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는 예고 없이 쏟아졌다.오후까지만 해도 흐리기만 했던 하늘이 해 질 무렵 갑자기 무너졌다.빗줄기는 굵었고,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다.규칙 없이 쏟아지는 소리. 그건 사람의 감정과 비슷했다.헬스장 로비는 유난히 습했다.젖은 우산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을 따라 길게 번졌다.이수는 일부러 러닝머신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로 자리를 옮겼다.이어폰은 귀에 꽂았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다.주변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태훈이었다.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그는 우산을 접으며 로비를 훑었다.그리고, 이수를 발견했다.눈이 멈췄다.그 멈춤이 길었다.이수는 모르는 척 속도를 조절했다.숨이 일정하게 오르내렸다.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다.태훈이 다가왔다.“또 보네요.”그는 웃는 얼굴을 만들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그러게요.”이수는 속도를 줄이며 말했다.“비 많이 오네요.”“네.”짧은 대답.그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손목, 다리로 천천히 내려갔다.확인하듯, 훑듯.“요즘 자주 오시네요.”“건강 챙기려고요.”"아직.. 만나시는 분은""없어요이수의 대답은 전과 같았지만, 이번엔 살짝 웃음이 섞였다.그 작은 변화가 태훈의 신경을 건드렸다.“확실해요?”“왜요.”“그냥.”그는 물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요즘 이상하게 불안해 보여서.”그 말은, 며칠 전 이수가 그에게 던졌던 문장이었다.이수는 고개를 기울였다.“제가요?”“네.”“왜 그렇게 생각하세요.”태훈은 대답하지 못했다.자신이 불안한 건지, 상대가 불안한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이수는 머신을 멈추고 내려왔다.“저 먼저 갈게요.”태훈의 눈이 흔들렸다.“벌써요?”“네.”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누가 기다려서.”그 문장은 일부러 던진 것이었다.태훈의 얼굴이 굳었다.“누가...”“일일이 대답할만큼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죠”그녀는 가볍게 웃고 돌아섰다.태훈은 그 자리
태훈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지만, 곧바로 출발하지는 못했다.핸들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숨이 거칠게 올라왔다가 내려갔고, 이마에 맺힌 땀이 천천히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받지 않는 전화.거절된 영상통화.헬스장에 없던 여자.생각은 단순했지만, 감정은 단순하지 않았다.의심은 논리가 아니라 상상으로 자라났다.그리고 그 상상은 점점 구체적인 얼굴을 만들어냈다.‘누구지.’그는 스스로에게 묻는 대신, 이미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있었다.액셀을 밟는 순간 차가 튀듯 앞으로 나갔다.젖은 도로 위로 타이어가 얕은 물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달렸다.집 안은 고요했다.미정은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깨진 휴대폰 액정 위로 가느다란 금이 여러 갈래로 퍼져 있었다.손목에는 아직 태훈의 손자국이 옅게 남아 있었다.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태훈이 들어왔다.술 냄새는 진하지 않았다.그 대신, 눈이 붉어 있었다.“왜 안 받아.”목소리는 낮았지만, 눌린 분노가 묻어 있었다.“받고 싶지 않았어.”미정의 대답은 예상보다 담담했다.“왜.”“지금은 말해도 안 통하니까.”태훈은 웃었다.짧고 비틀린 웃음이었다.“그래서 누구랑 통하는데.”그는 천천히 다가왔다.한 걸음, 또 한 걸음.“헬스장?”“아니.”“그럼 누구.”“아무도.”“거짓말.”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미정의 가방을 뒤졌다.지퍼가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방 안을 긁었다.“그만해.”“왜.”“이제 그런 거 안 보여줄 거야.”태훈의 손이 멈췄다.“안 보여줘?”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가 뭔데.”그 문장은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남편이 아니라 주인이 말하는 어투였다.미정은 그 눈을 똑바로 보았다.“나도 사람이야. 더이상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라고”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 틈이 미정에게는 처음으로 생긴 공간이었다.“말 다 했어?.”“아니...이제 나도 물러서지 않고.”미정은 천천히 말했다.“지킬거야.”
