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전북망이 단번에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괜찮았다. 외조부와 외삼촌들이 이 자리에 없는 이상, 바로 신분이 드러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그녀는 시만자와 다른 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고, 전사한 장병들의 유해 처리를 서둘렀다.자시가 지나 일곱 개의 큰 구덩이가 모두 메워졌다. 장병들은 그것을 흙으로 덮은 뒤 묵념에 들어갔다.누군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깊은 슬픔에 잠겼으며, 누군가는 억울함과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노장군은 모두에게 돌아가 쉬라고 지시했지만 자신은 부대로 복귀하여 전사자 명단을 정리하러 갔다.병사들은 그렇게 하나 둘 말없이 떠나 버렸다.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송석석은 전북망과 이방보다 앞서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속삭이는 대화가 들려왔다.“저 사람이 장군님이 혼인을 청했던 그 송씨 아가씨란 말입니까? 잘못 본 것이 아니고요? 그런 귀한 집안의 규수가 전장에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맞소, 틀림없소.” 전북망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방은 코웃음을 쳤다. “그 표정은 또 뭡니까? 청혼은 거절당하고 상대는 눈길 한 번 안 줬는데, 지금 혼자 상심이라도 하신 겁니까?”“그게 아니오. 많은 전우들이 전사했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소.” 전북망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송석석은 이 대화에 다소 의아함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전북망은 이방의 당당하고 개성 있는 모습에 깊이 매료되어 있어야 했다.하지만 그들의 일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지금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단 하나, 녹분성의 참사를 막는 것 뿐이었다.뒤이어 들려오는 이방의 말에는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원래 이런 일은 후방의 병사들이 맡아야 할 일이잖아요. 저와 장군님 모두 지위있는 무관인데 이렇게 시신을 매장하는 일까지 맡게 되다니요."“후방 병력이 어디 있겠소. 다들 전장에 나간 지 오래요.” 전북망이 냉엄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시오.” “성릉관의 병력은 턱없이
하루 종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 끝에, 날이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서경군은 마침내 웅성에서 물러났다.전투 때문에 성문과 성벽은 이미 크게 파손되어 더 이상 방어 기능을 하지 못했다.그들이 물러간 것은 어둠 속 전투가 불리하기 때문일 뿐, 내일이 되면 틀림없이 다시 들이닥칠 것이었다.서경군은 퇴각하며 전사자의 시신조차 거두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기름을 뿌려 불을 질러버렸다.불에 탄 것은 서경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성릉관 병사들의 시신도 함께 그 불길 속에 삼켜졌다. 소 대장군은 서경군과 함께 불 속에 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인원을 동원해 불길 속에서 시신을 구해내려 했다.하지만 기름을 부어 놓은 터라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고, 수습해 온 시신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전사자들은 그 불길 속에서 새까맣게 타버려 누구인지 분간할 수도, 서경군인지 상국군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함께 묻을 수밖에 없었다.소삼야는 전투가 끝난 뒤, 전장에서 만났던 그 용감한 병사를 찾아보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매장 업무에 차출되었으리라 여겼다.실제로 송석석을 비롯한 이들은 매장 임무에 투입되어 있었다. 송석석에게는 시신을 묻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모두 처음이었기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심지어 오랜만에 전장에 나선 전북망조차 침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렇다. 그들은 함께 깊은 구덩이를 파서 전사자들의 시신을 묻었다. 송석석은 전북망과 이방을 알아보았지만, 그는 송석석을 알아보지 못했다.횃불은 시커멓게 탄 시신들을 비추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옷과 살이 한데 엉켜 타들어간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여 진동했다.이제는 구덩이를 다 파서 이 시신들을 모두 묻어야 할 때였다. 몇몇 사람들은 시신들이 누구인지 구별해보려 애썼다. 성릉관의 병사들만이라도 따로 모아 묻고 싶어서였다.송석석 일행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 갑자기 이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만 찾고 빨리 장례나 치릅시다.
