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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Author: 눈빛 속의 약속
그의 간섭 따위는 필요 없었다.

“네가 그리 말해 주니 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며칠 후 집안에서 신년 연회를 열 생각이니, 너도 잊지 말고 곱게 단장해서 참석하거라. 서왕 전하께서 진국공부가 너를 박대했다고 오해하시지 않게 말이다.”

한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쉬거라.”

“살펴 가십시오, 어머니. 서유야, 어머니를 잘 배웅해 드리렴.”

강유영은 몸을 일으키며 한씨를 배웅했다.

그녀는 한씨가 방을 나서고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팽팽하게 긴장했던 몸이 스르륵 풀리며 막 이불을 걷어 내려던 찰나였다.

조원철이 이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몸 양옆을 짚어 품 안에 가두고는, 거리를 좁히며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불 속에 오랫동안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던 탓인지, 희고 깨끗한 얼굴에는 보기 드문 붉은 기가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날카롭게 빛나던 칠흑 같은 눈동자도 어쩐지 촉촉하고 부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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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999화

    강유영은 속으로 그를 대신해 한숨을 내쉬었다."상처는 다 아물었습니다. 많이 좋아졌지요."도경진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강유영만 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다행입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보양식을 좀 더 보내드리겠습니다."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유영 역시 도경진이 다치게 된 일에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기에 여전히 마음이 쓰였다."내가 혼사를 하명받은 일은 이미 아시겠지요."도경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시선을 내려 눈앞의 찻잔에 담긴 갈색 찻물을 응시했다."알고 있습니다."강유영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척 뻘쭘한 기분이었다.도경진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하지만 이런 일을 겪은 도경진에게 그 누가 어떤 위로를 건넨들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만약 자신이 원치 않는 사람과 억지로 혼인하여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누가 아무리 달랜다고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유영,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원치 않습니다."도경진이 낮게 속삭였다.강유영은 눈을 깜박이며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지만 폐하의 하명이니 대인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건정제가 하명한 혼사를 거역한다면 남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하늘 아래 그 누가 황권에 맞설 수 있단 말인가. 도경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알고 있습니다."도경진은 식은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미 마음을 굳힌 듯했다."나는 사예를 안지 않을 것입니다."요 며칠 집에서 누워 지내며 모든 것을 명확하게 정리했다.어투는 온화했지만 무척이나 단호했다.강유영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경진의 굳은 결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강유영의 기억 속 도경진은 늘 옥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점잖은 사람이었다.폐하의 하명으로 조사예를 부인으로 맞게 되었으니, 그저 운명에 순응하며 평생을 살 줄 알았다. 도경진에게 이토록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998화

    강유영은 은자를 꺼내 서유에게 건넸다.도경진의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감로 다루는 평범한 찻집이 아니라서, 그곳의 찻값이나 방값이 만만치 않았다.도경진이 비용을 지불하게 할 수는 없었다."아씨께선 참으로 배려심이 깊으십니다."서유가 은자를 받아 들며 한마디 했다."벗이니까 그렇지."강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강유영은 본래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은자가 없었지만, 오씨 어멈과 단비에게는 늘 후하게 대했다.하물며 지금은 수중에 돈도 있고 곧 전당포도 되찾을 테니, 푼돈에 연연할 필요도 없었다."그럼 아씨께서는요? 혼자 가시면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서유는 은자를 쥐고 머뭇거리며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단비와 함께 갈 것이다. 단비도 마차를 몰 줄 알지 않느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라."강유영은 말을 하며 침상에서 내려와, 곁에 둔 봄 저고리를 집어 입었다."그럼 단비를 들여 아씨의 채비를 돕게 하겠습니다."서유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강유영은 옷단장을 마치고 세수를 한 뒤, 아침까지 든든히 먹고 나서야 단비를 데리고 출발했다.감로 다루.도경진은 이미 방 안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놓인 찻물은 벌써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왠지 불길한 예감 때문에 그는 차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줄곧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밖에서 누군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도경진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도 대인."문을 연 강유영은 도경진을 보고 눈웃음을 짓고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왔다."유영."도경진은 불쑥 나타난 강유영을 보고 몹시 반가워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도경진의 시선은 강유영에게 닿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강유영은 예전과 달랐다.도경진은 두 사람이 혼담을 나누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강유영은 부끄러움이 많고 겁에 질려 감히 도경진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무나 괴롭혀도 될 것 같은 모습이었고, 실제로 강유영의 처지 역시 무척 어려웠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997화

