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판 / 마기에 잠식된 대공 / 제가 잘못 봤습니다

Share

제가 잘못 봤습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3 08:25:46

“전하께서 하셨습니까?”

엘라의 목소리가 교실 안을 또렷하게 울렸다.

테오도르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멈췄다.

“뭘?”

“제 책이요.”

“네 책이 왜?”

엘라는 대답 대신 책상 위를 가리켰다.

새것처럼 반듯했던 역사 교재의 표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푸른 잉크가 물에 번진 것처럼 얼룩져 있었고, 아래쪽 모서리는 길게 찢겨 있었다.

어제 처음 받은 책이었다.

엘라는 저녁 내내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었다. 아직 모르는 이름이 많아 작은 종이에 따로 적어 두기까지 했다.

그런 책이 망가져 있었다.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왜 이래?”

“저도 묻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전하께서 먼저 오셨잖아요.”

교실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창가에 서 있던 시종이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에드먼드 교수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

테오도르는 엘라의 책을 집어 들었다.

“젖었네.”

“보면 압니다.”

“그리고 찢어졌어.”

“그것도 압니다.”

“엘라.”

“네.”

“나한테 화났어?”

“조금요.”

“왜 나한테?”

엘라는 테오도르의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고, 안에는 푸른색 잉크가 절반쯤 남아 있었다.

어제 테오도르가 새로 받았다며 자랑했던 잉크였다.

엘라의 책에 번진 얼룩과 같은 색이었다.

“전하의 잉크잖아요.”

테오도르도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색이 같다고 내가 했다는 뜻은 아니야.”

“교실에 먼저 오셨고요.”

“그건 맞지만.”

“어제 제 책을 빌려 달라고도 하셨습니다.”

“안 빌려줬잖아.”

“그래서 화나셨습니까?”

테오도르의 얼굴이 굳었다.

“뭐?”

“말로 안 되니까 책을 망가뜨리신 겁니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전하께서는 가끔 화가 나시면 물건을 던지십니다.”

“목검을 한 번 던졌어.”

“두 번입니다.”

“그건 대련하다가 놓친 거야!”

“두 번째는 일부러 던지셨습니다.”

“네가 열세 번째로 날 넘어뜨렸잖아!”

“그러니까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지시는 게 맞네요.”

테오도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엘라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다.

증거가 있었다.

같은 색의 잉크.

교실에 먼저 온 사람.

어제 책을 빌려 달라고 했던 일.

그리고 화가 나면 목검을 던졌던 테오도르.

모든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낮게 말했다.

“내가 아니야.”

“그러면 누가 했습니까?”

“몰라.”

“전하는 늘 모르면 아니라고만 하십니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억울함과 화가 섞여 있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궁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

감정을 감춘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대로 해.”

테오도르가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전하.”

“수업 곧 시작해.”

“사과는요?”

테오도르가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안 한 일을 왜 사과해?”

엘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교실 문이 열렸다.

에드먼드 교수가 들어왔다.

노교수는 평소처럼 지휘봉과 여러 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교실 안으로 들어오던 그는 두 아이 사이의 이상한 분위기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에드먼드 교수의 시선이 엘라의 책으로 향했다.

“교재가 왜 그 모양입니까?”

엘라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망가졌습니다.”

“그건 보입니다.”

“전하께서 하신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의 손이 책상 아래에서 꽉 쥐어졌다.

교수는 곧바로 테오도르를 보지 않았다.

대신 엘라에게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엘라는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차례로 말했다.

같은 색의 잉크.

먼저 교실에 도착했다는 점.

어제 책을 빌려 달라고 했던 일.

테오도르가 화가 났을 때 물건을 던진 적이 있다는 것까지.

에드먼드 교수는 끝까지 조용히 들었다.

“전하.”

그가 테오도르를 불렀다.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공녀의 책이 망가진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방금 처음 봤습니다.”

“오늘 교실에는 몇 시에 오셨습니까?”

“수업 시작 삼십 분 전입니다.”

“그사이에 교실을 비운 적은?”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했다.

“있습니다.”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요?”

테오도르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종장이 아버지께서 부르신다고 해서 잠깐 나갔어.”

“얼마나요?”

