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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4 19:28:31

그리고 그곳에는.

“김선우 과장님?”

쏟아지는 오후의 역광을 등진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얼굴의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리는 순간.

“…….”

“…….”

당연하지만 몹시도 낯선 얼굴이었다.

넓게 떨어진 어깨와 군더더기 없이 곧게 뻗은 몸선. 흐트러짐 하나 없는 검은 머리칼 아래로 선명하게 자리 잡은 눈썹. 날렵하게 뻗은 콧날과, 쉽게 웃음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빛을 받은 눈동자는 묘하게 푸른 빛이 나는 듯했다.

“김선우 과장님?”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대답이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남자가 선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단 로웰입니다.”

선우가 손을 맞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맞잡은 손 아래로 느껴지는 체온과 함께 자신을 휘감는 이 위화감은.

“…….”

짧은 접촉 사이로 제 맥박이 그대로 들킨 것 같은 기묘한 착각.

정말 이상한 착각.

선우가 먼저 손을 빼려는 순간, 남자가 먼저 손을 놓았다.

“아시아 태평양 브랜드 총괄로 파견 왔습니다. 이번 분기 신규 위스키 론칭부터 김선우 과장님과 함께하게 될 겁니다. 아, 그리고.”

그가 말을 잠시 끊었다.

“좋은 기획안이더군요.”

선우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쿵.

심장이 또 한 번 요란하게 제 존재를 드러냈다.

정말 부정맥이라도 걸린 거야, 김선우.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의 얼굴로 끌려갔다.

남자의 눈동자는 꼭 잘 숙성된 위스키의 원액처럼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자의 시선이 제 얼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몹시도 신경이 쓰이는 참이었다.

불편한 상사와의 독대를 피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도망!

“그럼……. 저는 이만 업무 복귀해 보겠습니다.”

선우가 눈치를 살살 살피며 서둘러 몸을 돌린 찰나였다.

“김선우 씨.”

발이 멈췄다.

“…….”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또!

천천히 돌아보자 에단은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그의 뒤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역광에 잠긴 얼굴은 절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 위스키 말입니다.”

남자가 웃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술 끝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네?”

“사람들이 잊지 못할 술을 만듭시다.”

“…….”

“누군가의 취향을 맞추는 데 그치지 말고.”

“…….”

“취향 자체를 바꿔버리는 술을.”

***

커서는 빈 문서 위에서 얌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깜빡.

깜빡.

깜빡.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다가 내렸다.

다시 올렸다.

결국 마우스만 빙빙 돌렸다.

‘누군가의 취향을 맞추는 데 그치지 말고, 취향 자체를 바꿔버리는 술을.’

“…….”

선우가 무심코 본부장실 쪽을 바라봤다.

닫힌 문 너머에 남자가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한 순간.

“과장님.”

“…….”

“과장님?”

“어?”

옆자리에서 민지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뭐하세요, 과장님?”

눈이 반짝반짝했다. 저 표정이면 십중팔구 쓸데없는 소리였다.

“뭘 하긴요. 일하죠?”

“일을요?”

민지가 선우의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봤다.

“지금 화면에 떠 있는 게 뭔데요?”

“…….”

선우도 따라 모니터를 바라봤다.

빈 문서였다.

커서만 얌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완전 영혼이 가출하셨는데요.”

“곧 쓸 거예요.”

민지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본부장님 때문에 그러시죠?”

“아니.”

민지의 눈썹이 한쪽 올라갔다.

“오.”

너무 빨리 대답했나?

“뭐, 왜요.”

“아무것도요.”

“업무 없어요, 민지 씨?”

“과장님.”

민지가 턱을 괴고 선우를 빤히 바라봤다.

“왜.”

“혹시 반했어요?”

“미쳤어요?”

선우가 즉각 민지를 노려봤다.

“큼.”

목소리까지 괜히 커졌다. 민지가 별안간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그렇게 정색을.”

“일이나 하세요.”

“근데 진짜 잘생기긴 했드라. 혼혈은 다 그런가?”

뭐, 그냥.

“……그냥.”

“그냥?”

“그냥.”

말하고 나서 선우는 스스로도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굳이 인정했지.

민지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바짝 기울였다.

“그냥 잘생긴 게 아니던데요?”

“뭐가.”

민지가 두 손으로 허공에 윤곽을 그렸다.

“잘생겼는데 막 예쁜 얼굴은 아니고. 뭔가…….”

잠시 고민하던 민지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권력 있어 보이는 얼굴.”

