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로?” 시간이 아직 이르니, 좀 더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유건은 시연을 침대에 눕혔다. 시연은 허리를 한번 문지르더니, 참지 못하고 남자를 흘겨보았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유건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이 인간, 진짜 뻔뻔하긴...’ 시연은 못마땅한 듯 다시 남자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안 잘 거면 내 허리 좀 주물러 줘요.” ‘어이구, 아주 능숙하게 부려 먹네.’ 하지만 유건은 거절할 생각도 없이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좋아, 내가 해줄게. 내 손기술이 당신보단 못해도 힘 하나는 좋을 테니까.” 남자의 손바닥이 시연의 허리에 닿았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돼?” ‘오, 고 대표 손기술도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힘쓰는 일은 남자가 유리한 게 맞아.’ “네...” 시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른하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그래요... 거기...” 마치 고양이처럼, 나른하면서도 애교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시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벌써 정오였다. 순간, 그녀는 당황하며 황급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와중에 옆에서 태평하게 앉아 있는 유건을 보자 괜히 화가 났다. “왜 안 깨웠어요?” 유건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깨우면 ‘왜 깨우냐’고 뭐라 하고, 안 깨우면 ‘안 깨운다’고 또 뭐라 하고. 사모님,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었어? 너무 곤란한데?” 사실 그는 시연이 늦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시연이 할아버지를 신경 쓴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바로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그리고 아직 안 늦었어.” 더 이상 유건과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서 시연은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신혼 첫날, 시연이 고른 옷은 연한 보랏빛 롱 원피스였다. 왼손 약지에서는 유건과 맞춘 커플링이 빛났다. 그
시연과 유건은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문에 들어서자, 지하와 몇몇이 장난스럽게 놀려댔다.“어젯밤에 너무 힘들었던 거 아니야?”“형수님, 정말 수고하셨어요!”“이야, 이러다 이삿짐 싸야 하는 거 아냐?”“너희, 평생 장가 안 갈 작정이냐?”다들 어른이 되고도 여전히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시연은 그들의 말다툼에 끼지 않고, 우주를 바라보았다.지금 우주는 고상훈과 함께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둘만이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진아가 살짝 다가와 속삭였다.“꽤 오래 두고 있어. 처음엔 어르신께서 우주에게 말도 걸었는데...”그 말은 곧, 지금은 조용하다는 뜻이었다.‘왜...?’시연은 고상훈의 표정을 살폈다. 심각한 얼굴이었다.‘이거 좀 불안한데.'노인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굉장히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상훈은 바둑을 굉장히 좋아했고, 그만한 실력자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상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것도 겨우 십 대의 소년.이번 한 수를 두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다행히도, 우주는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 성급하게 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시연은 바둑을 둘 줄 몰랐다.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고상훈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우...”입을 열어 우주를 부르려는 순간, 유건이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저지했다.시연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왜 그래요?”“당신이야말로 뭐 하려는 거야?”유건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두 사람 바둑 두고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우주가 괜히 할아버지에게 폐 끼칠까 봐...”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주는 바둑 둘 줄도 몰라요...”“우주가 보통 아이야?”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보기엔 잘 두고 있던데?”“하지만...”시연은 망설였다.고상훈의 표정을 보면, 우주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닐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그럴 필요 없어.”유건은