“십 분 정도.”

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에드먼드 교수가 물었다.

“교실에 돌아왔을 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공녀의 책은 확인하지 않았고요?”

“왜 확인합니까?”

맞는 말이었다.

엘라는 자신의 책상만 내려다보았다.

교수가 이번에는 창가에 선 시종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 교실을 드나든 사람이 있습니까?”

시종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간식을 준비한 시녀와 청소 담당 시종이 들어왔습니다.”

“둘을 부르십시오.”

시종이 빠르게 교실을 나갔다.

엘라는 조금 전보다 확신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은 테오도르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교수는 수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교탁 앞에 서서 두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공녀.”

“네.”

“전하께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엘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은요.”

“조금?”

“하지만 증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증거와 추측은 다릅니다.”

교수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보다 더 무겁게 들렸다.

“같은 색의 잉크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전하께서 먼저 교실에 왔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네.”

“하지만 그 두 사실이 전하께서 책을 망가뜨렸다는 결론까지 증명합니까?”

엘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제 책을 빌려 달라고 한 사람이 오늘 책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빌려 달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망가뜨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엘라는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평소라면 자신이 조금만 바라봐도 왜 보느냐며 물었을 텐데.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때 교실 문이 다시 열렸다.

시종과 함께 어린 시녀 하나가 들어왔다.

엘라와 테오도르보다 몇 살쯤 더 많아 보이는 아이였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교수님?”

에드먼드 교수가 젖은 책을 들어 보였다.

“이 책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시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반응만으로도 교실 안의 모두가 답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시녀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엘라가 눈을 크게 떴다.

테오도르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교수는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침에 간식을 미리 가져다 놓으려다가…….”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교실에 쟁반을 내려놓던 중 발이 책상 다리에 걸렸다.

그 순간 테오도르의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이 넘어졌고, 잉크가 엘라의 책 위로 쏟아졌다.

당황한 시녀가 급하게 책을 닦으려다 젖은 표지를 잡아당겼고.

그 과정에서 모서리가 찢어졌다.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시녀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물건을 건드렸다는 걸 알면 제가 쫓겨날까 봐…….”

테오도르가 물었다.

“그래서 그냥 두고 갔어?”

“죄송합니다, 전하.”

시녀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만큼 깊이 숙였다.

“벌은 무엇이든 받겠습니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엘라는 자신의 책을 바라보았다.

전하의 잉크는 맞았다.

전하가 먼저 교실에 온 것도 맞았다.

하지만 책을 망가뜨린 사람은 테오도르가 아니었다.

사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를 자신의 생각으로 채웠다.

그 생각이 맞다고 믿었다.

엘라는 천천히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엘라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다.

어제 수업에서 교수는 말했다.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엘라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말을 잊었다.

“일어나세요.”

테오도르가 시녀에게 말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예?”

“무릎 아프잖아.”

“하지만 제가…….”

“잘못한 건 맞아.”

테오도르의 말에 시녀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책을 망가뜨린 것보다 숨긴 게 더 잘못이야.”

“……예.”

“다음부터는 바로 말해.”

“예, 전하.”

“그리고 내 잉크는 책상 끝에 놓지 말라고 시종들한테도 말할게.”

시녀가 눈을 깜빡였다.

“벌은…….”

“교수님이 정하시겠지.”

테오도르는 에드먼드 교수를 바라보았다.

교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망가진 교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오늘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에서 훼손된 책을 보수하는 일을 돕도록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시녀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녀와 시종이 교실을 나간 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에드먼드 교수가 엘라를 바라보았다.

“공녀.”

엘라는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전하.”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라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제야 테오도르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엘라는 똑바로 그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제 책을 전하께서 망가뜨렸다고 생각했습니다.”

“…….”

“제 생각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습니다.”

테오도르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엘라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하께서 아니라고 하셨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잠깐 멈춘 뒤.

“미안합니다.”

교실 안은 조용했다.

테오도르는 엘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났다.

황궁의 사람들은 대부분 테오도르가 한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다.

그가 황태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라만큼은 달랐으면 했다.

무조건 믿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말을 한 번쯤은 생각해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엘라는 처음부터 자신이 범인이라고 정해 버렸다.

