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화

작가: 레몬티
그날 밤, 영민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설은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라희의 SNS에는 주유연의 귀국 파티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K시 최대 규모 호텔을 통째로 빌리고 밤새 폭죽이 터졌다.

연회장 구석구석에는 그랜드 플로라 장미가 수북이 깔려 있었다.

영민의 친구들은 모두 모여 유연의 귀국을 축하했고, 웃음과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그건 지설이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 없는 세계였다.

영민은 지설을 그저 가사도우미 취급했고, 친구들에게 소개한 적도 결혼 사실을 공개한 적도 없었으니까.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장경은 여사가 보낸 이혼합의서가 도착했다.

지설은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고, 그 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장을 보러 나갔다.

이혼합의서에는 이혼이 성립되기 전까지 지설이 영민을 돌봐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민이 집에 없더라도, 저녁은 준비해 두어야 했다.

...

밤 8시, 영민이 돌아왔다.

회사의 조명을 받은 듯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아마 회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듯했다.

지설이 음식을 데우려는 순간, 영민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나 곧 나가야 해.”

그는 지설을 보지도 않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지설이 뒤따라가자, 영민은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깨끗한 셔츠와 바지를 챙겨 문 옆 선반에 올려두었다.

다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영민이 샤워를 마치고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아마 오늘 이혼 얘기를 꺼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계를 차며 계단을 내려오던 영민이 무심하게 말했다.

“내일 밤에 B시로 3일 출장을 가. 옷 좀 챙겨놔.”

“네.”

지설은 식탁 위 서류를 들었다.

“이거, 한번 봐줄래요?”

영민은 서류를 훑어볼 생각조차 없었다.

“장모님 치료비 명세서?”

매달 지설이 돈을 쓰려면, 이렇게 어머니 병원 치료비 항목을 작성해서 영민에게 결재를 받아야 했다.

지설에게는 가장 큰 지출은 늘 어머니의 치료비였다.

영민은 이미 익숙한 듯 마지막 장에 서명만 했다.

“됐어. 내 짐 챙기는 거 잊지 마.”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지설은 그 뒷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 엄마는 벌써 6개월 전부터 건강이 많이 회복됐는데...’

6개월 동안 치료비 명세서는 작성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민은 그 사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설은 곧바로 이혼합의서를 택배로 장경은 여사에게 보냈다.

장 여사의 수완이라면 법원까지 가지 않아도 이혼 처리는 문제없을 것이다.

다만, 한 달의 이혼숙려기간이 필요했다.

그 한 달만 지나면, 지설은 이 집을 떠날 수 있었다.

핸드폰을 켠 지설은 라희의 새로운 게시물을 보았다.

비행기표 사진과 함께 글도 올라와 있었다.

[오빠랑 새언니 덕 좀 보려고, B시에 같이 가서 콘서트 볼 거야!]

지설은 그제야 알았다.

영민이 B시에 가려는 진짜 이유를.

출장이 아니라, 주유연과 함께 콘서트를 보러 가는 거였다.

...

영민이 ‘출장’을 간 사이, 지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찾아가 여러 집을 둘러본 끝에 아파트형 투룸을 하나 계약했다.

장경은 여사가 준 전원주택은 괜찮았지만, 음악학원과 거리가 멀어 출퇴근이 불편했고 관리비도 만만치 않았다.

지설은 나중에 명의 이전을 받으면 그 집을 팔아 현금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어머니 건강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치료비가 크게 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설은 곧바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장을 스치듯 훑어보니, 거기 있는 옷들은 전부 결혼 전에 가져온 것뿐이었다.

영민은 한 번도 지설에게 옷을 사준 적이 없었다.

반대로, 지설이 영민을 위해 산 옷들은 전부 택배 상자 속에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가격표까지 달린 채였다.

영민은 몇 년째 단 두 개 브랜드 옷만 입었는데, 라희 말로는 그 브랜드들 모두 주유연이 추천해 준 거라고 했다.

‘이 옷들, 놔둬봤자 자리만 차지하네.’

지설은 영민 옷들을 전부 포장해 중고 거래 사이트에 저렴하게 올렸다.

그렇게 3일 동안 바쁘게 움직인 끝에 집 안에서 지설의 물건은 전부 새집으로 보냈다.

