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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3 08:55:46

“열일곱.”

엘라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에 흙과 잔디가 묻어 있었다.

무릎도 조금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주웠다.

“다시 하겠습니다.”

맞은편에 서 있던 기사가 난처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는 훈련장 가장자리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다 말고 물었다.

“엘라.”

“네.”

“뭘 다시 해?”

“대련을요.”

“방금 졌잖아.”

“그러니까 다시 해야 합니다.”

테오도르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열일곱 번이나 졌는데?”

“열세 번 진 전하도 다시 하셨습니다.”

“그건 네가 억지로 시켜서 그런 거야.”

“그래도 하셨잖아요.”

“나는 황태자니까.”

“저도 공녀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다만 황태자가 졌다고 다시 해야 한다면 공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목검을 고쳐 잡았다.

“준비됐습니다.”

맞은편의 기사가 다시 한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는 아직 젊었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를 짧게 잘랐고, 눈매는 선해 보였다.

이름은 레온 하르트.

황궁 제1기사단 소속의 정식 기사였다.

실력이 뛰어나면서도 어린 견습 기사들을 잘 가르쳐, 오늘 엘라와 테오도르의 훈련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엘라가 훨씬 끈질기다는 것이었다.

“공녀님.”

레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직 검을 들 수 있습니다.”

“그건 보입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계십니다.”

엘라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릎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이제 안 떨립니다.”

레온은 한숨을 삼켰다.

“안 떨리는 척하시는 겁니다.”

“아닙니다.”

“방금 오른쪽 무릎이 세 번 흔들렸습니다.”

“바람 때문입니다.”

벤치에 앉아 있던 테오도르가 소리 내 웃었다.

엘라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웃으십니까?”

“그거 내가 하는 변명이잖아.”

“전하의 변명이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도 안 불어.”

“조금 불었습니다.”

“나뭇잎도 안 움직이는데?”

엘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레온이 목검을 내려놓았다.

“일단 쉬시지요.”

“싫습니다.”

“명령입니다.”

엘라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기사님께서 저에게 명령하실 수 있습니까?”

레온도 멈칫했다.

명목상 오늘의 훈련 교관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엘라는 공작 영애였다.

제국에서도 가장 높은 귀족가의 딸.

기사인 자신이 명령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는지는 애매했다.

그때 테오도르가 끼어들었다.

“내가 명령할게.”

엘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전하께서는 가끔 황태자라는 지위를 함부로 사용하십니다.”

“그래도 오늘은 써도 되잖아.”

“왜요?”

“네가 쓰러지기 전에 쉬게 하려고.”

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레온이 아주 조금 웃었다.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십니다.”

“두 분이 짜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방금 처음 만났습니다.”

“마음이 잘 맞으시네요.”

테오도르가 벤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와서 앉아.”

엘라는 한동안 서 있었다.

다시 싸울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목검을 잡은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검 끝도 조금씩 아래로 기울었다.

결국 엘라는 마지못해 벤치로 걸어갔다.

그런데 세 걸음쯤 옮겼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엘라!”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레온이 빨랐다.

레온은 순식간에 다가와 엘라의 팔을 붙잡았다.

엘라는 넘어지지 않고 간신히 균형을 되찾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힘이 빠졌을 뿐입니다.”

레온은 그녀가 제대로 설 수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손을 놓았다.

엘라는 붙잡혔던 팔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자신은 분명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또 흙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테오도르가 빠르게 다가왔다.

“다친 데 없어?”

“없습니다.”

“정말?”

“네.”

“아까도 안 힘들다고 했잖아.”

“아까는 정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못 했잖아.”

엘라의 입술이 다물렸다.

테오도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그 말을 듣기 싫었다.

“전하는 가끔 너무 솔직하십니다.”

“누가 그런 걸 가르쳤는데.”

테오도르는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친구라면 잘못한 걸 알려줘야 한다고.”

엘라는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기분은 나쁩니다.”

테오도르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말해도 돼?”

“기분 나쁜데 안 나쁜 척하면 거짓말입니다.”

“그건 맞는데.”

“하지만 전하의 말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엘라는 마지못해 덧붙였다.

“그냥 제가 듣기 싫다는 뜻입니다.”

테오도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알겠어.”

