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
윤슬은 이미 잠에 들었던 상태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문 두드림 소리와 고함에 눈을 떴다.
‘대체... 또 무슨 일이야.’
이마를 찌푸린 채 스탠드를 켜고, 절뚝거리며 문 쪽으로 향했다.
“소...”
문을 또 세게 두드리려던 강현의 손은 딱 맞춰 열린 문에 허공을 가르며 멈췄다.
문틈 사이로 윤슬의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
“이 시간에 뭐야? 왜 그렇게 문을 두드려? 미친 사람처럼.”
말투는 딱딱했고, 분명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한밤중에,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소리 지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강현은 윤슬의 이런 태도에 순간적으로 더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윤슬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내 집에 들어온 게 뭐가 문제야?”
말은 더 거칠어졌고, 목소리는 무의식적으로 높아졌다.
그 말에 윤슬의 표정이 확 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무표정한 짜증이었는데, 이젠 명백한 고통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또, 이런 식이야. 언제나...’
강현은 윤슬이 ‘순해졌다’고 착각했다.
예전처럼, 조용히 고개 숙이고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윤슬의 다른 손이 그의 손목을 쳐내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강현은 손바닥에 닿은 이질감을 느꼈다.
‘뭔가 젖은 느낌?’
그는 놀란 듯 손을 뗐다.
그리고 손바닥을 보았다.
피였다.
윤슬의 팔, 강현이 잡고 있던 그 자리에 붉은 자국이 번져 있었다.
“다쳤어...?”
강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윤슬의 팔을 다시 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윤슬은 아무 말 없이 딱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시선엔 차가운 분노가 담겨 있었다.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강현이 한 발 내딛자, 윤슬이 말을 이어갔다.
“네가 한 짓이잖아.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표정을 지어?”
말끝이 떨릴 정도로 감정이 올라왔지만, 윤슬은 애써 삼켰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그제야 뚝 떨어졌다.
‘이젠 이 사람이 내 상처를 걱정하는 척하는 것도... 웃기고, 불쾌해.’
강현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문득, 아까 도로변에서 윤슬을 아무 말 없이 내려놓고 돌아선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로 향했다.
팔꿈치 쪽엔 넓게 벗겨진 상처가 붉게 번져 있었고, 방금 그가 세게 잡았던 자리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강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발등 위엔 여전히 물집이 부풀어 있었고, 발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로는 붉은 피가 은근히 번져 나왔다.
‘저 정도로 다쳤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그가 입술을 떨듯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윤슬이 조용히 몸을 돌려 문을 닫으려 했다.
“비켜. 문 좀 닫게.”
힘없이 문을 밀어보지만 강현이 걸쳐 있는 탓에 문은 닫히지 않았다.
강현은 여전히 입에 맴도는 사과 한마디를 끝내 꺼내지 못했다.
그 대신 나온 말은 또 엉뚱한 방향이었다.
“왜 전화 안 받았어? 내가 얼마나...”
그 순간, 윤슬은 입꼬리를 천천히 비틀며 웃었다.
‘하, 그게 이유야? 밤늦게 문 두드리고 화낸 게 그깟 전화 때문이라고?’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지은 그녀는 강현을 바라보지도 않고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갔다.
절뚝거리는 걸음.
발을 딛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침대 옆 협탁으로 가 깨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 못 받은 이유, 궁금하다며?”
윤슬은 화면이 산산이 부서진 핸드폰을 그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바닥에 떨어져서 액정 다 나갔어. 전원도 안 켜진다고.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 아니야?”
강현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럴 만했네. 근데 나는...’
“소윤슬...”
강현이 간신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문이 ‘딸깍’ 소리와 함께 닫혔다.
윤슬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강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
몇 초간 그대로 있다가, 강현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문 뒤에 남겨진 어둠은 이상하리만큼 낯설고 묘하게 불안했다.
방 안.
윤슬은 한 번 깼던 잠을 다시 청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진짜... 왜 이렇게 시끄러워.’
강현의 목소리,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 그 모든 게 짜증으로 남았다.