삼군은 일제히 대열을 갖추었고, 소 대장군은 그 앞에 나와서 장병들을 독려하며 사기를 북돋았다.소 대장군은 힘차게 연설을 마치고는 크게 외쳤다.“우리 상국 장병들은 어떤 위협도,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국의 한 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반드시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장병들은 모두 그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라 팔을 번쩍 들며 외쳤다.“어떤 위협도, 어떤 희생도 두렵지 않다! 상국의 한 치 땅, 한 명의 백성도 반드시 목숨 걸고 지킨다!”송석석 또한 대열에 함께하여 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비록 그녀는 비교적 뒤쪽에 서 있었기에 외조부의 얼굴이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람에 휘날리는 전투복 자락과 늠름한 기세만으로도 대장군의 기개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외조부는 이 수성전에서 화살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워졌고, 일곱째 외삼촌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셋째 외삼촌은 전북망을 구하려다 팔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가 모든 걸 바꿀 능력이 있는 건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곧이어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성릉관 전역이 진동했다.바로 그때, 성문 양옆의 측문이 열렸고, 장병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물밀듯이 앞으로 돌격했다.송석석은 장창을 든 채로, 소매 속에는 단도를 감추고 있었다. 몽동이와 다른 동료들도 각자 자신들에게 익숙한 무기를 쥔 채, 결연한 눈빛으로 선봉을 따라 전장을 향해 달려나갔다. 몽동이는 이미 전장을 경험한 바 있었고, 송석석 역시 전생의 기억까지 지니고 있는 반면, 시만자와 일행은 이런 참혹한 전투를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라는 두 글자가 가슴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순식간에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아우성, 그리고 비명 소리가 사방에 가득 찼다.송석석은 장창을 비틀어 적의 가슴을 꿰뚫고 온몸의 힘을 담아 앞으로 밀어붙여 몇 명을 넘어뜨렸다.그녀는 창을 뽑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려 허공에서 적의 머리를 밟고 섰다
전투 준비와 함께 성릉관 관문 근처에 거주하던 백성들도 전쟁의 영향을 피하도록 성 안으로 이주시켰다.관문 밖에는 몇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상국 백성이었고, 대대로 그곳에서 살아왔다. 과거에도 소 대장군은 전쟁의 위험을 이유로 그들을 관문 안으로 옮기자고 권유한 적이 있었지만 모두가 거부했다.성릉관과 서경의 마찰이 오래됐어도 그들 삶엔 영향을 준 적이 없었고, 이주란 곧 고향을 버리는 일이라며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이번에는 소 대장군이 직접 마을로 가 설득에 나섰다. 또한 전쟁이 발발해 마을이 파괴된다면 군에서 재건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소 대장군은 위세와 민심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나서서 긴 시간에 걸쳐 설득하자, 마침내 백성들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장병들도 이주를 돕기 위해 파견됐고, 송석석이 속한 부대 역시 그 일에 동원되었다. 불과 며칠 만에 이주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송석석은 기억하고 있었다. 양국 간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비록 애초에 백성을 죽이지 않고 평민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전쟁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면 약탈과 강제 이주가 뒤따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인명 피해가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주 조치는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마을 이주가 끝나자마자, 주 장군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했다.송석석의 기억에 따르면, 처음 성릉관에서 공성전이 발발한 후에야 조정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원군을 파병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도착하였다. 이는 지원군 도착 시점이 과거보다 훨씬 이른 셈이었다.송석석은 전북망과 이방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부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지원군 도착 바로 다음 날, 서경이 성릉관을 전면 공격해왔다.성벽 위에는 쇠뇌기가 여럿 설치되어 있었고, 성문 밖 빼곡한 서경 군을 겨누고 있었다.성릉관은 웅성 형태였으며 첫 번째 성벽은 튼튼하고 문