“왜 웃으십니까?”

“너도 똑같구나 싶어서.”

“뭐가요?”

“틀렸다고 인정하면서도 화나는 거.”

엘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온은 두 아이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황궁에서 자란 귀족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높은 신분일수록 더했다.

잘못을 인정하면 체면을 잃는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아이는 이상했다.

서로의 잘못을 곧장 말하고.

기분이 나쁘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상대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서툴렀지만 나쁘지 않았다.

레온은 물병을 내밀었다.

“우선 물을 드십시오.”

엘라는 병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생각보다 목이 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병의 절반을 비웠다.

테오도르가 혀를 찼다.

“그렇게 목마르면서 안 힘들다고 했어?”

“집중해서 몰랐습니다.”

“거짓말.”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네가 아까 그랬잖아. 자기 상태도 제대로 봐야 한다고.”

“그런 말은 한 적 없습니다.”

“비슷한 말 했어.”

“어제 교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럼 교수 말도 들어야지.”

엘라는 물병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전하께서는 언제부터 교수님 말씀을 그렇게 잘 들으셨습니까?”

“네가 안 들을 때부터.”

두 아이가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레온은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가 작게 웃자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기사님.”

“예, 공녀님.”

“왜 웃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언가 있으신 얼굴입니다.”

“두 분이 친하셔서 보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테오도르가 곧장 대답했다.

“안 친해.”

엘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자주 얄밉게 구십니다.”

“너는 안 그래?”

“저는 비교적 괜찮습니다.”

“누구랑 비교해서?”

“전하와요.”

“그게 비교가 돼?”

레온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테오도르도 따라 웃었다.

엘라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조금 웃었다.

훈련이 잠시 중단되자 기사들이 하나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황태자와 공녀의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엘라가 열일곱 번 연속으로 넘어지는 모습은 이미 훈련장 전체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커다란 기사들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엘라는 물병을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오십니까?”

가장 앞에 선 중년 기사가 헛기침했다.

“지나가던 길입니다.”

엘라는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저기 서 계셨습니다.”

기사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옆에 있던 젊은 기사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았다.

“공녀님께서 대단하시다고 생각해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기사가 솔직하게 말했다.

“열일곱 번이나 지는 게 대단합니까?”

“열일곱 번이나 다시 일어나는 것이 대단합니다.”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좋은 말 같았다.

그러나 완전히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럼 대련은 못했다는 뜻이군요.”

기사가 당황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열일곱 번 모두 졌습니다.”

“상대가 레온 경이지 않습니까.”

“기사님이 그렇게 강합니까?”

레온이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중년 기사가 대답했다.

“레온 경은 우리 기사단에서 손꼽히는 검술 교관입니다.”

엘라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보다 키가 두 배쯤 컸고.

팔도 굵었으며.

당연히 검술 경험도 훨씬 많아 보였다.

하지만 대련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황궁 기사단에서 비교적 젊은 기사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이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처음부터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엘라가 물었다.

레온이 눈을 깜빡였다.

“무엇을 말입니까?”

“기사님이 강하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강하다고 말씀드리면 공녀님께서 대련을 안 하셨겠습니까?”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아닙니다.”

“그러면 결과는 같았겠군요.”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했을 겁니다.”

“공녀님.”

레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한 채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레온은 벤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공녀님은 제가 몇 번이나 공격했는지 기억하십니까?”

“…….”

엘라는 떠올려 보았다.

첫 번째 대련에서는 레온이 두 번 움직였다.

두 번째에는 자신이 먼저 달려들었다가 검을 놓쳤고.

세 번째에는 다리를 걸렸다.

그 뒤로는.

수없이 넘어지느라 제대로 세지 못했다.

“모릅니다.”

“제가 어떤 공격을 가장 많이 사용했는지는요?”

“옆에서 검을 치셨습니다.”

“그다음은?”

엘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은 계속 이기는 방법만 찾으셨습니다.”

“대련은 이기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길 수 없을 때는 배우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엘라는 눈을 깜빡였다.

기사들이 조용히 레온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공녀님께서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보지 않으셨습니다.”

“…….”

“왜 넘어졌는지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셨고요.”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레온이 말했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계속 넘어지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 말이 엘라의 가슴에 조금 아프게 박혔다.