깨지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쨍’ 하는 소리 대신 ‘탁’ 하고 무거운 소리가 먼저 났다.그 다음에야 조각들이 흩어졌다.미정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일부러지.”태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아니.”“또 아니래.”그는 천천히 다가왔다.어제보다 조용했고, 그게 더 무서웠다.“요즘 왜 이렇게 당당해.”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는 순간, 그의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갈 것 같았다.“핸드폰.”그가 말했다.“오늘은 보여줘.”“싫어.”짧은 거절. 태훈의 턱이 굳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으니까 안 보여주는거 아냐?”“숨기는 거 없어.”“그럼 왜 안 보여주는데?”미정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당신이 무서우니까.”태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또 그 소리.”“맞아.”“내가 뭐 했는데.”그 말이 나왔다.그 말은 늘 그를 보호했다.‘내가 뭐 했는데.’기억하지 않는 척하는 문장.“어제.”미정이 말했다.“손 들었잖아.”“안 때렸잖아.”“때리려고 했잖아.”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그리고, 웃었다.“그 정도도 못 참아?”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미정은 깨달았다.이 사람은 폭력의 기준이 다르다.그에게 폭력은 피가 나야 성립한다.“난.”미정이 낮게 말했다.“들리는 것도 무서워.”태훈의 표정이 굳었다.“요즘 누가 자꾸 말해주지.”“뭐를.”“내가 나쁜 사람이라고.”그의 눈은 의심으로 가득했다.미정은 가만히 그를 봤다.“아니.”“그럼 왜 이렇게 변했어.”“원래 그랬어.”“거짓말.”그는 한 발 더 다가왔다.“남자 생겼지.”“아니.”“헬스장.”그 단어가 나왔다.미정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왜.”“거기서 누구 만나는 거 아니야?”그는 이미 결론을 내린 얼굴이었다.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몰아가려는 표정.“당신이 가서 봐.”미정의 말은 의외로 차분했다.태훈은 잠시 멈췄다.“뭐.”“가
불은 이미 붙어 있었다.태훈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술잔을 드는 손이 그 증거였다.‘한 잔만.’그 말은 늘 시작이었다.미정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전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운동.”태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요즘 운동 열심히 하네.”“응.”“누구랑.”“혼자.”태훈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헬스장에 남자 많지.”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태훈을 더 자극했다.“나 바보 아니야.”“누가 뭐래.”“요즘 너.”그는 잔을 비웠다.“평소랑 달라졌어.”“그래”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달라졌어.”그 한 문장이 방 안 공기를 갈랐다.태훈의 얼굴이 굳었다.“왜.”“이제 무섭다고 말했잖아.”“그거랑.”“연결돼.”그는 잠깐 멈췄다.“누가 옆에서 말했지.”“아니.”“그럼 혼자?”“응.”태훈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주먹으로 변했다.“너.”그가 낮게 말했다.“남자 생긴거 아냐?”미정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그런거 아니야.”“눈이 그래.”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핸드폰 줘봐.”“싫어.”짧은 대답.태훈은 그 한 단어에 잠깐 얼어붙었다.“뭐?”“싫다고.”그의 눈동자가 확연히 흔들렸다.“너.”“이제 안 보여줄 거야.”태훈의 숨이 거칠어졌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없어.”“그럼 왜.”“당신이 이제는 싫고 무섭거든.”그 말은 조용했지만 정확했다.태훈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손이 올라갔다.미정은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손은 멈췄다.허공에서.그 멈춤이 더 위험했다.“봐.”태훈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그 문장은, 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전형적인 문장이었다.미정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아니.”“뭐가 아니야.”“당신이야.”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그 순간, 태훈의 휴대폰이 울렸다.회사 동료였다.그는 이를 악물며 전화를 받았다.“어.”목소
