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미용실 문을 여는 손끝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장미 미용실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리문은 늘 같은 무게였지만,오늘은 이상하게도 한 번 더 밀어야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문이 아니라,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이수는 불을 켜고 안쪽을 한 번 훑어봤다.의자는 제자리에 있었고, 거울은 밤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인데도, 그 안에 서 있는 자신만 조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머리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손목에 남은 고무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사라지지 않는 건 늘 이런 것들이었다.눈에 잘 띄지도 않고, 굳이 설명할 수도 없는 흔적들.하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원래라면 이 시간쯤 커피를 들고 들어왔을 텐데, 오늘은 그 기척이 없었다.이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빗자루를 집어 들고 바닥을 쓸었다.소리가 크지 않게, 바닥을 긁지 않게. 쓸고 또 쓸면서 생각은 자꾸 다른 데로 흘러갔다.병원 복도. 차가운 바닥.기계음이 일정하게 이어지던 그 밤.이수는 빗자루를 멈췄다.멈춘 김에, 숨도 잠깐 고르고 있었다.과거는 이렇게, 아무 예고 없이 끼어들었다.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문득 비슷한 공기가 닿으면 스며들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일찍 와 있었네.”하빈의 목소리였다.평소보다 낮았고, 조금 느렸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너도 늦었네.”“어제 좀… 정리할 게 있어서.”그는 커피 두 잔을 내려놓았다.하나는 이수 앞에, 하나는 자기 앞에 말없이 내려놓는 동작이 익숙했다.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의 몸짓이었다.이수는 컵을 만지작거리다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먼저 왔고, 뒤늦게 고소함이 남았다.괜히 그 순서를 기억해두었다.“어제,”하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괜찮았어?”‘괜찮다’는 말은 참 애매했다. 무사했다는 뜻도 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도 되니까.“응. 그냥… 생각이 좀 많았어.”“그렇겠지.”그는 더 묻지 않았
“괜찮아.”이수가 말했다.습관처럼 나오는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하빈은 이수를 잠시 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괜찮다는 말을 믿어서라기보다는,믿어주는 편이 더 나은 순간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미용실 문 밖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비가 오지 않는 아침이었다.이수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 숨이 편해졌다.가위와 빗을 꺼내 놓으며 이수는 문득, 아버지 병실의 형광등을 떠올렸다.그곳의 빛은 늘 똑같았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더 잔인했다.여기처럼 아침과 낮이 나뉘지 않았고,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는 빛이었다.이수는 그 기억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붙잡지 않는 법을 이미 충분히 배웠기 때문이다.“오늘 일정은?”하빈이 물었다.“예약 두 명.”이수가 말했다.“그리고… 오후에 한 사람 더 올 수도 있어.”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의 뒷부분을 이해했다.‘머리를 하러 오는 손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라는 걸.“무리하지 마.”그가 말했다.이수는 웃었다.짧게, 아주 작게.“그 말,”이수가 말했다.“너한테 들은 지 벌써 몇 년 된 것 같아.”“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지.”“알아.”이수는 가위를 들었다.손끝에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이 손은 한때 산소마스크의 끈을 잡았고,문을 밀고 나왔고, 비를 맞으며 떨었고,이제는 사람의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같은 손이었다.그 사실이 이수를 조금 이상하게 만들었다.사람은 이렇게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같은 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게.하빈은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다.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는 이상하게 안정적이었다.누군가 옆에서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수는 그 감각을 아주 오래 붙잡아 왔다.하빈은 묻지 않았다.그 밤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이수가 왜 이 일을 선택했는지,왜 남의 결혼 안으로 들어가는지,왜 위험한 방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도망치지도 않았다.그날, 이수는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고 누군가 곁에 서 있었다.그 곁은 따뜻한 곁이 아니라, 그저 비를 덜 맞는 곁이었는데도.이수는 그 곁이 낯설어서, 더 움직이지 못했다.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는데..""갈 곳은 있어요?"'갈 곳'이라는 단어가 이수를 찔렀다.이수에게 집은 이미 집이 아니었다.민준이 있는 곳이 집이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자살 같은 일이었다.이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그리고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없어요.”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주소는 있을지 몰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대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그럴 수도 있죠”라고 말하는 것처럼.“그럼,”그가 말했다.“일단… 비 좀 피하죠.”“여기서 이러다 정말 쓰러져요.”이수는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거절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통제나 목적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민준의 말은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너를 내 안에 묶어두겠다’는 목적.그런데 지금 이 남자의 말에는 목적이 없었다.그게 이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우산 아래에서 한 발 옮겼다.그리고 또 한 발. 발걸음이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수는 이상하게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그 남자는 이수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이수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이 밤에는 이름 같은 게 필요 없었다.이 밤은 그저, 살아남는 밤이었고, 숨을 이어붙이는 밤이었다.그렇지만… 이수는 몰랐다.이 낯선 남자와의 이 한 걸음이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옆에서 버티게 해줄 “동행”의 시작이 될 거라는 걸.그 남자가 강하빈이라는 것도,그가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 이수의 일을 돕게 될 거라는 것도,그 모든 건 아직 알지 못했다.다만 이수는, 비가 그치지 않는 밤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혼자 도망치
산소마스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투명한 플라스틱과 얇은 고무줄.이게 사람의 생을 붙잡고 있다니, 그 사실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이수는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그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했다.눈꺼풀은 닫혀 있었고, 주름은 펴져 있었으며, 입가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이수는 속으로 물었다.아빠는 지금, 나를 원망할까.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들어 있을까.그 질문에 답은 없었다.답이 없다는 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이수의 손끝이 마스크 끈을 건드렸다.순간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떨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마지막 반응에 가까웠다.그 반응을 넘어서야만, 이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어차피…”이수는 거의 소리 없이 말했다.“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지금 가셔도 서운하지는 않죠?”그 말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었다.이수는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으면, 다음 순간을 넘길 수 없었다.마스크를 벗기는 과정은 생각보다 빨랐다.끈이 풀리고, 플라스틱이 들리고,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이수는 그 얼굴을 끝까지 봤다.어떤 순간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돌리면, 그건 도망이 될 것 같아서였다.기계음이 달라졌다.삐.., 삐...의 간격이 흔들렸다가, 어느 순간 길게 늘어졌다.이수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소리를 듣는 건 확인이었고, 확인은 마음을 붙잡는다.이수는 마음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병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복도의 공기가 달랐다.소독약 냄새는 여전했지만, 방금 전까지 ‘살아 있는 척’하던 공기는 병실 안에만 남겨졌다.이수는 걷기 시작했다.도망치듯이, 그러나 무작정은 아니었다.‘이제 나는 도망칠 수 있다.’그 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똑바로 섰다.아버지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도망.그게 너무 잔인하다는 걸 이수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민준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이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면, 이수는 그걸 선택했을까.
