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후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여름은 커다란 꽃바구니를 양손으로 안고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J&J에서 종종 주문을 받는 호텔이었다. 객실로 직접 전달하는 건 드물었지만 오늘 주문은 투숙객에게 보내는 기념일 선물이라 프런트 확인을 거쳐 직접 올라가게 됐다. “스위트룸 층…….” 여름은 주문서에 적힌 객실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꽃바구니가 제법 컸다. 시야 아래쪽이 반쯤 가려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몸부터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조용한 복도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름은 객실 번호를 하나씩 확인하며 걸었다. 긴 갈색 머리는 낮게 묶었고 흰 셔츠 위에는 J&J 앞치마를 그대로 두르고 있었다. 품 안에서는 장미와 리시안셔스, 여러 생화가 뒤섞인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목적지까지 몇 걸음 남겨두지 않았을 때였다. 앞쪽 스위트룸 문이 열렸다. 여름은 꽃바구니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앞을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죄송합니다.” 습관처럼 먼저 말한 뒤 지나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뭐냐?” 여름의 걸음이 멈췄다. 꽃바구니 옆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어?” 덕배였다. 검은 셔츠의 위쪽 단추를 두어 개 풀어놓은 채 스위트룸에서 나오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고 한 손에는 재킷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화려한 여자가 함께였다. 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피스에 풍성한 긴 머리, 또렷한 화장. 채아는 덕배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있었다. 여름은 둘을 번갈아봤다. 덕배도 어이가 없는지 여름의 앞치마와 품에 안긴 꽃바구니를 훑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꽃 배달 왔는데요.” “호텔까지?” “호텔에는 꽃 배달 오면 안 돼요?” “그런 말이 아니라.” 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며칠 전 길바닥에서 자기한테 차 빼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여자애를 호텔 스위트룸 복도에서 다시 볼 줄은 몰랐다. 여름이 꽃바구니를 고쳐 안았다.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하세요?” 덕배의 눈썹이 즉시 꿈틀했다. “야.” “왜요?” “여기서도 아저씨냐?” “장소 바뀌면 나이도 바뀌어요?” 덕배의 입이 잠깐 닫혔다. 채아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오빠. 아는 애야?” “며칠 전에 말한 걔.” 채아의 눈이 여름에게 향했다. “아.” 여름은 그 반응에 눈을 깜빡였다. “제 얘기를 했어요?” 덕배가 바로 받아쳤다. “뭘 그렇게 놀라. 네가 길바닥에서 동네 떠나가게 소리 질렀는데.” “누구 때문에요?” “또 시작하냐?” “아저씨가 먼저 말했잖아요.” 여름은 여전히 꽃바구니를 안은 채였지만 한마디도 밀리지 않았다. 채아는 둘을 번갈아보다 웃었다. “진짜네.” 여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성질 있다고 하더니.” 여름의 눈이 천천히 덕배에게 돌아갔다. 덕배가 순간 헛기침했다. “야, 그건—” “제 성질 얘기도 했어요?” “그냥 있었던 일 말한 거야.” “남의 흉을 봤네요.” “흉은 무슨 흉이야.” 여름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저는 아저씨 얘기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덕배가 피식 웃었다. “왜. 내 얘기도 좀 하지 그랬냐.” “별로 할 말이 없어서요.” 채아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게 진짜.” 여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일부러 한 방 먹였다는 게 뻔히 보였다. 덕배가 뭐라고 받아치려는 순간 채아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빠, 우리 늦었어.” “아.” 덕배는 시계를 확인했다. 여름도 그제야 자기 주문을 떠올리고 주문서를 봤다. “저도 가야 돼요.” “어디.” “저기요.” 여름이 복도 끝쪽 객실을 턱으로 가리켰다. “꽃 시들기 전에 가야 돼요.” “그 잠깐에 꽃이 시드냐?” 여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꽃은 생각보다 예민해요.” “그래?” “네. 사람보다 솔직하고요.” 덕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여름이 잠시 생각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아닌데요?” 덕배는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여름은 두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데이트 잘하세요.” 그 말에 덕배와 채아가 동시에 여름을 봤다. 여름은 이미 돌아서 있었다. “야.” 