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하는 순간 입이 다물렸다.또 그들과 같은 반이 된다? 그건 분명 편안하고 익숙한 선택이었다. 함께 라면 분명 지금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변하지 않는 환경. 그건 안전하고, 무엇보다 불안하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 매력적이었다.하지만, 자신만 따로 불러 이런 걸 묻는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왜? 내가 다른 아이들이랑 다르니까? 아프니까? 물론, 배려하는 마음이 담긴 거겠지.문제는 은하에게는 지금, 선생님의 질문 자체였다. 마치 혼자서는 학교 생활을 이어가지 못할 거라고 가정하는 것처럼 들려버렸다.‘나는… 아직도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일까?’무엇이 정답일까.지금처럼 편안함 속에 머무르는 게 맞는걸까, 아니면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볼까.한참을 고민하던 은하의 입이 열렸다.“선생님. 배려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만 이런 선택을 할 권리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은하야.”“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똑같이 평범하게 반 배정을 받고 싶어요.”“정말 그렇게 생각하니?”“네.”더 이상 자신을 예외로 두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건 좋지만, ‘특별한 배려’를 받으면서 까지 같은 반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다른 반이 되더라도 그들과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단단한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까? “좋아. 그럼 선생님도 은하 생각을 존중할게.”“네. 감사합니다.”짧은 면담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기 위해 교실로 돌아가자 이현과 태하가 애타게 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강은하. 무슨 일이야?”“담임 쌤이 왜 부르신 거야? 혹시 현수막 때문에 그래?”은하는 그들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아니. 반 배정 때문에.”“반 배정? 왜?”“선생님이… 우리 네 명을 같은 반으로 해줄 수 있다고 하셨어.”이현의 눈이 반짝였다.“대박, 담임 쌤 쩐다. 센스 무엇?”“근데… 굳이 그렇게
개학 날 아침.어제까지만 해도 방학이 끝난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지만, 현실은 빠르게 도착했다. 은하는 오랜만에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입었다.깔끔하게 정리된 교복을 손끝으로 만지며, 문득 지난 학기 마지막 날이 떠올랐다.그때와 지금, 자신은 얼마나 달라졌을까.현관 문을 열고 나서자, 이현과 태하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강은하~ 학교 가즈아!”“오랜만에 교복이다! 으~ 싫다!”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 걸으며 학교로 향했다. 참, 많은 일이 있던 방학이었다.겨울 바다, 카페, 잃어버린 기억, 아트 페스티벌, 그리고 조금씩 변화하는 관계들.이현이 가볍게 하늘을 올려다봤다.“와, 어떻게 벌써부터 피곤하냐?”“빠르게 현실.”은하는 조용히 태하의 말을 곱씹었다.맞다, 다시 현실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반복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은 뭐지.정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보란듯이 걸려 있는 이상하리 만큼 화려한 현수막에 입까지 떡 벌어졌다.[축💖2학년 3반 강은하, 아트 페스티벌 최우수상!💖축]“이게 뭐야…?”분명 자신을 축하해 주는 현수막은 맞는데 너무 크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도 눈에 띄었다. 게다가 하트는 또 뭐고?“아, 아저씨 진짜. 하트 좀 더 크게 해달라니까.”“그래도 눈에 확 뛰네. 형광 핑크는 역시 굿이다.”은하가 이현과 태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니들이지 또?”“당연히 우리지, 그럼 누구겠냐?”“은하야,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래도 최우수 상인데.”순간적으로 두통이 몰려와 이마를 감쌌다. 아침부터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이 현수막에 집중되고 있었고, 이미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은하? 저거 진짜야?”“대박, 최우수상이래!”“근데 현수막이 왜 저래? 보기만 해도 눈 아파.”“풉, 하트 뭐냐?”창피함에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상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대적인 축하를 받을 만큼의 일은 아니란 말이다.“고맙긴 한데, 다음부턴 제발 이러지
우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은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표정은 담담해 보였지만, 눈동자 속에는 혼란이 서려 있었다.“은하야, 모든 기억은 하나의 고립된 조각이 아니야.”“응?”“뇌는 연결된 경험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저장하기도 하니까. 힘든 일에 연결된 기억까지 함께 잃어버리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야.”은하는 갑자기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행복했던 기억들마저 잃어버릴 만큼,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었을까?“마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마주하면 돼.”“응. 오빠.”대답은 했지만, 은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자신이 그 기억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잃어버린 조각들이 다시 맞춰지는 게 왜 이렇게 두려운 건지.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은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몸을 붙이고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깊은 휴식. 오랜만에 느끼는 완전한 나른함이 몰려왔다.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벼웠고, 표정은 밝았다. ***다시 완벽한 현실로 돌아왔다.방학의 끝자락,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침이 되면 이현, 태하, 은하 세 사람은 늘 함께 운동을 했고, 은하는 오후가 되면 미술 학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태하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며 조용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의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여행을 다녀온 이후, 스스로 인강을 듣고 태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태하 역시 그런 모습에 놀랐었다.“너 진짜 왜 이래? 나 적응이 안돼서 미치겠어.”“뭐가. 나는 공부 좀 하면 안되냐?”“어울리는 행동을 하길 바란다.”하지만 어느새 문제집을 펼치고 펜을 든 채 인강을 듣는 이현의 모습은, 곧 태하에게도 익숙해질 정도로 달라져 버렸다.그리고 개학식 하루 전, 은하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미술 학원 원장님의 얼굴이 오늘따라 환했다.“은하야! 축하한다!”“네?”“아트 페스티벌 말이야!
