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싫어……! 나 버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그래도 그 사람은 너랑 안 어울려. 나를 봐. 나랑 있으면 아버지께 부탁해서 학비도, 취업도, 뭐든 다 해결해 줄 수 있잖아!”
최악의 말이었다. 자존심만 높은 집안 딸이 사랑을 돈으로 붙들어 두려 내뱉은 비겁한 소리. 태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내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에도 학비와 생활비를 벌려고 육체노동까지 하던 사람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려나는 게 두려워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을 막았다. “……!” 입안에 옅은 쇠 맛이 났다. 굳어 버린 태윤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해…… 태윤아, 진짜 좋아해. 그냥 나를 네 걸로 만들어. 그러면 나도 이제 너한테서 못 도망가잖아.” 남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벨트에 손을 댔다. 딸깍, 버클이 풀리는 소리가 좁은 현관에 크게 울렸다. 그 직후 시야가 흔들렸다. 허리를 감싼 팔에 끌려가듯 당겨졌고, 다음 순간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빠져나갈 곳이 없는 거리에서 태윤의 표정만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이성을 놓칠 것처럼 분노한 남자가 있었다. “……장난하지 마.” 바닥을 긁는 듯 낮은 목소리와 함께 턱이 붙들렸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절박하게 억누르는 그 손길만으로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가까이서 마주친 눈에는 경멸과 분노, 그리고 그 둘을 억지로 눌러 삼키는 듯한 어두운 열기가 뒤엉켜 있었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대체 나를 얼마나 모욕해야 속이 시원하겠어.” “괜찮아. 나, 네 것이 되고 싶어.” 도발하듯 올려다보자 그의 숨이 더 거칠어졌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다음 순간 큰 손이 젖은 원피스 위로 거칠게 움켜쥐었다. “아……!” 다정함은 없었다. 옷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은 내 손과 전혀 달랐다. 매일 일을 하며 생긴 상처로 거칠고 단단한 손이었다. 그 까슬한 피부가 연한 살갗을 스칠 때마다 아픔과 열이 함께 번졌다. 그가 버텨 온 힘겨운 시간을 몸으로 느끼는 것 같아 속 깊은 곳이 저려 왔다. “아…… 태윤아…….” 새어 나온 목소리를 차가운 눈빛이 꿰뚫었다. 허리가 더 세게 끌려갔고 목덜미에는 깨물 듯 거친 입맞춤이 떨어졌다. 아픔 뒤로 화끈한 열이 번지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귀 가까이서 들리는 거친 숨, 빗물과 땀, 그리고 낯선 남자의 체취. 무릎에 힘이 풀렸다. 이대로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이 아픔조차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은 바로 그때, 움직임이 갑자기 멎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내 몸을 만지던 태윤의 손등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고요했다. 멀리서 빗소리만 들렸다. 거칠었던 호흡만 남긴 채 열기는 물이 빠지듯 가라앉았다. 천천히 몸이 떨어졌다. 사라진 체온 대신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스며들었다. 올려다본 눈에는 더 이상 열기가 없었다. 깊은 경멸과 단호한 거절뿐이었다. 더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차가운 눈. “……울 거면 먼저 덤비지 마.” 내뱉은 말은 뺨을 맞는 것보다 아팠다. 태윤은 내 손을 쳐 내고 흐트러진 옷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 눈에는 어린 시절 함께한 정도, 여자를 향한 욕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꺼져.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째깍.
시계 초침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하…… 하아…….” 호흡이 얕았다. 붙들고 있던 액자 유리가 손의 열기로 흐려져 있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이 셔츠에 달라붙어 불쾌했다. 기억 속 거친 손의 감촉과 얼음처럼 차가웠던 거절. 너무 선명해서 아직도 팔을 붙잡힌 듯한 착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여기가 태윤이 집이야…….”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1mm라도 틀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숨까지 멈추고 각도를 맞췄다. 유리에 묻은 지문은 앞치마 자락으로 닦아 냈다. 이 공간에서 나라는 이물질을 지우듯이. 도망쳐야 한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지금 태윤이 돌아온다면.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여자가 하우스키퍼로 자기 집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서린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태윤은 품 안의 해준이를 내려다봤다. 