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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전속 지명

Author: 花柳響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2 00:12:12

 상상만 해도 무릎에 힘이 빠졌다. 지금의 태윤은 낡은 원룸에서 살던 가난한 복학생이 아니다. 내 삶 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 망가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엄마.”

 오늘 도망치면 다음 치료비를 감당할 길이 없다.

 잘난 집 딸의 자존심 따위는 진작 진흙탕에 버렸다고 생각했다.

“……해야 해.”

 입술을 깨물고 먼지털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나는 윤서린이 아니다. 그저 배정된 하우스키퍼 한 명, 업체 시스템 속 직원일 뿐이다.

 그 뒤로 이어진 시간은 고문에 가까웠다.

 넓은 거실 바닥을 닦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흔적을 찾았다.

 소파 등받이에 떨어진 짧은 검은 머리카락. 집어 든 손끝이 데인 것처럼 뜨거워졌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생수병, 사이드테이블에 펼쳐진 채 놓인 원서.

 그가 여기 앉고, 숨 쉬고, 이 풍경을 바라본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도 몸 안쪽이 자꾸만 술렁거렸다.

 한심해. 그렇게 잔인하게 끝났는데도.

 도망치듯 손을 움직였다. 주방, 게스트룸, 복도.

 다행히 안방과 서재는 잠겨 있었다. 그 문을 열어 그의 냄새가 밴 침구라도 봤다면 정말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

 업무 종료 5분 전.

 지문 하나,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마무리했다. 완벽했다.

 보조 출입구 앞에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단말기에 퇴근 보고를 입력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철문을 닫았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고 비가 그친 뒤의 흙냄새가 났다. 폐 깊숙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

 밤 9시.

 고요한 차고 안으로 낮은 엔진음이 스며들었다.

 차에서 내린 태윤은 재킷을 손가락에 걸치고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며 거실로 들어왔다.

 날카로운 시선이 방을 훑었다. 가구의 위치는 완벽했고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공기가 달랐다. 무기질적인 쇼룸 같던 집 안에 아주 희미하게, 겁먹은 사람의 체온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소파에 재킷을 던지고 사이드테이블 위 업무보고서를 들었다.

『직원 No.408 윤서린』

 감정 없는 글자 몇 줄.

 태윤의 입꼬리가 차갑게 휘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가사서비스 업체의 인력 목록에서 그 이름을 발견한 날부터, 그는 서린이 도망칠 틈이 없도록 천천히 길을 막아 왔다.

 보고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밤의 어둠에 잠긴 빈터. 한때 윤성가의 저택이 서 있던 곳을 내려다봤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내가 널 놓칠 것 같아?”

 낮은 혼잣말이 아무도 없는 거실에 녹아들었다.

◇

 해가 진 뒤 하늘이 검푸르게 물들 무렵, 겨우 원룸에 도착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이웃집 음식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다녀왔어, 엄마.”

“왔니, 서린아…… 콜록, 콜록…….”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힘겹게 기침했다.

 나는 바로 이불 곁으로 달려가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열이 높았다.

“말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

“미안하구나, 서린아…… 또 너만 고생시키고…….”

“괜찮아. 곧 급여도 들어오고,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뼈만 남은 듯 마른 손을 꼭 쥐었다.

 정밀검사에 장기 치료, 간병비까지 생각하면 지금 모아 둔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더 일해야 했다. 야간 배정도 늘려야 한다.

 어머니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는데 앞치마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렸다.

 화면에는 ‘가사서비스 센터 김미정’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 오늘 현장에서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네, 윤서린입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자 예상과 달리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린 씨?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어서요.』

 좋은 소식.

 지금 내 상황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목이 막혔다.

『오늘 갔던 집 이용자분한테 연락이 왔어요. 다음에도 꼭 서린 씨를 보내 달래요. 정식으로 전담 배정 요청이 들어왔어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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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제167화 두 줄의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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