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려진 왕비는 적국의 왕에게 시집갑니다: Chapter 1 - Chapter 10

40 Chapters

1화. 폐위 선고

「왕비 로잘린 카렌츠를 후사 없음의 사유로 폐위한다.」“왕비의 자리를 거두겠다.”라이너의 말이 끝나자 포셰가 문서를 펼쳤다. 종이 아랫단의 붉은 인장이 먼저 보였다.로잘린은 왕좌 아래에 서 있었다. 아침부터 장부를 보느라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대회의실로 오라는 전갈에는 장부를 두고 오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왕좌 오른편에는 마들렌이 서 있었다. 재무대신의 딸이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붉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이 희었다.로잘린이 회의실에 들어올 때까지 그곳에는 왕비의 의자가 있었다.지금은 없었다.“전하의 뜻에 따라 문서를 읽겠습니다.”포셰가 장갑 낀 손으로 종이를 바로잡았다. 반지에 박힌 돌이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았다.폐위 사유는 짧았다. 혼인한 뒤 후사가 없었고, 왕실의 앞날을 위해 왕비의 자리를 비운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에는 왕의 은혜로 신변과 거처를 보장한다는 말이 길게 붙었다.로잘린은 포셰가 읽는 동안 라이너를 보았다.라이너는 왕좌 팔걸이에 손을 놓고 있었다. 손가락이 금박 무늬를 따라 움직였다. 로잘린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멈췄다.“내 생각엔, 이 편이 서로에게 낫겠어.”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네가 궁에서 얼마나 애쓴 줄은 알아. 하지만 왕실에는 왕실의 사정이 있고, 귀족들도 더는 기다리기 어렵다는 뜻을 전해 왔으니…….”말끝이 흐려졌다. 라이너가 포셰를 보았다.포셰는 기다렸다는 듯 다음 줄을 읽었다.“폐위된 로잘린 카렌츠는 멜리네 조약에 따른 평화의 보증으로 라우덴에 머문다.”회의실 한쪽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로잘린은 포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문서를 주시겠어요.”포셰의 낭독이 멎었다.“아직 읽을 부분이 남았습니다.”“끝까지 읽겠습니다.”포셰는 라이너를 보았다. 라이너가 턱을 조금 움직였다. 그제야 문서가 로잘린의 손에 놓였다.종이는 두꺼웠다. 잉크도 새로웠다. 접힌 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 고쳐 쓴 문서의 마지막 장이었다.로잘린은 첫 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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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볼모의 마차

「멜리네 조약 2조. 올덴은 평화의 보증으로 왕족 한 사람을 라우덴 궁에 머물게 한다. 기한은 5년. 라우덴은 그 사람을 정중히 대우한다.」상자의 걸쇠는 새벽에도 잘 닫혀 있었다.페트라가 양손으로 뚜껑을 눌러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은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들었다. 폐위 문서와 조약 원문이 든 가방이었다.“장부는 제가 꺼내 둘까요?”“마차에 실은 뒤에. 지금은 손이 모자라.”페트라는 자신의 보따리를 어깨에 걸쳤다. 방문을 나서기 전,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왕실 무역 장부는 어젯밤 덮은 그대로였다. 확인을 마친 곳에 끼워 둔 끈이 책상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래에는 미처 계산하지 못한 메모가 남아 있었다. 종이 끝이 들리지 않게 장부를 조금 밀었다.“가자.”복도에는 이른 아침의 찬 공기가 고여 있었다. 페트라가 앞서 문을 열었다. 로잘린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뒷계단으로 향했다.«▼»성 뒷문에 마차가 서 있었다.말이 돌바닥을 발굽으로 긁었다. 마차꾼은 짐받이에 깔린 천을 펴고 있었고, 올덴 호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의 안장을 살폈다.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클라라 한 사람이었다.어머니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작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로잘린이 가까이 가자 꾸러미를 페트라에게 건넸다.“길에서 먹어라. 마차가 멈출 때까지 기다리면 끼니를 놓친다.”페트라가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클라라는 딸의 외투 깃을 바로잡았다. 오른쪽이 접혀 있었다. 손끝으로 펴도 잘 눕지 않자 접힌 선을 따라 한 번 더 눌렀다.“목은 가려야겠구나.”“잘 여밀게요.”“바닷바람은 여기 바람과 다르다더라.”“도착하면 편지할게요.”어머니의 손이 외투에서 내려왔다. 로잘린은 그 손을 잡았다. 새벽 공기 탓인지 손끝이 차가웠다.클라라는 잠시 딸의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가운데 손가락의 잉크 자국은 씻고 나와도 남아 있었다.“토렌 말도 잊지 않았겠지.”“어머니가 오실 때마다 쓰는데요.”“내가 자주 왔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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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론 강 다리