아내를 닮은 머리카락이 가을빛에 갈색으로 비쳤다.“이제 남자끼리 보내는 시간이군.” 해준이는 대답 대신 태윤의 니트 목을 움켜쥐었다. 태윤은 거실 러그 위에 아이를 내려놓고 블록을 가리켰다.“너는 저기서 놀아. 나는 잠깐 책을 읽을게.” 해준이가 알록달록한 블록 쪽으로 걸어갔다. 태윤은 소파에 앉아 두꺼운 경제 서적을 펼쳤다. 서린이 너무 걱정한 것 같았다. 아이가 노는 동안 지켜보면 될 일 아닌가. 조금 전까지 해준이는 엄마의 신발을 만지작거리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문이 닫히자 금세 블록에 정신을 빼앗겼다. 태윤은 그 뒷모습을 보며 긴장을 풀었다. 오늘은 점심도 제시간에 먹이고 낮잠도 재울 생각이었다. 사각, 사각. 뒤에서 종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해준이가 소파 뒤의 각티슈를 한 장씩 뽑고 있었다. 하얀 종이가 러그에 쌓일 때마다 아이가 웃었다.“해준아, 그건 장난감이 아니야.” 종이는 뽑힐 때마다 하얗게 펼쳐졌다. 해준이는 한 장이 나오면 또 한 장이 있는 게 신기한 듯 손을 멈추지 않았다. 태윤이 아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상자 속 티슈가 거의 다 빠져나왔다. 태윤이 다가가자 해준이는 상자를 뒤집어 남은 것까지 쏟아 냈다. 종잇조각을 입에 넣기 전에 치워야 했다. 그가 허리를 굽힌 사이 아이가 빠르게 기어가 텔레비전 서랍을 열었다. 리모컨과 케이블, 디스크 케이스가 바닥에 떨어졌다.“그건 던지면 안 돼!” 그는 티슈를 주울지 케이블부터 치울지 잠깐 망설였다. 작은 발은 이미 화분 앞에 있었다
“돈을 쓰면 좋은 의사도 장비도 부를 수 있어.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어렵지 않지. 그런데 내 힘으론 해준이의 열을 단 1도도 내릴 수 없더라.” 태윤의 손이 이불 끝을 쥔 채 떨렸다.“몸이 그렇게 뜨거운데 옆에서 보기만 해야 했어. 그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나는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그의 곁에 앉았다.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부모는 다 그래. 대신 아파 줄 수는 없어. 옆에 있으면서 물 먹이고 땀 닦아 주는 거지.”“그것뿐이라니.”“그게 해준이한텐 큰일이야. 네가 가까이 오고 말 걸었을 때 아이 표정이 조금 풀렸어.” 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불에서 손을 떼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허리에 둘린 팔에 힘이 들어왔다. 큰 몸이 기울어지자 나도 잠시 중심을 잃었다. 태윤은 팔로 내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 아침에 전화를 붙잡고 병원을 움직이려던 사람의 손이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 조용했다.“조금만 이러고 있자. 아까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어.”“응.” 나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었다. 밤늦게까지 일한 뒤 이른 아침부터 해준이 일로 뛰어다녔으니 지칠 만했다. 한참 지나자 어깨를 누르는 머리의 무게가 일정해졌다. 태윤은 그대로 잠들었다. 깨우지 않도록 그를 침대에 기대게 하고 어깨에 담요를 덮었다. 침대 위의 작은 숨소리와 그 아래의 큰 숨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태윤의 손이 이불 위로 뻗어 해준이의 발끝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 봄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두 사람을 한동안 지
“서른아홉 도야. 더 오르면 어떡해? 왜 진작 몰랐지?”“아이 열은 갑자기 올라. 먼저 침착해야 해.”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태윤은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박 실장. 세명의료원 원장에게 연결해. 소아과 병동을 비우고 전문의를 모아. 필요하면 헬기라도…….”“강태윤, 그만해!” 전화를 빼앗았다. 건너편에서 박현석이 헬기 허가 절차를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통화를 끊었다. 우리 목소리에 놀란 해준이가 더 크게 울었다.“병원 한 층을 통째로 비울 생각이야? 아이가 무서워하잖아.”“해준이 목숨이 걸렸어.”“소아과에서 진찰받을 거야. 돌발진일 수도 있지만 지금 단정할 순 없으니까. 가까운 병원 문이 열면 바로 가자.”“그때까지 기다리라고?”“지금 해준이가 어떻게 숨 쉬고 물을 마시는지 보자. 이상하면 바로 진료받을 거고. 큰소리부터 멈춰.” 해준이는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울었다. 나는 태윤에게 휴대전화를 내려놓게 했다. 내 말이 당장 아이의 열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이를 더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윤의 빈손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큰돈을 결정하는 사람에게도 아이의 열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깨끗한 수건과 찬 팩, 실온의 보리차를 가져와 달라고 했다. 해야 할 일을 들은 태윤은 곧장 부엌으로 뛰어갔다. 그가 돌아오는 동안 나는 해준이의 땀에 젖은 옷을 느슨하게 풀고 목과 등을 닦았다. 