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굳이 따지자면 맞는 말이지만 조금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섹스하자는 말에 거절한 건 주하니까, 같이 좋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어디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 무색하게도 태연하게 말이 나왔다. 마치 원래 알던 사람처럼.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또 한참 말이 없었다. 뒤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끊었는지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 알아서 뭐 하게요. 바빠요. ]
"말 안 해도 찾아갈 수 있는데." [ ...학교예요. 찾아오지 마세요. ]말 안 했다가 찾아오는 것보단 실토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도혁은 주하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다.
"이 번호 저장해둬. 그때 번호는 업무용이라."
[ 그때 번호로 저장할게요. ] "그 번호는 차단했잖아." [ ...풀면 되잖아요. ] "차단한 거 역시 맞네." [ ...... ]자꾸만 대화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괜히 더 보고 싶어졌다. 어떤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지 궁금해서. 상상하는 것으로도 즐거웠지만 눈으로 보면 더 즐거울 것이 틀림없었다. 이 미친 몸을 어떻게 하기에도 편할 것 같고.
"언제 끝나."
[ 뭐가요. ] "지금 바쁜 거." [ 졸업 작품이라 졸업해야 끝나는데요. ]오늘 몇 시 같은 게 아니라 여지 따윈 주지 않겠다는 대답이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게. 듣고 있으니 술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는 훨씬 또렷하고 시렸다. 그날도 심드렁했는데, 지금은 더 경계를 하는 것만 같았다. 도혁은 경계를 해도 자신이 해야 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이상하게 만든 사람이니까. 하지만 자꾸 안달이 났다. 이상하게도.
"오늘 다시 연락할 테니까 차단 풀어."
[ ...알겠어요. 진짜 바빠서 끊을게요. ]누군가 뒤에서 주하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듯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가 끊겼다. 허. 도혁은 허탈하게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뒤로 벌러덩 누웠다. 자꾸만 대화를 곱씹고, 방금까지 듣던 목소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오주하. 또 이름을 그렇게 떠올려보았다. 몸이 여전히 말썽이었지만 그건 곧 괜찮아질 거였다. 그저 조금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다시 일상생활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운동도 하고 보고서를 받고 나니 시간이 어느새 저녁 7시 반이었다. 도혁은 제 방으로 돌아와 업무용 핸드폰으로 다시 주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뚝 끊어졌다. 차단 안 풀었네. 그런 생각을 하는데, 통화 거절 메시지가 날아왔다. 나중에 다시 연락 바랍니다. 이런 문자를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주변엔 늘 신호음이 채 3번 지나기도 전에 재깍재깍 전화받는 사람들뿐이어서. 대학생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바쁜 건지. 도혁은 10분 뒤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같은 메시지만 날아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보냈다.[ 나중에 언제 ]
그러나 주하는 문자를 읽지도 않았다. 도혁은 그리 인내심이 가득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자기 전까지 몇 번 더 문자를 보내보았다. 하지만 주하가 전화받는 일도 없었고, 문자를 읽는 일도 없었다. 이런 식이면 매우 곤란했다. 도혁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를 들어 주하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어디든 찾아가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수업은 목요일 오후에 하나 있는 것이 전부였다. 마침 내일이라는게 조금 다행이었다. 집에 찾아가는 건 경계심을 무너트리기 좋은 건 아니니까. 학교 정도는 찾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의 신호도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자꾸 무시해서 좋을 건 없다는 그런 신호. 다음 주까지 기다리긴 아무래도 무리이고.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감고 한참 만에 잠이 들었다. 새벽 2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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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아, 아저씨. 미쳤어요?"주하는 도혁을 보고 눈가를 찌푸렸다. 아니, 그녀의 온 얼굴이 구겨졌다.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이 커다란 남자가 정장 빼입고 와서 남의 캠퍼스 한가운데에서 주인님 같은 소릴 크게 한단 말인지. 주하는 가까워진 도혁의 팔을 끌고 후문으로 향했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가 주하의 힘에 쉽게 질질 끌려왔다. 당연히 그가 거절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주하도 알았다. 누가 봐도 운동을 한 몸이었고, 그 날 봤던 문신이 조금은 그의 인생을 짐작하게 해줬으므로.