「멜리네 조약 1조. 두 나라는 하론 강을 경계로 하고, 서로 군대를 강 건너로 보내지 않는다.」페트라는 로잘린이 웃음을 거둔 뒤에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무슨 말인데요?”“그럼 짜겠다고 했어.”“뭐가요?”“소금을 그렇게 많이 먹는 사람들이라면.”페트라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조금 뒤에는 빵을 집어 로잘린의 접시에 놓았다.“마님도 얼른 드세요. 수프가 식겠어요.”로잘린은 빵을 수프에 적셨다. 페트라도 숟가락을 들었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지만, 페트라는 더는 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잠들기 전에는 외투 안쪽의 끈을 마저 꿰맸다. 로잘린이 입어 보자 페트라는 새로 단 끈을 잡아당겼다.“이제 안 풀려요.”로잘린은 그 끈을 여민 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남쪽으로 갔다.«▼»하론 강에 닿았을 때 마차꾼은 말을 천천히 몰았다.추수달 23일이었다. 창밖으로 돌다리의 난간이 보였다. 낮은 밭만 이어지던 길이 끝나고, 바퀴 아래에서 돌을 밟는 소리가 났다.로잘린은 창을 조금 열었다.강물이 다리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어릴 때 관세소 창에서 보던 물빛보다 짙었다. 다리 기둥 가까이에서는 물결이 갈라졌다가 다시 모였다.페트라가 옆으로 붙어 창밖을 보았다.“여기가 국경이에요?”“다리 가운데부터.”“저쪽 사람들이 라우덴 호위인가 봐요.”다리 반대편에 말과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앞서 받은 서한대로 호위는 넷이었다. 그 뒤에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외투를 입은 남자가 말을 타고 있었다.로잘린은 가방의 잠금쇠를 확인했다. 폐위 문서와 조약 원문은 안에 있었다. 가죽 장부는 천에 싸서 발치에 놓아두었다.올덴 호위 하나가 마차 옆으로 말을 붙였다.“여기서 잠시 멈춥니다.”마차꾼이 고삐를 당겼다. 바퀴가 멎자 강물 소리가 더 또렷해졌다.“말을 갈아야 하나요?”로잘린이 묻자 마차꾼이 뒤를 돌아보았다.“말은 그대로 갑니다. 저도 멜리네까지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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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바닷바위 궁

