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서울은 마치 죽은 도시 같았다.
도로 위에는 차들이 멈춘 채였고, 가로등 아래에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눈을 감은 얼굴들에는 고통도 공포도 남아 있지 않았다.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전부 의식을 잃었군."
이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SS급 마족인 그조차 이 광경 앞에는 말을 아꼈다
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단 하나의 방향에 고정돼 있었다.
도시 한복판, 수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단 한 사람.
"...."
로엘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왜 저여자만 안쓰러진거지?"
"그게 무슨...."
이안은 로엘의 고정된 시선을 쫓았다.
인간 여자 한명이 쓰러졌다가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여자는 길가에 무릎을 꿇은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마치 악몽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하아...하.."
그녀의 숨소리가 이 죽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로엘과 이안의 눈빛이 강하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마왕의 힘이 미치지 않은 인간이라니.
"로엘."
이안이 경계하듯 불렀다.
"저 인간은- 혹시.. 망각을 견디는 인간인가?"
"...그런 거 같군."
로엘의 시선이 여자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로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로엘의 심장이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요동쳤다.
마왕에게서 심장이 뛰는 일 따위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인데. 여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사람?"
그녀는 로엘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사람.
마족도, 괴물도 아닌- 사람이라고. 로엘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찰나, 이안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그만둬."
이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규칙을 어기면 안 돼."
"규칙?"
로엘이 서늘한 표정을 하며 이안에게 낮게 되물었다.
"인간은 먹잇감이야. 네가 힘을 사용한 이상 살리는 선택지는 없어."
이안의 말을 들은 로엘의 시선이 다시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망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울고 있었다.
로엘은 깨달았다.
이 인간은 자신을 보고도 공포보다 먼저 상실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여자를 괜히 살리고 싶어졌다. 그의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그 사실이 로엘의 선택을 바꿨다.
"...이안. 오늘은, 심장을 거두지 않는다."
이안의 눈동자에 미세한 균열이 스쳤다.
"로엘..! 그건-"
"명령이다."
마왕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로엘의 몸을 스쳤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마치무언가가 그의 선택을 기록한 것처럼. 여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엘의 향해 말했다.
"...저를 살려주시는 건가요?"
로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 적응 안되는 심장 떨림 따위를 오래 전 느껴본 기분이 들었다.
"살아라."눈을 떴을 때, 세상은 너무 조용했다. 한소연은 처음에 자신이 죽은 줄 알았다.
숨을 들이쉬자 자신이 살아있다고 증명하듯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그런데-
"...?"
몸을 일으키자 시야에 들어온 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로 위, 인도 위, 차 안에서도. 모두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연의 목소리는 텅 빈 도시로 흩어졌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21:00에서 멈춰 있었고, 머리에 터질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기억이...끊긴 것 같았다.
분명 퇴근을 하고 있었고,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마치 필름이 중간에서 잘려나간 것처럼 그 다음 기억이 없었다.
그때였다.
심장이 갑자기 조여오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불안. 숨이 점점 가빠졌다.
"하아...하.."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에는 쓰러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인 존재.
검은색 슈트에. 짙은 흑발에 핏기하나 없는 흰 피부, 붉게 빛나는 눈동자.
그는 이 도시의 일부가 아니었다. 아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닌 것 같았다.
저 사람을 보면 안된다는 걸. 도망쳐야 한다는 걸 그녀는 본능 적으로 느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남자에게 시선을 걷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가슴이 툭. 하고 내려앉았다.
무서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을 다시 본 것처럼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먼저 흘렀다.
"...사람?"
그 말이 왜 입 밖으로 나왔는지 소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사람 같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를 막아섰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였다.
그 남자와 비슷한 분위기 였지만, 은색 머리에 훨씬 날카로운 붉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둘이 말을 나누는 것 같았지만 소연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점점 멍해져가고 있을 때쯤.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박혔다.
"...오늘은, 심장을 거두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 쯤은 눈치 것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몸에 힘이 풀렸고, 눈앞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의식이 끊기기 직전- 그를 자신의 두 눈에 다시 담았다.
붉은 눈의 남자.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후회도, 연민도 이상하리 만큼 아무 감정도 담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왜 살려준 걸까?