그것이 생각보다 속상했다.

“왜 나라고 생각했어?”

테오도르가 물었다.

엘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하의 잉크였고, 전하께서 먼저 오셨고.”

“그건 아까 들었어.”

“그리고…….”

엘라는 조금 망설였다.

“전하께서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지신 적이 있어서요.”

테오도르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하지만 엘라는 피하지 않았다.

“그것도 제가 잘못 생각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전하께서 목검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해서 책도 망가뜨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한 번 한 행동으로 다른 행동까지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엘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하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 말에 테오도르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엘라는 어제 황제에게 말했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먼저 정할 필요는 없다고.

오래 봐야 한다고.

그러나 자신은 오늘 테오도르를 오래 보지도 않고 단정했다.

“제가 어제 했던 말과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테오도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네가 어제 뭐라고 했는데?”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오래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를?”

“사람을요.”

“그럼 나도 포함이잖아.”

“그렇습니다.”

엘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음에는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오늘도 물어봤잖아.”

“대답을 듣기 위해 물어본 게 아니었습니다.”

엘라가 말했다.

“이미 제가 맞다고 생각하면서 물어봤습니다.”

테오도르는 그 말을 곱씹었다.

엘라가 자신에게 했던 첫 질문은 정말 질문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하셨습니까?’

그 말에는 이미 답이 들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젖은 책을 바라보았다.

“화났어.”

“알고 있습니다.”

“많이.”

“네.”

“오늘 간식 안 나눠줄 거야.”

엘라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건 조금…….”

“미안하다며.”

“미안한 것과 간식은 다른 문제입니다.”

“안 달라.”

“다릅니다.”

“내 간식이야.”

“그건 맞습니다.”

엘라는 아주 잠깐 심각하게 고민했다.

테오도르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 끝을 조금 움직였다.

“그래도.”

그가 말했다.

“사과는 받을게.”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입니까?”

“응.”

“이제 안 화나셨습니까?”

“아니. 아직 화났어.”

“그럼 언제 풀리십니까?”

“몰라.”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테오도르가 눈을 깜빡였다.

“뭘?”

“화가 풀리실 때까지요.”

“계속 옆에 있겠다는 거야?”

“같이 수업을 받아야 하잖아요.”

테오도르는 잠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결국 웃었다.

“그건 기다리는 게 아니야.”

“그렇습니까?”

“그냥 네가 수업에 오는 거지.”

“그래도 옆에는 있잖아요.”

테오도르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완전히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엘라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싶지는 않았다.

에드먼드 교수는 그제야 책을 펼쳤다.

“두 분의 대화가 끝났다면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테오도르와 엘라가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교수는 칠판에 어제 적어 두었던 질문을 다시 써 내려갔다.

황제에게 틀렸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틀렸다면, 황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자신이 남겨 둔 질문이었다.

에드먼드 교수가 말했다.

“어제 공녀가 남긴 질문입니다.”

그는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주 적절한 사례가 생겼군요.”

테오도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공부에 다 쓰시네.”

“말씀하십시오, 전하.”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교수는 모른 척 칠판을 두드렸다.

“공녀는 전하께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엘라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공녀의 판단이 틀렸습니다.”

“네.”

“그렇다면 전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테오도르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엘라가 자신을 의심했던 것.

믿지 않았던 것.

사과했던 것.

그리고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말한 자신을 기다리겠다고 했던 것.

“무조건 용서하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엘라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교수가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잘못했다고 말한 사람이 사과했다고 해서 속상했던 일까지 바로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좋습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 사람이 틀렸다는 이유로 앞으로 하는 말도 전부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에드먼드 교수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왜지요?”

“사람은 다음에는 다르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엘라의 눈이 커졌다.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테오도르는 엘라를 보지 않은 채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왜 틀렸는지는 생각하고.”

“…….”

“다음에는 어떻게 말할지도 봐야 합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답입니다.”

테오도르의 귀가 아주 조금 붉어졌다.

엘라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전하.”

“왜?”

“잘하셨습니다.”

“너한테 칭찬받는 거 아직 안 받아.”

“화가 풀리실 때까지요?”

“응.”

“알겠습니다.”