어제 자신은 테오도르를 잘못 의심했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믿었다.

그래서 오늘은 다르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검을 들자 또다시 자신의 생각만 믿었다.

계속하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왜 지는지는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엘라가 물었다.

레온은 미소 지었다.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엘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누구에게요?”

“저에게요.”

“기사님은 제 상대입니다.”

“지금부터는 선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대에게 이기는 방법을 물어봐도 됩니까?”

“대련이 끝났으니까요.”

엘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

말은 간단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검술을 처음 배울 때는 자연스러웠다.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제법 잘한다고 생각했다.

테오도르를 열세 번이나 이겼고.

공작가의 견습 기사들과 겨뤄도 쉽게 지지 않았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면 자신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레온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테오도르도 아무 말 없이 엘라를 바라보았다.

엘라는 한동안 목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레온의 미소가 조금 깊어졌다.

“물론입니다.”

“왜 제가 계속 넘어졌는지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라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도 이 손이 자신을 붙잡아 주었다.

이번에는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손이었다.

엘라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았다.

레온이 가볍게 힘을 주자 몸이 쉽게 일어났다.

“우선 자세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자세는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그 자세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요?”

“지금 공녀님에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엘라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마다 자세가 다릅니까?”

“체격도, 힘도, 속도도 다르니까요.”

레온은 엘라가 목검을 든 모습을 살폈다.

“공녀님은 자신의 힘보다 검을 너무 세게 쥐고 계십니다.”

“놓치지 않으려고요.”

“그래서 손목이 굳습니다.”

레온은 자신의 검을 가볍게 움직였다.

빠르고 부드러웠다.

“검은 놓치지 않을 만큼만 잡는 겁니다.”

엘라는 손가락에 들어간 힘을 조금 풀었다.

처음에는 검이 금방 떨어질 것처럼 불안했다.

“더 풀어도 됩니다.”

“떨어질 것 같습니다.”

“떨어지면 다시 주우면 되지요.”

엘라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제가 하던 말과 비슷합니다.”

“좋은 말이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직접 해 보고 판단하십시오.”

레온이 다시 자세를 잡아 주었다.

이번에는 몸을 직접 만지지 않고 자신의 동작을 보여줬다.

엘라는 유심히 관찰했다.

발의 방향.

무릎을 굽히는 정도.

목검을 쥔 손의 위치.

아까는 레온을 쓰러뜨릴 방법만 찾았다.

지금은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려고 했다.

같은 훈련장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전하께서도 하시겠습니까?”

레온이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테오도르는 벤치에 앉은 채 팔짱을 꼈다.

“나는 이미 배웠는데.”

엘라가 그를 보았다.

“오늘 저에게도 지셨습니다.”

“그건 아까고.”

“지금 다시 하면 이길 수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그럼 해보십시오.”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두 분 모두 기본 자세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레온이 말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굳었다.

“나도?”

“전하께서도 검을 지나치게 세게 쥐고 계십니다.”

엘라가 즉시 테오도르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말입니다.”

“너는 언제부터 선생이야?”

“방금 배웠습니다.”

“방금 배운 사람이 나를 가르치려고 해?”

“틀린 것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 말 진짜 편하게 쓴다.”

두 아이는 결국 나란히 섰다.

레온은 한 명씩 자세를 고쳐 주었다.

주변에 모였던 기사들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훈련을 돕기 시작했다.

한 기사는 발을 옮기는 법을 보여 줬고.

다른 기사는 검을 쥔 손의 힘을 조절하는 법을 알려 줬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던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엘라가 질문을 시작하자 모두 조금씩 입을 열었다.

“왜 오른쪽 발부터 움직입니까?”

“공녀님의 오른손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왼발부터 움직이면 안 됩니까?”

“가능하지만 지금은 균형이 무너질 겁니다.”

“기사님은 왼발부터 움직이셨습니다.”

“저는 왼손잡이입니다.”

엘라는 눈을 크게 떴다.

“사람마다 정말 다릅니다.”

중년 기사가 웃었다.

“그래서 상대를 보아야 합니다.”

그 말은 검술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엘라에게는 다른 뜻으로도 들렸다.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 먼저 보아야 한다.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미리 정하지 말고.

한 시간 뒤.

