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
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
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
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
“어디에 둘까요, 마님?”
“조약 사본 옆에.”
“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
“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
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
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
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
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
“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
“아니. 오늘 읽을게.”
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
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
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
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페트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 받침이 책상에 닿는 소리가 작게 났다.
로잘린은 다음 줄을 읽었다.
「책봉을 앞두고 궁의 노래 선생에게 다시 노래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선생은 왕비가 된 뒤에도 부르면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마들렌이 라이너 곁에 앉아 있던 날, 로잘린은 붉은 머리와 하얀 손을 보았다. 그 손이 의자 팔걸이를 붙잡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로잘린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채우지 않았다. 종이 위에 적힌 말로 눈을 돌렸다.
「궁 밖에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나갈 수 있게 되면 노래하는 데로 간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아버지가 정해 주는 곳이 아니라 제가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요.」
마지막 줄은 앞의 글보다 반듯했다.
「돌아오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께서 제 말을 읽지 않으셔도 답을 재촉하지 않겠습니다.」
로잘린은 종이를 펼친 채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잔에 손을 대고 있으니 굳어 있던 손가락이 조금 풀렸다.
페트라가 물었다.
“뭐라고 썼어요?”
“자리를 원한 적 없었대. 아버지 말을 따랐고, 왕이 손을 내밀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고.”
페트라는 찻주전자 손잡이를 놓았다.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래.”
“이제 와서 편지를 읽었다고 마님이 괜찮다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 말은 쓰지 않을 거야.”
로잘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꾸는 편지는 아니니까.”
페트라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모서리에 붙은 종이 조각을 떼어 내고 편지 옆에 놓았다.
“노래하러 간다는 것도 적혀 있나요?”
“나갈 수 있게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정말 나갔다고 했죠. 지난 소식지에서.”
“응.”
로잘린은 편지의 맨 아래를 다시 보았다. 마들렌은 답을 받기 전에 궁을 나갔다. 이 편지에는 갈 곳의 이름도, 새로 기대겠다는 사람의 이름도 없었다.
“답장은 어디로 보내요?”
“올덴 서신을 맡는 곳에 보내면 전해 줄 거야. 행선지를 알게 되면.”
페트라는 깨끗한 종이를 가져왔다. 로잘린은 긴 편지지를 고르지 않았다. 책상 한쪽에 남아 있던 작은 종이가 알맞았다.
깃펜 끝을 잉크에 적신 뒤 잠시 들고 있었다.
첫 줄에 괜찮다는 말도, 이해한다는 말도 쓰지 않았다.
「편지를 읽었습니다. 궁을 떠났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디서 노래할지는 직접 정하시기 바랍니다. 제 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로잘린은 이름을 쓰고 펜을 내려놓았다.
페트라가 답장을 읽었다.
“이렇게만 보내실 거예요?”
“더 부탁할 일은 없어.”
“따질 일도요?”
로잘린은 마들렌의 편지를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 잘못 접으면 마지막 줄이 봉투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그날 내가 잃은 건 이 답장으로 돌아오지 않아. 돌아오길 바라지도 않고.”
페트라는 더 묻지 않았다. 잉크가 마른 답장을 받아 봉투에 넣었다. 겉면에 쓸 이름은 로잘린이 직접 적었다.
마들렌 포셰.
로잘린은 이름 뒤에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
책상 옆에 놓인 서신함에는 헨리크의 서기가 함께 보내온 작은 봉투가 남아 있었다.
왕실 문서와 달리 인장이 없었다. 북쪽 영지에서 보냈다는 표시와 받는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로잘린은 봉투를 열었다.
라이너의 편지는 종이를 다 펼칠 필요도 없을 만큼 짧았다.
「다리 돌의 뜻을 전해 받았다. 고맙다.」
그 아래에 이름이 있었다.
말을 잇기 위해 붙이던 문장도,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문장도 없었다. 로잘린은 종이 뒷면을 확인했다. 비어 있었다.
