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는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 성유리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회전목마.”그러던 아이는 결국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회전목마만 좋아해? 후룸라이드나 바이킹은 놀아봤어?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에는 밤이면 공연도 하고 퍼레이드도 하는데 본 적 있어? 하늘이는 공주들이나 다른 만화 캐릭터랑 같이 사진 찍고 싶지 않아?”놀이공원에 관한 프로젝트 또한 박한빈은 해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 번도 직접 놀이공원으로 향한 적은 없어도 각종 놀이기구나 시설, 공연 등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신바 좋아한다고 했지?”박한빈은 문득 하늘이가 늘 가지고 다니던 사자 인형이 떠올랐다.“거기 있는 무대에는 아마 신바도 있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난 너를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도 있고.”비록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의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하늘이는 달콤한 그의 유혹에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아이의 친엄마인 성유리는 당연하게도 하늘이가 지금 박한빈의 말에 많이 흔들리고 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특히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난 하늘이의 눈은 전보다 더 반짝였다.필경 전에 몇 번 놀이공원으로 향했을 때, 시간이 안 맞아 한 번도 무대 위에서 하는 퍼레이드나 공연을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건 하늘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게다가 박한빈이 말한 놀이기구들 또한 아이는 타보지 못했었다.왜냐하면 성유리가 그런 기구들을 타기를 즐기지 않기에 하늘이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매번 포기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놀고 싶으면 내가 데리고 가줄게. 공연 완전 재밌거든? 아마 넌 본 적이 없을 거야.”하늘이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박한빈은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내심 박한빈과 하늘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그녀는 부녀 사이가 엄청 가까워지지는 못해도 적어
차는 빠르게 달려 이내 놀이공원에 도착했다.오늘은 평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놀이공원은 인산인해였다.하지만 박한빈이 오기 전에 미리 관계자한테 연락을 해뒀는지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달려 나와 맞이해줬다.하늘이가 무슨 기구를 놀고 싶어 하든 다 그들만을 위한 통로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세 사람은 아예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성유리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필경 박한빈은 이제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오늘은 박한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늘이와 놀이공원에 오는 날일 것이다. 그렇기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습관을 들이기가 싫었다.그러나 지금 하늘이는 너무도 흥분한 상태였고 오늘 같은 날씨에 밖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는 것 또한 아이의 몸에 좋지 않기에 성유리는 꾹 참았다.놀이공원에 도착하고 제일 처음으로 박한빈은 하늘이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러 향했다.그 회전목마는 중간에 분수까지 설치되어있어 어느 한 범위 안에 들어서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하늘이는 비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놀이기구에서 내릴 때는 이미 앞머리가 젖어버린 상태였다.성유리는 아이의 몸에 묻은 물을 닦아내 주고 싶었지만 하늘이는 고개를 돌린 채 박한빈만 바라보며 말했다.“더 타고 싶어요!”“그래. 그러자.”박한빈은 주저도 없이 아이의 말에 동의했다.그러자 하늘이는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고 박한빈은 그런 아이에게 다정히 말했다.“엄마는 힘든 것 같아. 아니면 나랑 둘이 갈래?”그의 말에 하늘이의 표정이 굳어져 버렸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기만 했다.성유리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자 하늘이는 망설임 끝에 박한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그는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이 아닌 처음으로 잡아보는 커다란 남자의 손에 하늘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이는 주저하다 박한빈의 손이 아닌 그의 옷깃을 살짝 움켜잡았다.박한빈 또한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와 함께 전용 통로로 들어섰다.비록
하늘이는 오늘 노느라 유달리 지쳤는지 성유리의 품에서 오랜 시간 잠에 들어 있었다.요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 하늘이는 체중 또한 나날이 늘고 있었다. 박한빈의 차에서 내릴 때, 성유리는 아이를 계속 안고 있어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러자 박한빈이 얼른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내가 안고 올라갈게.”“괜찮아요.”성유리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박한빈은 가녀린 그녀의 팔을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너 지금 하늘이 안고 올라갈 수 있어? 아니면 그냥 깨워서 직접 걸어가라고 해.”성유리는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아이를 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깊은 잠에 들어있는 아이를 보니 차마 깨울 수가 없어 망설였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원래 박한빈은 작디작은 이런 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안아보니 아이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특히 아이가 잠에 들어 있으면 더더욱.