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채아가 보낸 주소는 호텔 라운지였다.
덕배가 들어서자 바 안쪽에 앉아 있던 채아가 먼저 손을 들었다. 몸에 붙는 붉은 원피스는 풍만한 몸매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또렷한 화장까지 어느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오빠.” 덕배는 맞은편이 아니라 채아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자 채아가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늦었어.” “일했잖아.” “주말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고. 무슨 이사가 그래?” “존나게 바쁜 이사.” 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좋아하지?” “사실인데 뭘.” 덕배는 채아가 내민 잔을 받아 단숨에 절반쯤 비웠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채아와는 굳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술을 좋아하고,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 서로 뭘 원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덕배에게는 편한 관계였다. “오빠, 나 가방 봐둔 거 있는데.” “사진 보내.” “가격 안 물어봐?” “보고 마음에 들면 사.” 채아가 그의 어깨에 기대며 웃었다. “이래서 내가 오빠 좋아한다니까.” “가방 사줘서?” “그것도 있고.” 덕배가 코웃음을 치며 잔을 내려놓았다. “솔직해서 좋네.” 채아는 그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오늘 위에 방 잡았어.” 덕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네.” “싫어?” “내가?” 짧은 웃음과 함께 입술이 겹쳤다. 그 뒤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늦은 밤 호텔방을 나온 덕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셔츠 소매를 정리했다. 채아는 먼저 잠들었고, 덕배는 내일 아침 현장 일정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민이었다. “왜.” - 계좌 주인 나왔어.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기색이 덕배의 얼굴에서 바로 사라졌다. “누군데.” 이름을 들은 그의 걸음이 멈췄다. “확실해?” - 두 번 확인했어. 회장님께는 내가 보고할게. “하지 마. 같이 들어가.” - 지금? “어. 이건 전화로 끝낼 일 아니야.” 덕배는 차 문을 열며 시계를 확인했다. “삼십 분 안에 회사에서 봐.” - 너 어디인데? “호텔.” 잠깐 정적이 흘렀다. - 안 물어볼걸. “내가 방 번호까지 처불어줘?” - 됐어. 더럽게 안 궁금해. “끊어.” 덕배가 전화를 끊고 차에 올라탔다. 삼십 분 뒤, CH건설 상층부 회의실에는 강수까지 나와 있었다. 정민이 확보한 자료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서쪽 업장에서 빠져나간 돈은 여러 계좌를 거쳐 한 사람에게 흘러들어갔다. 문제는 그 이름이 사뇌파 내부에서 오래 자리를 지킨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덕배는 자료를 끝까지 확인한 뒤 턱을 쓸었다. “혼자 처먹은 건 아닐 겁니다.” 강수가 그를 봤다. “이유.” “이 새끼 혼자 움직이기엔 돈이 큽니다. 그리고 돈 빠진 날짜가 너무 일정합니다. 뒤에서 장부 보는 놈 하나 더 있어요.” 정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강수는 잠시 자료를 내려다보다 짧게 말했다. “확인해.” 덕배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혼자 가지 마.” “예.” “건드리지 말고 봐.” 덕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날 밤은 길었다. 다음 날 오전, 여름은 덕배가 그런 밤을 보냈다는 사실과 아무 상관 없는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J&J 작업대 위에는 새벽에 들어온 꽃들이 가득했다. 여름은 앞치마 끈을 단단히 묶고 물올림을 끝낸 꽃을 종류별로 나눴다. 평소에는 재희와 농담을 주고받느라 입이 쉬지 않았지만 꽃을 손에 잡은 뒤부터는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줄기의 길이를 맞추고 상한 잎을 골라내는 손이 빠르고 조심스러웠다. 재희가 옆에서 한참 지켜보다 주문서를 내밀었다. “여름아, 이거 네가 한번 잡아볼래?” 여름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응. 꽃다발.” 주문서에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름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 제가 해도 돼요?” “내가 마지막에 봐줄 거야.” “할래요.” 대답은 빨랐다. 여름은 주문서에 적힌 색감을 몇 번 확인한 뒤 냉장고 앞으로 갔다. 꽃을 하나씩 꺼내 조합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넣었다. 평소 덜렁거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장님, 이거 어때요?” 재희가 다가와 꽃을 살폈다. “왜 이걸 골랐어?” “결혼기념일이잖아요. 너무 화려한 것보다 오래 같이 산 느낌으로 편안하게 하고 싶어서요.” 