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물론 제가 아이를 낳으시라고 권하는 건 어디까지나 용화 씨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예요. 하지율 씨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아이를 낳는 거니까 하지율 씨도 아이도 주변의 시선을 감수해야 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고요. 가능성은 낮겠지만 주용화 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거나 어떤 이유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하지율 씨한테는 여전히 아주 어려운 선택일 거예요. 다만...”진소현은 문 쪽을 한번 바라봤다.조금 전 병문안을 왔을 때 하지율이 주용화를 밖으로 내보냈다.진소현이 다시 말했다.“지금 아이를 지우겠다고 해도 주용화 씨가 쉽게 동의하진 않을 것 같아요.”그러자 하지율이 물었다.“화야 씨는 원래 아이를 좋아해요?”진소현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윤택이나 시온한테 그렇게 잘해 주는 걸 보면 아이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그러고는 하지율을 바라보며 물었다.“지율 씨가 임신한 걸 알고 많이 기뻐하던가요?”하지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소현이 말했다.“그럼 그렇겠네요. 아이를 좋아하는데 하지율 씨가 아이를 지우겠다고 하면 그게 또 큰 자극이 될 수도 있어요. 지율 씨,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하지율은 주용화가 잠깐 기억을 잃었던 일도 이야기했다.하지만 진소현은 그 말을 듣고도 매우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그건 지율 씨가 알고 있는 것뿐이에요. 주용화 씨가 숨긴 일 중에는 우리가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어요. 그건 본인만 알겠죠.”하지율은 진소현의 뜻을 알아들었다.주용화의 상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진소현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용화가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자신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주용화를 바라보자 하지율은 마음 한구석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팠다.“지율 씨.”주용화가 하지율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제 우리한테 아기도 생겼으
최근 주용화는 줄곧 그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율 씨가 두 사람의 아이를 가진 이상 이제 그 준비도 필요 없어졌다.고소한 죽 냄새가 은은하게 병실 안에 퍼졌다.주용화의 시선은 뜨거운 불길처럼 하지율에게 꽂혀 있었다.마치 하지율을 뚫어 버릴 듯한 강렬한 시선에 하지율도 결국 더는 자는 척할 수 없어 다시 눈을 떴다.하지율이 눈을 뜨자 주용화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벌써 깼어요? 지율 씨, 조금 더 잘래요?”하지율은 이미 잠이 다 달아난 뒤였다.“됐어요.”주용화는 탁자 위의 죽그릇을 들어 온도를 확인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어요.”주용화는 숟가락에 죽을 떠서 하지율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율은 입맛이 없었지만 뱃속의 아이가 떠올라 결국 입을 벌려서 받아먹었다.하지만 입맛이 워낙 없어 3분의1 정도 먹고 나니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주용화도 억지로 먹이지 않고 대신 하지율이 남긴 죽을 그대로 마저 먹었다.그 모습을 본 하지율이 물었다.“화야 씨, 계속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네.”하지율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내려가서 뭐라도 좀 먹고 와요.”“괜찮아요.”죽그릇이 그리 크지 않기에 주용화는 금세 남은 죽을 다 먹었다.“이 정도면 됐어요.”하지율은 입술을 달싹였다.걱정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삼켰다.이번에는 주용화도 침대 곁에 앉아 계속 하지율만 바라보지는 않았다.대신 책 한 권을 가져와 소파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하지율은 다시 눈을 감았고 병실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오후의 햇살은 따뜻했다.하지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창밖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고 불을 켜지 않은 병실 안도 어스름했다.오후 내내 푹 자고 나니 하지율은 한결 정신이 맑아진 듯했다.눈을 굴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문득 어둠 속에서 깊고 검은 두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그런 시선이 얼마나 자신을 오래 쳐다보고 있었
하지율은 입술을 달싹였다.그동안 주용화에게 그렇게 모진 말을 쏟아냈으면서도 정작 지금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하지율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그 모습을 본 주용화의 눈에서 싸늘함이 사라졌다.주용화는 주위를 짓누르던 위압감도 어느새 모두 거둬들였다.주용화의 목소리는 다시 다정해졌다.“지율 씨, 아직 열이 안 내렸어요.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주용화는 물 한 잔을 따라 하지율에게 내밀었다.“조금 마셔요.”하지율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하지율은 눈을 감은 채 주용화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후,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살며시 입술에 닿았다.동시에 미지근한 물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하지율이 번쩍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 주용화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하지율은 눈을 크게 떴고 창백했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붉은 기운이 번졌다.하지율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피하자 입가로 물이 흘러내려 침대 시트 위에 떨어졌다.주용화는 하지율이 피하는데도 화내지 않았다.오히려 입가에 맺힌 물방울을 가볍게 입맞춤으로 닦아내며 말했다.“지율 씨는 아프잖아요.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셔야 해요.”하지만 하지율은 싸늘하게 말했다.“지금 물을 먹이려는 거예요? 아니면 이 틈에 저한테 수작 부리는 거예요?”주용화는 너무도 솔직하게 대답했다.“둘 다요.”하지율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그런데 주용화가 갑자기 하지율을 끌어안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지율 씨,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뒤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적 한 번도 없잖아요. 그동안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요.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게 당연한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지율 씨한테 화까지 냈네요. 저를 때린 것도 당연합니다.”하지율은 할 말을 잃었다.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주용화가 벌써 모든 이유를 대신 만들어 놓았다.주용화가 다시 하지율을 바라보며 물었다.“지율 씨, 아직도 화났어요? 그냥 저를
