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멜리네 조약 3조. 두 나라 사이 곡물과 소금의 관세는 수출하는 나라 5퍼센트, 수입하는 나라 8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마티아스는 문손잡이를 잡은 로잘린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침에 서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조약 원문을 가져가도 되나요?”
“제 것도 있습니다. 편하신 쪽으로 하십시오.”
마티아스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로잘린은 복도를 돌아 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진 뒤 문을 닫았다.
페트라가 빈 그릇을 포개 놓으며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이유를 듣고 조건을 정하겠다고.”
로잘린은 책상으로 돌아왔다. 펼쳐 둔 조약에서 혼인 조항을 다시 찾았다. 두 나라는 혼인으로 평화를 굳히는 데 힘쓴다. 혼인할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로잘린은 그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 물을 말을 쓰려다가 펜을 잉크병에 돌려놓았다.
내일은 먼저 들어야 했다.
«▼»
추수달 27일 아침, 로잘린은 조약 원문과 폐위 문서를 포개 들고 서쪽 복도를 걸었다.
서재 문은 열려 있었다. 마티아스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어제의 외투는 의자 등에 걸려 있었고, 셔츠 소매는 손목 위로 걷혀 있었다.
로잘린이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자 마티아스가 돌아보았다.
“들어오십시오.”
책상 맞은편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어제 광장에서 읽은 선언문이 있었다. 로잘린은 자리에 앉기 전에 문서를 들었다.
왕비로 맞는다는 문장 아래에 마티아스의 서명이 있었다.
“보내 주신다고 하셨죠.”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칠 곳 있습니까.”
“읽고 말씀드릴게요.”
로잘린은 선언문을 끝까지 읽었다. 볼모를 뜻하는 말도, 혼인이 끝날 조건도 없었다. 문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의자를 당겼다.
마티아스는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 한쪽에 밀어 둔 종이들은 모서리가 맞지 않았다. 그 위에는 잉크병을 누른 흔적이 둥글게 남아 있었다.
“어디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말씀하고 싶은 곳부터요. 제가 생각한 답에 맞추실 필요는 없어요.”
마티아스는 선언문 쪽으로 손을 옮겼다.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로잘린은 선언문의 아래쪽을 잡았다. 손끝에 종이의 거친 결이 닿았다.
“그 말은 알아들었어요.”
“왕비께서 올덴에서 출발하셨다는 서한을 받았습니다. 왕비를 폐위했고, 조약의 보증인으로 보낸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 문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요.”
로잘린은 가져온 폐위 문서를 내밀었다. 마티아스는 받지 않고 로잘린이 펼친 끝줄을 보았다.
“왕비 자리는 거두면서 조약에는 왕족으로 쓰겠다는 뜻입니다.”
“라이너 전하께서는 제 자리도 마련했다고 하셨죠.”
로잘린은 문서의 접힌 선을 손톱으로 눌렀다.
“궁에 머물 자리가 있으니 좋은 일이라고요.”
마티아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로잘린이 손을 떼자 선언문을 그 옆에 놓았다.
“라우덴이 그대로 받으면 올덴은 버린 사람을 보냈고, 라우덴은 받아 두었다는 것만 남습니다.”
“그래서 왕비로 맞으셨나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마티아스는 로잘린이 가져온 조약을 가리켰다. 로잘린이 펼쳐 주자 보증인 조항과 혼인 조항을 차례로 짚었다.
“올덴이 조약에 따라 왕족을 보냈다고 했으니, 라우덴도 조약에 따라 왕족을 맞습니다. 정중히 대우하고, 혼인으로 평화를 굳힙니다.”
“두 조항을 함께 쓰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혼인까지 요구하는 조항은 아니에요.”
“그래서 다리에서 왕비께 물었습니다.”
로잘린은 손가락을 혼인 조항 아래에 두었다. 광장에서 동의를 묻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대답이 끝날 때까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제가 거절했다면 선언문도 달라졌겠네요.”
“혼인 이야기는 빠졌을 겁니다. 궁에 모시는 일은 그대로였을 것이고요.”
