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제 그 말,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뭐?”
“유치하다는 말, 굉장히 거슬리더라고?”
순간, 주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살짝 커졌다. 몇몇 학생들이 흘끔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를 즐기는 듯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은하를 지켜보았다.
은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와, 볼수록 웃기는 애네. 이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현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도 점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은하는 대답 없이 이현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책으로 시선을 돌린 뒤 작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이현은 그 반응에 더 기분이 나빠져 버렸고.
“전학생 주제에 나 백이현을 무시한다라….”
묵직한 중얼거림에 주변은 더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은근슬쩍 두 사람을 지켜보며, 대화가 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숨을 내쉬며, 책장을 넘겼다.
“좋아. 유치한 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거야.”
이현은 그렇게 경고의 말을 내뱉고 교실을 나섰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은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책을 읽었다.
물론 수업 시간 내내 이현의 말이 신경 쓰이긴 했다. 그가 뱉은 말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었으니까.
근데 뭐? 알게 뭐람. 지금 중요한 건 백이현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민희가 또 다시 활짝 웃으며 은하를 찾아왔다.
“은하야, 어제는 누구랑 밥 먹었어? 오늘은 나랑 먹을래?”
민희는 첫날부터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아이였다.
지나칠 정도로 활발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소심하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압적이지 않은 친절함이 있었다.
“응. 그러자.”
“그럼 빨리 가자. 늦으면 줄 엄청 길어져!”
급식실로 향하자 민희의 말처럼 이미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서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곤거림은 여전했다.
“어? 전학생이네?”
“백이현이랑 뭔 일 있었다던데?”
민희도 그런 시선이 느껴졌는지, 슬리슬쩍 은하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신경 쓰지 마. 전학생한테 관심이 몰리는 건 당연한 거잖아.”
은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런 시선쯤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은 은하와 민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 사실, 어제 좀 놀랐어.”
“응? 뭐가?”
“너무 까칠해서!”
“아… 미안. 내 성격이 원래 좀 그래.”
“아니야. 오히려 좋았어. 혹시, 괜찮다면… 나랑 친구 할래?”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친구. 그 단어는 여전히 낯설고 불편했다.
물론 그동안 친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친구’라고 부를 만한 관계는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기억에 남는 이름이 딱히 없는데.
은하는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되게 재미없는 성격인데.”
“괜찮아. 나랑 반대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전학 온 지 이틀이 되던 날, 은하에게 친구가 생겼다. 생각보다 빠르게 생긴 친구였다. 그건 전부 민희의 살가운 성격 덕분이었고.
하지만 그 분위기를 깨는 듯한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전학생. 여기 있었네?”
여전히 장난기가 섞인, 나른한 어조. 은하와 민희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맞다. 백이현이다.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식판을 들고 은하의 옆 자리에 앉았다. 주변 몇몇 학생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같이 먹자고.”
은하는 '또 시작이네' 라는 생각이 몰려왔지만,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은하의 표정을 살피던 민희가 머뭇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백이현, 오늘은… 우리 둘이 먹고 싶은데….”
이현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이 짐짓 멈췄다. 그리곤 예상치 못한 방해에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민희를 바라보았다.
민희는 긴장한 듯 했지만, 나름 확고한 눈빛으로 이현을 보고 있었다.
“아, 그래?”
“응.”
“근데 어쩌지? 싫은데?”
태도와 표정은 가벼운 농담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명확한 도발이기도 했다. 민희는 당황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역시나 강은하는 쫄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뜻을 전했다.
“어. 여기서 먹어. 우리도 밥 먹자. 민희야.”
이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여전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분명히 느껴졌고, 당연히 기분 좋을 리 없지 않은가.
은하는 더 이상의 반응 없이, 숟가락을 들어 조용히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민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 진짜 재미없는 애네.”
백이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여전히 은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든 은하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다는 듯.
말없이 밥을 떠먹고 있는 그 태연한 모습이 오히려 더 신경을 박박 긁어댔다.
그때,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태하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탁.’
이현과 은하의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 정태하.
“네가 더 재미없어 보이는데?”
