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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저리 심각하게 하는지 한마디 말도 없이 앉아있는 걸 보니 조금 서운했다. 이게 얼마 만에 만나는 거였더라.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와 만난 날을 세었다.
그와는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예술 고등학교인 만큼 연습생 신분인 학생끼리 뭉친 모임이 있었는데, 입학 후, 친구와 함께 갔던 그룹 모임에서 그를 처음 봤다. 모두가 연습생 준비 중인 아이들이라 외모가 빼어났지만, 그는 더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모든 힘을 그에게 쏟아붓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다. 뒤로 후광이 빛난다는 말은 그저 TV나 만화에서 하는 헛소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후광을 받아 빛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를 보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기도 했었다. 짙은 눈썹에 아래로 적당한 크기의 눈동자.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옅게 그려지는 쌍꺼풀이 참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 강아지상인 그는 웃을 때마다 오른쪽 광대뼈 위로 인디언 보조개가 푹 들어갔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매력 포인트는 전부 가지고 있는 듯했다.
저보다 2살이나 많은 선배였지만, 먼저 살갑게 다가와 대해준 덕에 빠르게 모임에 스며들 수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선후배 사이로 지내다가 그의 졸업식 날, 용기를 내 고백했다. 거절당해도 그저 그에게 제 마음을 말하고 싶었던 욕심이 컸다. 그런데, 제 생각과 달리 그는 제 고백을 받아줬고, 그 이후 선후배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니 그와 만나는 게 힘들어졌다. 졸업하자마자 더 바빠진 탓이었다. 필모를 키우기 위해 조연부터 시작에 작은 역할에도 빼지 않고 출연했고, 지금은 함께 돌아다니면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해졌다. 오늘도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입을 삐죽이며 앞에 앉은 세민의 눈치를 살피던 예하가 시켜두고 여태 입도 못 댄 커피잔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예하야.”
“네?”
“나 드라마 들어가. 주연으로 캐스팅됐어.”
갑작스러운 세민의 말에 놀라 눈을 깜박거리며 잠시 굳어있던 예하가 축하해줘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안 해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니던 세민이었다. 오디션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작은 장면이라도 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게으름 피지 않았던 그였다. 몇 분밖에 나오지 않는 장면도 열심히 촬영했던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조연보다는 주연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갈망이 있었다. 그동안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예하가 세민의 캐스팅 소식에 당사자보다 더 기뻐했다.
“정말요?! 축하해요. 오빠! 이 얘기하려고 그렇게 뜸 들인 거예요? 얼른 이야기하지. 우리 케이크 사서 같이 축하할까요? 난 또 표정이 심각해서 안 좋은 일인 줄…”
“우리, 그만 만나자.”
“…네?”
신이 나서 떠들던 예하가 세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저를 바라보던 세민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만 만나자고.”
“… ….”
“너는 알잖아. 오빠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온 건지. 이제 겨우 주연 맡았는데 너랑 내 사이가 들통나는 날엔 그거 다 물거품이야. 꿈이 돼버린다고.”
“… ….”
지금껏 제가 봐온 세민이 아닌 것 같았다. 할 말을 잃은 예하가 가만히 세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물론 세민의 말이 틀린 건 없었지만 이렇게 쉽게 저와의 사이를 정리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제 고백을 받아주고 사귀기 시작한 건, 그 역시 저와 같은 감정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세민을 바라보던 예하가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는다.
“아… 안 들키면…… 안 들키면 되잖아요. 오빠. 제가 더 조심할게요.”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쉰 세민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이 모습을 보는 예하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렸다. 한숨 뒤로 아무런 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들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굳은 예하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네가 아직 이쪽에서 일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모양인데. 이 바닥 소문도 빠르고, 말도 많아. 안 그래도 요즘 너랑 같이 찍힌 사진이 사무실로 날아와서 사장님도 의심하는 거 같단 말이야.”
“… ….”
“예하야, 너는 알잖아. 내가 주연 한 번 해보겠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안 해본 역할이 없어. 바닥부터 올라와서 겨우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나 여기서 무너지고 싶지 않아.”
세민이 그동안 인기를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은 그를 붙잡고 제발 헤어지자고만 하지 말라고 빌고 싶었지만, 머리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해주라고 하고 있었다. 울먹이던 예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의 앞길을 막는 게 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빠… 하나만 물어도 돼요?”