“권력 있는 얼굴이 따로 있어?”

“있죠, 왜 없어요.”

민지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자세 고쳐 앉는 얼굴.”

민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광에 반쯤 잠긴 실루엣이 다시 선우의 머릿속을 둥실둥실 떠다녔다.

선우가 괜히 모니터를 노려봤다.

어허.

저리 안 나가?

“게다가 그냥 본사 직속이 아니래요.”

민지가 다시 속삭였다.

“…….”

민지가 주변을 한 번 살폈다.

“쓸데없이 진지한데?”

“아시아 태평양 브랜드 총괄.”

“그건 아까 들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민지가 입술을 삐죽였다.

“직급보다 중요한 건 배경이라니까요.”

“무슨 소리야.”

“후계자 냄새.”

“참나.”

선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후계자 냄새는 또 뭐야.”

“진짜라니까요!”

민지가 억울하다는 듯 몸을 들썩이다 목소리를 낮췄다.

“딱 보면 알아요.”

“뭘.”

“자기가 어디에 앉을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

“엥.”

“그리고 한국 이름도 있다던데?”

“한국 이름?”

“네. 어머니가 한국 분이라고.”

“…….”

아주 박사네, 박사야.

“뭐더라.”

민지가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아, 맞다. 이현우!”

이현우?

선우의 손가락이 멈췄다.

“검색만 해도 나오는데? 완전 유명인.”

조금 전 회의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감청색 눈이 다시 떠올랐다.

“근데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민지가 다시 말했다.

“아까 저 지나가는데 눈 마주쳤거든요.”

민지가 두 팔을 쓸어내렸다.

“와…….”

“왜.”

“눈이 진짜.”

민지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결론을 내렸다.

“사람 잡아먹게 생겼어요.”

“치.”

선우가 피식 웃었다.

“과장님은 안 느껴졌어요?”

그 질문에 선우의 손이 멈췄다.

“분위기가 아주.”

민지가 의자를 빙글 돌렸다.

“딱 봐도 여자 한트럭은 울려봤을 것 같던데.”

민지가 씩 웃었다.

“뭐, 어쨌든.”

의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눈 조심하세요.”

민지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무슨 말이야.”

“그냥 그런 느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민지는 이미 업무로 돌아가 있었다.

“…….”

선우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빈 문서.

깜빡이는 커서.

그리고 조금 전부터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사람.

“…….”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첫날부터 사람을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는 것도 능력인가.

그때였다.

본부장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 짧게 오가는 인사말,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한꺼번에 겹쳤다.

그 사이로 에단이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서류철이 들려 있었고, 다른 손은 바지 주머니에 느슨하게 꽂혀 있었다.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는 걸음이었다. 걷고 있을 뿐인데 사무실 안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

에단의 시선이 사무실을 느긋하게 훑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러다 멈췄다.

선우에게.

“…….”

“…….”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선우의 미간이 폭삭 찌푸려졌다.

“…….”

지금 나 보고 웃은 거 맞지?

선우가 못 볼거라도 본 사람처럼 모니터에 시선을 박았다.

괜히 들킨 기분이었다.

뭘 들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고개를 돌리고 나서도 이상했다.

귓가가 뜨거웠다.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고 있었다.

‘눈 조심하세요.’

선우는 아직 몰랐다.

오늘 처음 마주친 이 남자가 앞으로 자신이 그토록 견고하게 지켜온 모든 취향과 기준의 안전장치를 하나씩 낱낱이 망가뜨릴 사람이라는 것을.

***

밤이 깊어가는 압구정의 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차분한 도심의 야경이 기묘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또 마주칠까 겁나던 신임 본부장은 인사를 끝으로 코빼기도 안비췄다.

다행이었다.

오늘은 퇴근이 조금 늦었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시장 조사를 할 겸, 어제부터 꼬여버린 머릿속도 정리할 겸. 선우는 결국 수정의 바를 향했다.

잔업에 시달린 피로와 하루 종일 이어진 소란의 잔상이 눅눅한 밤공기와 뒤섞여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어제 그렇게 마셔놓고 또 술이었다.

문제는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거였다.

선우에게 술은 늘 그랬다.

기분이 좋을 때도 술.

기분이 나쁠 때도 술.

인생에 닥친 수많은 문제 앞에서 찾아낼 수 있는 해답이 늘 술 말고는 없다는 사실.

그 서글픈 관성마저 이제는 익숙해진 채 선우는 미로 같은 골목 끝에 숨어 있는 수정의 가게로 발을 들였다.