끼이익 열린 방 문.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이불 속에선 누군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백이현. 적당히 자고 일어나라.”하지만 이불만이 조금 더 움찔 거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태하는 한숨을 쉬며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일어나라고!”이현은 미동도 없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었다.태하는 익숙하다는 듯 혀를 차며 이불을 홱 걷어 올렸다.“너 지금 안 일어나면, 우주 형님한테 와인 가져온 거 다 이른다.”“…아씨, 정태하 너 진짜.”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이현. 은하와 관련된 협박은 무조건 통하는 멍청이 자식.“얼른 나와. 아침 먹으러 가게.”“오키.”***네 사람은 간단히 짐을 정리한 후,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유난히 차가운 겨울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지만, 하늘은 맑았다.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나서는, 완벽하게 살아난 민희가 물었다.“아쉬우니까 바다 한 번 더 보고 갈래?”“좋지.”“콜.”해변가는 여전히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두 손을 주머니에 꼭 넣은 은하는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고, 모래사장을 밟아대는 민희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였다.“한 번 더 보고 가야 아쉬움이 덜하지.”태하와 이현 역시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며 긴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만든 추억은 꽤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았다. 네 사람은 마지막으로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을 각자의 마음에 새겼다.숙소로 돌아오자, 검은 코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사람이 숙소 앞에 서 있었다. 박 비서였다.“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요?”“네! 너무 즐거웠어요!”“네.”정말로 떠나야 하는 시간. 짧지만 길었던 여행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민희는 짐을 차에 실으면서도 아쉬운 듯 바닷가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아쉽다. 진짜 좋았는데.”이현이 가볍게 민희의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또 오면 되지.”“진짜? 또 오게 해 줄 거야?”“아니?
태하 역시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 아무래도… 우주 형님 얼굴 못 볼 것 같아….”은하는 그들의 대화를 흐릿하게 들으며 멍한 눈으로 물을 마셨다.“오빠한테 말 안 하면 되잖아….”“야, 양심의 가책 이라는 게 있잖아!”“몰라… 어지러워. 이상해.”“아 진짜 골 때리네. 얼른 가서 쉬자. 자야 돼.”은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어질어질 했다. 처음 마신 술의 여운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태하는 이현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다 책임져. 그러니까 와인은 왜 챙겨와서.”“내가 무슨 강은하 보호자냐?”말은 그렇게 뱉으면서도, 이현은 조심스럽게 은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가자. 천천히.”은하는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균형을 잡았고, 이현은 은하를 부축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태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내가 데려다 줄 걸 그랬나….’방에 도착한 뒤, 이현은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은하의 몸이 푹, 부드러운 이불 속으로 파묻혔다. “푹 자라.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그리고는 방 안의 커튼을 살짝 당겨 닫아주고, 이불을 정리한 후 문 쪽으로 향했다.방을 막 나서려던 순간,“…백이현.”나른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이현은 문 고리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은 꼭 감고 있었지만, 마치 꿈결처럼 입술을 떼었다. “너…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오지 못했다.‘왜?’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왜 강은하 한테만 이렇게 신경이 쓰일까. 왜 이렇게 챙겨주고 싶어 안달인 걸까.그리고, 왜 이 따위 아무것도 아닌 질문에 마음이 요동칠까.“그냥. 그러고 싶으니까.”“…….”은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르는 듯, 금세 잠에 빠져든 모습이었다.규칙적인 숨소리, 살짝 붉어진 볼, 편안하게 이불 속에 파묻힌 모습.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이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사랑이 다 뜨거워야 되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남은 와인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따뜻한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거실, 커다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은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이미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볼이 발그레 붉어져 있었다.