“… ….”
“제가, 고백했을 때 …절 좋아해서 받아준 건 맞는 거죠?”
“……그래.”
“알겠어요. 우리…… 헤어져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가득 채운 채로 고개를 든 예하가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며 세민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그렇게 그와 헤어진 후, 카페에 홀로 남아 이렇게 울다가는 눈물이 마를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전부 다 쏟아냈었다.
세민은 제 첫사랑이었다. 연인으로서 그와 함께 한 시간은 너무나 행복했고 즐거운 추억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헤어짐이 이토록 가슴 아픈 것인지 알게 된 쓰린 연애기도 했다.
‘촬영 중’이라고 뜬 간판에 조심스럽게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온 준영이 혹시나 빛이 들어가 촬영에 방해될까 재빠르게 닫았다. 잠시 멈춰서서 세민과 촬영 중인 릴리를 살펴보다가 대기실로 들어오자 나갈 때보다 더 분위기가 어두웠다. 예하가 그렇게 가버렸으니, 멤버들 기분이 좋을 리가 있을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있던 서린이 준영을 발견하고 다가왔다.“예하는요?”“옆에 스튜디오에서 쉬고 있어.”“다른 얘기는 안 하고요?”고개를 끄덕이는 준영을 보던 서린이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하의 성격상 무슨 일인지 얘기해줄 거라 생각지 않았다. 저나 매니저인 준영이나 눈치껏 둘이 무슨 사이였을지 예상하는 것뿐이었다.“아무래도 둘이 가벼운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예하 반응도 어딘지 어색하더라고요.”멤버들과 떨어져 앉아 준영과 소곤소곤 대화하던 서린이 조금 전 예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본 반가움과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거는 세민과 반대로 그를 대하는 태도가 항상 봤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선배든 후배든 늘 친절하고 살갑게 대하는 예하가 누군가에게 쌀쌀맞게 구는 모습에 멤버들 역시 놀란 눈치였다.“우선은 예하가 먼저 말할 때까지 두자.”“물어본다고 말할 애도 아니잖아요.”하긴, 묻는다고 쉽게 말해줄 이야기였다면 조금 전 제가 물어봤을 때 대답해 줬을 거다. 단호하게 말하기 싫다고 하던 예하를 다시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큰일이네. 앞으로 이틀은 더 봐야 하는데.”“그러게 말이에요.”드라마 뮤비 촬영은 내일도 잡혀 있어서 세민을 안 볼 수가 없다.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예하만 조금 늦게 스튜디오에 나올 수 있게 시간을 조절하는 일이었다. 예하를 대하던 세민의 태도로 봐서는 내일도 힘겨운 하루가 되겠다 싶었다. 게다가 세민의 촬영 이후, 남은 군무 촬영까지 예정되어있었다. 심적 스트레스가 얼마나 체력 소모가 되는 일인지 알기에 더더욱 걱정이었다.게다가 예하는 자켓 촬영이나 뮤비 촬영 전엔 아무것도
머리를 헝클어뜨린 준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예하와 세민이 아는 사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세민의 행동에 예하는 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불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태도에 준영이 재빠르게 대기실을 훑으며 누가 있었는지 파악했다. 현시점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와 아이돌이었다. 혹여나 두 사람의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걱정스러웠다.“예하는 내가 찾아볼 테니까 우선 릴리랑 나현이는 촬영 들어갈 준비 하자.”“알겠어요.”“네.”다급한 걸음으로 대기실을 나온 준영이 예하가 갔을 법한 곳을 떠올렸다. 조용한 곳, 사람들이 적은 곳을 찾아갔을 거란 생각에 최대한 어둡고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이 적은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다음 촬영이 현재 와 있는 제2 스튜디오에서 있으니 사람 대부분이 이곳에 몰려 있을 거란 생각에 떠오른 장소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걸음은 다급했지만, 마주치는 사람과 인사할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얼굴로 같이 인사한 준영이 조용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내일 촬영 준비 중이라 조금 전에 있던 장소보다 조용하고 사람도 적었다. 아무리 급했어도 본인이 익숙한 장소를 찾는 게 사람 심리였다. 조금 전 사용했던 대기실 문을 조심스럽게 연 준영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안쪽에 웅크리고 앉은 예하를 발견한 준영이 조심히 문을 닫고 불을 켰다.“불도 안 켜고 뭐 하고 있어. 아무도 없는데 무섭지도 않아?”“… ….”“예하야.”“…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렸던 준영이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나갈 줄 알았던 준영이 다가와 앉자 예하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미나한테 잔소리 듣고 싶으면 울든가.”“…하아. 진짜.”