페트라는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답을 원한대요?”
“그 말은 없어.”
“돌아오라는 말도요?”
로잘린은 편지를 건네주었다. 페트라는 짧은 글을 읽고 곧 돌려주었다.
“정말 이것뿐이네요.”
“응.”
로잘린은 새 종이를 당겼다. 무엇을 먼저 고쳐 말해야 할지 고를 필요가 없었다.
「뜻이 전해졌다니 알겠습니다.」
이름을 쓰고 나니 남은 여백이 넓었다. 로잘린은 종이를 더 채우지 않았다.
페트라가 두 답장을 서신함에 넣었다. 하나는 마들렌에게 전해 달라는 메모와 함께, 다른 하나는 봉투에 적힌 북쪽 영지로 보낼 묶음에 놓였다.
로잘린은 받은 편지들을 책상 가운데에 나란히 두었다.
마들렌의 종이에는 접힌 자국이 많았다. 라이너의 종이에는 짧은 글 아래로 빈 곳이 남았다. 두 편지의 모서리를 맞추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크기가 달랐다.
‘보낼 것은 둘. 기다릴 답은 없음.’
서랍에서 아버지의 가죽 장부를 꺼냈다.
오래된 가죽은 손에 익은 자리에 조금 들어가 있었다. 로잘린은 관세소의 기록이 끝난 뒤, 글을 적지 않은 장을 펼쳤다. 마들렌의 편지를 봉투에 넣고 라이너의 편지를 그 옆에 놓았다.
페트라가 장부를 보았다.
“거기에 두시려고요?”
“잃어버리지 않게.”
“상자에 넣어도 되는데요.”
“오늘은 여기가 좋겠어.”
로잘린은 편지 두 통을 장부 사이에 끼웠다. 덮기 전에 봉투 끝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확인했다.
폐위 문서는 문서함에 있었다. 답장은 보낼 곳이 정해졌다. 받은 편지는 장부에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빈 찻잔과 깃펜만 남았다.
로잘린은 더 적을 말을 찾지 않고 잉크병 뚜껑을 닫았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게르다가 천을 팔에 걸치고 들어왔다. 뒤따라온 페트라는 의자를 창가로 옮겼다. 로잘린이 책상 앞에서 일어나자 게르다가 천을 펼쳤다.
꾸밈을 달기 전의 혼례 옷감이었다. 빛이 닿는 쪽과 그늘진 쪽의 색이 조금 달라 보였다.
“지금 재도 되겠습니까?”
“예.”
“팔을 들어 주세요. 너무 높이 들지는 마시고요.”
로잘린은 팔을 조금 벌렸다. 게르다는 어깨에 천을 대고 등을 돌아 살폈다. 허리 쪽에 남는 부분을 손으로 모았다가 놓았다.
페트라가 옆에서 천을 받쳤다.
“허리는 이만큼 줄이면 되겠어요.”
“그렇게 줄이면 오래 서 있기가 불편합니다.”
게르다가 말했다.
“앉을 때도 보셔야 해요.”
로잘린은 의자에 앉았다. 모아 둔 천이 허리에서 당겼다. 게르다는 그 부분을 풀어 주었다.
“이만큼은 남기겠습니다.”
“좋아요.”
“올덴식인가요, 라우덴식인가요?”
로잘린은 무릎에 놓인 옷감을 보았다.
“옷 말인가요?”
“혼례요. 옷도 거기에 맞춰야 하니까요.”
페트라가 입을 열려다가 로잘린을 보았다. 올덴식 혼례에 필요한 것을 말하려던 듯했다.
로잘린은 소매 끝에 댄 천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손목을 돌려 보니 펜을 들 때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소금 한 줌 나누는 거요.”
게르다는 허리 쪽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건 이미 하셨지요.”
“그때는 서류 앞에서 했죠. 이번에는 광장에서 할 거예요.”
“옷은요?”