재희가 여름을 한번 봤다. “해봐.” 허락이 떨어지자 여름은 입술을 살짝 말아 웃고 다시 꽃에 집중했다. 한참 뒤 꽃다발이 완성됐다. 여름은 양손으로 들어 방향을 바꿔가며 살펴봤다. 재희가 손댄 건 꽃 한 송이의 높이를 조금 낮춘 것뿐이었다. “잘했어.” 여름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진짜요?” “응.” “손님도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여름은 완성된 꽃다발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오후가 되어 주문한 손님이 찾아왔다. 중년 여자는 꽃다발을 받아 들자마자 얼굴 가득 웃었다. “어머, 너무 예쁘다.” 여름의 눈이 따라 휘어졌다. “마음에 드세요?” “네. 엄마가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그 한마디에 여름은 자기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손님이 나간 뒤에도 유리문 밖을 한번 더 바라보던 여름이 작게 웃었다. “사장님.” “응?” “저 진짜 플로리스트 할래요.” 재희가 웃었다. “그럼 지금까지는 뭐 하려고 했는데?” 여름이 잠깐 생각했다. “플로리스트요.” “…….” “근데 방금 더 하고 싶어졌어요.” 재희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여름도 따라 웃으며 다음 꽃을 집었다. 꽃집 밖으로 밝은 오후 햇살이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덕배는 여름과 민우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J&J 안에 서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두 사람의 뒷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또 거절당한 다이아 반지가 든 쇼핑백이 남아 있었다. “배 이사님.” 재희의 목소리에 덕배가 돌아봤다. “왜요.” “안 가세요?” “갑니다.” 대답은 했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재희는 작업대 위 꽃을 정리하며 슬쩍 그를 봤다. 가방부터 시작해서 구두, 팔찌, 오늘은 다이아 반지까지. 가격을 몰라도 비싼 물건이라는 건 포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름은 단 한 번도 상자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고 덕배는 거절당하면서도 다음 날 또 뭔가를 사왔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뭡니까.” “여름이가 왜 안 받는지 아직도 모르세요?” 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 “비싼 거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재희의 손이 멈췄다. 잠시 뒤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모르시네.” “뭘요.” “비싼 게 싫은 게 아니라 이유 없이 받는 게 싫은 거예요.” 덕배가 쇼핑백을 한번 내려다봤다. “내가 주고 싶다는데.” “그게 배 이사님 이유고요.” 재희는 꽃 줄기를 정리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여름이는 자기 이유가 없잖아요.” 덕배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선물 받는 데 걔 이유까지 있어야 합니까?” “여름이는 그래요.” 재희가 웃었다. “그러니까 그만 사오세요. 저러다 진짜 화내요.” 덕배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맨날 화내는데요.” “그건 그렇네요.” 재희도 웃었다. 덕배는 결국 쇼핑백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차에 올라타 뒷좌석 문을 열자 기가 막힌 광경이 보였다. 가방. 구두. 팔찌. 그리고 반지. 나란히 쌓인 쇼핑백을 보던 덕배가 혀를 찼다. “씨발, 매장 하나 차리겠네.” 운전석에 올라탔지만 바로 시동을 걸지는 않았다. 재희가 한 말이 걸렸다. 여름이 왜 안 받는지는 알았다. 이제는.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바로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덕배가 현장에서 빠져나온 건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워진 뒤였다. 예정보다 일이 길어졌다. 오전부터 붙잡고 있던 협력업체 문제가 오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확인을 끝내고 나서야 현장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차에 올라탄 덕배는 안전모를 뒷좌석에 던졌다. 그 옆에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반지였다. 가방도 안 받았다. 구두도 안 받았다. 팔찌도 안 받았다. 그런데 덕배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디까지 안 받나 보자는 오기가 붙었다. 오늘 고른 건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매장 직원이 선물 받는 사람과 무슨 관계냐고 물었을 때는 대충 얼버무렸다.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 조절과 교환이 가능한 제품으로 골랐고, 이번에도 가격은 가장 높은 쪽이었다. 덕배는 시계를 확인했다. J&J 영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아직 있겠지.” 