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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Author: 흙내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04 15:37:25

짙은 정적. 쇳소리조차 증발해버린 폐허 속에서 끊어진 배관의 잔여물만이 쉿쉿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도진은 피가 눌어붙은 손으로 찢어진 어깨를 거칠게 지혈했다. 시야가 붉게 명멸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허공에 떠 있는 검은 결정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감찰관이 던져두고 간 열두 시간의 유예는 이미 잔혹하게 줄어드는 중이었다.

실패의 진흙탕 속에서 도진의 머릿속은 오히려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화학적 융해는 한계에 부딪혔고 물리적 압력은 역효과만 불렀다. 도진은 비틀거리며 결정체 앞으로 다가갔다. 보랏빛 파동이 영체를 사정없이 긁어댔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천 년 치의 원념이 뭉쳐 질량조차 상실한 상태. 덩어리라기보다 지독하게 꼬여버린 악성 정보의 군집에 가까웠다. 이승의 공학적 잣대를 들이대자면 거대한 공정 라인을 통째로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오류 코드였다.

그동안의 접근은 에러가 난 하드웨어를 망치로 두들기거나 독한 산성 용액에 담그려 한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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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계의 수석 환경공학자   008

    붉은 관복이 바닥을 끄는 스산한 마찰음이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백색 가면을 쓴 상급 감찰관이 무장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제9구역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에는 오만함과 동시에 일말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작업장 전체를 짓누르던 끔찍한 보랏빛 파동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영체를 부식시키던 독기 대신, 서늘하고 정갈한 공기만이 폐허를 맴돌고 있었다.​감찰관의 시선이 박살 난 원심분리기의 잔해와, 그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도진에게 닿았다.​도진의 몰골은 처참했다. 찢어진 어깨에서는 끊임없이 검붉은 영적 파편이 흘러내렸고, 전신은 붕괴 직전의 유리창처럼 미세한 균열로 가득했다. 당장 쓰러져 한 줌의 재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하지만 도진은 두 발로 단단히 버티고 서서 감찰관의 안력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납품 기한보다 한 시간 십 분 일찍 오셨군요."​도진이 피 딱지가 앉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감찰관은 대답 대신 허공에 띄워진 푸른색 홀로그램 그래프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0.0%를 가리키던 숫자는 온데간데없었다.​[최종 정화 수율: 98.9%]​백색 가면 너머에서 짧은 흡기음이 새어 나왔다. 감찰관의 뒤를 따르던 호위병들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창자루를 쥔 손을 잘게 떨었다.​감찰관의 안광이 도진의 발치에 수북하게 쌓인 하얀 모래알들을 향했다. 명계의 그 어떤 문헌에서도 본 적 없는 순백의 가루. 거기에는 망자들의 지독한 원념도, 썩어 문드러진 찌꺼기의 악취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완벽하게 정제된 순수한 생명 에너지의 파동만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이게… 네놈이 말한 그 흉측한 결정체의 잔해란 말이냐."​감찰관의 쇳소리 섞인 음성에 처음으로 짙은 당혹감이 배어 있었다.​"잔해가 아니라 완제품입니다."​도진은 핏기가 가신 손을 뻗어 바닥의 하얀 가루를 한 줌 쥐어 보였다. 손가락 틈새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가루가 허공에서 반딧

  • 명계의 수석 환경공학자   007

    짙은 정적. 쇳소리조차 증발해버린 폐허 속에서 끊어진 배관의 잔여물만이 쉿쉿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도진은 피가 눌어붙은 손으로 찢어진 어깨를 거칠게 지혈했다. 시야가 붉게 명멸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허공에 떠 있는 검은 결정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감찰관이 던져두고 간 열두 시간의 유예는 이미 잔혹하게 줄어드는 중이었다.실패의 진흙탕 속에서 도진의 머릿속은 오히려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화학적 융해는 한계에 부딪혔고 물리적 압력은 역효과만 불렀다. 도진은 비틀거리며 결정체 앞으로 다가갔다. 보랏빛 파동이 영체를 사정없이 긁어댔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수천 년 치의 원념이 뭉쳐 질량조차 상실한 상태. 덩어리라기보다 지독하게 꼬여버린 악성 정보의 군집에 가까웠다. 이승의 공학적 잣대를 들이대자면 거대한 공정 라인을 통째로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오류 코드였다.그동안의 접근은 에러가 난 하드웨어를 망치로 두들기거나 독한 산성 용액에 담그려 한 셈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파괴가 아니라 덮어쓰기였다. 무질서가 극에 달한 저 덩어리에 가장 정교하고 폭력적인 질서를 강제로 주입해 구조 자체를 붕괴시켜야 했다."관리자, 대가리 들어."도진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안에 담긴 권위는 짐승의 목줄을 틀어쥐듯 날카로웠다. 구석에 처박혀 덜덜 떨고 있던 괴물 관리자가 퀭한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감, 감독관님. 이제 다 끝난 거 아닙니까. 설비는 박살 났고, 저 덩어리는 더 커졌는데 도대체 뭘 어쩌자고….""끝난 건 당신 모가지뿐이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 모가지, 오늘 안으로 다시 붙여줄 테니까 당장 일어나."도진은 바닥에 흩어진 잔해 중 비교적 온전한 영적 전도체 합금 조각들을 발로 긁어모았다."여기에 엎드려 있는 망자들 전부 집합시켜. 양동이나 철판 따위는 필요 없다. 전원 저 결정체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앉히도록 해."괴물은 영문을 몰라 주춤거렸으나 도진의 서늘한 살기에 짓눌려 서둘러 영혼들을 걷어차며 깨웠다. 비명과 고통에