“볼모로요?”
“조약의 보증인으로입니다. 왕비 자리를 거절하셨다고 대우를 낮출 이유는 없습니다.”
로잘린은 조약에서 손을 뗐다.
“올덴이 보낸 사람을 라우덴이 왕비로 대우하면, 올덴은 다른 나라의 왕비를 함부로 내보낸 셈이 되겠군요.”
“이제 올덴이 그 일을 설명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얻는 것은요?”
“라우덴이 모욕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막을 수 있습니다. 조약을 먼저 지킨 쪽이라는 기록도 남습니다.”
답은 짧았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은 없었다.
로잘린은 두 문서를 조금 벌려 놓았다. 한쪽에는 폐위가, 다른 쪽에는 왕비로 맞는다는 선언이 적혀 있었다.
“정치에 필요한 자리라는 뜻은 알겠습니다. 두 번째 이유를 들을게요.”
마티아스는 서재에 있던 조약 원문을 펼쳤다. 펼쳐진 곳은 관세 조항이었다.
“멜리네에서 협상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처음 제시된 수입 관세는 20퍼센트였습니다.”
“그대로 두면 곡물을 사 오는 쪽이 버틸 수 없었죠.”
로잘린은 대답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마티아스의 손이 조항 아래에 멈춰 있었다.
“그 숫자를 8퍼센트로 고쳐 쓴 분을 봤습니다.”
로잘린은 책상 아래에서 무릎을 조금 당겼다.
협상장의 긴 책상 끝에는 서기들이 앉아 있었다. 로잘린의 자리는 그 뒤였다. 초안을 건네받을 때마다 앞으로 몸을 숙여야 했고, 잉크병은 다른 사람의 팔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날 고쳐 쓴 숫자는 마른 뒤에도 번진 자국이 남았다.
“제가 썼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때부터요?”
“그때는 몰랐습니다. 올덴의 왕께 물었습니다. 관세를 고친 분이 누구인지.”
마티아스는 펼친 조약의 귀퉁이를 눌렀다.
“내 서기라고 하셨습니다.”
로잘린은 왼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 가운데 손가락의 잉크 자국은 아침에 씻은 뒤에도 남아 있었다.
라이너는 협상이 끝난 뒤 관세를 낮추느라 애썼다고 말했다. 로잘린에게는 잘 정리해 두라고 했었다. 왕의 말을 받아 적고, 바뀐 숫자를 다른 문서에도 옮기는 동안 축하 인사는 라이너의 자리로 갔다.
“서기가 왕비라는 말씀은 없으셨겠죠.”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마티아스가 폐위 문서 곁으로 손을 옮겼다.
“다리에서 그 문서를 받쳐 들었을 때, 끝줄 옆에 주석이 보였습니다.”
로잘린은 자기 문서의 끝줄을 보았다. 궁에 머무는 기한이 빠져 있어, 떠나기 전날 밤 여백에 적어 넣었던 줄이었다.
「기한은 5년. 대우는 조약 2조를 따른다.」
“그걸 보셨군요.”
“숫자와 글씨가 같았습니다. 협상장에서 8을 쓴 손이었습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로잘린은 주석 위에 손가락을 놓았다.
“글씨 하나로 사람을 정하셨나요?”
“글씨만은 아닙니다. 협상장에서 관세를 낮춰야 한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서기들 뒤에 앉아 있었어요.”
“하지만 말씀하실 때는 앞으로 나오셨습니다.”
로잘린은 고개를 들었다.
“기억하십니까. 관세를 낮춰도 배가 더 오면 세입을 지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을 사지 못하는 항구에서는 세금을 걷을 수도 없다고요.”
그 말 뒤에 라이너가 설명을 덧붙였었다. 로잘린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수정할 조항을 찾았다. 맞은편 사람들이 누구를 보고 있었는지는 살피지 못했다.
마티아스는 로잘린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 서기입니다.”
로잘린은 문서 위에 놓았던 손을 거뒀다. 종이의 귀퉁이가 조금 들렸다.