    조원철은 뜨거운 얼굴을 목덜미에 묻고 가볍게 비비며, 강유영의 손을 끌어당겨 팽팽하게 당겨진 자신의 욕망을 느끼게 했다.강유영은 흠칫 놀라 손을 뺐다. 온몸이 불에 데인 듯 달아올랐다.그녀는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씨 어멈과 시녀들의 처소가 멀지 않은 데다, 이 방이 방음이 잘 안 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유영아, 입술 상한다."조원철이 뺨을 쥐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붉게 달아오른 아랫입술에는 이미 선명한 잇자국이 두 개나 남아 있었다.그는 턱을 틀어쥐고 엄지로 입술을 애틋하게 문지르더니, 고개를 숙여 그 자국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붉은 기운이 얼굴에서 가슴팍까지 번져나갔다. 강유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감히 그와 마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버텼다."착하지. 사람들은 다 물렸으니 아무도 듣지 못한다. 내 사랑…… 참지 말고 소리 내거라……."조원철은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싼 채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평소의 과묵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그녀의 귓가에 대고 쉼 없이 사랑을 속삭였다."읍……."강유영은 머릿속이 새하얘져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그러나 내 사랑이라는 부름에 단박에 정신이 들었다.또 소은경의 대용품 취급을 한 것이다.머리는 차갑게 식었지만, 거세게 밀어붙이는 공세를 밀어내지 못하고 힘없이 휘둘렸다.다시 그가 만든 소용돌이에 휩쓸려 이성을 잃을 것 같자, 그녀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맞닿은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입안에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기어이 입술에 피를 보고 만 것이다.조원철의 입맞춤이 멈칫했다. 다음 순간, 그는 억센 힘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더니 아예 품속에 가두고 뼛속 깊이 새겨 넣으려는 듯 거칠게 옥죄었다.입술의 찌릿한 통증은 그를 물러서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광기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거칠고 뜨거워진 숨결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거침없는 공세 앞에 강유영은 다시 속수무책으로 무너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996화

    예전처럼 그를 대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조원철은 씻고 나와서 정교한 벽옥 상자를 건넸다."이게 무엇입니까?"강유영이 호기심에 손바닥만 한 옥 상자를 받아 촛불에 비추어 보았다. 뚜껑에 연꽃이 양각되어 있어 퍽 정교해 보였다."순금 팔찌다. 틈이 나면 도경진에게 전해주거라."말을 마치고 조원철은 침상에 올랐다.그 말에 강유영이 상자를 열어보니, 과연 덩굴 연꽃 무늬가 새겨진 두툼한 순금 팔찌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손에 쥐니 제법 묵직했다.조원철은 따로 덮던 이불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강유영의 이불을 들쳤다."뭐 하시는 겁니까?"강유영은 금팔찌에서 시선을 떼고 한 손으로 경계하듯 이불 끝을 꽉 쥐었다."자야지."조원철은 단숨에 이불을 걷어내고 파고들어 강유영을 품에 안았다.손에 들린 벽옥 상자가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강유영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지금은…… 피곤합니다. 이 방은 방음도 잘 안 되는데……."발로 다리를 밀며 이불 밖으로 차내려 했지만 통할 리 없었다."안고만 잘 테니 가만히 있어."조원철은 강유영의 팔을 끌어다 허리에 두르게 하고는 품에 더 꽉 끌어안았다.그는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강유영 특유의 단향을 맡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다른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자, 강유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끝내 저항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북교에서의 그날 밤, 호되게 당한 탓에 숨이 막힐 듯 버겁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여전히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정말이지 그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조원철은 한동안 가만히 안고 있다가, 귓가에 입술을 부비며 속삭였다."오늘 금수 상회에 다녀올 정도면 기력은 다 회복된 모양이구나."나직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였다."아닙니다……."강유영이 다시 몸부림쳤다.저런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얌전히 넘어갈 속셈이 아님이 뻔했다."입만 맞출 테니 그리 긴장할 것 없다."조원철의 뜨거운 입술이 귓불에 닿더니, 여린 귓바퀴 끝을 가볍게 깨물었다.강유영은 흠칫 몸을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995화