엘라는 다시 레온의 맞은편에 섰다.

아까보다 다리에 힘은 없었다.

팔도 무거웠다.

하지만 목검을 쥔 손은 전보다 부드러웠다.

레온이 물었다.

“다시 대련하시겠습니까?”

“네.”

“이번에도 이기려고 하실 겁니까?”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이기고 싶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엘라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왜 지는지도 보겠습니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목검을 들어 올렸다.

테오도르는 벤치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시작!”

엘라가 먼저 움직였다.

아까처럼 무작정 달려들지 않았다.

레온의 어깨와 발을 함께 보았다.

오른쪽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검이 옆으로 들어올 것이다.

엘라는 몸을 낮췄다.

휙―

목검이 머리 위를 스쳤다.

처음으로 레온의 공격을 완전히 피했다.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엘라는 기세를 타고 레온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러나 레온은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뒤였다.

그가 손목을 돌렸다.

이번에는 아래쪽.

엘라는 급히 검을 내렸다.

탁!

두 목검이 부딪쳤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하지만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

엘라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레온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위.

옆.

아래.

하나씩 보려고 했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아까보다 훨씬 오래 버텼다.

하지만 여덟 번째 공격에서 균형이 무너졌다.

레온의 목검이 엘라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목검이 풀밭으로 떨어졌다.

엘라는 그대로 멈췄다.

레온의 검 끝이 자신의 어깨 앞에 있었다.

“대련 끝입니다.”

또 졌다.

이번에는 열여덟 번째였다.

하지만 엘라는 곧장 검을 주우러 가지 않았다.

레온의 마지막 움직임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래쪽 공격을 막는 순간.

레온의 발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비어 있는 손목을 쳤다.

“제가 검만 봤습니다.”

엘라가 말했다.

레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맞습니다.”

“기사님의 발을 놓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라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졌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왜 졌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다음에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엘라는 고개를 들어 레온을 바라보았다.

“다시 해도 됩니까?”

레온이 웃었다.

“오늘은 안 됩니다.”

“왜요?”

“정말로 힘이 다 빠지셨으니까요.”

엘라는 곧장 반박하려 했다.

그때 무릎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에는 스스로 알아차렸다.

입을 다물었다.

“……그렇네요.”

테오도르가 천천히 다가왔다.

“방금 인정한 거야?”

“사실이니까요.”

“아까는 바람 때문이라며.”

“그때는 제가 잘못 봤습니다.”

테오도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엘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전하께 칭찬을 들으니 이상합니다.”

“왜?”

“진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너한테 배웠거든.”

“무엇을요?”

“못한 건 못했다고 하고, 잘한 건 잘했다고 해야 한다며.”

테오도르는 풀밭에 떨어진 목검을 주워 엘라에게 내밀었다.

“아까보다 훨씬 잘했어.”

엘라는 목검을 받아 들었다.

그 말이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테오도르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엘라는 레온과 주변 기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들이 잠시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신분 높은 귀족이 기사들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레온이 대표로 허리를 숙였다.

“배우려고 하신 것은 공녀님입니다.”

“그래도 저 혼자서는 몰랐을 겁니다.”

엘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다음에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중년 기사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다만 다음에는 쓰러지기 전에 쉬겠다고 약속하셔야 합니다.”

엘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노력하겠습니다.”

“약속은 아닙니까?”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

기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엘라도 따라 웃었다.

훈련이 끝난 뒤.

엘라와 테오도르는 기사단 식당으로 향했다.

본래 황태자는 별궁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가 기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어 보고 싶다고 고집했다.

정확히는.

훈련을 마친 기사들이 먹는 고기 스튜 냄새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엘라도 반대하지 않았다.

긴 나무 식탁 위에는 커다란 빵과 김이 나는 스튜가 놓였다.

기사들은 황태자와 공녀가 들어오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도르가 손을 내저었다.

“앉아.”

기사들은 머뭇거리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무도 편하게 먹지 못했다.

황태자가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엘라는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스튜를 한 숟갈 먹었다.

눈이 조금 커졌다.

“맛있습니다.”

테오도르도 한입 먹었다.

“진짜네.”

두 아이가 먹기 시작하자 기사들도 조금씩 숟가락을 들었다.