덕배가 불렀다. 여름이 꽃바구니 옆으로 얼굴만 돌렸다. “왜요?” “데이트 아니야.” 여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요?” 덕배가 입을 열려다 멈췄다. 굳이 이걸 왜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 “……됐어. 가.” “네.” 여름은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고 다시 걸었다. 채아가 그런 뒷모습을 보다가 덕배를 올려다봤다. “왜 굳이 아니라고 해?” “뭐가.” “데이트.” 덕배가 재킷을 어깨에 걸쳤다.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채아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우리 지금 스위트룸에서 같이 나왔는데?” 덕배가 그제야 상황을 돌아봤다. 흐트러진 셔츠. 채아. 호텔 스위트룸. 그리고 꽃을 안고 가던 스무 살짜리 여자애. 누가 봐도 뻔했다. “씨발.” 덕배가 낮게 웃었다. “저 조그만 게 뭔 생각을 했겠네.” 채아가 그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신경 쓰여?” 덕배가 바로 코웃음을 쳤다. “뭐가 신경 쓰여.” 그는 채아와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그 시간 여름은 주문받은 객실 앞에서 벨을 누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다시 밝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J&J 플라워숍에서 꽃 배달 왔습니다.” 조금 전 스위트룸 앞에서 누구와 마주쳤는지는 이미 머릿속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여름에게는 지금 품에 든 꽃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덕배는 여름과 민우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J&J 안에 서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두 사람의 뒷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또 거절당한 다이아 반지가 든 쇼핑백이 남아 있었다. “배 이사님.” 재희의 목소리에 덕배가 돌아봤다. “왜요.” “안 가세요?” “갑니다.” 대답은 했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재희는 작업대 위 꽃을 정리하며 슬쩍 그를 봤다. 가방부터 시작해서 구두, 팔찌, 오늘은 다이아 반지까지. 가격을 몰라도 비싼 물건이라는 건 포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름은 단 한 번도 상자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고 덕배는 거절당하면서도 다음 날 또 뭔가를 사왔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뭡니까.” “여름이가 왜 안 받는지 아직도 모르세요?” 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 “비싼 거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재희의 손이 멈췄다. 잠시 뒤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모르시네.” “뭘요.” “비싼 게 싫은 게 아니라 이유 없이 받는 게 싫은 거예요.” 덕배가 쇼핑백을 한번 내려다봤다. “내가 주고 싶다는데.” “그게 배 이사님 이유고요.” 재희는 꽃 줄기를 정리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여름이는 자기 이유가 없잖아요.” 덕배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선물 받는 데 걔 이유까지 있어야 합니까?” “여름이는 그래요.” 재희가 웃었다. “그러니까 그만 사오세요. 저러다 진짜 화내요.” 덕배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맨날 화내는데요.” “그건 그렇네요.” 재희도 웃었다. 덕배는 결국 쇼핑백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차에 올라타 뒷좌석 문을 열자 기가 막힌 광경이 보였다. 가방. 구두. 팔찌. 그리고 반지. 나란히 쌓인 쇼핑백을 보던 덕배가 혀를 찼다. “씨발, 매장 하나 차리겠네.” 운전석에 올라탔지만 바로 시동을 걸지는 않았다. 재희가 한 말이 걸렸다. 여름이 왜 안 받는지는 알았다. 이제는.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바로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덕배가 현장에서 빠져나온 건 저녁 일곱 시가 가까워진 뒤였다. 예정보다 일이 길어졌다. 오전부터 붙잡고 있던 협력업체 문제가 오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확인을 끝내고 나서야 현장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차에 올라탄 덕배는 안전모를 뒷좌석에 던졌다. 그 옆에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반지였다. 가방도 안 받았다. 구두도 안 받았다. 팔찌도 안 받았다. 그런데 덕배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디까지 안 받나 보자는 오기가 붙었다. 오늘 고른 건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매장 직원이 선물 받는 사람과 무슨 관계냐고 물었을 때는 대충 얼버무렸다. 손가락 사이즈를 몰라 조절과 교환이 가능한 제품으로 골랐고, 이번에도 가격은 가장 높은 쪽이었다. 