「올덴이 보낸 분을 라우덴은 왕비로 맞는다. 조약 2조와 9조를 라우덴이 먼저 지킨다.」로잘린은 마차 발판에 올리려던 발을 내려놓았다.“왕비라고 하셨나요?”“그렇습니다.”마티아스는 고삐를 쥔 채 기다렸다. 뒤에 선 베크가 입을 열려다 말았다. 페트라는 마차 문 안쪽을 붙잡고 있었다.“조약에는 궁에 머물게 한다고만 적혀 있어요.”“혼인은 따로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제가 거절하면요?”“궁에 머무실 곳을 마련하겠습니다. 시녀도 곁에 두실 수 있습니다.”로잘린은 손잡이의 가죽이 접힌 자리를 엄지로 폈다.“그러면 지금 답을 드릴 필요는 없겠네요.”“멜리네에 닿기 전에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생각해 보겠어요. 제게도 물을 것이 있습니다.”“듣겠습니다.”“지금은 길부터 가죠. 말이 기다리고 있어요.”마티아스의 말이 앞발로 돌을 긁었다. 마티아스는 고삐를 짧게 고쳐 쥐고 옆으로 비켰다. 로잘린은 발판을 밟았다.페트라가 안에서 가방을 받아 주었다. 자리에 앉자 천에 싼 장부가 무릎 옆에 닿았다.“마님.”페트라가 낮게 불렀다.“나도 들었어.”로잘린은 마차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 창 너머에서 마티아스가 말에 올랐다. 베크는 한동안 다리 가운데에 서 있다가 뒤따랐다.마차가 움직였다. 페트라의 무릎에 놓인 사과가 천 위에서 굴렀다. 로잘린이 손을 뻗어 사과를 잡아 주었다.“먼저 먹어. 오래 들고 있으면 손에 물이 묻어.”페트라는 사과를 받았지만 바로 베어 물지는 않았다.«▼»추수달 26일, 마차 창으로 짠 냄새가 들어왔다.로잘린은 창을 열다 손을 멈췄다. 길가에 길쭉한 창고가 이어졌다. 열린 문 안에는 흰 가루가 묻은 자루들이 쌓여 있었다. 일꾼이 자루를 어깨에 메자 옷깃에도 가루가 내려앉았다.창고 지붕 너머로 돛대가 보였다.“바다예요?”페트라가 고개를 내밀었다.“조금 더 가면 보이겠어.”길이 굽자 낮은 지붕들 사이로 물빛이 드러났다. 강과 달리 맞은편 둑이 없었다. 배가 줄지어 묶여 있었고, 물가에서는 그물을 펼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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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기의 글씨

「멜리네 조약 3조. 두 나라 사이 곡물과 소금의 관세는 수출하는 나라 5퍼센트, 수입하는 나라 8퍼센트를 넘지 않는다.」마티아스는 문손잡이를 잡은 로잘린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하십시오. 아침에 서재에서 기다리겠습니다.”“조약 원문을 가져가도 되나요?”“제 것도 있습니다. 편하신 쪽으로 하십시오.”마티아스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로잘린은 복도를 돌아 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진 뒤 문을 닫았다.페트라가 빈 그릇을 포개 놓으며 물었다.“뭐라고 하셨어요?”“이유를 듣고 조건을 정하겠다고.”로잘린은 책상으로 돌아왔다. 펼쳐 둔 조약에서 혼인 조항을 다시 찾았다. 두 나라는 혼인으로 평화를 굳히는 데 힘쓴다. 혼인할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로잘린은 그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 물을 말을 쓰려다가 펜을 잉크병에 돌려놓았다.내일은 먼저 들어야 했다.«▼»추수달 27일 아침, 로잘린은 조약 원문과 폐위 문서를 포개 들고 서쪽 복도를 걸었다.서재 문은 열려 있었다. 마티아스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어제의 외투는 의자 등에 걸려 있었고, 셔츠 소매는 손목 위로 걷혀 있었다.로잘린이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자 마티아스가 돌아보았다.“들어오십시오.”책상 맞은편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어제 광장에서 읽은 선언문이 있었다. 로잘린은 자리에 앉기 전에 문서를 들었다.왕비로 맞는다는 문장 아래에 마티아스의 서명이 있었다.“보내 주신다고 하셨죠.”“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칠 곳 있습니까.”“읽고 말씀드릴게요.”로잘린은 선언문을 끝까지 읽었다. 볼모를 뜻하는 말도, 혼인이 끝날 조건도 없었다. 문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의자를 당겼다.마티아스는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 한쪽에 밀어 둔 종이들은 모서리가 맞지 않았다. 그 위에는 잉크병을 누른 흔적이 둥글게 남아 있었다.“어디부터 들으시겠습니까?”“전하께서 말씀하고 싶은 곳부터요. 제가 생각한 답에 맞추실 필요는 없어요.”마티아스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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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소금 창틀