“여기서 입는 것으로 해 주세요. 걷고 앉을 수 있게.”
게르다는 천을 로잘린의 어깨에 다시 맞췄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로잘린이 고개를 들었다.
게르다는 이미 소매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닿았던 어깨에는 천의 무게와 다른 감촉이 잠깐 남았다.
“이쪽은 조금 넓히겠습니다.”
“제가 팔을 잘못 들었나요?”
“아닙니다. 왕비 전하께서 사람들 손을 잡으셔야 하니까요.”
페트라가 천을 펴며 웃었다.
“소매가 당기면 안 되겠네요.”
“예. 옷 때문에 손을 놓으시면 곤란하죠.”
게르다는 바늘을 꽂지 않은 부분만 다시 접었다. 로잘린은 팔을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천이 따라 움직였고, 어깨는 당기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걸어 보시겠습니까?”
로잘린은 창가에서 문까지 걸었다. 옷자락을 밟지 않으려고 처음에는 발을 조금씩 옮겼다.
게르다가 뒤에서 말했다.
“평소처럼 걸으셔도 됩니다.”
로잘린은 걸음을 넓혔다. 페트라가 뒤에 남은 천을 따라 들었다. 문 앞에서 돌아섰을 때 게르다가 밑단을 잡아 표시했다.
“이 길이면 계단도 괜찮겠습니다.”
페트라는 로잘린이 벗어 둔 외투를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여기선 이렇게 하죠. 옷에 맞춰 걷는 게 아니라 걸을 만큼 옷을 남겨요.”
“올덴에서도 그렇게 만들면 돼.”
로잘린이 말했다.
페트라는 잠깐 손을 멈췄다가 외투의 구겨진 곳을 폈다.
“그렇네요.”
게르다는 치수를 적은 종이를 접었다. 천을 걷어 내자 로잘린의 평소 옷이 다시 드러났다. 어깨에 남아 있던 작은 실밥을 페트라가 떼어 주었다.
“다른 것을 더 정해야 하나요?”
로잘린이 물었다.
“오늘은 이것이면 됩니다.”
게르다가 옷감을 팔에 걸쳤다.
“식기 전에 차를 드세요. 새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책상에는 따뜻한 찻잔이 놓여 있었다. 로잘린은 아버지의 장부를 한쪽으로 옮기고 앉았다. 편지가 들어간 만큼 장부가 조금 벌어졌지만, 끈을 묶으니 곧 닫혔다.
게르다는 문을 나서기 전에 돌아보았다.
“소매 끝은 손등을 덮지 않게 하겠습니다.”
“왜요?”
“잉크 묻은 손을 감추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로잘린은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운데 손가락에 오늘 묻은 잉크가 남아 있었다.
게르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닫았다.
«▼»
찻잔이 비었을 때 페트라가 답장을 가져갔다.
로잘린은 서신함이 있던 자리를 비우고 혼례 옷의 치수를 적은 종이를 놓았다. 허리에 남길 부분과 소매를 넓힐 자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문서함을 선반에 올린 뒤 아버지의 장부를 책상 안쪽에 두었다. 오늘은 다시 펼칠 일이 없었다.
복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로잘린이 나갔을 때 마티아스가 서재 문을 닫고 있었다. 손에는 금고 기록이 들려 있었다. 문서 아래쪽을 잡은 손에 잉크가 조금 묻어 있었다.
“아직 일하고 계셨어요?”
“확인할 것이 있었습니다.”
마티아스가 로잘린의 방 안을 보았다. 의자 위에는 천을 걷어 낸 뒤 남은 실 한 가닥이 놓여 있었다.
“치수는 다 재셨습니까?”
“예. 팔을 움직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전하도 재셔야 할 텐데요.”
“게르다가 항구에 가기 전에 붙잡겠다고 했습니다.”
로잘린은 웃음을 참으며 문틀에서 손을 뗐다.
“피해서 나가실 생각은 아니죠?”