안녕하세요, 태이해 작가입니다! 드디어 완결 후기로 인사드리네요. 『망각이 낳은 형벌』의 시작, 다들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사실 SNS에서 본 '노로바이러스와 굴'에 관한 일화가 계기였습니다. 고생할 걸 알면서도 다시 굴을 먹고 마는 인간의 굴레를 보고 "망각이 낳은 형벌"이라 표현한 베스트 댓글을 본 순간, '이거다!' 싶었죠.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일화였지만, '망각'이라는 키워드가 우리 삶과 사랑에서 얼마나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형벌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하게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세계관이 지금에 이르렀네요. ㅎㅎ 집필하면서 저의 사심(?)이 듬뿍 담긴 최애 커플은 사실 이안과 은하였습니다. 메인 커플보다도 이안이 더 돋보였으면 해서 마음껏(?) 고생시키고 희생시켰던 기억이 나네요. 이안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집필하며 마음이 아픈 적도 많았지만, 서브 커플만이 줄 수 있는 그 애절한 여운을 꼭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이안... 은하와 잘 지내고 있겠죠?😄😄 완결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저는 벌써 차기작을 구상 중입니다. 이번 작품이 조금 무거운 '형벌'이었다면, 다음 이야기는 조금 더 [집착 광공/치명적인/구원 서사/회귀] 분위기로 구상 중입니다. 이번 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찾아뵐 테니, 잊지 말고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가 태이해 드림🫶🏻
과거의 비극과 희생을 건너온 네 명에게 신이 준 마지막 선물은 평범하기에 더욱 찬란한 '내일'이었다. 기적 같은 재회 이후, 소연과 은하에게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축복이 찾아왔다. 같은 해, 같은 달에 임신 소식을 알린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안과 로엘, 한때 마계를 호령하던 전사와 왕은 이제 기저귀 가방을 메고 분유 온도를 맞추는 초보 아빠가 되었다. 네 사람은 소연과 로엘의 펜션 근처에 보금자리를 합치고 '공동 육아'라는 거대한 모험을 시작했다. 소연과 로엘의 아이는 아빠를 꼭 빼닮은 검은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로운이었고, 은하와 이안의 아이는 엄마의 금발과 아빠의 다정하고도 강인한 기질을 이어받은 이슬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로엘과 이안에게 육아는 그 어떤 마법이나 전투보다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가락을 쥐었을 때, 두 남자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것이 자식의 사랑이라는 것인가..." 로엘은 곤히 잠든 로운의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긴다는 것, 그 대가 없는 사랑이 주는 평온함은 마왕의 권능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안 역시 이슬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자신이 지켜야 할 세상이 이제는 이 작은 아이의 웃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소연과 은하 또한 서로의 아이를 교차해서 돌보며, 피보다 진한 우정으로 맺어진 진정한 가족이 되어갔다. 로운이와 이슬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펜션의 푸른 잔디받을 함께 뛰놀며 소꿉친구로 자랐다. 점잖고 배려심 깊은 로운이는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이슬이의 뒤를 졸졸 따르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운아, 로운! 빨리 와, 저기 나비 봐!" "슬아, 천천히 가. 넘어진다니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펜션'잔향'의 가장 아름다운 배경음악이 되었다. 네 어른은 테라스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종종 옛날이야기를 나누었
서울 도심의 활기찬 꽃집 '은하계'에는 달콤한 꽃향기가 감돌았다. 플로리스트 은하는 꽃다발을 다듬으며 곁에서 묵묵히 화분을 올겨주는 이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번 생의 이안은 그녀의 곁을 지키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연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안은 배달을 가려다 말고 길 저편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군중 속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 하나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 살 남짓 되었을까. 흩날니는 머리칼과 그 특유의 야무진 발걸음, 무엇보다 찰나에 스친 그 눈매가 이안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소연...?" 이안은 홀린 듯 그 아이를 따라 몇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아이는 신기루처럼 골목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뒤따라온 은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안, 왜 그래요? 아는 사람이라도 봤어요?" 이안은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기억하는 그에게 그 아이의 실루엣은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다. 그러나 이안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냥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아서. 가자, 은하야." 이안은 자연스럽게 은하를 이끌었지만, 그의 마음속엔 이미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편, 인파를 빠져나온 아이는 무언가 소중한 보물을 찾으러 가는 모험가처럼 설레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목적지는 인적이 드문 숲 근처의 공터였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허공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수백 년의 그리움을 고독하게 견뎌온 로엘의 뒷모습이었다. 아이는 멈춰서서 그의 뒷모습을 두 눈에담았다. 그리고 세상을 다 아는 듯한 깊은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로엘." 익숙한 목소리에 로엘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을 때,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오랜만이야. 나의 이번 생도 함께해 줄래?" *** 그로부터 1