몽동이는 오자령 전투에서 공을 세워 백부장으로 임명됐고, 이제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릴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그는 노장군에게 직접 신병들을 훈련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자신이 지휘할 병력은 신병들 가운데서 뽑고 싶다고 말했다.노장군은 그 제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몽동이는 용감하니 전장 최전선에서 정예 병사들을 이끌도록 쓰는 편이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동이는 자신이 무림 출신이라 특별한 방식의 훈련법이 있다며, 신병들에게 그 방법을 적용하면 반드시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정예병으로 키워내겠다고 말했다. 몽동이는 군령장을 써서라도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노 장군은 실제로 그와 군령장을 쓰진 않았다. 이런 좋은 인재는 드물기에, 당연히 곁에 두고 잘 키우고 싶었는데, 그가 신병을 이끌고 싶다고 하니, 그냥 한 번 맡겨보기로 했다. 못하겠다고 하면 그때 다시 데려오면 그만이었다.몽동이는 기쁜 마음으로 신병 훈련소로 가서 병사들을 직접 선발하기 시작했다.그 중에 송석석과 만두, 시만자와 신신은 당연히 포함되었고, 그 외에도 용기가 있거나 머리가 빠르고 손발이 날쌘 병사들이 선발되었다.그렇게 선발된 백명의 병사들은 당당히 위소로 이동했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들도 전장에 투입될 것이었다.위소는 소식이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몽동이는 노장군에게서 조정이 성릉관에 지원군을 추가로 파견했다는 말을 들었다.지원군을 이끄는 장수는 노장군이었고, 그 휘하에는 전북망이 함께하고 있었다.몽동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들었어? 이번에 여장군도 온대. 도적 소탕에서 큰 공을 세웠다지! 태후께서도 엄청나게칭찬하셨대.”그러자 시만자와 신신은 눈을 반짝이며 그 여장군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졸라댔다.몽동이가 말했다.“나도 잘 아는 건 아니야. 다만 그녀 이름은 이방이고,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대. 그녀 부친은 원래 송회안 대장군 휘하의 장수였는데, 전장에서 다리를 다쳐 퇴역했대. 그 뒤로 보상금을 받고 딸인 이방을 군에 추천했
송석석은 마침내 시만자와 신신 일행과 재회했다.젊은 얼굴들을 마주할 때마다, 송석석은 마치 전생을 건너 다시 만난 듯 아득한 감정에 휩싸였다.모두 신병 훈련소에 들어가 기초 훈련을 받았다. 그 강도는 새로 들어온 신병들에게는 벅찰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그냥 살짝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하루 훈련이 끝나고 다른 신병들이 침상에 쓰러져 숨을 몰아쉴 때, 그들은 오히려 밖으로 나가 몇 바퀴 더 달리고 모래바닥에 드러 누워서 미래 계획을 나누곤 했다.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만두는 풀잎 하나를 입에 물고 두 손을 머리 뒤로 깔고 누운 채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듯 말했다.“석석아, 난 아직도 한낱 꿈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 이 먼 데까지 와서 군인이 되다니, 정작 전투도 시작되지 않았잖아.”“그래도 필요는 있지.” 시만자와 신신이 동시에 대답했다.글고 신신이 팔꿈치로 만두를 툭 치며 말했다.“왜 이럴 필요가 없어? 신선이 직접 석석이에게 꿈에 나타나 알린 거라니까. 그렇지 않으면 너랑 나랑은 왜 맨날 닭 훔치고 개 속이는 꿈 같은 것만 꾸고, 나라 일 같은 중대한 꿈은 한 번도 안 꿨겠어?”시만자도 거들었다.“다 떠나서, 세상 구경도 해보고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모두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만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늘 매산에서 지내 세상 물정을 거의 모르고 살았으니, 세상만사를 몇이나 직접 겪어봤겠는가?그리고 이제는 군까지 들어왔으니, 세상을 넓게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그럼 지금은 몽동이가 공을 세우기만을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냥 훈련만 받고 있잖아. 이래서야 어떻게 공을 세워서 우리의 대장이 되겠어?”만두가 묻자, 송석석이 대답했다.“조급해하지 마. 지금은 양국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은 충돌만 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전면전이 시작될 거야. 몽동이가 속한 부대는 분명 전장에 나갈 테고, 그 실력이라면 적을 죽이고 공을 세우는 건 문제도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