덕배는 시계를 확인했다. J&J 영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아직 있겠지.” 차를 출발시켰다. 꽃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일곱 시 이십 분이 넘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덕배는 쇼핑백을 집어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아저씨?” 여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덕배는 안으로 들어서다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 달랐다. 앞치마도 없었다. 무릎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밝은색 원피스를 입었고, 늘 풀어놓거나 낮게 묶던 긴 갈색 머리는 깔끔하게 올려 묶었다. 목선과 작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옅게 화장까지 한 것 같았다. 덕배의 시선이 말없이 위에서 아래로 한번 내려갔다. 여름이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왜요?” 덕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전 민우와 첫 데이트를 한다던 날에는 선크림만 바르고 갔다고 했다. 오늘은 누가 봐도 달랐다. “너 어디 가냐.” 여름이 거울을 보며 귀 옆 잔머리를 정리했다. “데이트요.” 덕배의 턱이 바로 굳었다. 알면서 물은 셈이었다. “그 새끼랑?” 여름이 돌아봤다. “민우 씨요?” “어.” “네.” 대답도 시원했다. 덕배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
다음 날 아침, 덕배는 침실 한쪽에 놓인 쇼핑백 두 개를 보며 셔츠 단추를 채웠다. 가방. 구두. 둘 다 실패였다. 어젯밤 검색창에 "스무 살 여자 선물"을 쳐본 뒤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결과는 죄다 비슷했다. 가방, 향수, 주얼리, 화장품. 향수는 마음에 안 들었다. 여름에게서는 원래 꽃향기가 났다. 굳이 다른 냄새를 덮을 이유가 없었다. 덕배는 시계를 채우다 손을 멈췄다. 주얼리. “그래.” 가방도 아니고 구두도 아니다. 몸에 하고 다니는 건 다를 수 있었다. 어제 분명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은 머릿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점심 무렵 덕배는 주얼리 매장에 들어섰다. “선물 찾으세요?” “예.” “연령대가 어떻게 되실까요?” “스물.” 직원은 익숙하게 몇 가지 제품을 꺼냈다. 가느다란 목걸이와 귀걸이, 작은 펜던트가 달린 팔찌까지 차례로 놓였다. 덕배의 시선은 팔찌에서 멈췄다. 여름의 손목이 떠올랐다. 자기 팔에 붕대를 감아주던 작은 손. 꽃 줄기를 잡고 가위를 움직이던 가느다란 손목. 덕배는 팔찌 하나를 들어봤다. “이건 얼마입니까.” 직원이 가격을 설명했다. 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거.” “조금 더 높은 라인으로 보여드릴까요?” “제일 좋은 걸로.” 잠시 뒤 다이아몬드가 작게 세팅된 팔찌가 나왔다. 화려하게 크지는 않았지만 가격은 앞서 본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덕배는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손목 사이즈는 아실까요?” 이번에는 덕배도 멈췄다. 발 사이즈는 물어봤다. 손목 둘레까지 물어보면 여름이 바로 눈치챌 게 뻔했다. “제일 작은 걸로 하면 안 됩니까?” “조절 가능한 제품이라 크게 문제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로.” 결제는 또 빨랐다. 오후 세 시. J&J 문이 열렸다. 여름은 꽃바구니를 만들다가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했다. 그다음 그의 손을 봤다. 작은 쇼핑백. 여름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덕배는 아무
다음 날 오전, 덕배는 현장으로 향하다 백화점 앞에서 차를 돌렸다. 어제 산 가방은 여전히 뒷좌석에 있었다. 상자조차 열어보지 않고 거절당한 물건이었다. 보통이라면 다시 매장에 보내든 누구에게 줘버리든 했겠지만 아직 그대로였다. 덕배는 가방이 아니라 다른 게 문제였다고 결론 내렸다. 취향. 서여름이 가방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걸 사면 됐다. 덕배에게는 단순한 문제였다. 백화점에 들어선 그는 어제와 다른 층으로 올라갔다. 여성 구두 매장이 이어진 곳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문제는 이번에도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덕배는 매장 직원에게 곧장 물었다. “스무 살 여자들이 뭐 신습니까?” 직원이 잠시 당황했다가 웃었다. “찾으시는 스타일이 있으실까요?” “예쁜 거.” “평소 스타일은요?” 덕배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름이 뭘 입었더라. 청바지. 운동화. 꽃집 앞치마. 양로원에 갔던 날도 운동화였다. “편하게 입습니다.” “그럼 로퍼나 플랫도 괜찮고요. 조금 꾸밀 때 신을 거라면 이런 펌프스도—” 덕배는 직원이 보여주는 구두를 훑었다. 그러다 가장 비싼 쪽에 시선이 멈췄다. “이건.” “시그니처 라인입니다.” “이걸로.”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덕배가 멈췄다. “……사이즈?” “네.”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덕배는 잠시 서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배덕배: 야.] 답장은 잠시 뒤 왔다. [서여름: 왜요?] [배덕배: 발 몇이냐.] 이번에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서여름: 제 발이요?] [배덕배: 그럼 내 발 물어봤겠냐.] [서여름: 235요. 근데 왜요?] 덕배는 화면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말했다. “235.” 결제까지 끝낸 뒤에야 여름의 마지막 질문에 답했다. [배덕배: 그냥.] 쇼핑백을 들고 나온 덕배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는 가방이 아니었다. 신발은 누구나 신는다. 게다가 예뻤다. 가격도 충분히 비쌌다. 이 정도면