엘라는 맞은편에 앉은 레온에게 물었다.

“기사님은 몇 번이나 지셨습니까?”

레온이 빵을 뜯다 멈췄다.

“제가요?”

“기사님도 처음부터 이기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레온에게 향했다.

레온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셀 수 없습니다.”

“열일곱 번보다 많습니까?”

기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레온도 웃으며 대답했다.

“훨씬 많습니다.”

엘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런데 지금은 강해지셨습니다.”

“많이 졌으니까요.”

“지면 강해집니까?”

“지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레온은 스튜를 한 숟갈 떠먹은 뒤 말했다.

“왜 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요?”

“도움도 받아야 하고요.”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받는 건 아직 조금 어렵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엘라는 빵 조각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제가 못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요.”

레온은 곧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혼자서는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 부끄러운 것 아닙니까?”

“왜 부끄럽습니까?”

“못하니까요.”

“사람이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습니다.”

레온은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저는 검을 잘 다루지만 요리는 못합니다.”

주방 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레온 경이 만든 스튜는 말도 안 먹습니다!”

식당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레온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지난번에 말이 냄새를 맡고 도망갔습니다!”

“그건 우연이었습니다.”

엘라도 웃음을 터뜨렸다.

레온이 헛기침한 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는 요리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요리사는 검을 못 쓰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요.”

주방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칼은 잘 씁니다!”

테오도르가 웃다가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레온도 결국 웃었다.

“그러니 서로 도움을 받는 겁니다.”

엘라는 식당에 앉은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검을 잘 쓰는 기사.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

훈련장을 관리하는 시종.

각자 할 수 있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서로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갔다.

엘라는 자신이 도움을 받는 것을 약함이라고만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도움을 받는 것도 잘해야 합니까?”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는 것만큼이나요.”

그 말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엘라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했다.

테오도르의 자세를 고쳐 주고.

실수를 알려주고.

넘어지면 기다려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넘어졌을 때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걷는다면.

자신만 계속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때로는 자신도 손을 잡아야 했다.

점심을 마친 뒤.

테오도르와 엘라는 황제의 집무실로 불려 갔다.

황제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썹을 올렸다.

엘라의 옷에는 흙이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에는 잔디가 하나 붙어 있었다.

테오도르 역시 소매가 구겨지고 뺨에 작은 밀가루 자국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황제가 물었다.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엘라가 열여덟 번 졌습니다.”

엘라가 곧장 덧붙였다.

“전하는 오전에 저에게 두 번 지셨습니다.”

“그 얘기는 왜 해?”

“사실이니까요.”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펠리시아 공작은 딸의 무릎에 난 흙자국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다쳤느냐?”

“아닙니다.”

“정말이냐?”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아까였다면 무조건 괜찮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손바닥이 조금 쓰라렸다.

무릎도 아팠다.

“손바닥이 조금 아프고 무릎도 따갑습니다.”

공작은 즉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엘라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치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닙니다.”

공작은 딸을 바라보았다.

“확실하냐?”

“네. 레온 경과 기사님들도 확인해 주셨습니다.”

공작은 그제야 다시 앉았다.

황제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괜찮은 척하지 않는구나.”

엘라가 눈을 깜빡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까부터 오른쪽 다리를 조금씩 들고 있거든.”

엘라는 자신의 자세를 내려다보았다.

아픈 무릎에 힘을 주지 않으려 자신도 모르게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숨기지 못했습니다.”

“숨길 필요가 있느냐?”

엘라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힘들어 보이면 다른 사람도 힘들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제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엘라는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숨기는 일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군주나 기사는 때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두려움을 숨겨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숨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황제가 말했다.

엘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너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어야겠지.”

“…….”

“하지만 너를 걱정하는 사람에게까지 아프지 않은 척하면.”

황제의 시선이 펠리시아 공작에게 향했다.

“그 사람은 네가 힘들 때 손을 내밀 수 없지 않겠느냐?”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엘라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아버지는 그 말을 믿어주었다.

정확히는 믿는 척했을지도 몰랐다.

엘라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럼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해도 됩니까?”

황제가 웃었다.

“당연하지.”

테오도르가 곧장 끼어들었다.

“내가 아까부터 그랬잖아.”