사실 지설의 물건은 많지 않아서 영민이 돌아와도 집 안이 달라진 걸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애초에 그는 집에 뭐가 있고, 어디에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K시로 돌아오기 전, 영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준비해. 내일 이씨 집안의 본가에서 장례가 있어.”

이씨 집안과 부씨 집안은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였다.

예전에 영민을 따라 이씨 집안의 연회에 간 적도 있었다.

장례식이라면 당연히 함께 가야 했다.

하지만 지설은 이런 자리가 불편했다.

영민의 인맥 속에서 자신을 곱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따가운 시선들 속에 있으면, 숨이 막히는 듯했다.

무엇보다, 지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교 섞인 말과 웃음을 흘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곧 이혼인데, 이제 이런 자리 따라갈 일도 없겠지.’

거절할 권한은 없었지만, 그 생각 하나로 버텼다.

...

영민이 돌아왔을 때, 그는 역시 집 안의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짐은 지설이 전부 챙겨줬으니, 반쯤 비어 있는 드레스룸에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번에 입은 옷은 좀 아니더라. 이번엔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골라.”

그는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네.”

영민이 지설의 옷차림을 신경 쓰는 건 이런 중요한 자리뿐이었다.

그것도 ‘자신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서’일 뿐, 관심이나 애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민이 장경은 여사에게 전화를 걸자, 잠시 후 여사 쪽에서 직접 보낸 옷이 도착했다.

지설은 옷을 입어보고, 치수가 맞는 걸 확인하곤 조용히 옷장에 넣었다.

다음 날, 지설은 전날 받은 그 옷을 입고 영민의 차 조수석에 올랐다.

장례식에 동행하는 길이었다.

그녀는 조수석에 앉자마자, 왠지 모르게 몸이 불편했다. 손을 뻗어 의자 틈을 더듬다가, 작은 검은색 머리핀 하나를 발견했다.

‘누구 건지, 안 봐도 뻔하네.’

‘주유연이 이 자리에 앉은 건 한두 번이 아니겠구나.’

지설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다행히 이제 이혼 절차 밟는 중이지.’

‘아니었으면 토할 뻔했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그곳에 주유연도 와 있었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연은 마른 체구에 지설과 비슷한 디자인의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연한 화장만 했는데도 더 연약하고 순해 보였다.

‘참, 청순한 척은 제대로네.’

유연이 영민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불렀다.

“오빠.”

팔이라도 잡을 듯했지만, 지설이 옆에 있는 걸 의식한 건지, 그대로 멈췄다.

영민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연아.”

그러고는 옆에 있는 지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이 심지설 씨.”

그제야 지설은 깨달았다.

영민은 주유연을 ‘유연’이라 부르면서, 자신은 풀네임으로 부른다.

‘관심도 없으면서... 참 웃기네.’

이미 마음이 식었지만, 순간적인 우스움은 피할 수 없었다.

지설은 둘이 시선 주고받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시어머니에게 인사드리겠다며 자리를 떴다.

영민은 지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유 모를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유연이 놓치지 않았다.

‘부영민이 심지설한테 아무 감정 없다고 했는데...’

‘지금 그 눈빛은 아무렇지 않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지!’

유연은 순간 불쾌한 예감이 들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아냐, 아니야. 착각이겠지.’

유연과 영민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다.

서로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연은 자신이 질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100화

    말을 마친 은화는 장난스럽게 도진을 향해 윙크까지 했다. 옆에서 팔짱을 낀 우란은 흥미로운 듯 이 장면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역시 우리 은화, 분위기 띄우는 데는 선수네.’‘기도환 대표님도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우리 대표님을 이렇게 끌어내다니.’예린은 촉촉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도진에게 물었다.“도진 오빠, 이분들은 오빠 친구들이야?”그 말과 함께, 예린의 시선은 자연스레 은화 옆에 앉아 있는 지설에게로 옮겨갔다.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는 눈빛.아무리 봐도, 세 사람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지설이었다. 단정하면서도 또렷한 이목구비, 은근한 고집이 묻어나는 기품 있는 분위기.‘위험해. 이런 여자는... 분명 도진 오빠 곁에 오래 남을지도 몰라.’예린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피어올랐다.하지만 도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명은커녕, 관심조차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역시... 형이 여기 오자고 고집부린 이유가 이거였군.’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환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엔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럼에도 도환은 태연했다. 동생의 서늘한 기색 따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오히려 환한 미소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이쪽은 구예린, 내 친구예요.”그러고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예린아, 여긴 우란 씨. 도진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라고 할 수 있지.”우란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웃었다.“별말씀을요. 저는 그냥 작은 새우일 뿐이에요.”도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이 두 분은 심지설 씨랑 소은화 씨. 유명한 피아노 강사님들이지. 지금 창업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은화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도환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어머,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대표님을 알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럼 든든한 투자자 한 분 더 모실 수 있었을 텐데요?”그 말에 도환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9화