수정이 바텐더로 일하는 바는 압구정 일대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낡은 벽이었다.

간판도 없고 문도 없었다. 처음 온 사람이라면 여기가 바인지, 창고인지, 아니면 그냥 잘못 들어온 골목인지 한참 고민할 만한 곳.

벽 한쪽에 붙은 오래된 전화기만이 유일한 단서였다.

선우가 수화기를 들었다.

찰칵.

잠시 뒤 낮고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벽 한쪽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안쪽에서 은은한 조명이 새어 나왔다.

“별나다니까.”

하지만 그 별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좋았다.

바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끊겼다. 바 안은 꼭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깊은 수조 같았다.

“왔어요?”

바 테이블 안 쪽에서 수정이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손을 흔든 수정이 익숙한 몸짓으로 잔 하나를 밀어주었다.

“언니가 좋아하는 거. 암룻 퓨전(Amrut Fusion).”

“굿 초이스.”

암룻 퓨전.

인도 북부의 보리와 스코틀랜드의 보리. 서로 다른 대륙의 맥동이 한 병에 담긴 이 싱글몰트 위스키는 선우가 유독 애정하는 술이었다.

“음.”

잔을 코끝에 가져다 대자, 열대 우림의 습한 열기 속에서 말린 과일을 구워낸 듯한 묵직한 달콤함이 먼저 치고 올라왔다.

곧이어 볶은 커피와 구운 곡물의 고소함이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꿀처럼 끈적한 단맛과 희미한 장작불 향이 입천장에 길게 남았다.

선우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좋다.”

수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사진, 미안해서 부른 거에요.”

사진. 민재의 바람을 제보한 것에 대한 찜찜함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왜 니가 미안해. 덜떨어진 짓은 그 자식이 했는데.”

“그래도요.”

수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보낸 거잖아요.”

선우가 남은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내곤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시간 아꼈어. 고마워.”

“그럼 다행이고.”

수정이 빈 잔을 다시 채웠다.

꼴꼴꼴.

액체가 유리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선우가 잔을 손끝으로 빙글 돌렸다.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요?”

“이번에는 좀 다를 줄 알았어.”

평소라면 목구멍 안쪽에서 몇 번이나 걸러냈을 말이 쉽게 흘러나왔다. 벌써 술기운이 도는지 괜히 진솔해지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안 그러겠지 했는데.”

담담함으로 위장한 문장 사이마다 정돈되지 못한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수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잔을 닦던 손을 멈췄다.

“아니에요.”

선우의 눈이 올라갔다.

“처음부터 티 나잖아요.”

“…….”

“적당히 괜찮고,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

“망해도 안 아픈 쪽.”

정확히 찔렸다.

“야.”

“왜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세게 말해.”

“팩트잖아요.”

수정이 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안 건드리잖아요, 언니.”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반박할 틈조차 없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지난 연애의 파편들은 하나같이 수정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선우가 손에 쥔 잔을 내려다봤다. 유리잔 너머로 흔들리는 금빛이 꼭 제 마음 같았다.

넘실넘실댄다.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잡히지도 않고.

버리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 흔들리는 것.

“…….”

결국 잔을 들어 남은 위스키를 몽땅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마음까지 같이 태워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근데 오늘 회사 재밌었겠다.”

수정이 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선우가 잔을 내려놓았다.

“재미?”

“본사에서 거물 하나 내려왔다며.”

선우의 손이 멈췄다.

거물급 파견이라면, 에단 로웰을 말하는 건가.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이 바 오는 사람들 절반이 언니 업계라니깐.”

수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특히 그 거물이 아주 잘생겼다는 소문은 더 빨리 퍼지고.”

“……그런 얘기까지 들었어?”

“보통 호들갑은 아니더라고. 그걸 못 들었다면 내가 귀머거리죠.”

“무슨 비밀이 없어.”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더니. 사람들 입에 오른 소문은 발이 아니라 날개라도 단 모양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김민재가 괘씸해지는 중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몸을 떨었다.

지이잉.

선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휴대폰으로 향했다.

“누구지?”

화면에 떠 있는 건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이 시간에?

선우는 잠시 손을 뻗지 못했다.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망설이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부지런히 몸을 떨었다.

지이잉.

결국 선우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

선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잘못 걸려온 전화인가 싶어 끊으려던 순간.

찰나의 정적 너머로.

ㅡ “김선우 과장님.”

선우의 손끝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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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 부정맥 메이커   99.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 부정맥 메이커   98.

    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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