“지금은 서기가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왕비로 맞았습니다.”
“장부를 맡기기 위해서요?”
“그것도 두 번째 이유에 들어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라우덴은 가난합니다. 세입을 적는 사람도 있고, 지출을 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오가는 물건과 조약을 함께 보며 장부를 정리할 사람이 부족합니다.”
“베크 재상께서 계시잖아요.”
“재상은 항구와 귀족회의, 곡물 구입까지 맡고 있습니다. 제가 그 일을 더 얹을 수는 없습니다.”
“저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고요.”
“관세 조항을 고치셨을 때, 상대가 낼 수 있는 만큼을 먼저 보셨습니다. 라우덴에 필요한 일입니다.”
로잘린은 조약 원문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 일은 서기로 불러도 맡길 수 있어요.”
“올덴에서 왕비셨던 분을 서기로 쓰는 것이 정중한 대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티아스는 선언문을 접지 않은 채 두었다.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다만 그전에, 어떤 자리에서 청하는지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로잘린은 문서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받은 선언문에는 자신의 이름이 온전히 적혀 있었다.
«▼»
바람에 책상 끝의 종이가 흔들렸다.
마티아스가 일어나 창을 조금 닫았다. 그러다 창밖으로 시선을 내려 잠시 멈췄다.
로잘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보세요?”
“배를 셉니다.”
“지금요?”
“아침마다 셉니다. 오늘은 항구에서 먼저 보고 왔습니다.”
창 아래로 낮은 지붕과 창고가 이어졌다. 그 너머에 묶인 배들이 보였다. 로잘린은 창틀에 손을 얹지 않고 가까이 섰다.
“여기서는 창고에 가려진 것도 있겠어요.”
“예. 대신 항구에서 보기 어려운 쪽이 보입니다.”
마티아스는 손가락으로 물가의 한쪽 끝을 가리켰다. 로잘린은 그곳부터 눈으로 세었다. 겹쳐 선 돛대는 선체를 확인하고 넘어갔다.
“열넷.”
“맞습니다.”
로잘린은 더 먼 쪽을 보았다. 창고 끝에서 가느다란 돛대가 기울어져 있었다.
“저 끝에 하나 더 있어요.”
“저건 가라앉은 겁니다.”
로잘린은 가리키려던 손을 내렸다.
물 위에는 돛대와 선체 일부만 남아 있었다. 옆의 배가 물결을 따라 움직일 때도 그것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꺼낼 수 없나요?”
“수리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보고 있습니다.”
“장부에는 배로 남아 있겠네요.”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곡물을 실을 수는 없습니다.”
로잘린은 창고 앞에서 자루를 옮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장부의 배 수와 항구에서 쓸 수 있는 배 수는 달랐다.
“배를 세시는 이유가 있었네요.”
“제가 놓치는 것도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창에서 물러나 의자를 당겨 놓았다. 로잘린이 먼저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창가에 서 있던 동안 선언문 모서리가 다른 종이 밑으로 밀려 있었다.
로잘린은 그것을 꺼내 다시 가운데에 놓았다.
“혼인 조건도 들어야겠어요.”
«▼»
“서류에 서명하고, 라우덴 풍습에 따라 소금을 나누면 혼인이 성립합니다. 혼례와 대관은 지금 치르지 못합니다.”
마티아스가 말했다.
“돈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광장에서 이미 왕비로 맞으셨어요. 혼례를 미룬다고 그 말이 달라지지는 않겠죠.”
“달라지지 않습니다.”
로잘린은 선언문 아래를 다시 확인했다.
“조약의 기한은 5년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요?”
“원하시면 자유롭게 떠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혼인도 그 선택을 막는 데 쓰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문서에 넣어 주세요.”
“넣겠습니다.”
로잘린은 빈 종이를 찾아 앞에 놓았다. 이번에는 펜을 들었다. 기한과 떠날 권리를 적은 뒤, 펜 끝을 잠시 띄웠다.