졌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보인 예하를 보며 같이 웃던 준영이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다리를 세우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은 탓에 치마를 입은 예하의 다리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너는 치마 입고 왜 그렇게 앉아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원래 나오기로 한 배우를 대신해서 온 사람이 세민이라니. 한 공간에서 그와 촬영할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앞섰다. 그는 알까. 자신이 오늘 촬영하는 뮤직비디오가 제 노래라는 것을.급격하게 싸늘해진 대기실 분위기에 멤버들이 예하의 눈치를 살폈다. 데뷔 전부터 민세민과 마주치는 것을 기피하던 예하였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항상 다정하고 착한 예하가 그리 꺼리는 거라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 싶어 회사에서도 조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게 된 배우가 하필이면 민세민이라니. 가라앉은 예하의 분위기를 눈치챈 멤버들이 입을 다문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무슨 정신으로 자켓 촬영을 끝내고 뮤비 촬영장으로 넘어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원래 안무 뮤비부터 찍기로 했지만, 세민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갑자기 스케줄이 변경됐다. 세민을 곧 만날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고,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준비 중인 예하에게 먼저 다가온 릴리가 평소처럼 곁에 앉으며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아니야.”“언제 만났어요?”“응?”“아니. 우린 오늘 보는 게 처음인데, 언니가 왜 그렇게 싫어하나 싶어서요.”같은 직종에 있는 만큼 언제고 마주칠 거라 생각했다. 특히나 지금 세민의 위치라면 어디서 마주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떤 배역이든 했어야만 했던 몇 년 전과 달리 지금은 방송국에서 서로 부르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유명해졌으니 말이다.그냥, 말끝을 흐린 예하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미룰 수 있으면 최대한 미루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회사와 계약할 때 말도 안 되는 부탁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싫은 게 맞는 걸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으니까 자꾸 생각나고 꿈에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보기 싫었다. 그와 마주친 순간, 또다시 두근거리고 흔들릴 걸 알고 있어서.“조금 불편해서 그런 거야. 괜찮아.”“정말 괜찮
나현의 말에 예하가 이를 부득 갈며 따졌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룹 내 막내인 나현은 부모님의 우수한 유전자 탓일까. 멤버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렇게 키를 가지고 저를 놀렸다.나이로는 나현이 막내였지만, 멤버들 모두가 둘째인 저를 편하게 생각해서인지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에 팬들 역시 저를 막내 취급하는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팬사인회 때마다 나현에게 저를 잘 챙겨주라고 했을까. 둘의 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지만, 당시엔 너무 황당해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그날 이후, 운동과 담을 쌓았던 저는 마음을 바꾸고 더 열심히 몸매를 가꿨다. 키가 안 되면 몸매라도 좋아야겠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멤버들은 없는 11자 복근까지 자리 잡았는데, 아직 그룹 이미지상 소속사에서 금지령을 내린 탓에 공개한 적이 없어 아쉬웠다. 대체 왜 못 보여주게 하는 거야.어느새 나현이 아닌 소속사를 씹고 있던 예하가 손을 내렸다. 어디 좀 보자. 물병을 내리자마자 다가온 미나가 많이 가라앉은 눈을 보고 안도했다.“이제 화장 들어가도 되겠다.”***무슨 정신으로 자켓 촬영을 끝내고 뮤비 촬영장으로 넘어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원래 안무 뮤비부터 찍기로 했지만, 세민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갑자기 스케줄이 변경됐다. 세민을 곧 만날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고,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준비 중인 예하에게 먼저 다가온 릴리가 평소처럼 곁에 앉으며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아니야.”“언제 만났어요?”“응?”“아니. 우린 오늘 보는 게 처음인데, 언니가 왜 그렇게 싫어하나 싶어서요.”같은 직종에 있는 만큼 언제고 마주칠 거라 생각했다. 특히나 지금의 세민의 위치라면 어디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떤 배역이든 했어야만 했던 몇 년 전과 달리 지금은 방송국에서 서로 부르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로 유명해