엘라는 다시 칠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엘라는 망가진 책을 들고 황궁 도서관으로 향했다.

새 교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 책을 그냥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표지는 젖었고 모서리는 찢어졌지만.

안쪽에는 자신이 적어 둔 작은 메모가 남아 있었다.

시녀가 도서관에서 책 보수 일을 돕고 있을 테니, 함께 고쳐 보기로 했다.

테오도르도 따라왔다.

엘라가 물었다.

“왜 오셨습니까?”

“책 고치는 거 보려고.”

“수업 끝났으니 쉬셔도 됩니다.”

“내 잉크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전하께서 일부러 하신 게 아닙니다.”

“그래도 내 물건이었으니까.”

엘라는 잠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책임지는 겁니까?”

“교수가 말했잖아.”

테오도르는 괜히 앞서 걸었다.

“황제는 잘못된 일이 생기면 책임져야 한다고.”

“아직 황제가 아니십니다.”

“미리 연습하는 거야.”

엘라는 작게 웃었다.

“멋집니다.”

“네 칭찬 안 받는다고 했어.”

“아직도 화나셨습니까?”

“조금.”

“그럼 나머지도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 자꾸 하지 마.”

“왜요?”

“이상하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황궁의 긴 복도를 걸었다.

어제와 같은 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엘라는 조금 달랐다.

사람을 본다고 생각했다.

오래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보다 자신의 생각을 먼저 믿었다.

테오도르는 그 잘못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엘라는 처음으로 알았다.

잘못을 알려 주는 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말만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황궁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종이와 가죽 냄새가 흘러나왔다.

도서관 안쪽에는 아까의 어린 시녀가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녀는 두 아이를 발견하자 다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라는 천천히 다가갔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시녀가 놀란 듯 대답했다.

“마, 마리입니다.”

“마리.”

“네, 공녀님.”

“저와 같이 책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까?”

마리가 눈을 깜빡였다.

“제가요?”

“네.”

엘라는 젖은 책을 내밀었다.

“혼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책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제가 망가뜨렸는데…….”

“그러니까 같이 고치면 됩니다.”

엘라는 말을 마친 뒤 잠시 멈췄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다음에는 숨기시면 안 됩니다.”

마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예.”

“제가 먼저 잘못한 사람을 정해 버렸습니다.”

엘라는 테오도르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것도 좋지 않았습니다.”

마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저도요.”

“공녀님이 왜…….”

“저도 잘못했으니까요.”

엘라는 도서관 안쪽의 작업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디서부터 해야 합니까?”

마리는 잠시 당황하다 책을 펼쳤다.

“우선 젖은 종이를 말려야 합니다.”

“어떻게요?”

“마른 천을 사이에 끼우고, 무거운 책으로 눌러야 합니다.”

테오도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거운 책이라면 여기 엄청 많아.”

“전하께서 가져다주실 겁니까?”

“내가?”

“미리 책임지는 연습을 하신다고 했잖아요.”

테오도르가 엘라를 노려보았다.

“그건 황제가 된 다음 얘기야.”

“연습은 미리 하는 겁니다.”

“……네가 방금 한 말이잖아.”

“잘 기억하셨습니다.”

테오도르는 투덜거리면서도 서가로 향했다.

잠시 뒤.

그는 양팔 가득 두꺼운 책을 안고 돌아왔다.

“이 정도면 돼?”

마리가 깜짝 놀랐다.

“너무 많습니다, 전하.”

“그럼 몇 권만 쓰면 되잖아.”

세 사람은 작업대에 둘러앉았다.

젖은 페이지 사이에 마른 천을 끼우고.

찢어진 표지의 모양을 맞추고.

무거운 책을 위에 올렸다.

처음에는 서툴렀다.

테오도르는 천을 너무 크게 잘랐고.

엘라는 접착제를 지나치게 많이 발랐다.

마리는 두 사람을 말리느라 진땀을 흘렸다.

“공녀님, 조금만 바르셔야 합니다.”

“이 정도입니까?”

“그것의 절반이요.”

“이미 발랐습니다.”

“닦아야 합니다!”

“전하, 천을 주십시오.”

“여기.”

“그건 책 닦는 천이 아닙니다!”