와인바에서 돌아온 뒤로도 이수의 머릿속은 잠잠해지지 않았다.태훈의 말투.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라고 말하던 순간의 눈빛.그 눈빛은 부정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의 눈이었다.“기억 안 난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복한다.”하빈은 운전석에 앉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그래.”이수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근데 이번엔 단순 폭행으로 가면 길어져.”“그래서.”“불안.”이수는 고개를 돌렸다.“저 사람은 폭력보다 불안이 먼저야.”하빈은 그녀를 봤다.“아내가 밖에 나가는 게 불안했고.”“통제 안 되는 게 싫고.”“그래서 붙잡는 거고.”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불륜을 만들려면 욕망이 필요해.”“근데 태훈은?”“욕망보다 소유욕이 커.”차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하빈이 물었다.“그럼 어떻게 도발할 건데.”이수는 짧게 웃었다.“질투.”다음 날 오후. 미정은 장미 미용실에 앉아 있었다.손이 아직 조금 떨렸다.어제 집을 나왔다가, 밤늦게 다시 들어갔다.아이 때문에. 남편은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이었다.“어제는 어땠어요.”이수가 묻자 미정은 씁쓸하게 웃었다.“미안하대요.”“그리고.”“나 없으면 못 산대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예상 그대로였다.“그래도.”미정이 덧붙였다.“눈이 이상했어요.”“어떻게요.”“붙잡고 싶어 하는 눈.”이수는 잠시 생각했다.“좋아요.”“뭐가요.”“이제 그 눈을 더 흔들 거예요.”미정은 놀란 표정이었다.“저… 위험해지지 않나요?”“조심할 거예요.”이수는 부드럽게 말했다.“이번엔 물리적으로 붙잡히는 상황 안 만들 거예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남편분 요즘 술은?”“끊겠다고 했어요.”“완전히요?”“아니요… 집에선 안 마신대요.”이수는 미묘하게 웃었다.“밖에서 마신다는 말이네요.”저녁에 태훈은 헬스장 로비에 서 있었다.이수는 운동복 차림이었다.머리는 묶었고, 화장은 거의 하지 않았다.와인바에서와는 다른 분위기
다음 날은 유난히 조용했다.장미 미용실 유리문에 비친 거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이수는 자꾸만 휴대폰 화면을 뒤집어 보게 됐다.연락은 오지 않았다.“안 와?”하빈이 물었다.“안 와.”“의외네.”“아니.”이수는 고개를 저었다.“저런 사람은 바로 안 움직여.”하빈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봤다.“왜.”“자기가 밀린 걸 인정하기 싫으니까.”이수는 가위를 들고 머리를 자르면서도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았다.어제 태훈의 손.짧았지만 분명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놓는 순간의 표정.‘들켰다’는 얼굴.그건 중요한 장면이었다.폭력은 항상 작은 균열에서 먼저 드러난다.그리고 들켰다고 느끼는 순간,그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더 숨기거나, 더 세게 누르거나.“오늘 안 오면,”하빈이 말했다.“네가 먼저 움직일 거야?”“아니.”“왜.”“기다리는 게 더 불안하거든.”그 말에 하빈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너.”“응?”“요즘 더 차가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이수는 웃지 않았다.“차가운 게 아니라 계산하는 거야.”“같은 말이야.”잠깐의 정적.하빈은 덧붙였다.“계산하다가 다쳐.”이수는 대답 대신 손님의 머리를 말렸다.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떨어졌다.발신자: 태훈.이수는 바로 받지 않았다.벨이 세 번 울리고, 네 번 울릴 즈음 받았다.“네.”잠깐의 침묵.그쪽에서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어제.”태훈이었다.목소리가 낮았다.술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네.”“어제 일은.”“뭐요.”“미안합니다.”형식적인 사과였다.이수는 차분하게 말했다.“뭐가요.”그는 잠깐 말을 고르는 듯했다.“손.”“기억하네요.”태훈의 숨이 한 번 멈췄다.“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그 말이 나왔다.이수는 조용히 웃었다.“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그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오늘.”그가 말했다.“시간 되세요?”“왜요.”“얘기 좀 하고 싶어서.”이수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