“젊은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놀다 와.”시연의 몸 상태 때문에 신혼여행 계획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제남도를 떠날 것도 아니었다.계획대로라면 섬에서 이틀, 삼일 정도 더 머무르며 쉴 예정이었다.오후가 되자, 유강석이 앞장서서 바닷가에 가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동의했다.시연은 우주를 걱정하며 물었다.“우주, 가고 싶어?”우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시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가고 싶어.”하지만 시연은 여전히 고민되었다. 몸이 불편한 탓에 동생을 제대로 돌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주는 영리했다. 바로 유건에게 시선을 돌렸다.게다가 우주는 시연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간절하게 바라볼 때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유건이 그걸 이겨낼 리 없었다. 결국 처남을 위해 나섰다.“가자. 우주는 걱정하지 마. 내가 볼게. 마침 우주도 수영 배우고 싶다며? 내가 가르쳐 줄게.”우주의 두 눈이 더 크게 빛났다.몇 번이나 말하려다 망설이며, 결국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매형, 진짜... 진짜야?”“진짜지.”유건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면, 네 누나가 날 가만둘 것 같아?”“누나.”매형의 약속을 받고 나니, 우주는 다시 시연을 바라보았다. 결국 결정권은 누나에게 있었다.동생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던 시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물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그녀는 유건을 믿었다.감정을 떠나, 유건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뢰감을 주었다.“와!”우주는 기쁨에 들떠 뛰어올랐다.“매형! 누나가 허락했어! 얼른 가자!”그렇게 다들 바닷가로 향했다.남자들은 전부 바다로 뛰어들었고, 시연만이 해변 의자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임진아는 자연스럽게 시연 곁을 지켰다.“안 들어가?”“귀찮아.”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움직이기도 싫어.”“히힛.”진아는 장난스럽게 다가오며 속삭였다.“어젯밤에 너무 무리했어?”시연
“네?”진아가 고개를 돌려 보니, 부지하였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는 사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지하는 여자의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궁금해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 말 없이 표정만 저렇게 변하는 걸까?’그가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가게의 코코넛을 바라보니, 이미 개봉된 상태였다. 상황이 다 이해됐다.지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핸드폰 안 가져온 건가?”진아는 순간 멍해졌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결심한 듯 손을 꽉 쥐며 말했다.“실례지만, 대신 결제해 주실 수 있나요? 핸드폰 찾으면 바로 송금해 드릴게요.”“흠...”지하는 일부러 생각하는 척했다.코코넛 몇 개 값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진아가 원한다면, 섬 하나를 사서 선물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 쫀득한 찹쌀떡 같은 진아가 묘하게 재미있어서 장난치고 싶어졌다.“못 해 줄 건 없지.”“정말요?”진아는 반색하며 기뻐했다.“응.”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대신, 나를 ‘오빠’라고 한 번 불러 봐. 그럼 그냥 사줄게. 돈도 안 받을게, 응?”진아는 순간 얼어붙었다.‘뭐라고?'그리고 곧바로 깨닫고는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됐어요! 도움 안 받을래요!”‘성빈이 말이 맞아. 이 사람,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코코넛 몇 개 사 준다고 생색을 내다니! 게다가 이런 장난까지!’진아가 화가 나서 돌아서려던 순간, 가게 주인이 말했다.“어이, 아가씨! 돈 안 내고 어디 가!” 이와 동시에 지하가 진아의 손목을 붙잡았다.“사장님 말씀 들었지? 아가씨, 먹튀는 나쁜 거야.”진아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면서도 창피함까지 몰려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됐어.”지하는 더 장난을 칠 기세였지만, 이대로 가다간 진아가 진짜 폭발할 것 같아서 적당히 멈추기로 했다
“지하야, 우주 좀 잘 부탁해.”“걱정하지 마.”지하는 가볍게 OK 사인을 그려 보였다. ‘우주는 유건이 아내의 심장 같은 존재니까, 내가 당연히 잘 챙겨야겠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서 재우려 했다.혹시라도 햇빛이 들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아를 바라보았다.“진아 씨, 부탁 좀...”“네.”진아는 유건의 말에 따라 방수 의류를 들어 시연의 얼굴과 머리를 가렸다.“됐어, 고마워.”유건은 한숨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그 태도에 진아는 순간 놀랐다.‘고 대표가 이렇게까지 시연이를 아끼다니.’그녀는 연애를 해본 적 없지만, 주변 친구들의 연애는 익히 봐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남자도 유건과 비교할 수 없었다.‘이래서 시연이가 결혼을 결정했구나.’이제 진아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유건이 앞으로도 시연만 바라보고, 장소미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얽히지 않는 것. ...유건은 시연을 방으로 데려가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커튼을 내려, 편히 잘 수 있도록 했다.몇 분 정도 옆에서 머물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우주는 여전히 해변에 있었다.물론 지하가 잘 챙기고 있겠지만, 그래도 유건은 시연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해가 저물 무렵, 시연이 눈을 떴다. 푹 자고 난 덕분에 머리가 개운했다.그리고 방 안은 조용했고, 그녀 혼자뿐이었다.시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어 보니, 바깥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모두가 머무는 곳과 테라스는 연결되어 있었고, 중앙의 넓은 공간에는 수영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BBQ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붉게 물든 노을과 겹쳐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가운데에는 진아와 성빈이 있었다.진아는 바비큐를 굽고 있었고, 성빈은 잘 깐 귤을 그녀 입에 하나씩 넣어 주고 있었다.시연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시연아, 일어났어?”진아가 바로 반응하며 성빈을 툭툭 쳤다.