박한빈은 조금만 힘을 준다면 하늘이가 아파서 깰까 봐 두려웠고 힘을 풀면 하늘이가 안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그래서 집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박한빈의 몸은 잔뜩 긴장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그러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유리는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아이를 안고 있었을까?’“하늘이 침대에 내려놓으시면 돼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 조심스레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하늘이는 너무도 피곤했는지 침대에 올려놓자마자 자세를 휙 바꾸더니 계속 잤다.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뭐... 다른 일 더 있으세요?”그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덕분에 하늘이도 너무 신나게 논 것 같아요.”“그래.”박한빈은 짧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본인이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박한빈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성유리가 말한 대로 그는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또한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오늘 재밌게 놀았으면 그만 아닌가?박한빈이 오늘 갑자기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제안을 한 것도 사실 연정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 옆에 남아있는 사람이 절대로 연정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오늘 일부로 연정우에게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한 것이다.성유리 또한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오늘 세 사람은 예상 밖으로 너무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그래서 박한빈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렇게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박한빈의 생각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진하기만 했다. 성유리는 오늘 그저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함이었다.오직 추억 하나만 위해서였고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이런 생각이 든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럼 넌 누구랑 같이 있으면 즐거운데? 연 교수야?”그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성유리와 하루 종일 문자를 나눈 사람이 바로 연정우라는 사실을.처음부터 박한빈은 성유리가 오늘 하늘이를 데리고 연정우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성유리가 연정우를 하늘이의 아빠로 삼고 싶은 의미라고 박한빈은 스스로 해석했다.“전에 유효정 씨한테 납치당했던 일 잊었나?”박한빈이 물었다.“그 일도 연정우 씨가 계획한 거야. 알아? 연 교수는 유효정 씨랑 결혼하기 싫어서 너를 방패로 삼은 거라고. 유효정 씨가 너를 극도로 혐오하게 만들어놓고 만약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연 교수가 알고 있...”“저도 알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짧디짧은 그녀의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알고 있으면서
성유리의 팔목을 잡고 있는 박한빈의 힘은 상당했다.그 고통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아프다는 티도 내지 않고는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그거 아세요? 사실 그때 하늘이가 아플 때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사람은 바로 박한빈 씨예요.”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박한빈 씨한테 전화를 너무 걸고 싶었는데 용기나 안 났어요.”“왜냐하면 저도 박한빈 씨가 상처받은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나... 제 아이한테 어떤 태도를 보일지 짐작이 안 됐어요.”“나중에야 하나 씨가 그러더라고요. 박한빈 씨가 소개팅까지 하면서 결혼할 준비를 한다고. 게다가 하늘이 상황도 알면서 신경도 안 쓰다고 있다는 말도 저한테 했어요.”“그건 다 오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에 끼어들며 반박했다.“그때 내가 사하나 씨랑 만났을 때 난 그 사람이 현장 일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어. 나는 절대...”“저도 알아요. 그다음은요?”성유리가 물었다.그러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나중에 저희 상황을 다 알고 나서도 왜... 그렇게 모질게 구셨죠?”“하늘이가 저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아시면서.”“사실 그때 만약 저희가 앉아 대화를 나눴더라면 아마...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으셨죠.”“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박한빈 씨는 아이를 이용해 저를 협박하고 벼랑 끝까지 내모셨잖아요.”“박한빈 씨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계실 때, 하루하루 창백해져 가는 하늘이의 안색을 지켜만 봐야 하는 제 심정을 당신은 죽을 때까지 모르실 거예요.”“하늘이는 제 몸의 일부이고 제 피부이자 살이에요. 저랑 피를 나눈 아이가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세요?”성유리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박한빈을 조롱하듯 물었다.“아니면 혹시 그걸 아시니까 일부러 더 그랬던 건가요?”“박한빈 씨, 전에 저를 어떻게 대하셨던 전 상관이 없었어요. 심지어