“아닙니다. 어디로 나가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마티아스가 접힌 금고 기록을 바로 잡았다. 로잘린은 종이 끝에 적힌 세르 표시를 보았다.
“문서를 돌려드리러 가세요?”
“예. 왕비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확인할 것이 있나요?”
마티아스가 복도 끝을 보았다가 다시 로잘린을 보았다.
“베크 재상이 금고를 열고 울고 있습니다.”
“왜요?”
“2만 세르랍니다.”
복도 끝에서 베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비 전하, 돈이 생겼습니다.”
(38화 끝)
「꽃달 1일, 왕과 왕비는 백성이 모은 소금 앞에서 혼례를 맺고 구리 관을 쓴다. 두 사람의 서약은 광장에 모인 이들이 듣는다.」마티아스는 문턱에 얹힌 로잘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을 조금 옮기자 잉크 자국 위로 엄지가 닿았다.“고칠 곳이 있었군요.”“예. 내일도 있으면 말씀드릴게요.”“듣겠습니다.”마티아스는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로잘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혼례 옷은 의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로잘린은 펜을 다시 들지 않고 등불을 낮췄다.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천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도 곧 그쳤다.«▼»아침에 게르다가 가져온 것은 수프와 작은 접시였다.“옷부터 입으면 못 드십니다.”접시에는 꿀빵이 놓여 있었다. 표면의 소금이 아침 볕을 받아 희게 보였다. 로잘린이 의자를 당기자 페트라가 수프 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광장에 나눌 빵은 옮겼어요. 이건 마님 몫이고요.”“먼저 먹어도 돼?”“마님이 드실 것을 먼저 빼 뒀어요.”페트라가 빵을 갈랐다. 로잘린은 수프를 먹은 뒤 빵 조각으로 접시의 꿀을 훑었다. 게르다는 빈 그릇을 확인하고서야 혼례 옷을 들었다.옷에는 금실도 보석도 없었다. 밝은 천의 소매 끝에 작은 바느질이 이어져 있었다. 로잘린이 팔을 넣자 페트라가 등 뒤를 여몄다.게르다는 어깨의 접힌 곳을 펴고 소매를 내려 주었다.“손을 뻗어 보세요.”로잘린은 책상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지 않았다.“펜을 잡아도 되겠어요.”“오늘도 잡으실 겁니까?”“날짜는 적어야죠.”게르다는 대답 대신 마지막 매듭을 고쳐 묶었다. 페트라가 머리를 빗어 하나로 모았다. 평소보다 천천히 빗살이 내려왔다.문밖에서 소냐가 물었다.“들어가도 돼요? 준비 다 됐어요? 관도 여기 있어요?”“들어와.”소냐는 문을 열자마자 말을 멈췄다. 로잘린의 옷을 보고, 머리를 보고, 다시 옷을 보았다.“언니가 계단을 내려오면 제가 먼저 광장에 알려도 돼요?”“뭐라고?”“우리 왕비가 나온다고요.”게
「왕비의 혼례를 앞두고 백성은 소금 한 줌씩을 광장에 모은다. 가져온 이의 이름과 소금의 양은 묻지 않는다.」복도 끝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베크는 금고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열쇠를, 다른 손에는 금고 장부를 들고 있었다. 로잘린이 문턱에 서자 베크가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왕비 전하, 돈이 생겼습니다.”한 번 더 말하는 목소리는 처음보다 낮았다.로잘린은 안으로 들어가 장부를 받았다. 마지막 줄에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베크의 글씨였다. 숫자 옆에 확인한 표시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베크의 손이었고 하나는 마티아스의 손이었다.“세어 보셨어요?”“세 번 셌습니다.”“세 번 다 맞았고요?”“예.”베크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돈이 없다고 말한 날을 셀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전하께서는 알겠다고만 하셨지요.”마티아스가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셈은 왕비가 했습니다.”“제가 적었습니다.”로잘린은 장부를 베크에게 돌려주었다.“그럼 둘이 맞춘 거네요. 적은 사람이 없으면 셈도 없어요.”베크는 장부를 받아 금고 위에 놓고, 열쇠를 돌려 문을 잠갔다. 손이 조금 느렸다. 다 잠근 뒤에야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내일부터는 이 숫자로 시작하겠습니다.”