차를 출발시켰다. 꽃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일곱 시 이십 분이 넘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덕배는 쇼핑백을 집어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아저씨?” 여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덕배는 안으로 들어서다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 달랐다. 앞치마도 없었다. 무릎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밝은색 원피스를 입었고, 늘 풀어놓거나 낮게 묶던 긴 갈색 머리는 깔끔하게 올려 묶었다. 목선과 작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옅게 화장까지 한 것 같았다. 덕배의 시선이 말없이 위에서 아래로 한번 내려갔다. 여름이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왜요?” 덕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전 민우와 첫 데이트를 한다던 날에는 선크림만 바르고 갔다고 했다. 오늘은 누가 봐도 달랐다. “너 어디 가냐.” 여름이 거울을 보며 귀 옆 잔머리를 정리했다. “데이트요.” 덕배의 턱이 바로 굳었다. 알면서 물은 셈이었다. “그 새끼랑?” 여름이 돌아봤다. “민우 씨요?” “어.” “네.” 대답도 시원했다. 덕배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
다음 날 아침, 덕배는 침실 한쪽에 놓인 쇼핑백 두 개를 보며 셔츠 단추를 채웠다. 가방. 구두. 둘 다 실패였다. 어젯밤 검색창에 "스무 살 여자 선물"을 쳐본 뒤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결과는 죄다 비슷했다. 가방, 향수, 주얼리, 화장품. 향수는 마음에 안 들었다. 여름에게서는 원래 꽃향기가 났다. 굳이 다른 냄새를 덮을 이유가 없었다. 덕배는 시계를 채우다 손을 멈췄다. 주얼리. “그래.” 가방도 아니고 구두도 아니다. 몸에 하고 다니는 건 다를 수 있었다. 어제 분명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점심 무렵 덕배는 주얼리 매장에 들어섰다. “선물 찾으세요?” “예.” “연령대가 어떻게 되실까요?” “스물.” 직원은 익숙하게 몇 가지 제품을 꺼냈다. 가느다란 목걸이와 귀걸이, 작은 펜던트가 달린 팔찌까지 차례로 놓였다. 덕배의 시선은 팔찌에서 멈췄다. 여름의 손목이 떠올랐다. 자기 팔에 붕대를 감아주던 작은 손. 꽃 줄기를 잡고 가위를 움직이던 가느다란 손목. 덕배는 팔찌 하나를 들어봤다. “이건 얼마입니까.” 직원이 가격을 설명했다. 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거.” “조금 더 높은 라인으로 보여드릴까요?” “제일 좋은 걸로.” 잠시 뒤 다이아몬드가 작게 세팅된 팔찌가 나왔다. 화려하게 크지는 않았지만 가격은 앞서 본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덕배는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손목 사이즈는 아실까요?” 이번에는 덕배도 멈췄다. 발 사이즈는 물어봤다. 손목 둘레까지 물어보면 여름이 바로 눈치챌 게 뻔했다. “제일 작은 걸로 하면 안 됩니까?” “조절 가능한 제품이라 크게 문제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로.” 결제는 또 빨랐다. 오후 세 시. J&J 문이 열렸다. 여름은 꽃바구니를 만들다가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했다. 그다음 그의 손을 봤다. 작은 쇼핑백. 여름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덕배는 아무
다음 날 오전, 덕배는 현장으로 향하다 백화점 앞에서 차를 돌렸다. 어제 산 가방은 여전히 뒷좌석에 있었다. 상자조차 열어보지 않고 거절당한 물건이었다. 보통이라면 다시 매장에 보내든 누구에게 줘버리든 했겠지만 아직 그대로였다. 덕배는 가방이 아니라 다른 게 문제였다고 결론 내렸다. 취향. 서여름이 가방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걸 사면 됐다. 덕배에게는 단순한 문제였다. 백화점에 들어선 그는 어제와 다른 층으로 올라갔다. 여성 구두 매장이 이어진 곳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문제는 이번에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덕배는 매장 직원에게 곧장 물었다. “스무 살 여자들이 뭐 신습니까?” 직원이 잠시 당황했다가 웃었다. “찾으시는 스타일이 있으실까요?” “예쁜 거.” “평소 스타일은요?” 덕배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름이 뭘 입었더라. 청바지. 운동화. 꽃집 앞치마. 양로원에 갔던 날도 운동화였다. “편하게 입습니다.” “그럼 로퍼나 플랫도 괜찮고요. 조금 꾸밀 때 신을 거라면 이런 펌프스도—” 덕배는 직원이 보여주는 구두를 훑었다. 그러다 가장 비싼 쪽에 시선이 멈췄다. “이건.” “시그니처 라인입니다.” “이걸로.”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덕배가 멈췄다. “……사이즈?” “네.”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덕배는 잠시 서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배덕배: 야.] 답장은 잠시 뒤 왔다. [서여름: 왜요?] [배덕배: 발 몇이냐.] 이번에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서여름: 제 발이요?] [배덕배: 그럼 내 발 물어봤겠냐.] [서여름: 235요. 근데 왜요?] 덕배는 화면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말했다. “235.” 결제까지 끝낸 뒤에야 여름의 마지막 질문에 답했다. [배덕배: 그냥.] 쇼핑백을 들고 나온 덕배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는 가방이 아니었다. 신발은 누구나 신는다. 게다가 예뻤다. 가격도 충분히 비쌌다. 이 정도면