“제가 맡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요?”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잘할 거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네요.”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거짓말이 됩니다.”
로잘린은 펜을 잉크병 가장자리에 가볍게 댔다. 묻은 잉크를 덜어 내고 다음 줄을 비워 두었다.
“한 가지 더 묻겠어요. 왜 제 이름을 안 부르십니까.”
마티아스는 바로 대답했다.
“허락받지 않았습니다.”
“왕비라는 호칭은 쓰시면서요.”
“그 자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따로 묻고 싶었습니다.”
로잘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문서에 쓰인 이름과 입으로 부르는 이름을 나누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라이너는 처음부터 편한 쪽을 골랐다. 귀족들 앞에서는 왕비, 부탁할 일이 있으면 이름이었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마티아스는 이유를 더 묻지 않았다. 로잘린은 빈 줄로 눈을 돌렸다.
“제 조건이 남았어요.”
“듣겠습니다.”
“장부를 전부 보여 주세요.”
“어느 장부부터 필요하십니까?”
“국고와 세입, 항구와 무역 장부요. 정리한 것만 말고, 처음 받은 기록도요.”
마티아스가 책상 한쪽의 종이를 보았다.
“읽기 어려운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적은 사람에게 묻겠어요. 빠진 줄이 있으면 왜 빠졌는지도요.”
“재상에게 말씀하겠습니다.”
“장부를 본 뒤에 할 수 있는 일부터 정하겠어요. 금고를 열어 보지도 않고 나라를 살리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요.”
마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은 빈 줄에 장부 열람을 적었다. 글씨가 마를 때까지 종이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고친 것은 제 이름으로 남겨 주세요. 잘못 고친 것도 마찬가지예요.”
마티아스는 로잘린이 적은 줄을 읽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잘린은 펜을 놓고 조건을 적은 종이를 앞으로 밀었다. 마티아스는 문구를 바꾸지 않았다. 종이 옆에 손을 놓고 끝까지 읽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안쪽 서랍이 열렸다.
마티아스는 작은 열쇠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손잡이 부분은 오래 만져 닳아 있었고, 끝에는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금고 열쇠입니다.”
로잘린은 열쇠를 보았다. 선언문보다 작고, 지금 가진 방 열쇠보다 무거워 보였다.
마티아스가 의자 뒤에 서서 말했다.
“금고에 1만 2천 세르. 올해 곡물 수입에 6만 세르가 듭니다. 시작하시겠습니까?”
로잘린은 조건을 적은 종이 옆으로 손을 뻗어 열쇠를 집었다.
(5화 끝)
「꽃달 1일, 왕과 왕비는 백성이 모은 소금 앞에서 혼례를 맺고 구리 관을 쓴다. 두 사람의 서약은 광장에 모인 이들이 듣는다.」마티아스는 문턱에 얹힌 로잘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을 조금 옮기자 잉크 자국 위로 엄지가 닿았다.“고칠 곳이 있었군요.”“예. 내일도 있으면 말씀드릴게요.”“듣겠습니다.”마티아스는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로잘린이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혼례 옷은 의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로잘린은 펜을 다시 들지 않고 등불을 낮췄다.