엘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말씀하실 때는 잔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가 말하면 괜찮고 내가 말하면 잔소리야?”

“말투의 차이입니다.”

“똑같은 말이었어!”

황제와 공작은 동시에 웃었다.

잠시 뒤 황제가 엘라에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을 배웠느냐?”

엘라는 생각했다.

검을 너무 세게 쥐면 손목이 굳는다는 것.

상대의 검만 보지 말고 발과 어깨까지 보아야 한다는 것.

계속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따로 있었다.

“도움을 받는 법을 배웠습니다.”

황제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어려웠느냐?”

“네.”

엘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못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정하니까 배울 수 있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하루였구나.”

“열여덟 번이나 졌는데요?”

테오도르가 물었다.

황제가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좋은 하루였을 수도 있지.”

테오도르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엘라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오늘 한 번도 지지 않았다면.

자신은 레온에게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들과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패배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픈 것도 싫었다.

그래도 오늘의 패배는 엘라에게 새로운 것을 남겼다.

“내일 다시 하겠습니다.”

엘라가 말했다.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내일도?”

“네.”

“상처가 낫고 나서 해라.”

“손바닥만 조금 아픕니다.”

“조금 아픈 것도 아픈 거다.”

“하지만.”

“엘라.”

공작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루를 쉬면 배운 것을 잊을 것 같았다.

그때 테오도르가 말했다.

“내일은 검 없이 하면 되잖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테오도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발 움직이는 연습만 하면 손바닥은 안 쓰잖아.”

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런 방법도 있군요.”

“레온 경한테 물어보면 되지.”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또다시 검을 들거나 완전히 쉬는 두 가지 방법만 생각했다.

테오도르는 그사이의 방법을 찾아냈다.

“전하.”

“왜?”

“좋은 생각입니다.”

“이제야 알았어?”

“가끔은 도움이 되십니다.”

“가끔?”

“오늘은요.”

테오도르가 인상을 쓰려다 웃었다.

“됐어.”

황제는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엘라가 테오도르에게 솔직함을 가르치고.

테오도르는 엘라에게 쉬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느 한 사람만 다른 사람을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두 아이는 서툴게 서로의 빈 곳을 채우고 있었다.

황제는 문득 오래전 자신과 공작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이 너무 앞으로 달려가면 공작이 붙잡았고.

공작이 지나치게 고민하면 자신이 등을 떠밀었다.

어쩌면 친구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엘라는 공작가로 돌아가기 전 황궁 기사단의 훈련장을 다시 찾았다.

기사는 대부분 저녁 훈련을 마치고 돌아간 뒤였다.

넓은 훈련장에는 레온만 남아 목검을 정리하고 있었다.

엘라가 다가가자 레온이 허리를 숙였다.

“공녀님.”

“아까 가르쳐 주신 것에 관해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내일은 손을 쓰지 않고 발 움직이는 연습만 해도 됩니까?”

레온이 잠시 놀랐다.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생각했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요.”

레온이 웃었다.

“전하께서도 좋은 훈련 상대가 되어 가시는군요.”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전하께 배우는 게 있습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조금 새로웠다.

늘 자신이 테오도르에게 알려 주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테오도르가 자신이 보지 못한 방법을 보았다.

“기사님.”

“예.”

“도움을 잘 받는 방법도 있습니까?”

레온은 목검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라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미안할 것 같습니다.”

“왜 미안합니까?”

“그 사람의 시간을 쓰는 거잖아요.”

레온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감사하면 됩니다.”

“그것뿐입니까?”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람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면 되지요.”

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꼭 같은 만큼 돌려줘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요?”

레온은 훈련장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도움은 빚이 아니니까요.”

엘라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다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무엇을요?”

“혼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레온은 목검 하나를 엘라에게 내밀었다.

“저도 수많은 사람에게 배웠습니다.”

“기사님도요?”

“예.”

“지금도 도움을 받습니까?”

“매일 받습니다.”

레온은 기사단 막사 쪽을 가리켰다.

“동료가 등을 지켜 주고.”

식당 쪽을 가리켰다.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주며.”

마지막으로 황궁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지키는 사람들이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를 줍니다.”

엘라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면 혼자 강한 사람은 없습니까?”

레온은 미소 지었다.