찬희와 친구들은 성인이 된 이후 더 과감해졌다. 가출 청소년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주며, 그들을 이용해 돈까지 벌기 시작했다.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화면 너머로 전송되는 수많은 컨텐츠들.누군가는 찍었고, 누군가는 소비했고, 누군가는 그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날 밤, 찬희네 집에 모인 그들은 서서히 계획이란 걸 세우기 시작했다.“오래들 기다렸다. 이제 걔네도 다 성인이잖아?”“그치. 이제부턴 보호 받는 애들이 아니라는 뜻이지. 캬.”“최소라, 강은하 어떻게 하고 싶어?”“뭘 어떻게 해. 나랑 똑같이 만들어 줘야지.”“푸하하.”방 안에 얄팍한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다.누군가는 피자를 씹었고, 누군가는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지만 소라만은 입꼬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무리 중 한 명이 히죽 웃으며 소라를 바라보았다.“강은하는 너처럼 바닥까지 떨어지진 않을 걸? 집도 잘 살고, 의사 오빠도 있고, 남자친구도 있고… 완전 그림책 속 인생 아니냐?”“…그래서 더 부숴야 돼.”소라의 대답이 사뭇 진지했다.눈은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손끝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그 떨림이 불안인지, 기대인지, 증오인지조차 알 수 없는 미세한 진동이 이어졌다.그때,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전하기 시작하는 찬희.“일단, 그 뭐야. 정민희. 걔를 좀 이용하는 게 좋겠어.”“정민희?”“응, 걔네가 정민희 집을 갔던 적이 있던가?”“아마 없을걸? 백이현네 집이 아지트임.”“확실해?”“확실함. 쭉 같은 패턴임.”“그럼 일단 모아둔 돈으로 정민희네 아파트에 월세부터 얻자.”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굿. 우리도 더 넓은 곳이 필요하긴 해.”“콜.”찬희가 웃었다. 그 미소는 사람을 향한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쾌감에 가까웠다.무리들의 말이 이어졌다.이번엔 약간의 걱정이 담긴 뉘앙스였다.“근데 백이현이랑 정태하 건드는 건 좀 그렇지 않냐?”“그건 안돼. 드베르랑 한성기업은 진짜
시간이 흐를수록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웃고 떠들던 분위기는 조금씩 흐려졌고, 대화는 눈에 띄게 느긋해지고.이현은 여전히 술잔을 들어 올리는 은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좀 적당히 마시지? 어?”“뭐, 니네는 어른 되기 전부터도 마셨잖아.”“어쨌든. 이제 그만 마셔.”“싫어!”은하는 민희와 술잔을 부딪히며 짠을 외쳤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곧 넉다운이 된 듯 상체를 흔들며 헤헤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뭐냐? 얘네?”“…갈대냐?”그때, 은하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푸헤헤…”태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야, 나 은하 이런 모습 처음 봐.”“야 강은하. 정신 좀 챙겨라”“푸헤헤…. 백이현… 정태하, 그리고 정민희!”“….”“나느응, 니네를 만나서 정말 너~무 너무우 행복해앵.”“…완전 맛탱이 갔다.”“미치겠네. 정민희도.”“가자….”태하는 민희를, 이현은 은하를 부축했다.민희를 먼저 택시 태워 보낸 태하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피했다.“은하 잘 데려다 주고 와라. 먼저 간다.”“야! 정태하!”도움의 외침이 버럭 튀어나왔지만, 눈치 빠른 태하는 이미 떠난 후였다.이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은하의 허리를 감싸안고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괜찮아? 적당히 마시라니까.”은하는 여전히 어깨를 흔들며 웃어댔다.“나아 이런 기분 처음이야앙. 진짜 좋다아! 끄으치?”“하….”“히잉! 왜 한숨 쉬어? 나는 지금 기부니 좋타니까!”처음 보는 애교에 이현은 스르륵 녹아내렸다. 꿈틀거리는 입꼬리,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알겠어. 알겠으니까 집에 가자요.”“…우응응.”애교는 좋은데, 왜 이렇게 몸을 흔들어 재끼는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그 위태로운 몸짓에 이현은 결국 자세를 낮췄다.“휴… 일단 업혀.”“시타요오.”“야이…!”“힝. 화내지마용. 구럼 업힐게용.”‘하, 미치겠다. 진짜….’기어코 은하를 업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 이현.등 뒤로 느껴지는 숨소리. 그
다음 날 아침.겨울 햇살은 유난히 부드럽게 창가를 타고 흘러들었고, 은하는 거울 앞에서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너무 꾸민 것처럼 보이나…?”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립밤을 덧발랐다.코트 깃을 여미고, 가방을 맸을 뿐인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딸깍.방문이 열리고, 거실에서 은하를 기다리던 이현이 환하게 웃었다.“어디 가려고 이렇게 예쁘게 차려 입었어?”“장난치지 마.” “진짜거든? 너무 예뻐서 말이 안 나옴. 말 문이 막힘.”“참나. 말만 많구만 뭘!”이현이 우주를 향해 90도로 고개를 바짝 숙였다.“형님~ 저희 다녀오겠습니다.”“그래. 운전 조심하고! 늦지 않게 들어오고!”“네!”오랜만에 단둘이 즐기는 데이트였다.카페, 영화관, 맛집까지. 한참을 돌아다닌 두 사람.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이현의 차는 남한산성 초입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차창 밖으론 겨울 나무들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든 미약한 햇살이 반짝였다.