잠에서 깨어난 예하가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자는 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은 물론 베개까지 눈물로 푹 젖어있었다. 하아. 한숨을 푹 쉰 예하가 팔로 눈을 가렸다.매번 세민이 나오는 방송을 보고 나면 그날의 꿈을 꿨다. 어제 녹음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씻는 순서를 기다리며 틀어둔 TV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본 게 이유인 듯싶었다. 그래서 보기 싫었던 건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예하가 손등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러 닦아냈다.똑똑.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닦고 멍하니 앉아있던 예하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목을 가다듬었다. 들어와. 제 허락에 조심스럽게 열린 문 사이로 빨간 머리가 쑥 들어왔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눈가를 둥글게 휘며 웃는다.“언니.”“릴리. 잘 잤어?”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온 릴리가 침대에 걸터앉더니 저를 빤히 바라본다. 한국 어머니와 영국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릴리는 딱 아이돌 상이었다. 이렇게 예쁜 얼굴을 예고 없이 들이밀 때면 저도 얼굴을 붉히곤 했으니까. 한참 눈을 마주치고 있던 릴리가 팔을 뻗어 제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쓱, 당기는 힘에 릴리의 얼굴 앞으로 딸려간 예하가 당황한 눈빛을 했다.“왜, 왜 그래.”“언니, 왜 울었어요?”“…아니, 안 울었……”“눈이 엄청 빨간데? 무서운 꿈 꿨어요?”저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말하는 릴리의 모습에 예하가 아니라며 손을 밀어낸다. 손쉽게 밀려난 릴리가 에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밀려났던 것보다 더 바짝 다가왔다. 외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릴리는 다른 멤버들보다 스킨십이 배는 많은 편이었다. 제 허리를 끌어안은 릴리가 품으로 당겨 안고는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괜찮아.”“진짠데.”“오늘은 같이 잘까요?”“됐거든!”소리 지르며 릴리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난 예하가 거리를 벌리며 떨어졌다. 그러자 키득키득 웃으며 일어난 릴리가 지나가며 머리를 쓰다듬고 방을 나간다. 저보다 2살이나 어린 릴리가 저리 굴 때는 꼭 동생이 된 기분이었다. 툴툴대며 욕실로 들어간 예하가
무슨 생각을 저리 심각하게 하는지 한마디 말도 없이 앉아있는 걸 보니 조금 서운했다. 이게 얼마 만에 만나는 거였더라. 손가락을 접어가며 그와 만난 날을 세었다.그와는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예술 고등학교인 만큼 연습생 신분인 학생끼리 뭉친 모임이 있었는데, 입학 후, 친구와 함께 갔던 그룹 모임에서 그를 처음 봤다. 모두가 연습생 준비 중인 아이들이라 외모가 빼어났지만, 그는 더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모든 힘을 그에게 쏟아붓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다. 뒤로 후광이 빛난다는 말은 그저 TV나 만화에서 하는 헛소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후광을 받아 빛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를 보고 환하게 웃는 얼굴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기도 했었다. 짙은 눈썹에 아래로 적당한 크기의 눈동자.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옅게 그려지는 쌍꺼풀이 참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 강아지상인 그는 웃을 때마다 오른쪽 광대뼈 위로 인디언 보조개가 푹 들어갔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매력 포인트는 전부 가지고 있는 듯했다.저보다 2살이나 많은 선배였지만, 먼저 살갑게 다가와 대해준 덕에 빠르게 모임에 스며들 수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선후배 사이로 지내다가 그의 졸업식 날, 용기를 내 고백했다. 거절당해도 그저 그에게 제 마음을 말하고 싶었던 욕심이 컸다. 그런데, 제 생각과 달리 그는 제 고백을 받아줬고, 그 이후 선후배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니 그와 만나는 게 힘들어졌다. 졸업하자마자 더 바빠진 탓이었다. 필모를 키우기 위해 조연부터 시작에 작은 역할에도 빼지 않고 출연했고, 지금은 함께 돌아다니면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해졌다. 오늘도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입을 삐죽이며 앞에 앉은 세민의 눈치를 살피던 예하가 시켜두고 여태 입도 못 댄 커피잔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오빠,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