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천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도 곧 그쳤다.«▼»아침에 게르다가 가져온 것은 수프와 작은 접시였다.“옷부터 입으면 못 드십니다.”접시에는 꿀빵이 놓여 있었다. 표면의 소금이 아침 볕을 받아 희게 보였다. 로잘린이 의자를 당기자 페트라가 수프 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광장에 나눌 빵은 옮겼어요. 이건 마님 몫이고요.”“먼저 먹어도 돼?”“마님이 드실 것을 먼저 빼 뒀어요.”페트라가 빵을 갈랐다. 로잘린은 수프를 먹은 뒤 빵 조각으로 접시의 꿀을 훑었다. 게르다는 빈 그릇을 확인하고서야 혼례 옷을 들었다.옷에는 금실도 보석도 없었다. 밝은 천의 소매 끝에 작은 바느질이 이어져 있었다. 로잘린이 팔을 넣자 페트라가 등 뒤를 여몄다.게르다는 어깨의 접힌 곳을 펴고 소매를 내려 주었다.“손을 뻗어 보세요.”로잘린은 책상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지 않았다.“펜을 잡아도 되겠어요.”“오늘도 잡으실 겁니까?”“날짜는 적어야죠.”게르다는 대답 대신 마지막 매듭을 고쳐 묶었다. 페트라가 머리를 빗어 하나로 모았다. 평소보다 천천히 빗살이 내려왔다.문밖에서 소냐가 물었다.“들어가도 돼요? 준비 다 됐어요? 관도 여기 있어요?”“들어와.”소냐는 문을 열자마자 말을 멈췄다. 로잘린의 옷을 보고, 머리를 보고, 다시 옷을 보았다.“언니가 계단을 내려오면 제가 먼저 광장에 알려도 돼요?”“뭐라고?”“우리 왕비가 나온다고요.”게
「왕비의 혼례를 앞두고 백성은 소금 한 줌씩을 광장에 모은다. 가져온 이의 이름과 소금의 양은 묻지 않는다.」복도 끝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베크는 금고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열쇠를, 다른 손에는 금고 장부를 들고 있었다. 로잘린이 문턱에 서자 베크가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왕비 전하, 돈이 생겼습니다.”한 번 더 말하는 목소리는 처음보다 낮았다.로잘린은 안으로 들어가 장부를 받았다. 마지막 줄에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베크의 글씨였다. 숫자 옆에 확인한 표시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베크의 손이었고 하나는 마티아스의 손이었다.“세어 보셨어요?”“세 번 셌습니다.”“세 번 다 맞았고요?”“예.”베크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돈이 없다고 말한 날을 셀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전하께서는 알겠다고만 하셨지요.”마티아스가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셈은 왕비가 했습니다.”“제가 적었습니다.”로잘린은 장부를 베크에게 돌려주었다.“그럼 둘이 맞춘 거네요. 적은 사람이 없으면 셈도 없어요.”베크는 장부를 받아 금고 위에 놓고, 열쇠를 돌려 문을 잠갔다. 손이 조금 느렸다. 다 잠근 뒤에야 지팡이를 찾아 들었다.“내일부터는 이 숫자로 시작하겠습니다.”“예. 내일 아침에 다시 봐요.”로잘린은 서재를 나오면서 마티아스를 보았다. 마티아스는 베크가 금고 열쇠를 품에 넣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 주었다.«▼»씨앗달 25일 아침, 로잘린은 금고 기록을 덮고 창가로 갔다. 그날부터 아침마다 확인한 장부 끝에는 오늘도 2만 세르가 적혀 있었다. 확인을 마친 기록은 서재로 돌려보내면 되었다.그런데 창밖에서 천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광장 가운데에 넓은 천이 깔려 있었다. 게르다가 모서리를 잡고, 궁 하인들이 접힌 곳을 펴고 있었다. 천을 다 펼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작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로잘린은 창을 열었다.소금이 그릇에서 쏟아졌다. 흰 알갱이가 천 위에 작은 무더기를 만들었다.