예전에 하우스키퍼로 일하며 아픈 아이를 돌본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 두꺼운 서류가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어린이 공원 안전 개선안’이라고 쓰여 있었다.“태윤.”“미리 말하는데, 공원을 사겠다는 건 아니야.”“생각은 했다는 거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에는 낡은 놀이 기구부터 가로등의 사각지대, 건널목의 시야까지 전문가가 조사한 수치가 빼곡했다. 태윤은 시에 기부해 전면 보수하고 관리인도 두겠다고 했다. 낮에 공원 밖에 세워 둔 차를 돌려보낸 사람에게 이만한 자료가 몇 시간 만에 나왔다는 것도 놀랍지 않았다. 태윤에게 불안은 곧 조사하고 고쳐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해준이에게 필요한 놀이터가 회사 시설처럼 관리되는 곳인지는 달랐다.“공원을 요새로 만들지 마.”“사고 난 다음에 고쳐 봐야 소용없어.”“위험한 곳은 고쳐야지. 그런데 넘어질 돌까지 전부 치워 버리면 해준이는 자기 발밑을 보지 않게 돼.” 나는 해준이가 흘린 밥알을 집었다. 아이는 숟가락으로 접시 끝의 당근을 쫓느라 바빴다. 태윤도 그 모습을 봤다.“넘어질 때 지켜보고, 넘어지면 도와주면 돼. 모든 걸 대신 없애 주는 건 다른 일이야.”“지키는 것과 가두는 건 다르다…….” 태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와 조금 놀랐다. 그는 서류를 덮었다. 위험한 곳만 시에 제안하겠다고 했다. 관리인도 경호원도 늘리지 않기로 했다. 일주일 뒤 공원에는 검은 차도 경호팀도 없었다. 해준이를 잔디에 내려놓자 아이가 흙을 만지고 풀을 움켜쥐었다. 잔디 위를 기어가다 주저앉아 나를 올
“사실을 말하는 거야. 내 식단도 잘 챙겨 주지만, 내 고기를 저렇게 갈아서 숟가락으로 먹여 준 적은 없잖아.”“이는 멀쩡하잖아. 직접 씹어 먹으면 되지!”“씹는 문제가 아니라 나한테 쓰는 정성 얘기야.”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는 누구도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는 남자가 여섯 달 된 자기 아들과 당근 한 숟가락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알았어. 태윤 것도 줄게.” 숟가락에 남은 당근을 그의 입 앞에 내밀었다. 태윤은 황당하다는 듯 물러났지만, 내가 “아” 하고 기다리자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한참 진지하게 맛을 본 뒤 말했다.“싱거워.”“아기 음식인데 당연하지.” 숟가락을 거두려는데 그의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졌다.“그래도 나쁘진 않아.” 태윤이 입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해준이는 턱받이에 당근을 묻힌 채 빈 그릇만 보고 있었다.“아이가 보고 있잖아.”“엄마 아빠가 사이좋다는 걸 알아도 되지.” 나는 얼굴을 붉히고 그를 노려봤다. 해준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새 숟가락을 달라는 듯 소리를 높였다. 태윤은 숟가락을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아까는 아이에게 질투한다더니 이제는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고 있었다. 앞치마의 당근 얼룩을 보며 우리는 같이 웃었다. 상자 속 수입 채소는 그날 저녁 어른들의 식탁에 올랐다.◇ 겨울이 왔다. 여덟 달 된 해준이를 아기띠에 안고 동네 공원으로 갔다. 모래 놀이터 근처에 모인 엄마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생각보
태윤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해준이에게 갔다. 나는 부엌에서 작은 냄비와 체, 아이의 그릇을 꺼냈다. 평소 식사를 만들 때는 손에 익은 대로 움직였지만, 오늘은 첫 한 숟가락을 위한 준비라 도구부터 다시 확인했다. 냄비에는 쌀미음을 약한 불로 끓여 두었다. 싱크대에 찬물을 받아 당근의 흙을 씻어 내고 껍질을 얇게 벗겼다. 동그랗게 썰 때마다 도마에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 손가락으로 눌러도 부서질 만큼 익힌 다음 나무 주걱으로 체를 밀었다. 뜨거운 김에서 단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작은 조각이던 것이 부드러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겨우 한 숟가락이지만 해준이의 몸속으로 들어갈 음식이라 더 꼼꼼해졌다. 묽게 끓인 쌀미음과 당근을 작은 그릇에 따로 담았다. 손등에 한 방울 떨어뜨려 온도를 확인한 뒤 식탁으로 갔다. 해준이는 새 아기 의자에 앉아 파란 턱받이를 한 채 앞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태윤은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입 주변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그렇게 쳐다보면 해준이가 긴장하겠어.”“혹시 목에 걸리면 바로 대처해야지.”“미음이랑 곱게 간 당근이야. 앉아 있어.” 나는 아이 앞에 앉아 작은 숟가락 끝에 쌀미음을 조금 올렸다. 태윤은 옆에서 숨까지 멈췄다.“뜨겁진 않지?”“확인했어.” 해준이가 처음 보는 숟가락을 빤히 보더니 입술을 벌렸다. 미음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입가를 오물거리던 아이의 눈썹이 조그맣게 모였다. 우유와는 다른 맛을 천천히 살피는 듯했다. 우리 둘은 말도 못 하고 그 얼굴만 봤다. 입안에 들어간 것을 혀로 밀어내지 않을까 싶어 숟가락을 뺀 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