“진짜 예쁘다… 나 여기 처음 와봐.”“내려서, 좀 걸을까?”“응. 좋아.”은하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이현은 그 발걸음을 꼭 맞춰 걸었다.한참을 걷다 보니, 작은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그곳에 나란히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파우치 하나를 꺼내는 이현. 커다란 손이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강은하.”“응?”파우치가 열리고, 그 안에는 얇지만 빛나는 팔찌 하나가 놓여 있었다.작고 섬세한 은행잎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 있는 너무도 은하 다운, 단정한 디자인이었다.“짜잔.”“이거… 은행잎이잖아?”“응. 이제 우리 졸업하면 학교 은행나무 자주 못 보잖아.”“……너무 예쁘잖아! 진짜 너무 너무 예뻐.”이현은 은하의 손목에 팔찌를 조심스레 채워주었다. 은행잎 펜던트가 가느다란 손목 위에서 반짝이며 작게 흔들렸다.“고마워. 백이현.”“앞으로 놀러도 많이 다니고, 추억도 더 많이 쌓고, 못 가본 곳도 더 많이 가자.”“응. 그러자.”“그리고… 우리 둘 다 한국대 꼭 붙었으
그날 이후 소라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먼저 웃었고, 스스로 그들 곁으로 거리낌없이 다가갔다.“최소라, 너 요즘 텐션 뭐냐?”“이래서 떡 맛이 무섭다니까. 푸하.”그리고 찬희는 완전한 소유물이 되어버린 소라를 보며 무언가를 떠올렸다.“애들 좀 더 모아볼까? PC방 알바도 슬슬 지겨운데. 돈도 안되고.”“배달도 존나 추움.”“그니까 좀 더 쉬운 쪽으로 가자고.”“텔그렘이랑 오픈 톡방 파기 시작해?”“일단 빨리 방부터 파봐.”“오키.”이제는 단순한 일탈을 넘어 명백한 범죄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 그들.소라 역시 무력감과 혐오를 넘어 모든 걸 함께 하고 있었다.“야 최소라, 애들 관리 잘만하면 강은하 눈 앞에 데려다 줌.”“콜.”감정이라곤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거래라도 하듯 무심코 흘러나온 대답.그 대답을 들은 찬희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은하와 이현, 태하와 민희는 너무나도 다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기말고사마저 끝내고 완전한 해방감에 놓인 그들. 이제 남은 건 대학교 원서 접수 결과였다. 민희가 팔을 번쩍 들며 외쳤다.“와! 드디어 끝났다! 다 끝났다고!”은하 역시 활짝 웃으며 책가방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오고 가는 대화는 한결같이 따뜻했고, 그 말들 속엔 평범한 청춘의 겨울이 담겨 있었다. 길을 걷다 눈을 맞고, 편의점에서 따뜻한 어묵 하나를 나눠 먹고, 밤 늦게 까지 톡방에서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일상.그 안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불신도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주말.완전히 해방된 기분으로 하나둘 모인 그들 앞에 하얀색 새 차 한 대가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등장했다.“얘들아~ 가즈아~!”운전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뿌듯한 표정의 이현이 밝게 웃고 있었다.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뭐냐? 면허 딴 거냐?”“당연하지. 내가 누구냐?”“와, 미쳤다…”민희가 감탄을 흘리며 뒷좌석으로 먼저 뛰어 올랐다. “와 백이현
“처음부터 강은하 아니었으면, 네가 지금 이러고 있겠어?”소라의 시선이 찬희를 향했다. 그 눈동자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진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분노.아직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그러나 확실하게 꿈틀대는 것.그 모습을 본 찬희는 오히려 더 흥이 난 듯 웃으며 다시 술을 따랐다.“너는 이제 대학도 못 갈텐데, 강은하는 아마 수능 끝나고 입학도 준비하고. 평범한 삶을 그리고 있겠지?”그 말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가슴을 찔렀다.이름만 들어도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평범한 삶?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은 강은하. 그 이름에서부터 시작인데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강은하도… 정말 나처럼 만들어 준다고?”확실한 질투였다.이미 바닥을 친 인생이지만 자신보다 더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마치 유일한 위안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그리고, 역시나 찬희는 그 눈빛을 읽어버렸다.“그럼. 근데 그건 너 하는 거 봐서.”“강은하 걔는… 날 망가뜨렸어.”“알지. 약한 척, 착한 척 덕분인지 다들 걔만 챙기잖아?”“걔 인생도… 나처럼 망가졌으면 좋겠어.”소라의 눈빛은 더 이상 부서진 피해자가 아니었다. 타인을 무너뜨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눈이었다. 히죽거리며 웃던 찬희가 손가락으로 빈 잔을 또르르 굴렸다.“얘들아, 내일부터 걔네 좀 똑바로 체크해라.”“오키. 분명 기말까지 끝나면 노느냐고 바쁠 듯.”“걍 틈 보이는 순간 훅 치면 되는 거 아님?”찬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한 눈빛엔 알 수 없는 열기가 감돌았다.“대학 가기 전에 부숴 놔야지.”시간이 갈수록 취기가 온몸을 두드렸다.웃음은 둔해졌고, 대화는 점점 알아듣기 힘든 소음으로 번져가더니, 술기운에 휘청 거리던 몸들은 이내 하나둘씩 바닥에 드러누웠다.“야… 간만에 끝까지 달렸다.”“너무 쳐 먹었나… 대가리 깨질 것 같다.”식탁 위에 엎어진 술병과 젓가락, 그리고 미처 사라지지 않은 담배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같은 시각.