「멜리네 조약 6조. 두 나라 상인은 상대 나라 항구와 시장에서 그 나라 상인과 같은 세를 낸다.」열쇠는 손바닥 안에 들어왔지만 손가락을 오므려도 끝이 조금 남았다.로잘린은 검게 묻은 부분을 엄지로 문지르지 않고 뒤집어 보았다. 금고를 열기 전에 보아야 할 장부가 있었다.“열쇠는 받겠습니다. 장부는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나요?”“재상에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처음 받은 기록도 함께요.”“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마티아스는 조건을 적은 종이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장부 열람 아래에 로잘린의 이름으로 기록을 남긴다는 문장이 있었다.“혼인 문서는 이 조건을 넣어 다시 쓰겠습니다. 내일 읽어 보시고 서명하십시오.”“읽다가 고칠 곳이 나오면요?”“고친 뒤 서명하시면 됩니다.”로잘린은 열쇠를 가져온 문서 위에 놓았다. 서류를 포갤 때 금속이 종이를 긁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받쳤다.마티아스가 자리에서 비켜 주었다. 문까지 함께 걸었지만 문턱을 넘지는 않았다.“왕비.”로잘린이 돌아보았다.“내일 소금도 준비됩니다.”“얼마나 먹어야 하나요?”“조금이면 됩니다.”“풍습은 제가 잘 몰라요.”“저를 보시고 하시면 됩니다. 저도 많이 먹지는 않습니다.”로잘린은 잠깐 마티아스의 얼굴을 보았다. 웃음을 기다리는 얼굴은 아니었다.“알겠습니다. 소금부터 따라 하죠.”«▼»추수달 28일, 로잘린은 서재의 그 의자에 앉았다.책상 위에는 새로 쓴 혼인 문서와 작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접시의 소금은 흰 가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갱이 몇 개가 펜촉 끝처럼 날카로웠다.베크는 책상 옆에 서 있었다. 게르다는 접시를 내려놓은 뒤 문 가까이 물러났다. 둘 다 로잘린이 문서를 읽는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로잘린 카렌츠를 라우덴의 왕비로 맞는다.」로잘린은 첫 줄부터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조약의 보증인으로 머무는 기한은 5년이었다. 그 뒤에는 원하면 떠날 수 있고, 혼인을 이유로 그 선택을 막지 않는다는 문장이 따로 적혀 있었다.“이 줄은 두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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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장부방 열쇠

「멜리네 조약 10조. 이 조약은 리타어로 적은 원문이 기준이다. 번역이 다르면 원문을 따른다.」물병을 든 하인이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병 주둥이가 빈 잔 위에서 멈췄다.로잘린은 내려놓았던 빵을 다시 집었다.“물은 충분해요.”라우덴어로 한 말에 하인이 물병을 거두었다. 쟁반을 든 사람도 식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로잘린은 빵을 수프에 적셨다. 식기 전에 먹으려면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부인께서 저희 말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물병을 든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이제 알았으니 일하기 편하겠네요.”로잘린은 접시 곁으로 밀려난 숟가락을 바로 놓았다.“제가 못 알아들은 말이 있으면 다시 물을게요.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세요.”“예, 부인.”쟁반을 든 하인이 먼저 대답했다. 두 사람이 물러나자 페트라가 로잘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무슨 말을 했어요?”“빵 이야기를 했어.”“그런데 왜 저렇게 서 있었대요?”“내가 알아듣는 줄 몰랐나 봐.”페트라는 하인들이 나간 문을 보았다. 로잘린은 남은 빵을 나누어 페트라의 접시 가장자리에 놓았다.“식기 전에 먹어.”페트라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문밖에서는 누군가 급히 걸어가는 소리가 났다. 잠깐 뒤, 다른 사람의 발소리도 그쪽으로 따라갔다.«▼»서리달 3일 아침, 게르다는 로잘린의 방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대답이 난 뒤에 들어왔다.팔에는 깨끗한 천을 얹고 있었다. 게르다는 책상 옆 작은 상에 천을 내려놓은 다음, 로잘린이 읽던 종이를 접을 때까지 기다렸다.“왕비 전하, 아래층으로 가실 준비가 되셨습니까.”로잘린은 종이 모서리에 두었던 손을 멈췄다.게르다는 말을 고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빈 물잔을 가져갈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장부가 준비됐나요?”“재상께서 복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곧 내려갈게요.”로잘린은 혼인 문서를 서랍에 넣었다. 그 옆에 금고 열쇠가 놓여 있었다. 오늘 필요한 것은 금고 안의 은화보다 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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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소금의 길

