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4화. 사과라는 이름의 소환장

last update 게시일: 2026-05-17 13:38:42

“아니, 오빠! 어제 그놈들 옷깃에 황실 문장이 있지 않았어요? 황실이 우릴 노린 거였잖아!”

​

내 물음에 칼라일 오빠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

“옷깃에 뻔뻔하게도 황실의 태양 문장을 수놓았더군. 하지만 확인해 보니 조잡하게 꾸며낸 모조품이었다.

누군가 황실을 사칭해 우리 루체른을 노린 거야. 가장 연약한 너를 인질로 삼으려는 비열한 수작이겠지.”

“……네? 사칭이요?!”

​

카시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얼빠진 얼굴을 보니 ‘카시안이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곧 더 큰 충격에 빠졌다.

​

‘카시안 오빠도 아니고, 황제가 보낸 것도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구지?

상점가의 그 소년인가? 아니면 이 은 원통을 노리는 제3의 세력이 또 있다는 건가?!’

​

황제가 보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할 틈도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흑막이 내 목숨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끔찍한 공포가 밀려왔다.

​

“누군진 몰라도 선을 넘었어. 오늘부로 저택의 결계를 세 배로 올리고, 호위 기사들을 전부 정예로 교체한다.

카엘루스 폐하께도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그 ‘고드름 쥐새끼들’을 황궁으로 보냈다.”

​

우리 가족의 환장할 동상이몽 조찬 모임은 그렇게 각자의 지독한 두통을 안은 채 흘러갔다.

제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이 루체른의 고요한 식탁 위로 서서히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

​​

[그 시각, 황제의 집무실]

​

“……그래서. 루체른 공작이 이것들을 친히 내게 보냈다는 건가?”

​

나른하게 옥좌에 기대앉은 카엘루스의 붉은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최고급 대리석 위에는 꽁꽁 얼어붙어 해동(?) 중인 사내 셋이 널브러져 있었다.

​

근위대장 엘릭이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

“예, 폐하. 누군가 황실을 사칭하여 루체른 공작저, 그것도 막내 영애의 침소를 노렸다고 합니다. 폐하의 이름을 도용한 겁도 없는 쥐새끼들이니 황실 차원에서 엄중히 조사해 달라는 공작의 전언입니다.”

​

카엘루스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어붙은 사내의 옷깃을 거칠게 젖혔다.

조잡하게 수놓아진 황실의 태양.

​

“하. 짐의 그림자? 감히 내 이름을 사칭해?”

​

카엘루스의 적안이 짙은 짜증과 흥미로움으로 번뜩였다.

감히 제국의 지배자인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놈들의 배짱도 가상한데,

왜 하필 목적지가 루체른 공녀의 방인 걸까?

​

‘루체른 공작저 영애의 방이라…’

​

순간, 카엘루스의 뇌리에 며칠 전 황궁 정원에서 마주쳤던 눈부신 백금발의 여인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을 지우는 이능력자 와 루체른 영애를 노린 사칭범들.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묘하게 거슬렸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짜증 나는 상황이지. 내가 요즘 너무 자애로웠나 보군.”

​

카엘루스는 얼어붙은 가짜 암살자의 머리를 툭 차며 낮게 읊조렸다.

무심한 발길질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집무실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서늘했다. ​

​

“엘릭. 루체른의 그 막내 여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폐하.”

“흐음…….” ​

​

입가를 만지작거리던 카엘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숨바꼭질은 여기까지다.

짐의 정원을 헤집어 놓고 도망친 그 당돌한 사냥감을 이제는 직접 확인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

​

​

​

당분간 칼라일 오라버니의 당부에 따라 한동안 저택에만 있기로 마음먹은 엘리노아는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

싱그러운 봄바람에 그동안 있었던 다사다난했던 근심을 다 잊고

우아하게 최고급 다즐링 티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갑자기 집사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황궁 인장이 찍힌 편지가 왔습니다!”

​

푸읍—!

​

마시던 차를 시원하게 분수처럼 뿜어낸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낚아챘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적힌 예언서를 여는 기분이었다.

​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뜯어본 편지 안에는,

황제다운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필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

[루체른의 공녀에게.] ​

지난밤, 그대의 방에 잘못 찾아간 ‘짐의 그림자들’에 대한 사과를 직접 전하고 싶군. 밖에 세워둔 마차에 오르도록. 거절은 필요 없어. 황명이거든. 그럼.

​

“……사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거절은 필요 없어’라니! 이건 초대장이 아니라 소환장이라고.

아니다, 소환장도 아니라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는 명백한 영장이었다. ​

​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더럽게도 좋은 날씨였다. 제길!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외전 4. 황제 폐하에게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 (6)

    *​“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외전 4. 황제 폐하에게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 (5)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외전 4. 황제 폐하에게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 (4)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외전 4. 황제 폐하에게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 (3)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외전 4. 황제 폐하에게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 (2)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외전 4. 황제 폐하에게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 (1)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제26화.정화되지 않은 검은 실타래 (4)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내 방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번듯한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단의 모습이었으나,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기사단장 엘릭이 달고 있었던 비슷한 모양의 검은 그림자가 슬금슬금 촉수처럼 뻗어 나오기 시작하던지 점점 내 방 안쪽 내 침대를 향해 탐욕스럽게 일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아, 진짜 오늘 일진 왜 이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루세티아 여신님께 좀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뒷걸음질 치는 대신 턱을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제25화. 정화되지 않은 검은 실타래 (3)

    ​​​​“오라버니, 일단 진정해요. 저도 지금 엄청 황당하긴 한데, 어찌 되었든 황제는 제 정체를 알고도 돌려보냈잖아요. 그리고… 사실 카시안 오빠 문제보다 더 급한 건이 있어요.”​나는 아까 응접실에서 보았던 검은 실타래가 정화되었음에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던 모습을 떠올렸다.​“황궁이 아무래도 썩어가고 있는 것 같아. 작은 오빠가 말한 그 ‘불순물’이… 사실은 내 빛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두 오빠에게 오늘 황궁 응접실에서 목격한 그 기괴한 검은 거미줄에 대해 털어놓아야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제24화. 정화되지 않은 검은 실타래 (2)

    ​​“카시안 루체른, 당장 나와라!”​그가 집무실 문을 향해 거칠게 손을 뻗자 육중한 문은 단숨에 얼음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음, 황실 청구서 걱정을 할 게 아니라 우리 집 수리비 걱정을 해야 할지도…’​나는 속으로 수리비를 계산하며 조용히 큰오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히익! 형님, 형님! 진정하세요, 제발! 이건 다 거시적 관점에서 가문의 미래를 위한……!”​집무실 안에서는 카시안 오빠가 소파 뒤에 처박힌 채 덜덜 떨고 있었다.​그는 이미 칼라일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는지 온갖 방어 아티팩

  • 블랙 황궁을 퇴사하려다 미친 황제와 엮여버렸다.   제23화. 정화되지 않은 검은 실타래 (1)

    ​​큰오빠 칼라일의 등장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문을 통째로 날려버린 그 무식한 파괴력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스러운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칼라일은 제국의 태양이라는 카엘루스를 향해 고개만 까딱이며 최소한의 예의만 보인 뒤 빙하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황제를 꿰뚫어 볼 뿐이었다.​“황궁의 보안이 이토록 허술해서야. 감히 출처를 모르는 검은 벌레들 따위가 내 동생의 옷자락을 넘보게 한단 말인가.”​칼라일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 엘릭마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 살기의 과녁인 카엘루스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