“예. 내일 아침에 다시 봐요.”로잘린은 서재를 나오면서 마티아스를 보았다. 마티아스는 베크가 금고 열쇠를 품에 넣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 주었다.«▼»씨앗달 25일 아침, 로잘린은 금고 기록을 덮고 창가로 갔다. 그날부터 아침마다 확인한 장부 끝에는 오늘도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확인을 마친 기록은 서재로 돌려보내면 되었다.그런데 창밖에서 천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광장 가운데에 넓은 천이 깔려 있었다. 게르다가 모서리를 잡고, 궁 하인들이 접힌 곳을 펴고 있었다. 천을 다 펼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작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로잘린은 창을 열었다.소금이 그릇에서 쏟아졌다. 흰 알갱이가 천 위에 작은 무더기를 만들었다.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어디에 둘까요, 마님?”“조약 사본 옆에.”“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아니. 오늘 읽을게.”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삼국 협정 서문. 두 둑이 같이 젖는다. 두 나라는 서로의 백성이 먹고 살아갈 길을 함께 지킨다.」로잘린은 접어 둔 헨리크의 서한을 협정문 아래에 넣었다.바람달 15일의 강바람이 종이 모서리를 들었다. 마티아스가 탁자 끝을 눌러 주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찬 바람이 닿았다.“그 편지도 가져왔습니까?”“부탁받은 답을 해야 하니까요.”탁자는 하론 강 돌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올덴 쪽에서 오는 수레가 잠시 멈췄고, 라우덴 쪽에서는 소금 자루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지나갈 길은 가운데에 남겨 두었다.로잘린은 다리 난간의 돌을 보았다. 처음 이곳을 건넜을 때 손끝으로 더듬었던 글이 그대로 있었다.이번에는 그 글을 읽을 사람들이 돌 앞에 함께 섰다.헨리크가 외투의 여밈을 고치며 다가왔다. 흰 수염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따라온 서기는 문서함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보내 준 초안을 읽었소.”“고칠 곳이 있었나요?”“세입이 줄어드는 줄부터 다시 보았소. 통행세까지 없애면 당장은 받는 돈이 줄겠더군.”헨리크가 협정문 위에 손을 얹었다.“대신 떠났던 상인이 돌아와야 그 다음 장부가 채워지겠지.”“돌아올 이유를 오늘 적으려 해요.”“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읽지 않도록 해 주시오.”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스는 토렌 쪽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힐데는 구리 값이 적힌 장을 확인했고, 스벤은 소금과 대구의 약정이 붙은 끝장을 잡았다. 베크가 각 문서의 순서를 맞추어 탁자에 놓았다.헨리크가 난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저 글의 뜻도 오늘 듣게 되는 것이오?”“예.”로잘린은 협정문을 잠시 내려놓았다.«▼»돌에 새긴 글은 가운데가 조금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홈에 낀 먼지를 손수건 끝으로 걷어 냈다.헨리크가 곁에 서고 마티아스가 바람이 오는 쪽을 막았다. 힐데와 사스도 돌 앞까지 다가왔다.“리타어입니다.”로잘린이 글을 따라 손을 옮겼다.“두 둑이 같이 젖는다.”스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이 양쪽
「올덴 귀족회의 결의문. 라이너의 왕위를 거두고 헨리크 공을 왕으로 세운다. 앞서 나라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은 새 왕이 이어 지킨다.」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았다.사스는 빈 서명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다리에서 가져온 회담 문서를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귀족회의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릅니다.”“왕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남습니까?”“그것부터 글로 확인하겠습니다.”