“똑같이 생겼잖아.”

“그건 사서님의 손수건입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도서관 안에 작게 울렸다.

멀리서 책을 정리하던 늙은 사서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쫓아내지는 않았다.

한참 뒤.

망가진 책은 완벽하지 않지만 다시 읽을 수 있는 모습이 되었다.

찢어진 모서리에는 가느다란 수선 자국이 남았다.

푸른 잉크 얼룩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엘라는 책 표지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흔적이 남았습니다.”

마리의 어깨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죄송합니다.”

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얼룩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보면 오늘 일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가 물었다.

“싫어?”

엘라는 잠시 고민했다.

“조금 속상합니다.”

“그럼 새 책으로 바꾸면 되잖아.”

“이 책이 좋습니다.”

“왜?”

엘라는 자신이 적어 놓은 작은 메모를 펼쳐 보였다.

삐뚤빼뚤한 글씨.

모르는 이름.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

첫날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음 배운 책이니까요.”

그리고 오늘의 흔적까지 더해졌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던 날.

사과한 날.

함께 책을 고친 날.

엘라는 책을 품에 안았다.

“이제 더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게 말했다.

“나도 이제 안 화났어.”

엘라의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응.”

“간식도 나눠주실 겁니까?”

“그건 안 돼.”

“왜요?”

“화가 풀린 것과 간식은 다른 문제라며.”

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테오도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전하.”

“왜?”

“조금 치사하십니다.”

“그건 잘못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또 네 판단이 틀릴 수도 있잖아.”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오래 지켜보겠습니다.”

“뭘?”

“전하께서 정말 치사한 사람인지요.”

“엘라!”

도서관 안에 다시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날 저녁.

황제에게는 두 번째 합동수업 보고서가 올라갔다.

보고서에는 엘라가 황태자를 잘못 의심한 일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한 일.

그리고 두 아이가 시녀와 함께 망가진 책을 고친 일이 적혀 있었다.

황제는 보고서를 끝까지 읽었다.

맞은편에 앉은 펠리시아 공작이 물었다.

“오늘은 무슨 사고를 쳤습니까?”

“자네 딸이 테오도르를 범인으로 몰았네.”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정말입니까?”

“아니었지.”

황제는 마지막 문장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래서 사과했다는군.”

공작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렸다.

“다행입니다.”

“딸이 틀렸다는데도?”

“틀리지 않는 아이로 키운 적은 없습니다.”

공작은 조용히 말했다.

“틀렸을 때 모르는 척하지 않는 아이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황제는 잠시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그건 잘된 것 같군.”

“아직 멀었습니다.”

“그 아이도?”

“당연하지요.”

공작이 피식 웃었다.

“열 살입니다.”

황제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아직 몰랐다.

오늘 엘라가 처음 배운 일이.

훗날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앞두었을 때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눈앞의 사실보다.

이미 정해 놓은 생각을 더 믿지 않는 것.

사람에게 붙은 소문보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직접 듣는 것.

그날 엘라는 작은 책 한 권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오해를 고쳤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모두가 마기에 잠식되었다고 단정한 한 남자 앞에서도.

먼저 묻게 될 것이었다.

“정말 당신이 한 일입니까?”

이번에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마기에 잠식된 대공   가장 약한 돌을 먼저 버리지 않습니다

