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아니, 오빠! 어제 그놈들 옷깃에 황실 문장이 있지 않았어요? 황실이 우릴 노린 거였잖아!”
내 물음에 칼라일 오빠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옷깃에 뻔뻔하게도 황실의 태양 문장을 수놓았더군. 하지만 확인해 보니 조잡하게 꾸며낸 모조품이었다.
누군가 황실을 사칭해 우리 루체른을 노린 거야. 가장 연약한 너를 인질로 삼으려는 비열한 수작이겠지.”
“……네? 사칭이요?!”
카시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얼빠진 얼굴을 보니 ‘카시안이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곧 더 큰 충격에 빠졌다.
‘카시안 오빠도 아니고, 황제가 보낸 것도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구지?
상점가의 그 소년인가? 아니면 이 은 원통을 노리는 제3의 세력이 또 있다는 건가?!’
황제가 보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할 틈도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흑막이 내 목숨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끔찍한 공포가 밀려왔다.
“누군진 몰라도 선을 넘었어. 오늘부로 저택의 결계를 세 배로 올리고, 호위 기사들을 전부 정예로 교체한다.
카엘루스 폐하께도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그 ‘고드름 쥐새끼들’을 황궁으로 보냈다.”
우리 가족의 환장할 동상이몽 조찬 모임은 그렇게 각자의 지독한 두통을 안은 채 흘러갔다.
제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이 루체른의 고요한 식탁 위로 서서히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시각, 황제의 집무실]
“……그래서. 루체른 공작이 이것들을 친히 내게 보냈다는 건가?”
나른하게 옥좌에 기대앉은 카엘루스의 붉은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최고급 대리석 위에는 꽁꽁 얼어붙어 해동(?) 중인 사내 셋이 널브러져 있었다.
근위대장 엘릭이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예, 폐하. 누군가 황실을 사칭하여 루체른 공작저, 그것도 막내 영애의 침소를 노렸다고 합니다. 폐하의 이름을 도용한 겁도 없는 쥐새끼들이니 황실 차원에서 엄중히 조사해 달라는 공작의 전언입니다.”
카엘루스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어붙은 사내의 옷깃을 거칠게 젖혔다.
조잡하게 수놓아진 황실의 태양.
“하. 짐의 그림자? 감히 내 이름을 사칭해?”
카엘루스의 적안이 짙은 짜증과 흥미로움으로 번뜩였다.
감히 제국의 지배자인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놈들의 배짱도 가상한데,
왜 하필 목적지가 루체른 공녀의 방인 걸까?
‘루체른 공작저 영애의 방이라…’
순간, 카엘루스의 뇌리에 며칠 전 황궁 정원에서 마주쳤던 눈부신 백금발의 여인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을 지우는 이능력자 와 루체른 영애를 노린 사칭범들.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묘하게 거슬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짜증 나는 상황이지. 내가 요즘 너무 자애로웠나 보군.”
카엘루스는 얼어붙은 가짜 암살자의 머리를 툭 차며 낮게 읊조렸다.
무심한 발길질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집무실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서늘했다.
“엘릭. 루체른의 그 막내 여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폐하.”“흐음…….”
입가를 만지작거리던 카엘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숨바꼭질은 여기까지다.
짐의 정원을 헤집어 놓고 도망친 그 당돌한 사냥감을 이제는 직접 확인해야 할 시간이었다.
**
당분간 칼라일 오라버니의 당부에 따라 한동안 저택에만 있기로 마음먹은 엘리노아는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싱그러운 봄바람에 그동안 있었던 다사다난했던 근심을 다 잊고
우아하게 최고급 다즐링 티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갑자기 집사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앞으로 황궁 인장이 찍힌 편지가 왔습니다!”
푸읍—!
마시던 차를 시원하게 분수처럼 뿜어낸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낚아챘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적힌 예언서를 여는 기분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뜯어본 편지 안에는,
황제다운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필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루체른의 공녀에게.]
지난밤, 그대의 방에 잘못 찾아간 ‘짐의 그림자들’에 대한 사과를 직접 전하고 싶군. 밖에 세워둔 마차에 오르도록. 거절은 필요 없어. 황명이거든. 그럼.
“……사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거절은 필요 없어’라니! 이건 초대장이 아니라 소환장이라고.아니다, 소환장도 아니라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는 명백한 영장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더럽게도 좋은 날씨였다. 제길!
*“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내 방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번듯한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단의 모습이었으나,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기사단장 엘릭이 달고 있었던 비슷한 모양의 검은 그림자가 슬금슬금 촉수처럼 뻗어 나오기 시작하던지 점점 내 방 안쪽 내 침대를 향해 탐욕스럽게 일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아, 진짜 오늘 일진 왜 이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루세티아 여신님께 좀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뒷걸음질 치는 대신 턱을
“오라버니, 일단 진정해요. 저도 지금 엄청 황당하긴 한데, 어찌 되었든 황제는 제 정체를 알고도 돌려보냈잖아요. 그리고… 사실 카시안 오빠 문제보다 더 급한 건이 있어요.”나는 아까 응접실에서 보았던 검은 실타래가 정화되었음에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던 모습을 떠올렸다.“황궁이 아무래도 썩어가고 있는 것 같아. 작은 오빠가 말한 그 ‘불순물’이… 사실은 내 빛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두 오빠에게 오늘 황궁 응접실에서 목격한 그 기괴한 검은 거미줄에 대해 털어놓아야
“카시안 루체른, 당장 나와라!”그가 집무실 문을 향해 거칠게 손을 뻗자 육중한 문은 단숨에 얼음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음, 황실 청구서 걱정을 할 게 아니라 우리 집 수리비 걱정을 해야 할지도…’나는 속으로 수리비를 계산하며 조용히 큰오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히익! 형님, 형님! 진정하세요, 제발! 이건 다 거시적 관점에서 가문의 미래를 위한……!”집무실 안에서는 카시안 오빠가 소파 뒤에 처박힌 채 덜덜 떨고 있었다.그는 이미 칼라일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는지 온갖 방어 아티팩
큰오빠 칼라일의 등장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문을 통째로 날려버린 그 무식한 파괴력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스러운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칼라일은 제국의 태양이라는 카엘루스를 향해 고개만 까딱이며 최소한의 예의만 보인 뒤 빙하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황제를 꿰뚫어 볼 뿐이었다.“황궁의 보안이 이토록 허술해서야. 감히 출처를 모르는 검은 벌레들 따위가 내 동생의 옷자락을 넘보게 한단 말인가.”칼라일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 엘릭마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 살기의 과녁인 카엘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