로잘린은 초안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서명할 사람을 짐작해서 적지는 않을 거예요. 답이 오면 완성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사스는 그제야 펜을 놓았다.«▼»바람달 1일, 덮어 두었던 초안 위로 올덴 왕실 인장이 찍힌 서한이 놓였다.게르다가 가져온 쟁반에는 서한과 얇은 문서 묶음이 함께 있었다. 끈 끝에 길에서 묻은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풀기 전에 인장부터 확인했다. 왕실 문양이었다. 추수달에 받았던 폐위 문서의 인장과는 달랐다.“회의실로 가져갈까요?”게르다가 물었다.“여기서 먼저 볼게요.”게르다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로잘린이 봉인을 열자 접힌 종이 사이에서 결의문이 나왔다. 아래쪽에는 귀족회의의 확인을 마쳤다는 글과 서명이 이어져 있었다.왕위를 거둔다는 문장에 라이너의 이름이 있었다.로잘린은 종이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조금 옮겼다. 파렌 성에서 왕의 이름을 적을 때는 늘 빈칸이 모자랐다. 라이너가 원한 수식어를 넣고 나면 세금과 곡물에 관한 문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곤 했다.이 문서의 이름 앞에는 긴 말이 붙지 않았다.“왕비 전하?”“재상께 알려 주세요. 올덴에서 답이 왔어요.”“전하께도요?”“예.”게르다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로잘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포셰의 재산 가운데 관세소 장부와 대조해 확인한 몫을 국고로 돌린다는 결정이 있었다.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재산은 따로 적어 두었다.해마다 2만 피른이 빠져나간 줄을 찾는 데 쓰였던 아버지의 글씨가 떠올랐다. 이제 올덴의 서
「삼국 협정 초안 1조. 올덴의 밀 1자루와 라우덴의 소금 3자루를 서로의 장부에 올려 직접 교환한다.」마티아스가 세워 주었던 외투 깃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로잘린은 회의실 문 옆에 외투를 걸고 깃을 폈다. 안주머니에서 가죽 덮개를 꺼내자 다리에서 받아 온 문서가 함께 나왔다. 바람달 15일에 다시 만나겠다는 글 아래로 두 왕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오늘 탁자에 놓을 것은 그 약속이 아니라, 약속한 날 읽을 초안이었다.얼음달 10일 아침의 회의실에는 젖은 장화 냄새가 났다. 린드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스벤은 창에서 먼 자리를 골랐다. 산악 외투를 벗은 힐데는 구리 거래 장부를 펼쳤다.다시 멜리네에 온 사스는 탁자 가장자리의 잉크 자국부터 살폈다.“이번에는 저울이 없군요.”“운반 장부를 가져오셨으니까요.”로잘린이 초안을 나누어 주었다.“무게를 다시 확인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사스가 좋은 외투의 소매를 걷었다. 장부를 내려놓는 손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베크는 초안을 읽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관세를 양쪽 모두 3퍼센트로 낮추는 겁니까?”“예.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가 각각 3퍼센트를 받습니다.”“하론 강 통행세도 없애고요?”“그 조항은 그 아래에 있어요.”베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전하, 돈이 없습니다.”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앉아 있었다. 베크가 내민 조항을 읽은 뒤 종이를 다시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빠질 돈부터 적으십시오.”베크는 빈 종이를 당겼다. 로잘린이 그 옆에 항구 세입 장부를 폈다.“들어올 돈도 그 종이에 적어 주세요.”“배가 더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지난 장부를 가져왔어요. 토렌 배가 한 달에 6척 들어왔을 때와 11척 들어왔을 때예요.”베크는 장부의 표시된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배가 늘어도 관세를 낮추면 남는 돈이 줄 수 있습니다.”“맞아요. 배마다 싣는 물건도 다르고요. 그래서 척수만 곱하지 않았습니다.”로잘린은 밀과 소금이 적힌 줄만 골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