    남은 여섯 번의 반복 시험은 이틀에 걸쳐 끝났다.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네 번째에서 자동 제어석이 갈색 마력석의 내부 통로를 잘못 읽어 분배량을 6퍼센트 높이는 바람에 진동 수치가 기준선 가까이 올라갔고, 다섯 번째에서는 오염 마기의 점도가 예상보다 높아 세척 시간이 스물세 분까지 늘어났다. 여섯 번째에는 회수석의 흡수 속도가 세척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중간에 한 차례 정지해야 했고, 마지막 일곱 번째 시험에서는 일부러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일반석을 섞었다.완벽하게 같은 결과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대신 일곱 번 모두 사람의 마력이나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백은샘을 포함한 자연 지맥에서도 힘을 끌어오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시험은 미리 정한 기준에서 멈췄고, 멈춘 뒤에도 마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자동 제어석은 시험을 거칠 때마다 조금씩 수정되어, 마지막에는 각 전달석의 상태를 먼저 읽고 그 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흐름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일곱 번째 시험이 끝난 직후 아르센은 결과표를 테이블 한가운데 내려놓았다.“연구실 단계는 여기까지 가도 되겠습니다.”단테가 마지막 수치를 읽었다.“마지막 돌.”“잔류 오염 0.8퍼센트. 추가 균열 없습니다.”“제일 약한 거였다며.”“네. 현장 본선에 넣기에는 등급이 낮은 돌입니다.”단테는 갈색 마력석을 바라봤다. 처음 시험했을 때 진동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원래 방식대로라면 품질 미달 판정을 받고 창고 한쪽으로 밀려났을 돌이었다. 그런데 흐름을 돌에 맞춰 조정하고 나자 다른 돌보다 조금 느릴 뿐 제 역할을 했다.“그러면 이 정도 돌까지 현장에서 쓸 수 있다는 건가.”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주 전달석으로는 권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하가 낮은 구간이나 임시 교체석으로는 충분합니다.”“고급석 없다고 바로 멈추지는 않겠네.”“그렇습니다.”단테가 자료를 내려놓았다. “그게 좋군.”아르센은 곧바로 다음 설계도를 꺼냈다. 연구실 시험을

  • 마기에 잠식된 대공   빌리지 않아도 되는 힘

    백은샘의 흐름을 본떠 만든 세척 구조는 다음 날 아침부터 다섯 번의 반복 시험에 들어갔다. 전날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바로 현장 설계에 넣지 않기로 한 결정 때문이었다. 아르센은 같은 크기의 일반 마력석 세 개를 새로 준비했고, 에른은 각각 다른 산지에서 가져온 돌을 섞었다. 하나는 북부에서 흔히 쓰는 회색 마력석, 하나는 황실 기술단이 수도에서 가져온 표준석, 마지막 하나는 품질이 조금 떨어져 보조 장치에나 쓰던 갈색 마력석이었다.단테가 실험대 위 세 돌을 보고 물었다.“일부러 다른 걸 쓴 거야?”“네. 좋은 돌에서만 되는 구조면 북부 전체에 쓰기 어렵습니다.”아르센이 갈색 돌을 들어 보였다.“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실제 방어선에는 항상 최상급 마력석만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전쟁이 길어지거나 보급이 끊기면 이런 돌도 써야 합니다.”단테는 잠시 돌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재료가 있을 때만 안전한 체계는 결국 물자가 부족해지는 순간 누군가의 몸으로 부족분을 메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북부가 몇 번이나 그래왔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엘라는 안전선 밖에서 자료판을 받아들며 물었다.“오늘도 백은샘에서 가져오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죠?”에른이 답했다.“없습니다. 어제 기록한 흐름 비율만 사용합니다. 7 대 3, 4 대 6, 5 대 5로 순차 변환하고 합류점에서 압력을 한번 낮춥니다.”“그 비율이 꼭 저 숫자여야 합니까?”아르센이 웃었다.“그걸 확인하는 게 오늘 시험 중 하나입니다.”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성공한 모양을 그대로 신앙처럼 반복하는 순간, 또 다른 고정된 답이 된다. 정말 중요한 건 백은샘을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잔류 마기를 움직이게 했는지 찾는 일이었다.⸻첫 번째 반복 시험은 전날과 거의 같은 조건이었다.손상률 14퍼센트의 폐기 예정 전달석 안에 남은 오염을 3.6퍼센트까지 맞춘 뒤, 일반 마력을 세 갈래 흐름으로 흘렸다. 백은샘의 실제 마력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신성력을