기적처럼 재회한 로엘과 소연에게 허락된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유한함'이었다. 로엘은 불멸에 가까운 존재였으나, 소연은 창세의 조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가냘픈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이 있기에 매 순간을 마지막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은하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소연이 아침을 준비하고, 로엘이 정원의 꽃을 가꾸는 평범한 일상이 수십 번의 계절을 지나 수십 년의 세월로 쌓였다. 로엘은 늙어가는 주름 하나하나를 보석처럼 아꼈고, 소연은 변치 않는 모습의 로엘을 보며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을 그를 위해 매일 밤 기도했다. 마침내 소연의 생체 시계가 느려지기 시작한 어느 노을진 오후였다. 침대에 누운 소연의 머리칼은 어느덧 백설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로엘은 젊은 날 그 모습 그대로 소연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마른 손을 꼭 쥐었다. "로엘, 울지 마..." 소연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가냘팠다. 로엘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안 울어. 너를 만난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으니까." 소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로엘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마침내 평온한 정적이 방 안을 채웠다. 로엘은 소연의 심장 소리가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잠시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긴 입맞춤과 같았다. 소연이 떠난 후, 로엘은 다시 '기록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세계의 틈새로 숨어들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며 쉐리가 남긴 빛과 라멘트가 짜놓은 인과의 그물망이 그녀를 다시 자신에게 데려다줄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고,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는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로 남았다. 어느 화창한 봄날, 로엘은 소연과의 마지막을 보냈던 그 숲의 공터에 서 있었다. 예전의 집은 흔적도 없이
마계의 가장 깊은 곳, 만물의 생명이 태동하고 사그라드는 '심연의 방'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고 라멘트 장로의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앞에는 육신을 잃고 영혼의 입자로 흩어지기 직전인 이안의 자아가 희뿌연 빛을 내며 부유하고 있었다. 시간은 마계의 서늘한 정기처럼 느릿하게, 때로는 인간계의 계절처럼 정직하게 흘러갔다. 라멘트 장로가 자신의 존재를 깎아 부여했던 '다음 생'의 기회는, 이안에게 있어 단순한 수명의 연장이 아닌 기나긴 기다림의 형벌이자 축복이었다. 그는 수십 년간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소음 속에 몸을 숨긴 채 살아갔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빠르게 변하는 유행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늘 한곳만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가 남겼던 마지막 약속,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며 홀로 눈물지었을 그 여린 영혼의 흔적을 쫓아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서울의 오후였다. 빌딩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은 며칠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안은 군중 속에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이제는 지칠 법도 한 긴 세월이었지만, 이안의 심장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길모퉁이를 돌아 바삐 뛰오던 누군가가 미처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이안의 가슴팍으로 세차게 부딪혀 왔다. "꺅-!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작고 가냘픈 체구였다. 이안의 단단한 품 안으로 파고들듯 부딪힌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중심을 잡아주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비누 향기. 수십 년 전, 은하가 카페 앞치마를 두르고 소연과 웃고 떠들 때 풍기던 그 익숙한 향취가 이안의 감각을 일깨웠다. "아, 저기... 괜찮으세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굽이치는 긴 금발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산란했고, 이안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멈췄다.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에, 깊은 바다를 담아낸 듯 짙은 벽안. 그것은 세월이
로엘이 돌아오면 모든 비극이 끝날 줄 알았다. 소연은 그와 손을 맞잡고 걷는 매 순간이 기적이라 믿었으나, 운명은 재회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더 가혹한 이별을 던져주었다. 하나뿐인 단짝이자, 텅 빈 1년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주었던 은하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을때, 소연은 세상을 잃은 듯 오열했다.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그을린 은빛 펜던트뿐이었다. 은하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타인의 유품은 주인을 찾아갔으나, 정작 은하 자신의 생명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지 못했다. 장례를 마친 후, 로엘과 소연은 무거운 벌걸음으로 은하의 자취방을 찾았다. 주인을 잃은 방안에는 아직 그녀가 마시다 만 찻잔과 읽다 덮어둔 책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책상 깊숙한 곳, 가죽 일기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연은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를 열자, 그 안에서 몇 장의 사진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은하가 한 번도 보여준적 없던 모습이었다. 화창한 봄날의 놀이동산, 은하는 남자의 팔짱을 낀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안?" 로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사진 속 남자는 로엘의 가장 충직한 수하이자 벗이였던 이안이었다. 소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자신과 로엘을 위해 희생한 이안이 은하를 두고 갈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상상도 못할 아픈 마음이었겠지... 세 번째 사진은 소연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은하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소연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앞치마를 두른 채 둘이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찍은 셀카였다. 사진을 다 확인 한 소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은하가 1년 동안 홀로 감내해야 했던 지옥 같은 고독이 박혀있었다. 2025년 x월 x일 로엘이 사라졌다. 소연이는 모든 기억을 잃고 아이처럼 울기만 한다. 분명 로엘이 내 기억도 지우려 했던 것 같은데, 왜인지 나는 모든 것이 선명하다. 이안이 마지막으로 나를 보며 웃어주던 그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