“적어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일지도 몰랐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누군가 넘어지면 손을 내미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넘어졌을 때도 그 손을 잡는 일이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엘라가 말했다.

레온이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엘라는 돌아서려다 다시 멈췄다.

“기사님.”

“예.”

“오늘 저를 붙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온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는 넘어지기 전에 말씀해 주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약속은 아닙니까?”

엘라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녀는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레온은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작가의 영애.

황태자의 친구.

검술에 뛰어난 아이.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엘라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았고.

잘못하면 사과할 줄 알았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법까지 배우려고 했다.

아직은 서툰 아이였다.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레온은 다시 목검을 정리했다.

그때 훈련장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황제가 홀로 서 있었다.

레온은 놀라 곧장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편하게 있게.”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조금 전부터.”

황제는 엘라가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어떻던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

레온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잘 넘어집니다.”

황제의 눈썹이 올라갔다.

“칭찬인가?”

“아닙니다.”

“그럼?”

레온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잘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건 알고 있네.”

“그리고 오늘은.”

레온이 말했다.

“혼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황제의 눈빛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군.”

그는 천천히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는 엘라가 넘어졌던 흔적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짓눌린 잔디.

흩어진 흙.

작은 발자국.

하지만 그 발자국 옆에는 언제나 더 큰 발자국이 있었다.

레온의 것.

테오도르의 것.

그리고 훈련을 도왔던 기사들의 것.

황제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폐하.”

레온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왜 그러지?”

“공녀님을 정말 황태자 전하의 교육에 계속 참여시키실 생각이십니까?”

황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아들이 엘라와 함께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 전.

엘라가 혼자 강한 사람이 있는지 묻던 목소리도.

“나는 처음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테오도르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네.”

“지금은 아니십니까?”

“지금도 그렇지.”

황제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어쩌면 테오도르도 그 아이에게 필요한 사람일지 모르겠군.”

레온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날 황궁 기사단에는 작은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펠리시아 공작가의 둘째 영애가.

황태자를 열세 번이나 이겼으면서.

정작 황궁 기사에게는 열여덟 번이나 졌다는 이야기.

하지만 기사들이 더 오래 기억한 것은 승패가 아니었다.

열일곱 번까지는 혼자 일어났던 아이가.

열여덟 번째에는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는 것.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그 한마디였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북부의 차가운 성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던 한 남자가 무너졌을 때.

엘라는 오늘 배운 것을 떠올리게 될 것이었다.

도움을 받는 것은 약해지는 일이 아니라고.

혼자 강한 사람은 없다고.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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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드릭은 화를 잘 냅니다.”엘라의 말에 세드릭이 눈을 크게 떴다.“제가요?”“네.”“언제요?”엘라는 손에 들고 있던 공책을 펼쳤다.“지난 일주일 동안 세 번입니다.”“세 번밖에 안 냈는데요?”“밖에?”노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세드릭이 노아를 바라보았다.“너도 화내잖아.”“나는 세 번보다 적습니다.”“그걸 어떻게 알아?”노아는 자신의 기록장을 들어 보였다.“적었습니다.”세드릭의 얼굴이 굳었다.“다들 왜 이렇게 열심히 해.”에런이 진지하게 대답했다.“교수님이 한 달은 해보라고 하셨잖아.”“너는 원래 기록하는 걸 좋아하잖아.”“맞아.”너무 순순한 인정에 세드릭이 할 말을 잃었다.엘라는 다시 자신의 메모를 내려다봤다.오늘은 황실 예비교육반의 기록 수업 두 번째 주.에드먼드 교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기록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행동 하나를 찾아보라고 했다.엘라는 정식 학생은 아니었지만.보조 지도자로서 아이들의 기록을 함께 살피고 있었다.물론.보고 싶지 않다고 표시한 부분은 읽지 않았다.“다시 말하겠습니다.”엘라가 말했다.“세드릭은 화를 자주 냅니다.”“아까랑 똑같잖아요.”“아닙니다.”“뭐가 다른데요?”“아까는 잘 냅니다.”“…….”“지금은 자주 냅니다.”세드릭이 잠시 생각했다.“그게 더 나쁜 것 같은데요?”테오도르가 뒤에서 웃음을 터뜨렸다.“나도 그렇게 들려.”엘라는 두 사람을 무시했다.“화요일에는 검술 대련에서 졌을 때.”손가락 하나.“목요일에는 간식이 늦게 왔을 때.”두 번째.“어제는 에런이 책을 돌려주지 않았을 때.”세 번째.에런이 고개를 들었다.“그건 제가 반납일을 착각했습니다.”“알고 있습니다.”세드릭이 팔짱을 꼈다.“그러니까 제가 화를 잘 내는 게 맞잖아요.”“그럴 수도 있습니다.”엘라는 잠시 기록을 바라봤다.처음에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세 번이나 반복됐다.기록에도 남아 있었다.그렇다면 세드릭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하지만.문득 이상했