옆에서 빠르게 한쪽 팔이 뻗어 나와 우주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러나 너무 급한 탓에 숯불 화로가 그대로 넘어가면서 뜨거운 숯이 쏟아졌다. 그중 일부가 그 팔 위로 떨어졌다.“쓰읍!”유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입을 벌린 시연은 약 2초가량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유건 씨!”이어서 본능적으로 남자의 팔을 잡아 살펴보았다.“빨리 보여줘요.”그녀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그리고 더 볼 것도 없었다. 고온의 숯이 직접 닿았으니 당연히 화상이었다.“빨리 와요!”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시연은 유건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우선 세면대 앞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화상 부위를 식혔다.“잠깐만 있어요.”여자는 곧바로 욕실로 뛰어가 대야를 찾아 들고, 냉장고의 얼음 칸에서 얼음을 퍼 담았다.그런 다음, 단호하게 지시했다.“팔 넣어요.”유건은 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왜 멍하니 있어요?”시연은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너무 아파서 정신이 나간 거예요?”그리고 답답해서 남자의 손을 직접 잡고 강제로 얼음물에 담갔다.유건은 당연히 정신을 놓은 게 아니었다.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시연이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시연은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지금처럼 유건을 신경 써 주고, 다급하게 챙기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그게 유건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역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겠지?'유건은 시연이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단순히 할아버지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순간, 그는 멀쩡한 팔로 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리고 여자를 품에 끌어당겼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여보, 날 좋아하지?”질문을 뱉어낸 순간, 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사실, 유건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연이 자신을 조금은 좋아한다는 사실을.하지만 그녀가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 또한 묻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우주에게 차근차근 가르치듯 말하길 십 분.“누나가 말한 거, 기억했어?”“응!” 우주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다시는 안 그럴게. 누나, 화내지 마.”동생이 잔뜩 주눅 든 모습을 보니 시연의 마음이 또 약해졌다.그녀는 우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누나는 화난 게 아니야. 우주가 걱정돼서 그래.”바로 그 순간, 우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아이고!”기다렸다는 듯이 진아가 우주의 팔을 잡았다.“우리 우주 배고프다! 나랑 같이 가서 뭐 좀 먹자!”그녀는 우주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아이고 참, 우리 우주를 배고프게 했네!”방 안에는 다시 부부 둘만 남았다.시연은 유건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약상자를 꺼냈다.이곳의 약상자는 꽤 잘 갖춰져 있었다. 화상 연고까지 있었다.“얼음찜질은 이 정도면 됐어요.”그녀는 유건의 팔을 살며시 잡아 닦아주었다.“물기부터 닦고, 연고 바를게요.”이어서 깨끗한 거즈를 꺼내 물기를 조심스럽게 흡수한 후, 면봉으로 연고를 정성껏 발랐다.그리고 한층 신중해진 얼굴로 말했다.“아마 물집이 잡힐 거예요. 더 아플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터뜨려 줄게요.”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앙다물고 조용히 말했다.“미안해요.”시연은 자기 동생이 유건을 다치게 했으니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그런 말은 하지 마.”그리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아내가 남편한테 이런 식으로 사과해야 하나?’어쩐지 유건의 속이 상했다.“지시연, 지금 너는 내 아내고, 우주는 내 처남이야. 그런 사과는 필요 없으니까 취소해.”시연은 순간 당황했다.‘말한 걸 어떻게 취소하라는 거지?’하지만 유건은 진심으로 기분 나빠했다.시연은 살짝 남자의 손을 잡고 나긋하게 말했다.“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취소할게요.”그녀는 때로는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오늘 유건이 아니었으면, 다친 건 우주였을 것이다.그런 남편에게 사과하는 것은 이상한 일
“여보, 나 다 했어.”욕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렸다.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어, 알았어요.”그리고 허둥지둥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러나, 손을 떼기 전, 무심코 한 번 더 장소미의 생일을 빠르게 입력해 보았다. 화면에 뜬 글씨는 ‘비밀번호 오류’였다.순간, 가슴 깊이 안도감이 밀려왔고, 시연은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유건이 나와 손을 내밀었다.“가자. 나 배고파.”“나도요.”시연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났고, 걸어 나가면서도 틈틈이 유건을 힐끔거렸다.‘남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여자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할까?’ ‘내가... 착각한 건 아니겠지?'...다음 날,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 시내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출발 전, 시연은 고상훈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건의 팔을 치료해 주기로 했다. 예상한 대로, 화상 부위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소독한 바늘을 들고 하나씩 터뜨린 후, 그녀는 유건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다.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여긴 경구약이 없어서... 돌아가면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는 게 좋겠어요. 감염되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요.”말하면서도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흉이 질 수도 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연해지긴 하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그런 시연을 보며 유건은 미소를 지었다.“그게 뭐 어때서? 난 여자도 아닌데, 흉 남으면 남는 대로 두지 뭐.”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남 일처럼 말하지 말아요.”“그건 그렇고.”유건이 여자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말을 꺼냈다.“뭐예요?”시연이 남자의 손길을 피하지 않자, 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유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기환을 당신 곁에 붙이려고.”“네?”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이어서 말을 곱씹으며 다시 물었다.“나를 보호하려고 기환 씨를 붙이겠다는 거예요?”“똑똑하네.”유건은 시연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건드렸다.사실 이는 지난번 납치 사건 이후, 유건
만약 검사 결과에 문제가 없다면, 시연은 우주에게 간 이식 얘기를 꺼낼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문제가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오늘, 시연은 건강검진 중간 예약 때문에 병원에 왔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하자, 지동성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미리와 장소미까지 같이 와 있었다.‘놀랍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시연아.”시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지동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장미리도 덩달아 일어났다. 장소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에 예외였지만, 모두의 시선은 똑같았다.간절하고, 어딘가 초조한 눈빛.‘나를 향한 게 아니야. 우주의 간을 향한 거지.’“시연아.”장미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정말... 고마워.”“아니에요.”시연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차갑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소미도 연이어 말했다.“고마워...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돼?”“나랑 한 약속을 기억하면 돼요. 우주 앞에서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시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아예 당신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제일 좋고요.” 과거, 장미리가 우주를 납치하고 다치게 했던 기억이 스쳤다.“알겠어, 알겠어!”장미리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우린 잘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그럼 됐어요.”시연은 안쪽 진료실을 가리켰다.“그럼 장 여사님, 저는 서류 작성하러 들어갈게요. 그쪽 식구들, 더 이상 할 일 없으면 그냥 먼저 가보세요.”말을 끝내고, 시연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진료실로 향했다.“시연아, 나도 같이 갈게!”지동성이 급히 따라붙었다.잠시 후, 두 사람은 함께 진료실에서 나왔다. 시연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유건이었다.‘또 이 사람이야.’시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용히 무음으로 돌려버렸고, 받지도, 답장하지도 않았다. 이미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말이다.“어떻게 됐어요?”나오자마자, 장미
유건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 눈빛에는 잠깐의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너, 꽃... 안 좋아해?”“참...” 시연은 두어 번 짧게 웃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그러다 불쑥 말했다. “오늘, 아버지를 만났어요.”유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는 묵직한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그리고 그분한테 약속했어요. 우주한테 간 이식 얘기를 전하겠다고.”시연은 문득 웃었다. 쓸쓸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그날 당신이 했던 말들, 솔직히 듣기 끔찍했지만... 맞는 부분도 있었어요.”“시연아, 나...” 유건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끝까지 들어줘요.” 시연은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웃었다.“하지만 그분, 나랑 약속했어요. 우주한테 자기가 아버지라는 걸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요.