  • 명계의 수석 환경공학자   006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판이 한계치까지 휘어지며 짐승의 비명 같은 쇳소리를 토해냈다.차폐막의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증기는 이미 기체의 형태를 벗어나 날카로운 액압 커터처럼 허공을 갈랐다. 증기가 스쳐 지나간 천장의 배관이 두부 썰리듯 절단되며 끈적한 폐수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도진은 타들어 가는 손바닥의 고통을 무시한 채 메인 통제 밸브에 매달려 있었다.어떻게든 내부 압력을 빼내야 했다. 하지만 밸브를 1도만 더 열어도 농축된 저주 가스가 작업장을 덮쳐 수십 명의 영혼들을 소멸시킬 것이고, 반대로 1도를 닫으면 차폐막이 통째로 폭발해 제9구역의 모든 설비가 흔적도 없이 날아갈 판이었다.“가, 감독관님! 철판이 녹아내립니다! 대피해야…!”관리자 괴물이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했다. 영혼들은 이미 독기에 노출되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다.도진의 시야 망막에 붉은색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내부 압력 임계점 돌파.][화학적 평형 붕괴율 99%… 100%.]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막을 수 없다. 물리법칙이 허용하는 통제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전원, 바닥에 엎드려!”도진이 피투성이가 된 목구멍을 쥐어짜 내며 소리침과 동시에, 부풀어 올랐던 강철 차폐막이 결국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콰아아아앙—!시각을 마비시키는 섬광이나 거대한 화염 따위는 없었다. 대신, 수천 톤의 납덩어리로 짓누르는 듯한 묵직하고도 기괴한 파동이 제9구역 전체를 휩쓸었다.억겁의 세월 동안 압축되어 있던 누군가의 끔찍한 절망과 후회가 물리적인 폭풍이 되어 작업장을 덮쳤다.원심분리기의 파편들이 포탄처럼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고, 갓 설치했던 자동화 컨베이어 벨트는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허공으로 치솟았다.“큭…!”도진은 폭풍의 중심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 날아온 강철 파편 하나가 그의 어깨를 관통했고, 압도적인 저주의 파동이 그의 영체를 정면으로 타격했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수 미터 밖의 혐기성 소화조 외벽에

  • 명계의 수석 환경공학자   005

    매캐한 금속의 잔해 위로 짙은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규칙적으로 돌아가던 제9구역의 기계음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박살이 난 원심분리기의 틈새로, 새까만 결정체가 뿜어내는 기괴한 파동만이 작업장의 무거운 공기를 일그러뜨렸다.도진은 찌그러진 배관에 척추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를 닦아낸 손등에 검붉은 핏자국이 엉겨 붙었다. 영체에 가해진 타격은 이승에서 겪는 육체적 통증과는 결이 달랐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넘어, 자아의 가장 밑바닥을 강제로 긁어내는 듯한 지독한 오한이 전신을 파고들었다.허공에 띄워진 홀로그램 수치는 냉혹했다.[제9구역 전체 공정 가동 중지.][현재 정화 수율: 4.2%][감찰관 방문까지 남은 시간: 11시간 45분.]도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갈비뼈 부근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찔러왔지만, 턱관절에 뻐근하게 힘을 주며 버텼다. 지금 이 순간 절망이나 고통에 매몰되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인 낭비였다.그의 시선이 잔해 한가운데서 불길하게 고동치는 결정체에 닿았다.질량이 없는 순수한 원념의 응집체. 애초에 물리적인 무게와 부피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적인 응어리를 기계의 원심력으로 강제 분리하려 했다. 회전 에너지가 갈 곳을 잃고 설비의 내구도를 갉아먹다 폭발로 이어진 것은 열역학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었다.도진은 머릿속에 엉켜 있던 공정도를 완전히 폐기하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수식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물리적 타격이 불가능하다면, 접근 방식을 화학적 융해와 용출로 바꾼다.’저 결정체가 수천 년 동안 압축된 초고농도의 용질이라면, 상대적으로 농도가 옅은 용매를 지속적으로 흘려보내 표면의 결합부터 갉아내야 한다.“전원, 일어납니다.”도진의 건조한 음성이 제9구역에 울려 퍼졌다. 완장의 통제력이 보랏빛 파동에 노출되어 짐승처럼 헐떡이던 영혼들의 이성을 강제로 붙들었다.“비명 지를 시간 없습니다. 지금 저 물질을 억누르지 못하면 감찰관이 오기 전에 작업장 전체가 오염 가스에 녹아내릴 겁니다.”바닥을 구르던 영혼