  • 《마기에 잠식된 대공》   기록하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전하.” 엘라는 테오도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그건 무엇입니까?” 테오도르는 종이를 얼른 뒤집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걸 왜 숨기십니까?” “숨긴 거 아니야.” “지금 뒤집으셨습니다.” “그냥 손목 운동.” 엘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테오도르도 엘라를 바라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테오도르였다. “왜 그렇게 봐.” “거짓말을 잘 못하십니다.” “너도 잘 못해.” “저는 지금 거짓말 안 했습니다.” “그게 더 얄미워.” 테오도르는 결국 종이를 다시 펼쳤다. 거기에는 익숙한 형식의 표가 그려져 있었다. 수면 시간. 식사량. 공부 집중도. 검술 훈련. 기분. 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전하도 기록하십니까?” “응.” “왜요?” “아버지가 해보래.” “황제 폐하께서요?” “요즘 내가 피곤해 보인대.” 엘라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눈 밑에 아주 옅은 그늘. 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눈꺼풀. “정말 피곤해 보이십니다.” “왜 이제 말해?” “오늘 처음 자세히 봤습니다.” “맨날 그렇게 사람 얼굴 보면서.” “전하는 너무 자주 봐서 오히려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잠시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매일 보면 작은 변화는 놓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엘라는 자신의 신성력 기록 수첩을 꺼냈다. “저도 처음에는 검은 점만 기록했습니다.” “응.” “그런데 주변 상황도 같이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엘라는 수첩을 펼쳤다. 수면 부족 없음. 신성력 사용량 평소와 같음. 전령통 오염 근처에서만 검은 점 확인. 테오도르가 수첩을 들여다봤다. “그래서 뭘 알아냈어?” 엘라는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뭐야.” “대신.” 엘라는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검은 점이 나타난 날과 나타나지 않은 날을 같이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그날 일만 기억했습니다.”

  • 《마기에 잠식된 대공》   기다리는 것과 내버려두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수업은 취소됐습니다.” 에드먼드 교수의 말에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세드릭이 가장 먼저 물었다. “왜요?” “황궁 사정 때문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동시에 시무룩해졌다. 엘라는 교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눈 밑의 그늘도 짙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묻지 않았다. 교수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지금은 기다리면 된다. 다만. “교수님.” “왜요?” “저희가 알아야 할 때가 오면 알려주십니까?” 에드먼드 교수의 시선이 엘라에게 향했다. 잠시 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이들은 갑자기 생긴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곧장 훈련장을 가자고 했고. 에런은 도서관을 원했다. 릴리안은 과제를 끝내고 싶어 했다. 노아는 마구간에 가야 한다고 했다. “다 따로 가면 되잖아.” 테오도르가 말했다. 세드릭이 그를 바라봤다. “같이 놀면 안 됩니까?” “뭘 하고 싶은데?” “검술 대련이요.” 에런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저는 싫습니다.” “그럼 구경해.” “그것도 싫습니다.” 세드릭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재미없으니까.” “검술이 어떻게 재미없어?” “책 읽는 게 더 재밌어.” “그게 어떻게 재미있어?” 둘의 표정이 동시에 심각해졌다. 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하는 게 다를 수 있습니다.” 세드릭이 말했다. “그래도 다 같이 놀고 싶습니다.” 그 말에 에런도 조금 망설였다. “저도 같이 있는 건 싫지 않습니다.” “그럼 뭐 하지?” 릴리안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정원 미로는요?” 아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황궁 서쪽 정원에는 낮은 생울타리로 만든 작은 미로가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별것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복잡했다. 세드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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