「멜리네 조약 3조. 두 나라 사이 곡물과 소금의 관세는 수출하는 나라 5퍼센트, 수입하는 나라 8퍼센트를 넘지 않는다.」로잘린은 마지막 줄의 잉크가 마를 때까지 장부를 덮지 않았다.소금이 나간 기록과 돈이 들어온 기록을 따로 적은 종이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묶음 이름은 찾았다. 이제 한 물건이 어느 장부에서 다른 이름으로 적혔는지 확인할 차례였다.목도리를 여민 뒤 항구 세입 묶음을 당겼다. 첫 장의 소금 항목에는 돈보다 짧은 획이 많았다.다음 날에는 염전 출고 기록을 가져왔다. 베크가 알려 준 묶음 가운데 소금 자루 수가 가장 자세히 적힌 묶음이었다. 로잘린은 장부를 바꿔 펼칠 때마다 겉장 이름을 종이에 옮겼다.서리달 5일, 높은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책상 끝에 닿았을 때에도 그 묶음이 펼쳐져 있었다.페트라가 식은 물잔을 가져가며 물었다.“아직 못 찾으셨어요?”“찾았어. 그런데 이쪽에선 소금이고, 저쪽에선 배에 싣는 물건이야.”로잘린은 종이를 나란히 밀어 놓았다.“날짜도 배도 같아. 자루 수도 같고.”페트라는 양쪽 줄을 번갈아 보았다.“왜 이름이 달라요?”“그걸 물어봐야 해.”염전 장부에는 물건을 산 사람이 적혀 있었다. 멜리네 상인 길드장 오스카 린드였다. 항구 장부에서는 토렌 배 이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로잘린은 그 사이에 낀 영수증을 펼쳤다. 종이 끝에 린드의 이름이 있었다. 물건을 넘겨받은 쪽은 토렌 상인이었다.“이름을 못 읽게 쓴 것도 아닌데요.”페트라가 말했다.“따로 놓으면 이어 읽기 어려워. 여기서는 린드가 산 것으로 끝나고, 저기서는 토렌 배가 실은 것으로 시작하니까.”로잘린은 염전 장부를 접지 않고 페트라 쪽으로 조금 돌렸다.「소금 1자루, 1.5세르.」“자루 값은 여기에 있어. 항구에서 이 소금에 걷은 세금은 거의 없고.”“소금이면 세금을 안 내나요?”“내야 해. 조약에도 적혀 있어.”로잘린은 멜리네 조약 사본을 꺼냈다. 곡물과 소금이라는 낱말 아래로 손가락을 옮겼다.배에 싣는 물건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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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공란 한 줄