    "아씨, 세자께선 저택에 안 계십니다."서유는 녹나무 상자를 안고 나갔다가 그대로 들고 돌아와 강유영에게 고했다."이리 주렴."강유영은 상자를 받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그러고는 짐을 정리하며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가늠해보았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수까지 한 뒤 침상에 누웠을 때야, 조원철이 돌아왔다.그는 문을 밀고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오셨습니까?"어둠 속에서 침상에 누워 있던 강유영이 눈을 떴다.잠을 청하려 했으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상념에 빠진 탓에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아직 안 잤느냐?"조원철이 촛불을 밝혔다.칠흑 같던 침소에 금세 불이 밝혀졌다. 강유영이 고개를 돌리자 휘장에 비친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그녀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조원철은 침상 휘장을 걷고 가장자리에 앉아 강유영을 바라보았다.강유영은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일으켜 침상 머리맡에 기댔다. 그리고 침상 안쪽에 두었던 녹나무 상자를 꺼내 들었다."이건 이제 가져가십시오. 오라버니께서 가진 것과 함께 태워 없애시지요."녹나무 상자를 그에게 내밀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짜 혼서라는 사실은 조원철도 잘 알고 있으니 이리하는 게 마땅하다 여겼다.이 물건은 그야말로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가지고 있자니 조마조마했다.행여나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하지 못할 테니, 잠을 잘 때조차 침상 안쪽에 꼭꼭 숨겨두어야 했다."왜 태워 없애자는 것이냐?"조원철은 녹나무 상자를 받아 들며 눈을 들어 물었다."남의 눈에 띌까 봐 그렇습니다. 오늘 금수 상회에 들렀다가 서왕 전하와 마주쳤는데, 하마터면 들킬 뻔하여 십년감수했습니다."강유영은 까만 눈을 깜박이며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서준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어보았더라면, 지금쯤 이렇게 편히 누워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전당포 일은 어찌 되었느냐?"조원철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994화

    조사예는 강유영이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나올 줄 몰랐다. 게다가 눈빛에 비웃는 기색이 조금도 없이 오히려 진심 같아 보였다.잠시 멍해졌던 조사예는 강유영이 연기를 하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강유영은 서준에게 시집가지 않겠다 하면서, 도경진과의 혼사도 거절해놓고 줄곧 도경진과 엮이고 있었다.조사예는 강유영이 도경진을 대하는 마음이 남다르다고 여겼다. 도경진은 탐화랑 출신에 인물도 훤칠하고 출세욕도 있는 사내였다.어느 여인이 좋아하지 않겠는가.강유영은 가만히 조사예를 바라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조사예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시집을 가고 나면 기어이 본때를 보여주고 보란 듯이 잘 살아서 강유영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 작정이었다."사예야."도 부인이 마차 곁에서 불렀다."아주머니,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돌아서는 조사예의 얼굴에는 어느새 수더분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짐은 다 내렸다."도 부인이 텅 빈 마차를 가리켰다.이 부인 곁의 시녀들은 이미 다 흩어지고 없었다.소심이 비단 두 필을 안고 나와 곧장 조사예 등 뒤에 섰다."고생 많으셨습니다."조사예가 소심이 든 비단을 건네받아 마차에 실었다."이건 저희 어머니께서 부인 옷이라도 지어 입으시라며 주신 겁니다. 가져가십시오."본래 신랑 측에서 예물을 보낼 때 신부 측이 답례할 필요는 없었다.도경진에게 푹 빠져 있던 조사예는 도 부인을 친어머니처럼 모시기로 굳게 마음먹은 상태였다. 이 비단도 일부러 이씨에게 부탁해 챙겨둔 것이었다.도 부인은 비단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리에 선 채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왜 그러십니까?"조사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게 말이지, 요즘 경진이 간호할 사람도 필요한 데다,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혼례용품까지 사려니 도통 일손이 부족해서."도 부인이 손을 비비적거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소심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나랑 인력 시장에 가서 쓸만한 하인 하나 구해보는 게 어떨까?"반평생을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2화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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