병실의 공기는 차갑고도 무기력했다.소독약 냄새가 벽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형광등 빛은 사람의 피부를 조금씩 말려버리는 색이었다.바닥은 늘 반듯하게 닦여 있었지만, 그 반듯함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여기서는 누구도 흐트러질 수 없다는 듯이.이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자세는 단정했지만, 단정함이라는 건 가끔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형식”이 되기도 한다.손등 위로 손을 포개고, 숨을 고르면서도, 눈은 침대 위의 남자를 놓치지 않았다.서종민. 아버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엔 너무 오래, 너무 여러 번 버텨온 이름이었다.아버지의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투명한 플라스틱 너머로 김이 얇게 맺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 반복이 마치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기계가 “살려 두고 있는” 방식이라는 걸.기계는 성실했다.삐..., 삐....간격을 어기지 않고, 감정을 섞지 않고, 단지 기능으로만 존재했다.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사람도 어느 순간 기계처럼 생각하게 된다.이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이건 유지하냐, 끊느냐.의사는 오늘도 같은 말을 했다.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의식이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다고, 수치는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의 끝에는 늘 조심스러운 침묵이 따라붙었다.“결정은 가족이 하셔야 합니다.”그 말은 직접적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는 언제나 그 문장이 떠 있었다.가족. 이수는 속으로 그 단어를 한번 굴렸다.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였고, 그 하나 때문에 이수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그리고 그 하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 좋은 ‘줄’이었다.당기면 이수가 움직이는 줄.민준은 그 줄을 잡고 있었다.이수가 처음 민준을 만난 것도 병원이었다.그때의 이수는 계산을 잘하지 못했고, 스스로가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지조차 정확히 몰랐다.대출, 사채, 수
삼겹살집 안은 늘 그렇듯 시끄러웠다.환풍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 소리와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며 튀는 소리,옆 테이블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서로를 밀어내듯 뒤섞여 있었다.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생활의 소음이었다.이수는 그 소음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조용해졌다.장미 미용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고,머릿속으로 계산을 반복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여기,”하빈이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자주 오던 집이잖아.”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한동안은 거의 매주 왔지.”‘한동안’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언제부터 자주 오지 않게 됐는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그걸 정확히 말하는 순간, 지금의 자리가 설명해야 하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하빈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언제부터, 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 선택이 이수에게는 고마웠다.이런 자리는 괜히 정리하려 들지 않을수록 편해진다.삼겹살이 익자 하빈은 고기를 잘라 이수 앞 접시에 올려줬다.늘 하던 동작이었다.“먹어.”“이러다 다 타.”“응.”이수는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씹는 동안 생각이 잠시 멈췄다.고기 맛이 어떤지, 쌈장이 짠지 그런 것들이 오랜만에 중요한 감각처럼 느껴졌다.“요즘,”하빈이 불쑥 말을 꺼냈다.“너 많이 달라졌어.”이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빈을 봤다.“어떻게.”“말수가 줄었어.”“예전엔 말 안 해도 뭔가 남아 있었거든.”“지금은?”이수가 물었다.하빈은 잠시 생각했다.“지금은… 아예 안 보여주려고 하는 느낌.”이수는 웃었다.짧고, 무심한 웃음이었다.“그게 더 편할 때도 있어.”“너만 편한 거지.”하빈이 낮게 말했다.“보는 사람은 불편해.”이수는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잔을 들어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그때, 유리창 너머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처음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
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무거웠다.비가 그쳤다는 사실보다, 언제든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습기는 벽에 남아 있었고, 냄새는 아직 빠지지 않았다.이수는 카페 문을 열며 잠시 멈췄다.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어제와 달랐다.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컵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진상은 이미 나와 있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오늘은 왜이렇게 일찍 왔어요?”이수가 말했다.말끝은 가볍게 올렸지만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잠이 안 와서요.”그는 그렇게 답했다.변명처럼 들리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