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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Author: 태이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1 20:01:04

인간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렸을 때, 로엘은 아주 짧은 현기증을 느꼈다.

기억이 사라질 때와는 다른 감각. 이질적인 공기가 폐로 밀려 들어왔다.

"지금부터는 내가 말해주는 것만 믿어."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잊은 건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알았다."

서울은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걷고, 차들은 지나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로엘과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네가 멈췄던 곳."

이안이 말하자 로엘은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

그런데. 그의 가슴 깊은 곳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고, 로엘은 그 인간 여자가 이 근처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안. 그 인간 여자는 이 근처에 있다."

이안도 로엘과 같은 기척을 느끼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맞은 편 골목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한소연은 그날도 평소처럼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유없이 그저 가슴이 답답해졌다.

고개를 들자 낯선 남자 두 명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검은 색 슈트.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이상할 만큼 깊고 붉은 눈빛.

"어......?"

로엘과 소연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맞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찾았군."

로엘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했다. 내가 살린 인간 여자가 저 여자구나.

"네 이름이 뭐지?"

"저요..? 한, 한소연이요."

로엘이 풍겨내는 위압감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소연이라...나는 마계의 왕 로엘이다."

형벌이 진행되고 있는 탓인지, 그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내뱉을 때마다 그는 심장이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연은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날 밤, 저를 살려주셨던 분인가요?"

그녀가 그날 일을 회상하듯 말하자 로엘의 머릿속에는 짧은 장면이 스쳤다.

쓰러진 인간들. 그 사이에 숨 쉬고 있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얼굴.

로엘은 그녀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섰다.

그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너무 가까웠고, 이내 로엘은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한 쪽 볼을 쓸어냈다.

그렇게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그의 손끝에 전해져왔다.

그 순간- 로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되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게. 아주 불완전하게.

"윽...잠깐만요.."

동시에 그녀의 얇은 몸이 잠시 중심을 잃은 듯 흔들리더니, 이내 가슴 위로 손이 올라갔다.

"갑자기...심장 조임이..."

소연의 말을 들은 이안이 재빨리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이안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조금 놀라신 것 같네요. 저는 로엘의 친구이자 부하인 이안이라고 합니다."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신이 없어보였고,

이안의 말은 귀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시선은 끝내 로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숨을 한 번 고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엘... 저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아주 작은 목소리에 로엘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

소연의 별거 없는 저 언어가 그의 안쪽을 건드렸고,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감정이 퍼져갔다.

로엘의 작은 미소를 본 순간,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겟는데... 우리는 꼭 다시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로엘은 대답 대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로엘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며 주변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거리의 사람들과 주변의 시간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 정적 속에서 로엘의 발끝에서부터 어둠이 천천히 번져 나왔다. 검은 기운이 공기를 잠식하듯 일렁이며 공간을 뒤틀었다.

로엘이 그 어둠 속으로 한 발 내딛자, 이안도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검은 빛이 공기를 삼키듯 스쳐 지나갔고, 로엘과 이안의 모습은 소연의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마계로 향하는 문을 지나서도, 로엘이 시선은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주 잠깐인간 세계의 온도가, 그의 얼굴에 남았다.

이안은 옆을 걷는 로엘을 힐끗 바라봤다. 무표정해야 할 얼굴에,

설명하기 힘든 느슨함이 스며 있었다. 마치 방금 전 대화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로엘, 너 지금 웃고 있는 거 맞지?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돼놓고, 고작 대화 몇 마디에 실실 웃고 있다고?"

이안의 말이 떨어지자, 로엘은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안을 흘겨봤지만, 감정은 몸부터 배신하듯 귀와 목덜미를 붉게 물들였다.

이안은 붉어진 로엘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휴 미친놈. 빨리 가서 마력 결정 만들 생각이나 해."

***

그날 밤, 마계로 돌아온 로엘은 자신의 마력이 담긴 결정을 만들며 낮의 일을 회상했다.

로엘 그는 분명히 느꼈다. 망각의 형벌은 멈추지 않았지만 완전히 같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도 않고 있다는 걸.

로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이안이 입을 뗐다.

"그때. 아주 잠깐이지만 기억이 반응했어."

이안의 말에 로엘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기억은 흐릿했고, 형벌은 여전했다. 그런데-그 인간의 체온만은 이상하게도 남아있었다.

그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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