"내가 학교 찾아오지 말랬죠?"
"그렇지만, 주인님이 안 만나 줄 것 같아서?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해주고. 차단한 거나 다름없잖아."주하는 어제 내내 씹었던 도혁의 연락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왠지 위험해 보이는 이 남자와 엮이게 되었을까.
도혁은 또 등장한 수갑을 잠시 바라보았다. 진짜 수갑을 가져올 땐 언제고 오늘은 또 특이하게 생긴 수갑이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분홍색의 수갑. 털이 잔뜩 달려있어서 야시시하게 느껴지는 그런 물건이었다. 뭐, 그렇다고 그게 정말 야하게 보여서 흥분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주하가 수갑에 꽂힌 이유가 조금 궁금했을 뿐. 물론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얌전하고 순순하게 손을 모아서 내밀었다. 주하는 별말 없이 수갑을 그의 손목에 채우기 시작했다. 손목에 따뜻하게 감싸지는 느낌이 조금 특이했다. 차가운 금속과는 확실히 달랐다. 벌써부터 손목에 땀이 차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손목을 움직여보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수갑보다는 헐거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부러질 것 같지도 않았다. 있는 힘껏 어디 내려치지 않는 한 충분히 그를 묶어놓을 정도는 되는 느낌."진짜 수갑은 손목에 자국이 너무 많이 남길래 아플까 봐."주하는 묻지도 않은 걸 말하며 수갑을 내려다보았다. 도혁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런 주하를 보았다. 그런 이유로 새로운 수갑을 구해왔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그의 몸은 그런 붉은 자국 정도론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더 신경 쓰지 못했다. 그녀가 제 몸을 아껴주려고 이런 선택을 한 거라니. 갑자기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수갑을 보고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특이한 일이었다."왜 갑자기 서는데.""음, 저도 모르겠어요."도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 대답에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주하를 보고 발기하는 건 더 이상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주하가 질색팔색 하겠지만.도혁은 수갑을 찬 손목을 위로 들며 자연스럽게 침대 위에서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 이어질 일이 무엇일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하가 쇼핑백에서
"애인이니까 남자 친구라고 한 거지. 그럼 뭐라고 해.""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소개해 주실 거예요?""다른 사람?""그냥, 뭐, 다른 사람."주하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얼굴로 보아도, 도혁은 더 이상의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도혁을 보고서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서 할 대화는 아닌 것 같았다. 누가 언제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됐고, 내 거나 봐. 설명 해줄게.""네."대답이 빨랐다. 도혁은 금세 주하의 등 뒤에 붙어 작품 앞으로 갔다. 주하는 조금 전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설명을 다시 시작했다. 도혁도 내내 서 있으면서 이미 거의 다 외워버린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주하는 그런 도혁을 신경 쓰는 건지 아는 건지, 이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더 열심히 말했고, 작업하면서 고민했던 부분도 덧붙였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시작했는데 말하다 보니 자꾸 설명할 것이 생겼다."그래서 여기에는 이 재료를 쓴 거야.""네."주하는 설명하다 말고, 가볍게 대답하는 도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혁은 그런 주하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을 그는 참 좋아했다."...듣고 있어?""네. 듣고 있어요.""...나만 보고 있었던 거 아니야?""같이 보고 있었어요."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빠른 대답이었는데도 주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자신의 뒤에 있다 보니 그가 딴짓한 것이 눈에 보인 것도 아닌데 괜히 의심이 들었다."내가 무슨 얘기 했는데.""저 오늘 같은 설명만 10번 넘게 들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발표해 드릴 수도 있는데."주하는 저도 모르게 '아.'하고 짧게 말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가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아뇨. 좋은데요."뭐가 좋다는 거야? 주하가 그런 얼굴로 쳐다보았는데, 도혁은 뭐라 설명할 말이 없었다. 좋지 않은 게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도혁도 한 번 본 적 있는 그녀의 동기가 쭈뼛거리며 나타났다."안녕하세요... 그때 감사했습니다.""네."도혁은 짧게 목례하며 대답했다. 인사치레 같은 것은 없었다. 주하는 어쩔 수 없이 괜히 평소보다 더 반갑게 인사했다."아. 소정아. 네 과제 좋더라.""아, 아냐. 뭘. 