회의를 끝내고 CH건설을 나온 덕배는 곧장 J&J로 향했다. 같은 날 오후였다. 뒷좌석에는 백화점에서 산 가방이 든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한 번씩 눈에 들어왔지만 덕배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늘 그랬다. 여자에게 선물을 고르는 데 오래 고민한 적도 없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사줬고, 직접 고르기 귀찮으면 가장 비싸거나 좋은 걸 골랐다. 상대는 좋아했고 덕배도 그걸로 끝이었다. 이번에도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J&J 앞에 도착한 그는 익숙하게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쇼핑백을 들고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작업대에서 꽃을 정리하던 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한 얼굴에 의아함이 먼저 떠올랐다. “아저씨?” “어.” “아까 갔잖아요.” “알아.” 점심 무렵 진 꽃을 맡기고 돌아간 사람이 몇 시간 만에 다시 나타났으니 이상할 만했다. 여름의 시선이 덕배 손에 들린 쇼핑백으로 내려갔다. “그건 뭐예요?” 덕배는 작업대 앞으로 걸어가 쇼핑백을 올려놨다. “너.” 여름이 눈을 깜빡였다. “저요?” “어.” “뭐가요?” “선물.” 덕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턱짓했다. “열어봐.” 여름은 쇼핑백과 덕배를 번갈아봤다. 익숙한 명품 브랜드 로고였다. 표정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왜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다. “뭐가 왜야.” “왜 저한테 선물을 줘요?” “주고 싶으니까.” “갑자기요?” “어.” 여름은 쇼핑백에 손도 대지 않았다. 덕배가 답답한 듯 직접 상자를 꺼냈다. “일단 봐.” “아저씨.” “왜.” “저 이거 안 받아요.” 덕배의 손이 멈췄다. “뭐?” 여름은 장난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안 받을래요.” “열어보지도 않았잖아.” “뭔지 대충 알 것 같은데요.” “가방이야.” “그러니까요.” 덕배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가방 싫어
J&J를 나온 덕배는 차에 올라탄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점심도 먹지 않았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본 장면만 계속 걸렸다. 덮밥 두 개. 뮤지컬 티켓 두 장. 그리고 그걸 받아 들고 웃던 여름. 덕배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씨발.” 질투하는 건 이미 인정했다. 다른 새끼가 여름에게 들이대는 게 싫었다. 둘이 매일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이제는 뮤지컬까지 같이 보러 간다고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 있을 배덕배가 아니었다. 민우가 꽃을 사주고 밥을 사주고 공연을 보여주면서 점수를 따고 있다면 자신도 뭔가 하면 됐다. 덕배에게 여자 마음을 얻는 방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수도 없이 봤다. 가방. 주얼리. 비싼 레스토랑. 갖고 싶다는 게 있으면 사줬고, 대부분 좋아했다. 돈은 많았고 그 정도 지출에 의미를 둔 적도 없었다. 신호에 걸린 순간 덕배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내리다가 여자 하나를 골라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 함께 밤을 보낸 적 있는 여자였다. - 오빠? “어.” - 웬일이야? 먼저 전화도 하고. “물어볼 거 있어.” - 뭔데? 덕배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두드렸다. “요즘 여자들 무슨 가방 좋아하냐?”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 갑자기 가방? “어.” - 누구 사주게? “그건 알 거 없고. 요즘 제일 핫한 거.” 여자가 웃었다. - 나 사주려고? “너 말고.” - 너무하네. “빨리 말해.” 몇 가지 브랜드와 모델명이 줄줄이 나왔다. 덕배에게는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뭐가 제일 좋아.” -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데? 덕배가 잠깐 멈췄다. “스물.” 이번에는 전화기 너머가 더 오래 조용했다. - 오빠 양심 어디 갔어? 덕배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가방이나 처말해.” 여자가 한참 웃었다. - 알았어. 요즘 많이 찾는 게 있기는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