“그 사람은?”성유리는 갑자기 이런 물음을 묻는 하늘이가 무척 당황스러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다 색칠 놀이에 필요한 색연필을 아이에게 건네주며 되물었다.“누구?”하늘이는 색연필을 건네받아 푸른 초원을 초록색으로 칠하며 말했다.“있잖아. 그... 그 남자.”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눈치챘다.“하늘이 아빠 말이야?”“응.”하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도 몰라. 근데 갑자기 아빠는 왜 찾는 거야?”전에 박한빈은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하늘이도 박한빈의 존재를 굳이 신경 쓰지 않았고 가끔 마주친다 해도 피해버리거나 무서워 숨었었다.하지만 오늘, 하늘이는 갑자기 성유리에게 박한빈의 행방을 물었다.성유리는 하늘이를 뚫어져라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아빠는 갑자기 왜 묻는 건데?”“아니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하늘이는 성유리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열심히 색칠하는 척했다.어찌나 힘을 세게 주어 색을 입혔는지 그림 종이는 이미 여러 군데 찢겨 있었고 성유리는 아이의 속내를 알아차렸다.“아빠 보고 싶어?”“아니.”하늘이는 주저하지도 않고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괜찮아.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되지.”성유리의 말에 하늘이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내가 너무 배신자 같잖아.”“배신자라니?”“내가 그러면 난 엄마를 배신한 사람이 되는 거야.”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그래?”“근데 그 남자는...”“엄마가 그랬잖아. 그 남자가 아니라 하늘이 아빠라고.”성유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하늘이에게 계속 말했다.“만약 아빠가 아니었다면 하늘이는 이 세상에 올 수도 없었어. 그리고 하늘이 몸에는 아빠의 피가 흐르고 있어.”“그러니까 아빠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서로 이끌리고 끈끈하게 지내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고. 이런 일로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어. 엄마는 절대 하늘
“왜 자리가 없겠니? 거실에 걸어두면 되지.”“그럼 이 집의 인테리어랑 너무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그게 무슨 대수라고! 우리 손녀가 직접 그려준 그림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사.”김서영의 완강한 태도에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러나 김서영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하늘이를 보더니 물었다.“뭐 갖고 싶은 거 있니? 있으면 다 말해. 할머니가 사 오라고 말할 테니까.”“괜찮아요. 할머니.”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할머니, 저 이제 집에 가고 싶어요.”아이의 말에 김서영은 멍해졌다. 그러다 얼마 후,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집에 가고 싶다니? 지금도...”“아니요. 제 뜻은 경운시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에요. 저랑 엄마 둘이서만 사는 집.”하늘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고 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성유리와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김서영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성유리도 하늘이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성유리는 얼른 하늘이를 향해 돌아앉더니 물었다.“왜 그래? 왜 갑자기 돌아가려고?”“그럼 우리는 평생 여기서 사는 거야?”하늘이는 성유리를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민준 오빠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빠를 못 본 지도 너무 오래됐잖아. 안 그래?”“하늘이 네 친구야? 그럼 할머니가 내일 하늘이 친구를...”말을 하던 김서영은 자신의 말이 너무 황당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이내 입을 꾹 닫았다.“할머니, 시간 있으면 언제든지 할머니 보러 올게요. 할머니도 우리 보고 싶으면 우리한테 와도 돼요.”잔뜩 당황한 성유리와는 달리 하늘이는 너무 진지하고 단호했다.결국, 김서영은 포기한 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병원 가서 한 번 더 검사받고 나서 다시 말하자. 저번에 의사가 언제 다시 오라고 했지?”“이번 주 금요일이요.”가만히 앉아 있던 성유리가 그제야 대답했다.“그럼 한빈이보고 데려다주라고 할까?”
성유리는 하늘이가 박한빈과 할 말이 있어서 지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조용히 자리 피해줘야겠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박한빈을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병원 앞에 마침 편의점 하나가 있어 성유리는 하늘이를 위해 우유 한 개와 작은 케이크 하나를 구매했다.성유리는 하늘이가 박한빈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아 시간을 더 벌어주려고 계산을 마치고 나서도 병원 주위를 맴돌았다.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성유리가 올라갔을 때는 하늘이와 박한빈이 이미 대화를 마친 상태였다.두 사람은 조용히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성유리는 사실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가 자신의 이목구비와 아주 닮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나란히 앉아 있는 박한빈과 하늘이를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확신이 들었다.특히 두 사람이 입을 오므릴 때면 복사 붙여넣기를 하는 것처럼 매우 똑같았다.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엄마.”그녀를 발견한 하늘이는 눈까지 반짝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성유리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하늘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물었다.“배고파?”“응. 우유는? 우유 마시고 싶어.”“여기.”성유리가 빨대까지 꽂아주자 하늘이는 우유를 건네받고는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그때, 박한빈이 두 명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검사 결과 나왔대. 내가 가서 볼게.”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이 멀리 떠나가자 그제야 하늘이에게 물었다.“엄마가 없을 때 무슨 말 했어?”“누구랑?”“아빠랑 말이야.”“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하늘이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고 성유리는 피식 웃으며 아이의 귀를 살짝 잡고는 다시 물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가 모를 것 같아?”하늘이는 고개를 숙여 우유만 마시며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하지만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은 하늘이의 모습에 성유리는 너무도 궁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