하지율이 정신을 차렸을 때, 희미하게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과로로 인한 고열입니다. 그리고 하지율 씨는 현재 임신 한 달 정도 됐습니다. 몸이 많이 약해진 데다 아직 임신 상태도 불안정해서 잠시 후 유산 방지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3달 정도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산 위험이 높아요. 이건 멍과 상처를 가라앉히는 연고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발라 주세요.”하지율은 멍한 상태로 눈을 떴다.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심한 어지럼증이 몰려와 하마터면 그대로 다시 쓰러질 뻔했다.“지율 씨.”주용화가 빠르게 하지율의 곁으로 다가왔다.“깨어났어요?”하지율은 작게 대답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그제야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저... 왜 이래요?”주용화의 검은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열이 많이 났어요.”“열이요?”심한 어지럼증 때문에 하지율은 평소보다 반응 속도가 한참 느렸다.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흐려도 기억해야 할 일들은 결국 하나씩 떠올랐다.눈앞에는 익숙하고 잘생긴 주용화의 얼굴이 보였다.그러나 어젯밤 악마처럼 변해 버린 주용화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하지율은 몸이 굳었고 숨마저 순간 멎는 듯했다.주용화는 거의 즉시 하지율의 이상을 알아차렸다.“지율 씨, 또 어디 불편해요?”하지율은 주용화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화야 씨, 어젯밤 일이 기억 나요?”옆에 있던 의사는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병실을 나가 문까지 닫아 주었다.주용화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이성을 잃었습니다. 미안해요.”하지율은 주용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러면 어젯밤 저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봐요.”주용화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하지율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어젯밤에 주용화의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뜬 주용화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주용화는 더 이상 이 이
하지율은 차갑고 비웃음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화야 씨, 저한테 화야 씨는 그저 제 손에 쥔 칼일 뿐이에요. 제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죠. 그런데 그 칼이 너무 날카로워요. 남을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다치게 하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버릴 수밖에 없어요.”주용화는 하지율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율 씨, 저는 필요할 때 곁에 두고 필요 없으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그러자 하지율은 담담하게 말했다.“화야 씨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예요.”주용화가 다시 물었다.“그래서 여전히 저를 떠날 생각이에요?”하지율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주용화의 말뜻은 마치 자신이 떠나고 싶지 않다고만 하면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듯 들렸다.하지만 하지율은 이미 주용화에게 너무 심한 짓을 했다.하지율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저는 지후 씨와 다시 결혼하기로 했어요.”주용화의 두 눈에 의미심장한 눈빛이 일렁였다.“그동안 계속 지율 씨가 먼저 연락해 주길 기다렸어요. 지율 씨가 와서 저를 달래 주기만 했으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찾아오기는커녕 매일 고지후와 함께 있었죠. 지율 씨, 저 지금 정말 많이 화났어요.”주용화의 입가에는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순간 주위의 공기까지 위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그래도 계속 저를 자극할 겁니까?”하지율은 순간 숨이 턱 막혔고 더 이상 주용화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러다가는 정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하지율은 고개를 돌려 주용화를 외면했다.“그만 돌아가요. 저 쉬고 싶어요.”주용화가 문득 낮게 웃었다.“그렇게 아이가 좋다면 우리도 하나 낳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다른 남자한테 자꾸 신경 쓸 일도 없을 테고요.”그 말에 하지율의 미간이 순간 세게 떨렸다.거절하려던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주용화가 하지율을 끌어안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주용화의 눈빛은 집요
그날 하지율이 계약을 마친 뒤 상대 회사의 축하연까지 참석하고 나니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고지후는 하지율의 파트너 자격으로 함께 행사에 참석했고 연회가 끝난 뒤에는 직접 차를 몰아 하지율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주용화가 한동안 하지율에게 연락하지 않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눈치채지 못하게 두 사람은 계속 연인인 척 연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밤이 깊어지자 도로 양옆의 가로등이 얼룩진 빛을 길 위로 드리웠다.하지율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화야 씨는 아직 Z국에서 안 돌아왔어?”고지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한테 들어온 소식은 없어. 하지만 주용화가 마음먹고 내 눈을 피하려고 하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야.”그러다가 하지율을 한번 바라보며 물었다.“너한테도 아직 연락 없어?”“응. 그래서 내일은 진소현 씨에게 연락해 보려고 해.”고지후가 다시 물었다.“만약 주용화가 차라리 너랑 헤어지는 걸 선택하고 끝까지 최면은 거부하면 어떻게 할래?”하지율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마음이 떠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익을 따지게 돼. 지금 화야 씨에게 난 예전에 지후 씨를 떠나기로 한 임채아 같은 존재인 거야. 지후 씨라면 가치도 없는 사람 하나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겠어?”고지후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고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지율아, 요즘 네 얼굴이 너무 안 좋아. 정말 괜찮아? 병원이라도 한번 가 보는 게 어때?”하지율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그냥 요즘 계속 제대로 못 쉬어서 그래. 그나저나 지후 씨는 언제 돌아갈 거야?”“일이 별로 없어서 난 M국에 좀 더 있어도 돼.”그러자 하지율이 물었다.“고윤영 씨는? 아직 안 데려왔어?”고지후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남한테도 하면 안 된다는 걸 이번 기회에 좀 배워야지. 거기서 조금 고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고지후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하지율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차는 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