회의를 끝내고 CH건설을 나온 덕배는 곧장 J&J로 향했다. 같은 날 오후였다. 뒷좌석에는 백화점에서 산 가방이 든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한 번씩 눈에 들어왔지만 덕배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늘 그랬다. 여자에게 선물을 고르는 데 오래 고민한 적도 없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사줬고, 직접 고르기 귀찮으면 가장 비싸거나 좋은 걸 골랐다. 상대는 좋아했고 덕배도 그걸로 끝이었다. 이번에도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J&J 앞에 도착한 그는 익숙하게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쇼핑백을 들고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작업대에서 꽃을 정리하던 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덕배를 발견한 얼굴에 의아함이 먼저 떠올랐다. “아저씨?” “어.” “아까 갔잖아요.” “알아.” 점심 무렵 진 꽃을 맡기고 돌아간 사람이 몇 시간 만에 다시 나타났으니 이상할 만했다. 여름의 시선이 덕배 손에 들린 쇼핑백으로 내려갔다. “그건 뭐예요?” 덕배는 작업대 앞으로 걸어가 쇼핑백을 올려놨다. “너.” 여름이 눈을 깜빡였다. “저요?” “어.” “뭐가요?” “선물.” 덕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턱짓했다. “열어봐.” 여름은 쇼핑백과 덕배를 번갈아봤다. 익숙한 명품 브랜드 로고였다. 표정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왜요?” 덕배의 눈썹이 올라갔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다. “뭐가 왜야.” “왜 저한테 선물을 줘요?” “주고 싶으니까.” “갑자기요?” “어.” 여름은 쇼핑백에 손도 대지 않았다. 덕배가 답답한 듯 직접 상자를 꺼냈다. “일단 봐.” “아저씨.” “왜.” “저 이거 안 받아요.” 덕배의 손이 멈췄다. “뭐?” 여름은 장난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안 받을래요.” “열어보지도 않았잖아.” “뭔지 대충 알 것 같은데요.” “가방이야.” “그러니까요.” 덕배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가방 싫어
J&J를 나온 덕배는 차에 올라탄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점심도 먹지 않았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본 장면만 계속 걸렸다. 덮밥 두 개. 뮤지컬 티켓 두 장. 그리고 그걸 받아 들고 웃던 여름. 덕배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씨발.” 질투하는 건 이미 인정했다. 다른 새끼가 여름에게 들이대는 게 싫었다. 둘이 매일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이제는 뮤지컬까지 같이 보러 간다고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 있을 배덕배가 아니었다. 민우가 꽃을 사주고 밥을 사주고 공연을 보여주면서 점수를 따고 있다면 자신도 뭔가 하면 됐다. 덕배에게 여자 마음을 얻는 방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수도 없이 봤다. 가방. 주얼리. 비싼 레스토랑. 갖고 싶다는 게 있으면 사줬고, 대부분 좋아했다. 돈은 많았고 그 정도 지출에 의미를 둔 적도 없었다. 신호에 걸린 순간 덕배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내리다가 여자 하나를 골라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 함께 밤을 보낸 적 있는 여자였다. - 오빠? “어.” - 웬일이야? 먼저 전화도 하고. “물어볼 거 있어.” - 뭔데? 덕배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두드렸다. “요즘 여자들 무슨 가방 좋아하냐?”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 갑자기 가방? “어.” - 누구 사주게? “그건 알 거 없고. 요즘 제일 핫한 거.” 여자가 웃었다. - 나 사주려고? “너 말고.” - 너무하네. “빨리 말해.” 몇 가지 브랜드와 모델명이 줄줄이 나왔다. 덕배에게는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뭐가 제일 좋아.” -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데? 덕배가 잠깐 멈췄다. “스물.” 이번에는 전화기 너머가 더 오래 조용했다. - 오빠 양심 어디 갔어? 덕배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가방이나 처말해.” 여자가 한참 웃었다. - 알았어. 요즘 많이 찾는 게 있기는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