민희는 소파에 몸을 푹 던지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오늘 기분 너~무 좋다.”태하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미세하게 느긋해진 말투가 살짝 취기가 올랐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이현이 소파 한쪽에 기대 앉아 피식 웃었다.“정민희 완전 술고래 아니냐?”“웃겨. 지는 그럼 술취한 꽃게냐?”“그놈의 꽃게 얘기 좀 그만 해라 진짜.”은하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사이다가 든 잔을 만지작거렸다.자신만 취하지 않은 채,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조금은 신기하고 어색했다.잠시 후, 민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눈이 반짝였다. “히잇, 우리 수혁이잖아? 나 전화 좀.”애교 섞인 목소리를 남긴 채, 신나게 2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나도 잠깐 화장실 좀.”이현 역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방으로 향했다.마지막으로 태하마저 붉어진 볼을 식히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은하야. 나도 머리가 아파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응.”거실에 남은 건 은하 뿐이었다.한순간 조용해진 공간 속, 은하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했지만, 지금은 너무도 고요해진 공간.그때, 은하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반쯤 비워진 와인 병과 와인 잔이 눈에 들어왔다.‘다들 뭐가 그렇게 맛있어서 마시는 거지?’평소라면 망설였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런지, 난데 없는 호기심이 계속해서 밀려 들었다.결국 와인을 따르기 시작하는 손.아주 조금, 입술에 와인이 닿는 순간 낯선 향과 부드러운 쓴맛이 혀 끝을 감쌌다. ‘생각보다 맛은 없는데?’다시 한 모금,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쓰지만 따뜻한 맛이랄까.이상
조심스럽게 은하를 안아들고 보건실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태하. 팔에 안긴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숨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민희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따르며 은하의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보건실로 향하자마자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놀란 보건 선생님이 급히 다가와 은하의 상태를 살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달려왔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큰 소리에 갑자기 놀란 듯 하더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어요.”“약? 무슨 약?”민희는 서둘러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은하가 먹었던
뒷문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태하가 은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 보건실 데려다 줘?”목소리엔 왠지 모를 걱정이 담겨 있었고, 눈빛에는 분명한 진심이 서려 있었다. 이현은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느릿하게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감정은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흥미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아니… 나… 먼저 가봐야겠어. 담임 선생님께 말 좀 전해줘.”그 말과 함께, 은하는 가방을 들고 자리를 피하려는 듯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태하는 쉽게 수긍하지 않는 표정이었다.“은하야
다음날도 어김없이 시작된 학교생활.우주는 한결같이 동생 은하의 등교를 챙겼고, 교문을 지나던 은하는 커다란 은행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이틀이나 잘 해왔잖아. 이대로만 하면 돼.’ 다행히 은하의 생각대로 오늘은 별일 없이 무난한 시간이 끝나가는 듯 했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 시간이 되자, 각자 맡은 구역을 청소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은하는 이번 주, 교실 청소 담당이었다.표정 없이 칠판을 닦고 있던 은하가 잠시 손을 멈추고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어냈다.그리고 그 순간, ‘쾅—!’누군가 철제로 된 청소 도
잔뜩 인상을 찌푸린 이현이 투덜거렸다.“뭐야, 너는 왜 또 여기 앉아?”“자리가 남길래.”태하는 담담하게 국을 떠먹었다. 태도는 가벼워 보였지만, 그 속에는 '적당히좀 해라' 라는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갑작스러운 태하의 착석에 은하와 민희 역시 적지 않게 놀란 듯 했다.모두가 퍽 어이없는 상황, 이현이 은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야 전학생.”“…….”“넌 좋겠다. 정태하가 매번 나서서 도와주네?”도발적인 말이 떨어지고, 은하보다 태하가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백이현.”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