  • 명계의 수석 환경공학자   004

    붉은 관복을 입은 감찰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잿빛으로 변한 침전조 앞이었다.백색 가면 너머로 흘러나오는 짙은 영압이 작업장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바닥에 엎드린 영혼들은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파르르 떨었고, 관리자 괴물은 이미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오직 도진만이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상급 감찰관의 기형적인 안력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네놈이냐.”감찰관의 목소리는 쇳덩이를 긁는 듯 기괴했다.“형벌의 고통으로 씻어내야 할 망자의 업보를, 출처를 알 수 없는 사술로 훼손한 자가.”“사술이 아니라 산화 환원 반응입니다.”도진은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빼내며 건조하게 답했다. 감찰관을 호위하던 무장 병력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들었지만, 도진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고통으로 업보를 씻어낸다니, 야만적인 발상이군요. 그렇게 수천 년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한 결과가 시스템 붕괴율 98% 아닙니까? 저는 방치되어 있던 제9구역의 수율을 단 30분 만에 12%에서 95%로 끌어올렸습니다. 감찰관님께서 보셔야 할 건 제가 부린 마법이 아니라 저 홀로그램에 찍힌 객관적인 성과 지표입니다.”감찰관의 고개가 미세하게 갸웃거렸다.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망자의 태도도 흥미로웠지만, 허공에 선명하게 떠 있는 ‘공정 효율 95%’라는 숫자는 명계의 관료인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염라청 최고위 기술 관료들조차 30%를 넘기지 못해 쩔쩔매던 최악의 구역이었다.“입이 가벼운 망자로군. 네놈이 잠시 수치를 조작해 눈속임을 한 것이라면, 그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무간지옥의 땔감으로 쓰겠다.”“눈속임인지 아닌지는 위로 보고서가 올라갈 때쯤이면 증명되겠죠.”도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거래를 하나 제안하고 싶습니다.”“천한 망자가 감찰관에게 거래를 입에 올리느냐.”“실적은 누구에게나 고픈 법이니까요.”도진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저에게 딱 24시간의 통제권과 설비 개조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십시오. 구역 관리자였던 저 덩치에게 이미

  • 명계의 수석 환경공학자   003

    영혼들의 비명 대신 둔탁한 쇳소리가 제9구역을 채우기 시작했다.“서둘러! 격벽 내려오기 전까지 바닥에 깔린 슬러지를 전부 예비 탱크로 밀어 넣어!”도진의 목소리가 완장의 마력을 타고 작업장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갔다.영혼들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이승의 기억이 마모된 채 짐승처럼 노동하던 그들이었지만, 도진이 통제권을 쥔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들을 옭아매던 채찍질을 금지한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의 지시대로 움직이면 살을 파고들던 원념 폐수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하지만 상황이 녹록한 것만은 아니었다.보글… 부글부글….산화제의 약효가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회색빛으로 가라앉았던 침전조 바닥에서 미세한 기포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시커먼 진흙 덩어리들이 다시 흉측한 본래의 부피를 팽창시키며 수면 위로 떠오를 조짐을 보였다.“시간 다 됐어! 수율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다고!”수로 위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괴물 관리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허공에 띄워진 홀로그램 수치가 78%에서 75%로, 다시 72%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입 다물고 메인 밸브 개방 준비나 하십시오.”도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예비 탱크의 입구를 주시했다. 수십 명의 영혼들이 거대한 넉가래를 이용해 바닥에 쌓인 끈적한 카르마 덩어리들을 탱크 안으로 우겨넣고 있었다. 고농축된 오염 물질이 내뿜는 독기 때문에 영혼들의 투명한 피부가 치지직거리며 타들어 갔다.도진은 손에 쥔 기초 화학 촉매 생성기의 버튼을 눌렀다.[내구도 1/10 소모. 명계의 암모니아 가스를 포집하여 약염기성 중화제로 합성합니다.]은빛 큐브에서 뿜어져 나온 푸르스름한 가스가 작업하는 영혼들의 몸을 감쌌다. 타들어 가던 영체들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통증이 사라지자 작업 속도에 다시 불이 붙었다.“마지막 덩어리 들어갔습니다!”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도진이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3조, 격벽 차단! 관리자, 메인 밸브 전면 개방”쿠웅-! 콰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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