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당신도 입조심해요.”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마치 ‘이제 나가라’는 듯한 자세였다.“자, 이제 내가 할 말은 끝났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겠네요. 이제 당신의 목적도 이뤘으니 이만 가봐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밖에서 내리는 눈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시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끝이야. 나도, 당신도.’그때, 유건이 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얇은 입술에, 가볍고도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내 목적이 뭔데?”“됐어요, 그만해요.” 시연은 피곤한 듯 웃음을 거두었다.“더는 당신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요. 빨리 가서 장소미한테 좋은 소식 전해요. 기뻐하겠죠.”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시연에게 성큼 다가섰다.“내 목적이 뭐냐고 묻잖아. 대답해.”‘뭐야, 아직 부족해?’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내가 못 알아듣게 말했나?’“그...” “입 다물어.”유건은 거칠게 시연의 턱을 움켜잡았다. 남자의 숨결이 거칠고 짙게,
“고마워요.”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좀 볼게.” 지동성이 메뉴를 받아 들고, 시연의 취향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많이도 골랐다.“이 정도면 될까?” “충분해요.” “그래, 부족하면 더 시키자.”딸이 먼저 식사를 제안한 건 너무 뜻밖이라, 지동성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이런저런 질문이 이어졌다.“요즘 어때? 아이는 괜찮고?” “그럭저럭이요...” 시연은 대충 답했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또 시작이야...’ 지동성의 끊임없는 질문에 시연은 은근히 짜증이 밀려왔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간 이식 문제는, 우주한테 말해볼게요.”지동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시연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 ‘알아들었을 거야. 그것도 충분히.’ 그리고 이어갔다. “하지만, 저한테 약속 하나를 해줬으면 좋겠어요.”“시연아...” 지동성은 다급히 불렀지만, 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눈으로 지동성을 바라봤다.“저는 우주한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가족들도, 입 다물었으면 좋겠어요.”“우주는 자기 아빠도, 엄마처럼 이미 세상에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요.”말하는 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면 안 돼, 울지 마...’ 하지만, 그녀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저는 우주한테, 아버지가 그냥 자주 찾아오는 아저씨라고만 말할 거예요.”“시연아, 난...” 지동성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시연이 단호히 끊었다.“제발...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앞으로 절대, 우주를 아버지로서 대하려 하지 마세요.”“우주는 14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빠’를 불러본 적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우리 우주... 이제 와서 무너뜨릴 수 없어. 절대.’시연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약속할 수 있어요
남자는 키가 크고, 군더더기 없이 단단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유건과 체격이 비슷했던 덕분에, 시연은 그가 꾸준히 운동해 온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남자는 어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깊었고, 특히 크고 선명한 유럽풍 눈매가 눈길을 끌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 속에 은은하게 퍼지는 푸른빛이 인상적이었다.피부도 매끈했다. 아마 좋은 환경에서 자라온 덕분일까, 눈에 띄는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하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남자가 중년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시연이 잠시 귀를 기울이니,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불어였다. ‘불어...? 여기서?’ 시연은 살짝 긴장했지만, 곧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봉주르.” 시연은 조심스럽게 불어로 인사를 건넸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아.” 남자는 잠깐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불어 할 줄 아세요?”“조금이요.” 시연은 겸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걸로 먹고 살았던 적도 있지만...’“정말 다행이네요.” 남자는 위쪽 메뉴판을 가리키며 서툴게 손짓했다. “저기... 저걸로...”“네.” 시연은 금세 알아차리고, 미소를 띤 채 직원에게 돌아섰다.“이분은 레모네이드, 얼음은 조금만요.”“네, 알겠습니다.” 직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라면 간신히 알아듣겠지만, 불어는 아예 포기 상태였으니까.“고객님, 여기 카드로 결제하시면 됩니다.”‘카드...? 어쩌지?’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제가 도와드릴게요.”‘좋은 일은 끝까지 해야지.’시연은 자기 카드로 대신 결제를 진행했다.‘다행이다. 그냥 레모네이드 하나라서. 비쌌으면... 내 지갑부터 걱정했을지도 몰라.’“저는 밀크티 하나요. 같이 결제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정말 고맙습니다.”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