    도환은 동생의 신호 따위 전혀 못 알아챈 듯, 오히려 싱긋 웃으며 예린에게 말을 건넸다.“예린아,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네 눈엔 여전히 이 답답한 도진이만 보이니...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도진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그 말에 예린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곧바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도환 오빠!!”이내 마치 도진을 두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재빨리 말을 보탰다.“도진 오빠는 전혀 답답한 사람 아니야!”그 목소리에는 도진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도환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어차피 이렇게 만난 김에 도진이 한번 제대로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 오늘 점심은 도진이 쏘는 거다.”예린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었다. 시선은 곧장 도진에게 향했다.하지만 정작 도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형이 예린을 정리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같이 밥 먹자고?’예상치 못한 전개에 도진의 마음은 불편해졌다.길을 걷는 동안, 도환이 슬쩍 예린에게 속삭였다.“우리 형제 사이라는 건, 아는 사람 거의 없어. 꼭 비밀로 해 줘.”예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무슨 사정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도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기꺼이 맞춰 주고 싶었다....잠시 후, 도환은 주도적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한 식당 앞에 멈췄다. 전통 있는 분위기에 손님들로 가득한, 소문난 맛집이었다.그러나 뒤따라온 도진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간판을 올려다봤다.‘또 이런 데야? 난 자극적인 음식은 별로인데...’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를 떠올리며, 그는 이마에 잔주름을 만들었다.옆에 있던 예린이 서둘러 도환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도환 오빠, 도진 오빠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우리 그냥 다른 데로 가면 안 돼? 그래야 다 같이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말하면서도 예린의 시선은 계속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8화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지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이 복잡한 상황을 풀 수 있을까...’그 순간, 우란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슬쩍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지설의 옆모습을 조용히 찍어 버렸다. 한숨과 함께 떨어져 나온 쓸쓸하고도 애잔한 표정 그대로였다.우란은 곧바로 사진을 열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곧 사진은 도환에게 전송되었다.요즘 들어 도환은 로펌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활달하고 유쾌한 성격 덕분에 변호사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 과정에서 우란이 지설의 친구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고, 도환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기회다. 우리 도진, 이제라도 여자를 만나야지.’‘백년솔로’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법무법인 도진의 대표변호사 기도진. 괜찮은 남자임은 틀림없었고, 지설과 함께라면 참 잘 어울릴 거라는 확신이 도환에게 있었다. 우란도 그 말에 흔쾌히 동의하며 협조를 약속했다.잠시 후, 도환의 핸드폰에 사진이 도착했다. 화면 속 지설의 표정을 본 순간, 도환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리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주소는요?]거의 동시에 우란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울렸다. 우란은 지체 없이 레스토랑의 위치를 찍어 보냈다.그 시각, 도환은 이미 로펌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는 동생의 사무실로 향해 문을 열었다. 여전히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도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환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야, 그만 해. 밥 먹으러 가자.”도진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흥분한 듯 들뜬 표정이 역력한 도환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필요 없어. 이따가 배달시켜 먹을 거야.”도진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도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밥 같이 안 먹겠다면... 오늘은 여기 눌러앉아 로펌 한번 제대로 뒤집어 놓을 거다. 네가 나가 달라 빌기 전까진 안 나간다.”그 말과 함께 도환은 두 팔을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7화