그가 아까 전화했다고 했던 게 떠올라 무심코 핸드폰 전원을 켰다.
화면에 뜬 부재중 통화... 서른 통이 넘었다.
‘미친 거 아냐? 한신아 옆에 있던 사람이 웬 전화를 이렇게 많이 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윤슬은 바로 다시 전원을 껐다.
‘됐어, 더는 생각하지 말고 자자. 그게 나한텐 최선이야.’
그리고 이불을 댕겨 덮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안방.
강현은 대충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신아였다.
[윤슬이는 괜찮아? 무사히 집에 갔지? 너무 화내지 마. 나도 네 마음 알아.]
메시지를 읽은 강현은 윤슬에 대한 어렴풋한 미안한 감정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바로 메시지와 함께 무너졌다.
‘맞아, 애초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신아가 다치지도 않았을 텐데...’
‘결국 소윤슬이 자초한 일이지.’
남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소윤슬은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잘 자.]
강현의 답장을 받은 신아는, 강현이 윤슬에 대해 조금의 애정도 없이 말하는 거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역시, 부강현의 마음은 아직 나한테 있어.’
...
한편,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강현은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1시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부글거리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또 시작이네.’
고등학생 때부터 앓아온 위염.
그 시절엔 신아가 매일 아침 챙겨준 죽이며 약이며 하나하나가 위안이었다.
강현이 대학생이 되면서는 증상이 덜했지만,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음주와 야근이 반복되며 다시 재발했다.
그 이후부터는 윤슬이 하루도 빠짐없이 해장국을 끓여주었다.
밤늦게 들어와도, 항상 냄비 위엔 따뜻한 국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주방은 말끔했다.
냉장고 안에도, 냄비 속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없네...’
강현은 묘한 허전함에 냉장고 문을 한 번 더 열었다.
텅 빈 선반을 바라보며 애써 표정을 굳혔다.
‘왜 하나 더 안 끓여놨지? 내가 돌아올 수도 있었잖아.’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습관처럼 윤슬을 깨워 만들게 할까 생각했지만,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진짜...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결국 그는 약상자를 찾으러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늘 익숙한 자리에 약상자는 없었다.
‘어? 그럼...’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 조금 전 윤슬의 방 앞에서 스치듯 보았던 침대 옆 협탁.
‘거기 있구나.’
강현은 망설임 끝에 서재 서랍을 뒤져 예비 키를 찾았다.
윤슬의 방 문 앞에 도착해 천천히 문고리를 잡았다.
딸깍-
작은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 순간, 강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내 집인데, 왜 이렇게 몰래 들어가는 느낌이 들지? 내가 주인이 맞나?’
문이 열리는 소리.
어딘가 낯설고도 조심스러웠다.
강현의 발끝이 무겁고도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
방 안은 은은하게 어두웠고, 약 냄새가 섞인 잔잔한 향이 공기 중에 퍼져 있었다.
윤슬은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 있었고, 얇은 이불을 한쪽만 덮고 있었다.
몸은 작게 웅크린 채, 고요했다.
강현은 방 안으로 들어섰지만,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협탁에 놓인 약상자를 집어 들었다.
‘빨리 나가자. 괜히 불필요한 감정이 생길 필요는 없어.’
그는 몸을 돌려 일어서려는 순간, 문틈 사이로 스며든 불빛이 침대 가장자리를 비추었다.
무심코 스친 시선에 강현은 멈칫했다.
윤슬의 셔츠 자락이 살짝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허리 옆 피멍 자국이 따뜻한 조명 아래서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언제 저렇게까지...’
순간, 어딘가 가슴 한편이 조용히 조여왔다.
하지만 강현은 시선을 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는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피멍 좀 든 거 가지고... 죽을병도 아닌데 말이야.’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도 아니지.’
그는 애써 생각을 정리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소윤슬 때문이었잖아.’
‘질투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다치게 한 거야. 난 거기에 잠시 흔들린 거고.’
‘그게 다야. 그 이상은... 아니야.’
문 너머, 강현은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발걸음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히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