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하나둘 올라갔다.
하나같이 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에 유건은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며 입맛을 다셨다. 신 여사는 그런 그의 옆에서 흐뭇해하며 웃었고, 채원은 별다른 말 없이 테이블 위만 바라봤다.
태건과 강 회장은 모든 준비가 거의 다 마쳐졌을 때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채원이는 아까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너는 애를 혼자 두고 이제 오면 어떡하니?”
준비가 다 끝나고 나서야 나타난 태건을 보며 신 여사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 일 때문에 할 얘기가 좀 있었어.”
강 회장이 대신 나서 반론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당신도 똑같아요. 회사 일은 회사에서 얘기하면 되지, 뭣 하러 오늘 같은 날 애를 따로 불러요? 기다리는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하고.”
반박 한 번 했다가 도리어 더 화를 부르고 말았다.
태건보다 자신을 향한 더 살벌한 눈빛에 강 회장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착석했다.
“하하하! 아버지가 잘못 하셨네요.”
유건은 그런 그를 보며 호탕하게 웃으며 함께 나무랐다.
이렇게만 보면 화목한 가족 식사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함께 앉아 있는 태건과 채원의 얼굴엔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큼……. 음식 식겠다. 얼른 먹자.”
민망함에 헛기침하던 강 회장의 말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기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다이닝룸 안에 울려 퍼졌다. 식사가 시작되고 한동안은 사소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음식은 입에 맞는지, 오늘따라 더 맛이 좋다, 최근에 어딜 갔는데 거기가 너무 좋았다, 다음에는 같이 가자.
별거 아닌 사소한 대화였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대화도 아니었다. 대화는 주로 신 여사와 유건이 주고받았고, 채원은 이따금 가벼운 호응 정도만 했으며 태건과 강 회장은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식사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아, 참. 저 그러고 보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유건이 싱긋 웃으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신 여사는 뭔데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채원은 조용히 시선을 옮겨 그를 바라봤다.
유건은 중대 사항이라도 발표하는 것처럼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까지 내려놓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 뭐, 막 엄청난 건 아닌데. 저 이제 한국에 좀 들어와서 살까 해요.”
유건의 말에 신 여사가 가장 화색을 지었다.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반가운 말이었다.
“어머, 정말! 그러면 이제 집에 완전히 들어오는 거야?”
얼마나 좋은 건지 손뼉까지 치며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게, 유건은 그동안 자아 찾기, 버킷리스트 등등 온갖 이유를 다 붙여 가며 단 한시도 가만히 있던 적이 매우 드물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갑자기 유학을 가더니, 졸업하고 나서는 온갖 핑계를 다 대며 집에 있는 시간이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했다.
제발 한곳에 정착해서 살았으면 좋겠다만, 그 마음을 가지고서도 신 여사가 이제껏 유건을 잡지 못한 건 마음 한구석에 있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생아, 굴러 들어 온 돌 등의 수식어는 늘 꼬리표가 되어 유건을 따라다녔다.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최대한 차별 없이 사랑으로 키웠지만 그럼에도 불안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유건은 학창 시절 내내 삐뚤어지지 않고 늘 생글생글 웃으며 올곧게 자라주었지만, 그에 대한 고마움 뒤엔 늘 미안함이 따라다녔다.
그런데 드디어 한국에 정착한다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까.
가장 눈에 띄게 좋아하는 신 여사에 유건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당장은 아니에요. 짐 정리 할 시간도 좀 필요하고.”
“그렇지, 그렇지. 아이, 그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환하게 웃는 그녀에 유건은 싱긋 웃으며 강 회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가 제안 주셨거든요.”
“음? 아버지가?”신 여사가 금시초문이라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강 회장을 바라봤다.
강 회장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천천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느릿하면서도 별다른 미동이 없는 반응을 보니 이미 진즉부터 알고 있는 눈치였다.
“뭐야? 당신이 애 설득했어요?”
“설득은 무슨……. 진지하게 얘기 좀 했어.” “아니, 그러니까 무슨 얘기?”대체 나 빼고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눈 건지. 신 여사가 답답하다는 듯 그를 보채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유건이 픽 웃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형 도와서 회사 일 좀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순간 채원의 손이 멈칫했다.
형을 도와서? 말이 안 됐다. 안 그래도 두 형제 사이에 떠도는 소문들이 한두 개가 아닌데, 대건그룹의 오너 일가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가십거리에 일일이 반박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태건은 늘 침묵을 유지했고, 유건도 자아 찾기 같은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한국에 발을 붙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회사 일을 도와? 이건 말이 돕는 거지 실상은 둘이서 동등하게 경영권을 가지고 한 번 겨뤄보란 얘기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폭탄급 발언을 던진 유건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강 회장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반응했지만, 순식간에 다이닝룸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안 그래도 아버지가 형한테도 말씀하신다고 하셨는데, 형 얘기 못 들은 건 아니지?”
내내 싱글벙글 웃던 유건이 뒤늦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태건을 바라봤다. 그런 표정을 짓기엔 너무 늦은 것 아닌가 싶었지만, 오히려 태건은 아까보다 더 차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까 얘기 다 들었어.”
“아…… 그래?”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에 유건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그 마음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태건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마치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처럼 대하는 반응이었다.
정작 당황한 건 옆에 있는 채원이었다.
아까라면,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 강 회장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일 텐데. 그런 얘기를 들어놓고 어떻게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서 식사할 수 있는 건지. 경이로움을 넘어 경악스러울 정도의 포커페이스였다.
조금 놀란 눈으로 태건을 바라보던 채원은 이내 다시 처음의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자신과 상관없을 일인데,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유건이 경영에 같이 뛰어들게 된다면 태건에게는 더더욱 그를 이길만한 카드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미 채원은 자신이 그 카드가 아니란 걸 5년 동안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오히려 잘 됐어.’
속으로 심호흡을 한 채원이 작게 숨을 들이켜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계획을 실행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실 저도-”
이 기세를 몰아 그녀도 입을 열었다. 수없이 준비하고 되새기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순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도 드릴 말이 있어요.”
순간 태건이 그녀의 말을 치고 들어왔다. 다이닝룸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태건에게 집중되고, 순서를 빼앗긴 채원이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근데 방금 형수님이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그때 유건이 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채원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건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를 저지하는 행동에 채원은 열었던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눈으로 물어도 태건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묘한 기류가 오고 가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유건이 피식 웃었다.
“뭐야? 뭔데 그래요?”
싱글벙글 웃으며 묻는 유건에 태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고,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태건이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순간 그의 미소에 유건의 손이 움찔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보다 못한 신 여사가 재촉하듯 묻자, 태건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엄청난 건 아니고.”
“…….” “채원이가 임신했어요.” “…… 뭐?”아주 짧은 정적이 흐르고, 저마다 놀란 얼굴들이 일제히 채원을 향했다.
신 여사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었고, 식사 내내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던 강 회장마저도 평정심이 무너진 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건 또한 싱글벙글 웃던 미소를 잃고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마다 제각기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채원만이 당황한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지금, 무슨…….’
하마터면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은 당황한 탓에 뻐끔거리기만 했고, 정작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은 태건은 오히려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드디어 미친 거야?’
아무래도 저택에 오기 전에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게 분명했다.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