「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두 손으로 받은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다리에서 묶어 온 끈을 풀자 올덴 왕실 인장이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았다.바람달 20일이었다. 문서 끝에는 아직 다리 위에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쉽게 펴지지 않아 두꺼운 장부를 올려 두었다.페트라가 빈 문서함을 가져왔다.“어디에 둘까요, 마님?”“조약 사본 옆에.”“폐위 문서도 거기 있는데요.”“함께 두면 돼. 무엇을 바로잡았는지 알 수 있게.”페트라는 함 안의 종이를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재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문서 옆에 왕실 인장이 찍힌 문서가 놓였다. 로잘린은 두 문서의 모서리를 맞추고 뚜껑을 닫았다.책상 아래 서랍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서함을 꺼낼 때 안쪽에 둔 편지가 걸린 탓이었다.로잘린은 서랍을 당겼다.올덴 책봉 서한 아래로 얇은 봉투가 나왔다. 봉한 자리는 뜯기지 않았고, 겉면에는 로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페트라가 봉투를 보고 손을 멈췄다.“그 편지도 옮겨 둘까요?”“아니. 오늘 읽을게.”로잘린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 페트라는 창가로 가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바닷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은 닫아 둔 채였다.편지칼이 봉투의 윗부분을 갈랐다.안에 든 종이는 얇았다. 펼치자 접힌 곳을 따라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첫 줄 아래에는 잉크를 긁어 지운 자국이 있었다.「당신 자리를 원한 적 없다. 이 말을 먼저 적어도 되는지 오래 망설였습니다.」로잘린은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마들렌의 글씨는 책봉 서한의 글씨와 달랐다. 줄 끝으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졌고, 종이 아래에 남겨 둔 여백은 거의 없었다.「아버지는 왕의 곁에 있는 일이 우리 집안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왕께서 손을 내미셨을 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압니다.」
「삼국 협정 서문. 두 둑이 같이 젖는다. 두 나라는 서로의 백성이 먹고 살아갈 길을 함께 지킨다.」로잘린은 접어 둔 헨리크의 서한을 협정문 아래에 넣었다.바람달 15일의 강바람이 종이 모서리를 들었다. 마티아스가 탁자 끝을 눌러 주었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찬 바람이 닿았다.“그 편지도 가져왔습니까?”“부탁받은 답을 해야 하니까요.”탁자는 하론 강 돌다리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올덴 쪽에서 오는 수레가 잠시 멈췄고, 라우덴 쪽에서는 소금 자루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빈 수레가 지나갈 길은 가운데에 남겨 두었다.로잘린은 다리 난간의 돌을 보았다. 처음 이곳을 건넜을 때 손끝으로 더듬었던 글이 그대로 있었다.이번에는 그 글을 읽을 사람들이 돌 앞에 함께 섰다.헨리크가 외투의 여밈을 고치며 다가왔다. 흰 수염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뒤따라온 서기는 문서함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보내 준 초안을 읽었소.”“고칠 곳이 있었나요?”“세입이 줄어드는 줄부터 다시 보았소. 통행세까지 없애면 당장은 받는 돈이 줄겠더군.”헨리크가 협정문 위에 손을 얹었다.“대신 떠났던 상인이 돌아와야 그 다음 장부가 채워지겠지.”“돌아올 이유를 오늘 적으려 해요.”“그 이유를 서로 다르게 읽지 않도록 해 주시오.”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스는 토렌 쪽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힐데는 구리 값이 적힌 장을 확인했고, 스벤은 소금과 대구의 약정이 붙은 끝장을 잡았다. 베크가 각 문서의 순서를 맞추어 탁자에 놓았다.헨리크가 난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저 글의 뜻도 오늘 듣게 되는 것이오?”“예.”로잘린은 협정문을 잠시 내려놓았다.«▼»돌에 새긴 글은 가운데가 조금 닳아 있었다. 로잘린은 홈에 낀 먼지를 손수건 끝으로 걷어 냈다.헨리크가 곁에 서고 마티아스가 바람이 오는 쪽을 막았다. 힐데와 사스도 돌 앞까지 다가왔다.“리타어입니다.”로잘린이 글을 따라 손을 옮겼다.“두 둑이 같이 젖는다.”스벤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이 양쪽
