
찰나의 침묵.
윤슬은 강현이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비치길 바랐지만, 돌아온 말은 차가웠다.
“손은 안 다쳤잖아. 서 있기만 하면 되잖아?”
‘와, 이 사람은 끝까지 이러는구나. 사람이 다친 거엔 관심도 없고, 그저 ‘해야 하니까 해’라는 태도.’
‘아침엔 밥 안 해도 된다더니... 이젠 자기 말에 책임도 안 지네.’
윤슬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마디 더 했다간 쏟아낼 감정이 감당 안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