네 과제가 훨씬 좋지. 우리 과탑인데. 다들 네 것 궁금해했어. 다들 좋다고 하더라."주하는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어느 날부터는 학교에 가지 않고 도혁의 집에서 마무리했기 때문에 다른 동기들의 과제는 주하도 이제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처음 전해 들은 것이라서 괜히 멋쩍었다. 그래도 반응이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은 조금 놓였다. 지난 학기부터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과물이니까."그, 남자친구... 맞지?"소정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도혁에게도 아주 잘 들렸다. 그는 소정이 주하의 가까이에 다가가자마자 조금 가늘어진 눈으로 소정을 보다가, 그 소리에 눈을 착하게 떴다. 주하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맞아. 남자 친구."도혁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있었다. 숨이 잠시 멎은 것 같기도 했다. 남자 친구. 주하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면 그냥 시답지도 않은 단어였을 것이다. 그에겐 그 어떤 감흥도 주지 않을. 어린애 장난같이 유치한. 하지만 주하의 입에서 나오니 무게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이 남자 친구라는 자리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소개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다시 곱씹어보게 되어서 그랬
"아닙니다.""...아니긴 뭘 아니야.""몸은 어쩔 수 없어요. 주인님이 만지면 이렇게 돼요."도혁은 능글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손목의 자국은, 주하의 손가락이 닿자 왜인지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곧 자극이 되어버렸으니까. 그게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것에 놀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녁에 해. 저녁에.""...네.""왜. 뭔데."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도혁의 얼굴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님.'이라고 적혀 있어서 주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그 시선을 살짝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녁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서요."방금까지 능글거리면서 웃던 사람이, 이런 말에 부끄러워하면서 대답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주하는 허, 하고 소리를 내며 손목을 놓았다. 그냥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이 좋으면서도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휙 도혁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반보 뒤에 따라붙든지 말든지.-금요일, 졸업 전시회에 가기 위해서 새로 산 세미 정장을 입고 주하는 거울 앞을 한참 서성였다. 도혁은 늘 정장 차림이라 눈에 익숙할 법도 한데, 직접 입으니 영 어색해서 자꾸 옷매무새를 다듬게 되었다. 몸이 불편하기도 했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해서. 새삼스레 정장이 제 옷처럼 잘 어울리는 '어른 남자'가 제 옆에 늘 있는 게 의식이 되기도 했다. 누가 봐도 빌려 입은 것 같은 주하와는 달라서 그런지."잘 어울려요. 출발해야 하잖아요, 이제."도혁은 그런 주하를 달래듯 말하며 시계를 힐끔 보았다. 약속에 늦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거울 앞에 한참을 있으니 도혁이 더 신경이 쓰였다. 분명 늦으면 스스로 제일 많이 자책할 사람인걸 아니까.".
"...김치찌개 먹어야겠다."한참 만에 그런 결론을 내리며 주하가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음식을 가져오는 건 도혁이었다. 그는 느긋하게 가서 쟁반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김치찌개는 주하의 앞에 놓고, 우동은 자신의 앞에 놓았다."한입 먹을래요?""응. 너도 김치찌개 먹어봐."주하는 도혁이 덜어준 음식을 냉큼 받아먹었다. 도혁은 예의상 그녀의 김치찌개를 대충 한 입 떠먹었다. 주하는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중간부터는 도혁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의 음식을 넘봤다. 물론 도혁은 우동을 반쯤 밀어준 지 오래였다. 그는 어차피 오늘도 주하를 보느라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빨리 먹어."주하는 눈가를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도혁은 그제야 입에 음식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배가 꽤 찼다는 신호라는 걸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의 식사가 끝나간다는 뜻이니 속도를 맞추어 먹기 시작하면 그만이었다.주하는 음식을 거의 흡입하는 도혁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손목에서 찰랑거리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주하가 도혁에게 용서해 주겠다고 선언한 다음 날, 그녀는 그에게 '내가 선물해 준 생일 선물은 왜 안 하고 다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직접 받은 선물이 아니라서 열어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는 밝게 웃거나 감동을 받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조용히 제 팔에 액세서리를 차곤 지금까지 풀지 않고 있었다. 늘 긴 옷을 입고 있는 탓에 이렇게 식사를 할 때에나 가끔 소매 사이로 보여서, 괜히 눈에 띄면 보고 있게 되곤 했다."그..."그의 손목에는 팔찌만 있는 게 아니었다. 팔찌 아래에 붉은 자국이 살짝 보였다. 도혁은 주하가 입을 열자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곤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이건 어젯밤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 때문에 생긴 자국이었다. 넥타이로는 안 되겠다며