  • 마기에 잠식된 대공   흐름을 가져오지 않아도 됩니다

    백은샘을 직접 확인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오전 회의가 끝나기 직전이었다.처음에는 현장 조사를 나갈 계획이 없었다. 옛 남서 온실 아래 막힌 배수 지맥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확인했고, 그 끝에 현재도 남아 있는 백은샘이 있다는 것까지 찾았으니 다음 순서는 기록 조사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전날 단테가 먼저 ‘이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한 뒤라, 서쪽의 맑은 지맥을 세척용으로 사용할 계획도 일단 보류된 상태였다.그런데 에른이 오래된 대공성 원예 기록 한 장을 가져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백은샘 주변 식생 기록입니다.”단테가 문서를 받아들었다. 봄철 개화 시기, 야생동물 관찰 기록, 샘물 온도. 얼핏 보면 마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기록을 남긴 사람도 마법사가 아니라 백여 년 전 대공성의 정원 관리인이었다.엘라는 단테 옆에서 복제본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을 멈췄다.백은샘의 물은 한겨울에도 완전히 얼지 않으며, 샘 주변의 흰풀은 성내 서쪽 정원보다 보름가량 먼저 꽃을 피운다. 단, 샘물을 옮겨 심은 흰풀에는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물을 가져와도 안 됐네요.”엘라가 말하자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단테가 물었다. “무엇을.”“따뜻한 물이 원인인지, 지맥 자체의 흐름이 원인인지요.”아르센이 지도 위 백은샘을 가리켰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가 필요한 건 샘의 마력을 가져오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흐름의 형태만 분석할 수 있다면요.”그 말에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선대 대공의 우회 마력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선대의 마력을 계속 꺼내 쓰는 대신, 그들이 마기를 오래 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겼던 흐름의 패턴을 일반 마력석에 복사했다. 그렇다면 맑은 지맥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지맥을 세척수처럼 끌어다 쓰지 않고, 그것이 잔류 마기를 밀어내는 방식만 배울 수 있다면 백은샘을 건드릴 이유가 없어진다.단테도 같은 데까지 생각이 닿은 듯 문서를 다시 봤다.“현장에서

  • 마기에 잠식된 대공   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시험은 중단됐다.전달석 잔류 오염이 예상보다 빠르게 줄었다는 결과만 놓고 보면, 원래라면 연구실 분위기가 들떠도 이상하지 않았다. 3.8퍼센트까지 낮춘 뒤 밤새 자연 방출을 거쳤고, 다음 날 아침 0.9퍼센트. 숫자만 보면 효율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나 줄어든 마기가 회수석으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부터 누구도 그 수치를 성과라고 부르지 않았다.에른은 연구실 바닥 전체에 측정침을 박았고, 아르센은 서쪽 정원 지맥과 대공성 지하 지맥을 각각 따로 표시했다. 기존 지도에는 두 흐름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실제 측정값은 달랐다. 아주 가느다란 지맥 하나가 연구실 아래를 지나 남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약해서 평소에는 감지하기 어려웠고, 서쪽의 맑은 흐름이 세척 시험으로 조금 활성화되면서 그제야 반응이 선명해진 것이다.단테는 지도 위에 새로 그어진 얇은 선을 한동안 내려다봤다.“끝은?”“아직 못 찾았습니다.”에른이 대답했다.“방향은.”“남서쪽입니다. 대공성 밖으로 나갑니다.”“거리.”“현재 확인한 건 약 600미터. 그 뒤로는 흐름이 너무 약해집니다.”단테는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여기까지?”에른이 잠시 멈췄다.예전 같으면 대공이 직접 더 확인하자고 했을 질문이었다.오늘은 의미가 달랐다.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우선 성 안 구간만 더 확인하고, 외부 추적은 기사단 지형 담당과 마렌 님 기록을 같이 보겠습니다.”“좋아.”단테는 더 말하지 않았다.엘라는 연구실 바닥에 표시된 가느다란 선을 보며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검은 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과 같은 방향감이 남아 있었다. 남서쪽. 희미하지만 분명한 감각.단테가 알아챘다.“아직 느껴져?”“조금요.”“아파?”“아닙니다.”“그럼.”그가 아주 짧게 말했다.“느낌 따라가지는 마.”엘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안 갑니다.”“바로 대답하네.”“저도 이제 압니다.”단테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뭘.”“궁금한