    아침 일찍, 지설과 은화는 학원 내부 물건들을 정리하러 학원에 나왔다.마침 학원은 법무법인 도진이 있는 같은 빌딩에 있었다. 은화는 자연스럽게 우란에게 연락을 넣어 점심을 함께하자고 제안했고, 곧 우란이 약속 장소로 나타났다.세 사람은 근처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우란의 시선은 자꾸만 지설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지설 씨, 혹시 모르셨죠? 우리 대표님... 소꿉친구가 있다네요. 그것도 꽤 각별한 사이래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란은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화면을 뒤적였다. 그리고 회사 단톡방에서 이미 화제가 된 사진 한 장을 지설 앞으로 내밀었다.지설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순간 숨이 막히듯 굳어 버렸다. 화면 속 여자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맑고 반짝였으며, 그 자체로 싱그러움이 가득했다.‘왜 이렇게 답답하지? 숨이 잘 안 쉬어져.’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섞여 지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진과 자신은 공식적인 연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진의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지설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와, 정말 잘됐네요. 보니까 기 변호사님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억지로 짜낸 미소였다.우란과 은화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지설 씨, 정말 하나도 안 신경 쓰여요?”사실 지켜보는 이들 눈에도, 지설과 도진 사이에는 늘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그 미묘한 온도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는 우란과 은화가 모를 리 없었다.게다가 은화와 지설의 학원이 입주해 있는 이 층의 임대 문제도, 사실상 도진이 직접 발로 뛰며 해결해 준 일이었다.늘 바쁘게 일하며 숨 돌릴 틈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정성을 쏟을 수 있었을까?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분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6화

    도진은 차갑게 입술을 열었다.“나 지금 바빠. 중요한 일 아니면, 당장 나가.”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곧장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호하고 결연한 발걸음,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뚜렷했다.하지만 예린은 도진의 차가운 태도와 짜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재빠르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예린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눈이 예쁘게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구, 괜찮아! 난 그냥 오빠 일하는 거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점심도 같이 먹으면 되잖아?”도진은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대체 왜 저렇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거지?’‘분명 여러 번 말했잖아. 난 너한테 그런 감정 없다고.’도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하루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예린은 마치 거절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따라붙었다.시간은 흘러 두 시간이 지났다. 도진이 창밖을 바라보니, 예린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미친 거 아냐? 아직도 안 갔어?’도진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마음속 불편함은 더 짙어졌다. 결국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번호를 눌렀다.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차분하고 다정한 도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무슨 일인데?]도진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구예린이 아직도 여기 있어. 두 시간이나 붙어 있다니까. 형, 어떻게 좀 해봐.”그 말과 함께 도진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기억이 스쳤다. 언제나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떨어질 줄 모르던 꼬마 예린.매번 그런 상황을 해결해 준 건 늘 도환이었다. 꾀 많고 눈치 빠른 형이 나서야만, 그는 간신히 숨통을 틀 수 있었다.이번에도 도진은 본능처럼 형에게 기대고 있었다.[예린, 결국 또 찾아왔지?]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도환의 목소리엔 묘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한 자신감이 가득했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5화

    예린은 로펌 휴게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한 손에 잡지까지 펼쳐 놓고, 마치 이곳이 자기 집인 양 편안한 모습이었다.그 앳된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지나가던 변호사들과 직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꽂혔다.‘누구지?’‘처음 보는 사람인데...’‘...’속으로 웅성거렸지만, 정작 예린은 그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우아하고 당당한 태도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언뜻 보면, 예린이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드나들던 로펌의 안주인 같았다.잠시 후, 데스크 직원 유진이 다가와 뜨거운 커피를 건넸다.“손님, 커피 드시죠.”예린은 자연스레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곧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음... 커피가 조금 달네요. 저는 반만 당 넣은 게 좋아요. 그리고 얼음을 조금 넣어주면 더 산뜻하겠어요. 다음엔 그렇게 부탁드릴게요.”유진은 순간 멈칫했다. 이 여자분을 자신도 본 건 처음인데, 어쩐지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는 태도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게다가 예린의 옷차림은 눈에 띌 정도로 고가의 명품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흔한 사람이 아니었다.유진의 머릿속에 스친 건 단 한 사람.‘혹시... 우리 대표님 여자 친구?’‘근데 우리 모두 심지설 씨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유진은 마음속에 물음표를 잔뜩 품은 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네, 알겠습니다. 불편하시지 않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아침 9시 정각, 로펌 현관문이 열렸다.도진이 들어섰다.잘 재단된 수트가 그의 넓은 어깨와 곧은 허리를 따라 매끈하게 떨어졌다.고급 원단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흘러내렸고, 주변 공기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감이 뚜렷하게 풍겼다.도진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차분하게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그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예린과 눈이 마주쳤다.바로 그 순간, 예린의 눈길이 번개처럼 도진의 모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