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아..."
오주하. 그 이름만 떠올려도 몸이 달았다. 미쳐도 단단히 미쳐선. 사실 미친 게 몸만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그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걸 다 인정하기에는 따라가기가
"베였어요?"주하는 손을 확인하기도 전에 물었다. 세 사람이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거짓말도 못 하면서 뭘 그렇게들 숨기려고 하는 건지."죄송, 죄송합니다. 피, 피, 피는 안 묻었습니다.""누가 그런 거 걱정한대요."주하는 팍 눈가를 찌푸렸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팔을 휙 당겨 손을 확인했다. 제법 긴 상처가 나서인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왜 숨겨요.""아뇨, 그게, 그러니까..."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도움받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들은 어마어마한 명령을 받은 분위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이건 그냥 학교 과제예요. 부탁드리려고 부른 거고요. 그런 게 아니더라도 사람이 다치면 그게 제일 먼저예요, 상식적으로는."단호한 목소리에,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들에게는 왜인지 따뜻하게만 들렸다."일단 지혈부터 해요. 구급상자 있으면 가져오고."주하의 지시에 다른 부하가 헐레벌떡 구급상자를 찾아왔다. 그러나 주하에게 내미는 것은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도혁이 '주하가 직접 치료해 주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뒷감당이 무서웠던 탓이었다."그, 저희가 알아서..."주하는 별말 없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그 시선을 받고선 얌전히 구급상자를 내려놓았다. 과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조직의 보스를 움직이는 사람다운 눈빛이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며, 아직도 얼어 있는 험상궂은 남자들을 향해 나직하게 덧붙였다."이거 많이 날카로운 칼이라 조심해야 해요. 조금이라도 다치면 바로 말해요. 참지 말고. 피 같은 건 묻으면 다시 하면 되죠.""……감사합니다, 누님.
주하가 다시 집에 온 지 3일이 지났다. 둘 사이엔 여전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전엔 조용해도 편안한 공백의 시간이었다면, 지금은 굳이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불편한 공기였다. 주하가 가끔 말을 해도 대체로 변덕스러운 명령 정도일 뿐이었다. 주고받던 농담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도혁도 할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그야 조잘거리던 사람이 과제만 하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기껏 해봐야 심술맞게 굴며 그를 괴롭히는 게 전부고. 물론 그는 그 시간이 좋았다. 심술이든 괴롭힘이든 변덕이든. 그는 주하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이라도 서 있을 수 있었으니까."음. 햇빛 때문에 눈부셔.""블라인드 칠까요?""아니. 여기 와서 좀 서 봐."그를 햇빛 가리개로 쓰겠다는데, 전혀 개의치 않고 가리킨 곳에 서는 꼴을 보아하니 또 마음이 울컥거렸다. 왜 그가 자신의 명령을 들을수록 기분이 가라앉는지, 그녀는 이제 정확히 알았다. 시간이 지나니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명령을 다 듣고 있는 이유가."한걸음 뒤로 가.""네.""아니, 좀 왼쪽으로 더.""네."주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로봇을 조종하는 것처럼 명령했다. 물론 도혁은 철저하게 그 말에 따랐다. 창밖에서 그 모습을 보던 부하 둘이 조금 안타까워했지만, 그런 건 주하도 도혁도 몰랐다."......"어느새 햇빛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과제에 집중한 주하를 내려다보며 도혁은 등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날씨가 조금씩 선선해지고 있었는데, 가만히 한 자리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자니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해의 위치가 변하면 아주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그게 어떤 것이든 그녀를 방해하게 두진 않을 거니까. 주하는 한 번
"......"다시 침묵이 흘렀다. 노트북 위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주하의 머릿속은 온통 전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 집에 다시 돌아온 건, 그런 비참한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도혁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들 하니까. 물론 그 바닥에는 나름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아닐지라도, 최소한 제 '몸'을 탐내고 있다는 것. 그걸 무기 삼아 어떻게든 그를 쥐고 흔들어보자고 다짐하며 들어온 길이었다.하지만 평소보다 더 납작하게 엎드려 고분고분 구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간절하게 원하는 건 '주하'라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제게 명령을 내려주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아닐까 하는.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간식 좀.""아, 그럼... 잠깐 자리 비워도 괜찮아요?"별 걸 다 허락을 구한다 싶었다. 하지만 운동할 때 빼고 따라다니라고 한건 자기니까, 주하는 뭐라고 하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아, 네...!"도혁은 거절당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후다닥 사라졌다. 뭘 저렇게까지 기뻐하면서 가는 건지, 주하는 알 수 없었다.도혁은 그저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적어도 옆에 있는 배경 취급을 하지는 않는 거니까.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다는 뜻 같아서.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게 아무리 하찮은 일이어도 좋았다. 그는 곧장 식당으로 뛰어가듯 걸어서, 직원들을 닦달했다."평소에 좋아하던 거 위주로 준비해. 제일 빨리 되는 게 뭐야?""아, 그게,
두 사람은 어느새 도혁의 방으로 옮겼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무릎을 꿇고 앉은 도혁을 보며 주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은 제대로 잔 건지, 밥은 제대로 먹은 건지, 그를 꼼꼼히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혁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눈 밑이 제법 거뭇했고, 눈 자체도 퀭하게 보였다. 그간 기찬이 보고해 준 것들이 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원래 하루에 운동 몇 시간씩 했어?""네...? 아... 2시간 정도..."뜬금없는 질문에도 도혁은 성실히 대답했다. 주하가 그런 걸 왜 물어보는지,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물어보니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는 한 최대한 저자세로 임했다. 커다란 덩치를 구겨서 작아 보이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봤자 거구가 어딜 가는 것도 아닌데."매일 2시간씩 운동해. 그 외에는 무조건 나 따라다녀. 등 뒤에서.""네, 감, 감사합니다. 따라다닐게요...!"따라다니지 말라고 해도 감지덕지 감사하며 숨어서 얌전히 지낼 텐데, 따라다니라는 미션은 너무 쉬운 데다가 좋기만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주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녀도 사실 알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두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지 같은 건. 그저 한 달, 그 정도의 유예를 가져보기로 했을 뿐이었다. 마음을 접든, 아니든."과제하러 갈 건데, 운동하러 갈래?"생각한 건 잠이라도 자라는 말이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그런 말 뿐이었다. 도혁은 '아니요, 따라갈게요...'하고 대답하며 그녀가 나가길 가만히 기다렸다. 주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루에 그녀가 기찬을 통해 전달했던 신발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 신발을 신었다. 도혁은 내리깐 눈으로 그것을 가만히 지켜