「올덴 귀족회의 결의문. 라이너의 왕위를 거두고 헨리크 공을 왕으로 세운다. 앞서 나라의 이름으로 맺은 조약은 새 왕이 이어 지킨다.」로잘린이 펜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작은 잉크 자국이 남았다.사스는 빈 서명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다리에서 가져온 회담 문서를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귀족회의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릅니다.”“왕이 바뀌어도 이 약속이 남습니까?”“그것부터 글로 확인하겠습니다.”로잘린은 초안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서명할 사람을 짐작해서 적지는 않을 거예요. 답이 오면 완성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사스는 그제야 펜을 놓았다.«▼»바람달 1일, 덮어 두었던 초안 위로 올덴 왕실 인장이 찍힌 서한이 놓였다.게르다가 가져온 쟁반에는 서한과 얇은 문서 묶음이 함께 있었다. 끈 끝에 길에서 묻은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로잘린은 끈을 풀기 전에 인장부터 확인했다. 왕실 문양이었다. 추수달에 받았던 폐위 문서의 인장과는 달랐다.“회의실로 가져갈까요?”게르다가 물었다.“여기서 먼저 볼게요.”게르다는 문 옆에서 기다렸다. 로잘린이 봉인을 열자 접힌 종이 사이에서 결의문이 나왔다. 아래쪽에는 귀족회의의 확인을 마쳤다는 글과 서명이 이어져 있었다.왕위를 거둔다는 문장에 라이너의 이름이 있었다.로잘린은 종이 가장자리를 잡은 손을 조금 옮겼다. 파렌 성에서 왕의 이름을 적을 때는 늘 빈칸이 모자랐다. 라이너가 원한 수식어를 넣고 나면 세금과 곡물에 관한 문장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곤 했다.이 문서의 이름 앞에는 긴 말이 붙지 않았다.“왕비 전하?”“재상께 알려 주세요. 올덴에서 답이 왔어요.”“전하께도요?”“예.”게르다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로잘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포셰의 재산 가운데 관세소 장부와 대조해 확인한 몫을 국고로 돌린다는 결정이 있었다.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재산은 따로 적어 두었다.해마다 2만 피른이 빠져나간 줄을 찾는 데 쓰였던 아버지의 글씨가 떠올랐다. 이제 올덴의 서
「삼국 협정 초안 1조. 올덴의 밀 1자루와 라우덴의 소금 3자루를 서로의 장부에 올려 직접 교환한다.」마티아스가 세워 주었던 외투 깃에는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로잘린은 회의실 문 옆에 외투를 걸고 깃을 폈다. 안주머니에서 가죽 덮개를 꺼내자 다리에서 받아 온 문서가 함께 나왔다. 바람달 15일에 다시 만나겠다는 글 아래로 두 왕의 서명이 나란히 있었다.오늘 탁자에 놓을 것은 그 약속이 아니라, 약속한 날 읽을 초안이었다.얼음달 10일 아침의 회의실에는 젖은 장화 냄새가 났다. 린드는 문 가까이에 앉았고, 스벤은 창에서 먼 자리를 골랐다. 산악 외투를 벗은 힐데는 구리 거래 장부를 펼쳤다.다시 멜리네에 온 사스는 탁자 가장자리의 잉크 자국부터 살폈다.“이번에는 저울이 없군요.”“운반 장부를 가져오셨으니까요.”로잘린이 초안을 나누어 주었다.“무게를 다시 확인할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사스가 좋은 외투의 소매를 걷었다. 장부를 내려놓는 손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베크는 초안을 읽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관세를 양쪽 모두 3퍼센트로 낮추는 겁니까?”“예. 수출하는 나라와 수입하는 나라가 각각 3퍼센트를 받습니다.”“하론 강 통행세도 없애고요?”“그 조항은 그 아래에 있어요.”베크가 종이를 조금 내렸다.“전하, 돈이 없습니다.”마티아스는 로잘린 옆에 앉아 있었다. 베크가 내민 조항을 읽은 뒤 종이를 다시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빠질 돈부터 적으십시오.”베크는 빈 종이를 당겼다. 로잘린이 그 옆에 항구 세입 장부를 폈다.“들어올 돈도 그 종이에 적어 주세요.”“배가 더 들어온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지난 장부를 가져왔어요. 토렌 배가 한 달에 6척 들어왔을 때와 11척 들어왔을 때예요.”베크는 장부의 표시된 줄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배가 늘어도 관세를 낮추면 남는 돈이 줄 수 있습니다.”“맞아요. 배마다 싣는 물건도 다르고요. 그래서 척수만 곱하지 않았습니다.”로잘린은 밀과 소금이 적힌 줄만 골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