"네. 배고프죠? 식당으로 바로 갈까요?""응. 가자."주하는 자신의 뒤에 딱 붙어 서서 걷는 도혁을 등으로 느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반보 뒤에서 걸었다. 따뜻한 체온이 뒤에서 은은하게 퍼졌다. 옆에서 걷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사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중요한 건 마음이 통하는 것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뒤에서 걷는 게 싫었던 때도 있었다는 건 영원히 비밀이었다."일은 잘 되어가?""뭐. 대충은요."일부러 각자의 일상을 존중하는 의미로 일을 하러 보내기도 하는 건데, 도혁은 영 관심이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었지만 다른 것에는 관심이 너무 없으니까 좀 신경이 쓰였다. 지금의 여유로움이 평생 가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고 그가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금요일에 졸업 전시회 있는데... 같이 갈래?""어? 저도 가도 돼요?"도혁이 살짝 놀라며 한 걸음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꽤 위험하게 뒤로 걸으며 주하를 바라보았다. 나란히 걷는다는 선택지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하를 보며 뒤로 걷거나, 주하의 뒤에 딱 붙어 걷거나. 도혁은 둘 중 하나만을 골랐다. 주하는 그가 걸려 넘어질 만한 것은 없는지 눈으로 대충 살펴보곤 대답했다."응. 개인별로 초대장이 나오거든. 나도 두 장 있어.""가족들 안 부르고요?""멀어서 굳이? 졸업식에도 안 부를 거야."주하의 부모님은 그녀가 뭐든지 알아서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졸업 작품을 보러 지방에서 올라오실 생각은 없으실 것이 뻔했다. 게다가 전시회가 평일이라 각자의 일이 있으시기도 하고. 완성된 건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렸더니 '멋지네. 너무 고생했어.'하고 답장이 온 게 끝이었다. 
주하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려다가 시무룩해하는 도혁을 보며 회상을 멈추었다. 솔직히 차단까지 했는데 다른 번호로 연락할 정도로 집요할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적당히 바쁘다고 무시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더 단호하게 거절해야만 했다."글쎄, 아저씨랑 더 만날 일 없다니까요.""어떻게 사람을 한 번 먹고 버릴 수가 있어!"이 아저씨가 진짜 미쳤나.주하는 주변을 휙 휙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여기에 관
오주하. 만 23세. 생일은 11월 17일. 현재 한서대학교 건축학과 5학년 2학기 재학 중. 9학기 중의 6학기는 과에서 1등. 전액 장학금. 졸업 후에 취업 예정. 가족은 부모님, 그리고 고등학생인 여동생 한 명. 가족들은 지방 거주. 그래서 서울에 혼자 자취 중이고, 위치는 학교 앞 원룸. 부모님은 평범한 회사원.별다를 것 없는 정보의 나열이었는데 읽는 내내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정이 끼어들 틈 같은 것은 없는 종이 한 장이었는데도, 심드렁하던 주하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성철아.""예, 형님."성철은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성철은 그저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정리는 어떻게 되어가냐.""그... 게..."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 성철은 당황해서 옆 사람을 보았다. 그는 무슨 정리냐고 묻지도 못하고, 무슨 대답이든 하긴 해야 해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눈으로 SOS를 보냈다. 하지만 모인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정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성철은 어쩔
"어때? 가족 때문에 빚이 좀 있긴 한데, 학교 선생님이야. 괜찮아."도대체 뭐가 어떻냐는 건지. 도혁은 술병을 빼앗아 자신이 따르고, 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단숨에 한 잔을 다 마셨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 어제와 같은 상태가 될지도 몰랐다."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스타일로 준비를 해본 건데?"하지만 도혁의 옆에 앉은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여기서 소개팅하겠다는 건 아니었기에 그는 그저 술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하룻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