밖은 이미 어둑해졌고 찬희의 집 거실에는 술과 웃음, 시끄러운 말소리가 가득했다. 테이블 위엔 반쯤 비워진 맥주병과 안주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 특유의 거칠고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 소라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이제는 술잔도 자연스럽게 건네받고 있는 그들.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라가 찬희를 향해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짓을 보냈다. 찬희는 소라의 시선을 몇 번이나 마주치고 나서야 눈을 맞추곤, 세상 귀찮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담배 좀 피고 옴.”“여기 서 펴 그냥.”“최소라랑 잠깐 나갔다 올게.”“오키.”찬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였고, 소라는 잠시 찬희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오빠… 나 할 말 있는데.”“말해.”“아까 오빠 친구가 나한테… 이상한 말을 했어.”“뭐?”“그냥… 오빠 잘 하냐고… 자기도 안 한지 오래 됐는데, 오빠 오기 전에….”소라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찬희는 웃음을 터트렸다.“푸하하하. 애들 원래 그러잖아.”찬희의 장난스러운 반응에 소라는 기분이 더 언짢아졌다.자신만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진짜 찬희의 감정을 아는 게 두렵기도 했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렇지… 난 기분 나빠.”찬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손이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래? 그렇게 기분 나빠?”“…응.”그는 아무런 위로도 해명도 하지 않고, 물고 있던 담배 꽁초를 바닥에 내던졌다.그리곤 손목을 확 잡아 챘다.“가서 말해.”깜짝 놀란 소라는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텨봤지만, 찬희는 무심하게 소라를 집으로 끌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현관 문을 열리고, 날을 잔뜩 세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야, 니네.”“뭐임?”“분위기 왜이럼? 둘이 싸움?”찬희는 소라를 억지로 앉힌 뒤, 조소를 머금은 듯한 미소를 흘렸다.“최소라가 니들이 야한 장난 쳐서, 기분이 나쁘다는데?”“아 쏴리,”“미안~”어처구니 없는 반응에 소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근데
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저기… 선생님.”“응?”“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어느 가을날, 희뿌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하는 옷장에 걸린 새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걸려 있는 교복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속삭이는 듯했지만, 은하에게는 그저 낯설고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벌써 세 번째 전학. 이제는 익숙해야 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 순간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아직도 1년도 넘게 남아있었다.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은하를 안아들고 보건실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태하. 팔에 안긴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숨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민희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따르며 은하의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보건실로 향하자마자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놀란 보건 선생님이 급히 다가와 은하의 상태를 살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달려왔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큰 소리에 갑자기 놀란 듯 하더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어요.”“약? 무슨 약?”민희는 서둘러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은하가 먹었던
뒷문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태하가 은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 보건실 데려다 줘?”목소리엔 왠지 모를 걱정이 담겨 있었고, 눈빛에는 분명한 진심이 서려 있었다. 이현은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느릿하게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감정은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흥미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아니… 나… 먼저 가봐야겠어. 담임 선생님께 말 좀 전해줘.”그 말과 함께, 은하는 가방을 들고 자리를 피하려는 듯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태하는 쉽게 수긍하지 않는 표정이었다.“은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