「멜리네 조약 7조. 한 나라가 흉년이면 다른 나라는 곡물 수출을 막지 않는다. 다만 자기 백성이 먹을 양은 뺀다.」마티아스가 린드에게 내밀었던 빈 종이 자리를 보았다.“계산한 것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받은 값만 적어 오면 안 돼요. 낸 돈의 기록도 있어야 해요.”“그렇게 전하겠습니다.”로잘린은 영수증을 날짜순으로 모았다. 린드의 장부를 받기 전에는 빈칸을 채울 수 없었다. 확인하지 못한 줄 옆에는 짧은 획만 그었다.자리에서 일어나자 어깨에 걸친 외투가 내려왔다. 로잘린은 떨어지기 전에 받아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목도리는 그 아래에서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외투 덕분에 끝까지 읽었어요.”마티아스는 외투를 집지 않고 먼저 문을 열었다.“남은 것은 내일 보십시오.”“린드의 기록이 오면요.”“그 기록은 아직 없습니다.”로잘린은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더 넘긴다고 생길 기록은 아니었다.“그럼 다른 장부부터 보겠어요.”마티아스는 문밖의 하인에게 불을 밝혀 달라고 했다. 로잘린은 목도리를 바로 여미고 서재를 나왔다.«▼»서리달 8일, 장부방 문 앞에 곡물 장부가 놓여 있었다.묶음을 받친 나무판까지 차가웠다. 로잘린은 책상에 옮긴 뒤 천으로 겉장을 닦았다. 바닥에 놓인 쪽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페트라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재상께서 두고 가셨대요. 읽고 계시면 오시겠다고요.”“린드에게서 온 것은?”“아직 없어요.”로잘린은 소금 기록을 옆으로 밀었다. 그 위에는 린드에게 확인할 항목을 적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종이를 치우지 않고 곡물 장부를 펼쳤다.보리 창고에서 보낸 기록이 먼저 나왔다. 창고별로 거둬들인 양을 적고, 맨 아래에는 지난해 수확과 비교한 줄이 있었다.올해 수확은 평년의 절반이었다.로잘린은 다른 창고의 기록을 찾아 나란히 놓았다. 어느 한곳에서 덜 거둔 것이 아니었다.“보리는 여기서도 나는 거죠?”페트라가 빈 물잔을 가져가며 물었다.“응. 그런데 올해는 이것만으로 겨울을 날 수 없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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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열한 세르

「멜리네 조약 6조. 두 나라 상인은 상대 나라 항구와 시장에서 그 나라 상인과 같은 세를 낸다.」항구로 내려가는 돌계단 끝에 물이 고여 있었다.로잘린은 치맛단을 조금 들어 물을 피했다. 배에서 내려온 밧줄이 길을 가로막자 페트라가 먼저 발로 밀어 놓았다. 젖은 줄에서 바닷물이 떨어졌다.사스의 배에서는 아직 돛을 거두고 있었다. 짐을 받을 사람들은 창고 문을 열고, 배에서 내려 줄 자루 수를 서로 확인했다.베크가 부두 끝에서 손을 들었다.“부인, 이쪽입니다.”로잘린은 말아 온 견적서를 폈다.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뼈 자로 아래쪽을 눌렀다.“사스는 어디에 있나요?”“배 안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역이 끝난 뒤 만나겠다고 합니다.”“짐을 받기 전에 값을 물을 수는 없나요?”“왕비께서 오셨다고 전했습니다.”베크는 배 쪽을 보았다. 좋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난간 안쪽에 서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도 내려올 채비는 하지 않았다.로잘린은 견적서에 적힌 밀의 값 옆에 짧게 표시했다.“그럼 만날 날짜를 받아 주세요. 받은 물건과 받은 서류를 함께 보겠어요.”베크가 고개를 끄덕였다.배에서 첫 자루가 내려왔다. 일꾼이 어깨에 받아 창고로 옮겼다. 로잘린은 자루가 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보았다가 견적서를 다시 말았다.«▼»서리달 10일, 창고 앞에는 빈 나무 상자가 책상 대신 놓여 있었다.상자 위에 사스의 장부와 매입 증서가 펼쳐졌다. 로잘린이 요청한 기록이었다. 베크가 먼저 도착해 서류 끝에 돌을 얹어 두고 있었다.“받은 수량은 견적과 같습니다.”“900자루죠?”“그렇습니다. 창고지기와 배에서 내린 사람이 함께 셌습니다.”로잘린은 목도리 끝을 외투 안으로 넣고 상자 앞에 섰다. 페트라는 종이와 깃펜을 꺼냈다. 뼈 자는 종이가 젖지 않은 자리까지 확인한 뒤 내려놓았다.사스가 배에서 걸어왔다.작은 눈이 베크에게 먼저 닿았다가 로잘린에게 옮겨 왔다. 외투 깃에는 바닷물이 튄 흔적이 없었다.“부인께서 밀값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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