"주, 인님...!""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불러?"주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본가에 사는 사람은 도혁과 주하를 포함해서 총 55명. 기찬을 뺀 54명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말하는 건 도혁과 주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하도 도혁도,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도혁은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반말을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날 어찌나 시리게 존댓말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사실 이 공간에 다시 발을 디뎌주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에게는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주하의 시선이 짧게 아래로 향하자, 도혁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따라 내려갔다. 얼마 전에 마당에 신발을 놓고 가버린 탓인지, 주하의 발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낡은 슬리퍼가 걸려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주하를 저런 꼴로 돌아다니게 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찔러댔다."죄, 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제가..."주하는 사과하는 도혁을 그제야 쳐다보았다. 기찬이 말한 대로 도혁은 제대로 밥도 먹지 않은 얼굴이었다. 몇 주 만에 살이 제법 빠져서 안 그래도 날렵한 턱선이 날카롭게 보였다. 그렇다고 볼품없어진 건 아니었고 조금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쩐지 처연해 보이기도 했다. 늘 능글맞던 얼굴에 한치의 웃음기도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반성은 좀 했고?"주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태연한지 가늠해 보며 물었다. 도혁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하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감히 단 한 걸음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네, 네... 많이, 많이 했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후회하고, 또, 주인... 아니, 그러니까..."도혁은 호칭을 고르지
"저..."기찬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우물쭈물했다. 주하가 말한 3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미리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은 말해야 했는데 생각처럼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돌아오겠다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집합을 시키라는 내용이니까."무슨 일인데."도혁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몇 주간 기찬은 단 한 번도 보고하러 오지 않았기에. 그건 주하에게 위험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반대로, 보고를 하러 왔다는 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 그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로 기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누님이, 집합...! 하시랍니다... 그... 전원..."살다살다 전원 집합하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전하게 될 줄 몰랐던 기찬은 말을 더듬으며 겨우 말했다. 아무리 주하가 전하는 말이라고 해도,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태연하게 말이 나가질 않았다. 도혁 또한 잠시 그 말을 이해하느라 멈춰있는 듯했다."...뭐?""오늘,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따, 모시러 가려고 하는데... 제가...""몇시에... 아니, 너는 가 봐 그럼."기찬이 겨우 눈치를 보며 하는 말에 도혁이 손을 저어 쫓아냈다. 그리곤 지금까지 다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몸짓으로 어디론가 떠났다. 아무래도 모두에게 모이라고 말할 생각인 듯했다. 기찬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차고로 향했다.-주하는 왜 전부 다 부르라고 했을까. 기찬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조용히 도혁과 대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국 그녀가 시킨 일이었다. 할 수밖에 없는 일. 주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찬이 운전하는 차의 보조석에 올라탔다. 손엔 나갈 때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들어올 때와 같은 차림새였지만
주하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려다가 시무룩해하는 도혁을 보며 회상을 멈추었다. 솔직히 차단까지 했는데 다른 번호로 연락할 정도로 집요할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적당히 바쁘다고 무시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더 단호하게 거절해야만 했다."글쎄, 아저씨랑 더 만날 일 없다니까요.""어떻게 사람을 한 번 먹고 버릴 수가 있어!"이 아저씨가 진짜 미쳤나.주하는 주변을 휙 휙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여기에 관
"우리 좋았잖아."[ 아저씨나 좋았겠죠. ]굳이 따지자면 맞는 말이지만 조금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섹스하자는 말에 거절한 건 주하니까, 같이 좋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어디야."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 무색하게도 태연하게 말이 나왔다. 마치 원래 알던 사람처럼.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또 한참 말이 없었다. 뒤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끊었는지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알
오주하. 만 23세. 생일은 11월 17일. 현재 한서대학교 건축학과 5학년 2학기 재학 중. 9학기 중의 6학기는 과에서 1등. 전액 장학금. 졸업 후에 취업 예정. 가족은 부모님, 그리고 고등학생인 여동생 한 명. 가족들은 지방 거주. 그래서 서울에 혼자 자취 중이고, 위치는 학교 앞 원룸. 부모님은 평범한 회사원.별다를 것 없는 정보의 나열이었는데 읽는 내내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정이 끼어들 틈 같은 것은 없는 종이 한 장이었는데도, 심드렁하던 주하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성철아.""예, 형님."성철은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성철은 그저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정리는 어떻게 되어가냐.""그... 게..."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 성철은 당황해서 옆 사람을 보았다. 그는 무슨 정리냐고 묻지도 못하고, 무슨 대답이든 하긴 해야 해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눈으로 SOS를 보냈다. 하지만 모인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정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성철은 어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