  • 마기에 잠식된 대공   맑은 길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북부 지맥에서 ‘맑은 가지’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오염된 지맥은 오히려 찾기 쉬웠다. 마기가 오래 머문 곳은 토양의 마력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방어선과 연결된 지점에는 검은 침식 흔적이 남았다. 반면 깨끗한 지맥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물이 새는 곳은 수리 기록이 남지만, 잘 흐르는 수로는 굳이 장부 한쪽을 차지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에른과 아르센은 아침부터 북부 전역의 지맥 지도를 겹쳐놓고 오염도가 낮은 구간을 추렸지만, 낮다는 것과 실제로 세척에 사용할 만큼 안정적인 흐름이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후보는 일곱 곳입니다.”에른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북부 대공성 회의실에는 단테와 엘라, 아르센, 마렌, 휴고, 세리아가 모여 있었다. 최근에는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사람 수부터 늘리지 않았다. 누가 필요한지를 먼저 정했고, 오늘은 지맥과 민간 수원, 단테와 엘라의 상태를 함께 봐야 했기 때문에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했다.아르센이 일곱 개의 점 가운데 세 곳에 표시를 그었다. “이 셋은 곧바로 제외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르덴 지하수와 너무 가깝고, 다른 하나는 여름 목초지 아래를 지나며, 마지막 하나는 현재 북부 기사단 보급로와 겹칩니다.”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넷.”“두 곳은 흐름이 너무 약합니다. 전달석 세척에는 쓸 수 있겠지만 실제 분산로 전체를 관리하기에는 부족합니다.”엘라가 물었다. “그럼 두 곳 남네요.”에른이 지도 서쪽과 북동쪽을 각각 짚었다. “하나는 대공성 서쪽 지맥. 다른 하나는 북동쪽 산림 아래를 흐르는 자연 지맥입니다.”단테의 시선이 서쪽에 멈췄다.엘라도 금방 알아봤다.“설화초.”“네.”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서쪽 정원 아래에서 발견했던 흐름과 같은 계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며칠 전, 눈 아래에서 가장 먼저 설화초가 올라오게 만들었던 따뜻한 지맥. 북문 계통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오염 반응은 거의 없었고, 대공성에서

  • 마기에 잠식된 대공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길을 택했습니다

    실제 오염 마기를 사용하는 첫 현장 시험은 설화초가 완전히 핀 날 오전 열 시에 시작됐다.대공성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단테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리아에게 상태를 확인했고, 전날보다 잠을 조금 덜 잤다는 사실까지 먼저 알렸다. 두통과 감각 이상은 없었고 마기 유입량 역시 최근 평균 범위 안이었다. 엘라는 그 옆에서 듣기만 했다. 이제 단테가 자기 상태를 말할 때마다 의미를 붙이거나 변화라고 짚어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면 멈추는 것도 어느새 현장 준비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사용하는 오염 마기는 제9방어선에서 회수된 마력석에서 추출한 극소량이었다. 이전에 오염도 78퍼센트였던 돌을 제3감시탑의 기존 순환에 잠깐 연결해 31퍼센트까지 낮췄던 것과는 방식부터 달랐다. 그때는 이미 살아 있는 고대 흐름에 작은 돌 하나를 맡겨보는 시험이었다면, 오늘은 자신들이 새로 만든 네 개의 전달석과 두 개의 교대선을 거쳐 실제 오염 마기가 움직일 수 있는지를 처음 확인하는 자리였다.그래서 사람들은 어제보다 훨씬 말이 적었다.회백 능선 초입에는 길이 120미터의 시험 구간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눈을 걷어낸 암반 사이로 네 개의 전달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설되어 있었고, 각 전달석 사이에는 두 줄의 얇은 마력선이 번갈아 주선 역할을 맡도록 연결돼 있었다. 그 끝에는 방출 장치 대신 밀폐형 회수석이 놓였다. 오늘은 환경으로 마기를 내보내지 않는다. 전달만 확인한 뒤 마지막에 다시 회수한다. 실제 분산 방출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아르센이 마지막 봉인을 확인하며 말했다.“오늘 목표는 세 개뿐입니다. 실제 오염 마기가 전달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지, 이동 과정에서 전달석에 얼마나 남는지, 한쪽 선을 중간에 끊었을 때 보조선으로 전환되는지. 그 이상은 보지 않습니다.”단테가 물었다.“끝까지 안정적이어도?”“끝냅니다.”이번에는 아르센이 먼저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단테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에른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