“고, 유, 건!” 시연의 인내심이 결국 터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건은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너 샤워 다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 갈게. 욕실 바닥 미끄럽잖아. 그 생각하니까 그냥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네, 진짜.’시연이 숨을 꾹 참고 머리를 홰 젖히며 돌아서자, 긴 머리카락도 그녀를 따라 허공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방에서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건이 선수를 쳤다. “머리만 말려주고 갈게. 팔 오래 들고 있으면 어깨 아프잖아.” ‘와... 이 사람 진짜 각 잡았네.’ “당신...” 시연은 유건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지금 완전 딱 쫀득한 엿 같은데요? 질척거리는 게, 떼도 안 떨어질 것 같아요.” “고마워, 나 그런 칭찬 좋아해.” 유건은 오히려 웃으며 수건을 펼쳤다. “칭찬...?” 시연은 어이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정신력은 또 뭐야...’ “자, 머리 말리자. 머리 다 말리고 자야 감기 안 걸리지.” 결국 시연은 눈을 감았다. ‘됐어... 그냥 못 본 척하자. 말하면 뭐 해? 안 먹힐 텐데.’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유건은 하루에 두 번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침엔 아침밥 들고 등장. 점심엔 직접 못 오면 민환을 통해 도시락 배달. 저녁엔 꼭 나타났다. 빠르면 같이 저녁, 늦으면 야식. 그리고 샤워 후엔 늘 자연스럽게 등장해 머리를 말려주기까지. 시연은 정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봤다.차갑게도 말해봤고, 내쫓으려 해본 적도 있었고, 문 앞에 세워두기도 해봤다. 하지만 유건은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라도 되는 듯, 늘 시연 곁을 지켰다.마치 떠날 줄 모르는 그림자처럼.어느 날 오전. 시연은 오랜만에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잠깐 들릴 생각이
“놓아달라고?” 유건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긴 속눈썹 아래로 감춰진 눈빛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널 좋아한다고 말한 게, 널 못 놔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 ‘또 그 말이지. 좋아한다, 좋아해.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시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요?” 시연은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말이 안 통해.’ 머리는 온통 유건이 감아준 목도리로 덮여 있었다.겉으로는 따뜻해 보였지만 마음은 너무도 답답했기에, 약간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나... 당신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는 거...” “응, 알아.” 유건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웃었다. “아직 기억해.” “그럼 지금 이건 다 뭐예요?” 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린, 그거 때문에 헤어진 거잖아요?”두 사람은 명확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진 않았다.하지만 그동안의 긴 냉전은 이미 서로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서로 말은 안 했지만, 끝난 거나 다름없었어. 할아버지 때문에 그냥 참고 있었던 거지.’ ‘이젠 할아버지조차 이혼을 허락했는데... 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나도 알아.” 시연은 말끝을 질끈 씹듯 말했다.“당신이 그랬잖아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의미 없다고. 세상에 여자가 한둘도 아닌데, 그런 사람한테 매달릴 필요 없다고요...” 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말, 정확히 그렇게 했었다. ‘참 잘 기억하네. 근데 내가 했던 행동들은 왜 기억 안 하지...?’ 유건은 얇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냥 아무 말이나 뱉은 거야.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어?” “뭐라고요...?” 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말 바꾸는 거야?’ ‘이 인간, 진짜 뻔뻔하네.’ “우린 말 안 통해요. 난 당신처럼 무책임한 사
“고마워요.” “천만에요.” 우주는 과일 접시를 힐끗 보더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누나, 이 귤, 진짜 달아.” “그래?” 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우주는 먹어봤어?” “응.”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아저씨가 준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웃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저씨...’ 우주의 입에서 나오는 그 ‘아저씨’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당연히 지동성이었다. “그 사람이...”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가 널 보러 왔었어?” “응.” 우주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오후에 왔어.” ‘어제...’ ‘퇴원한 바로 다음 날?’ ‘그럼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우주를 보러 온 거야...?’ ‘이게 진심일까, 아니면 또 쇼일까?’ 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까지 애써야 할 이유가 대체 뭐지...?’ “누나.” “응?” 시연이 정신을 가다듬고 우주를 바라보자, 우주는 조금 머뭇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저씨... 이제 괜찮아진 거야?” ‘뭐...?’ 시연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우주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아저씨가 그랬어.” 우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날 보러 못 온 건, 아팠기 때문이라고.” ‘왜 그런 말을 우주한테 했지...?’ 시연의 가슴이 조여왔다. “아저씨가 또 뭐라고 했는데? 무슨 병이라고 했어?” “아... 뭐라고 했냐면...” 시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진짜 말한 거야? 설마...’ “뭐라고 했는데?” 우주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감기래.” “감기...?” 그 말에 시연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그 정도로만 말했구나...’ ‘정말... 그 사람, 아직도 이중적인 사람이네.’ “누나.” 우주가 다시 입을 열었
해가 채 뜨기도 전, 시연은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아는 이불 속에서 눈을 겨우 떠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야...?” “아직 이른 아침이야.” 시연은 진아의 통통한 볼을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나 우주랑 아침 먹기로 해서 좀 일찍 나가. 너는 더 자.” “응...” 진아는 듣자마자 바로 순하게 눈을 감았다. 시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별산장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문을 연 건 최예민이었다. “우주 도련님은 지금 세수 중이에요. 아침에 깨우지도 않았는데, 누나 온다고 혼자 벌떡 일어나서 준비하더라고요.” 최예민은 환하게 웃으며 시연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모님, 여기 앉으세요. 아침은 다 준비됐고, 곧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아이고, 뭘요. 당연한 일인데요.” 조금 뒤,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이 놓이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누나!” 우주가 얼굴에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시연의 옆에 착 붙어 앉으며 해맑게 웃었다. “조심해!”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만둣국 한 그릇을 우주 앞에 놓아줬다. 조금 전 살짝 식혀둔 국이었다. 그래도 시연은 당부했다. “천천히 먹어. 국물 뜨거우니까.” “응! 누나 걱정하지 마. 나 조심할게!” 우주는 아주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나도 같이 먹자!” “그럴까?” 시연도 조심히 젓가락을 들며 미소 지었다. ...그 시각, 시연의 아파트. 띠링- 초인종 소리에 진아는 부스스 일어나 문으로 갔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문을 열었는데, 눈이 순간 커졌다. “고, 고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진아는 아직 잠옷 차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에 머리도 제대로 못 가다듬은 상태였다.유건은 짧게 진아를 본 후, 바로 시선을 돌려 옆으로 몸을 틀었다. “시연이는 일어
“지시연!” 유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너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며 유건을 바라봤다. “내가 당신이 한 말 몇 마디에 감동해서 울컥하고, 기분 좋아서 그 말들 다 들어줄 정도로 철없는 애인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눈동자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 진심으로 너한테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어. 진심으로... 너한테...”“하지 마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망설임 하나 없이, 맑고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마음, 난 안 받을 거예요.”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유건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어. 하지만 시연아, 내가 널 좋아하는 감정은 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내 의지로도 안 돼.” 유건은 이내 들고 있던 장미꽃을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막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음에 들어?”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꽃을 보여주면 내가 감동할 줄 아나 봐?’ 시연은 꽃은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아요.” 유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기분 상했나 보네. 오늘은 일단 가주는 게 딱 좋겠어.’ “장미 안 좋아해?” 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알았어. 다음엔 다른 꽃으로 할게.” “뭐라고요...?” 시연은 벙찐 얼굴로 유건을 쳐다봤다. ‘지금... 난 그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유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진아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진아 씨, 이거 좀 꽂아줘.” “네?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