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예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악문 잇새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유은호 이사님. 선은 넘지 마시죠.”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은호를 쏘아본 예리가 어깨를 돌렸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도운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을까?하지만 예리를 멈추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은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도운 형 말입니다….”떼어지지 않던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실은 아윤 씨 말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 억지로 진행해 봤자 결국 아윤 씨 상처만 더 커질 겁니다.”“방금 한 말, 다시 해보세요. 아윤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니요?”어느새 은호의 앞까지 바짝 다가온 예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은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도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그의 기억은 조금 전, 도운을 찾아 헤매던 뒷마당으로 거슬러 올라갔다.***타닥.은호의 하얀 운동화가 급하게 멈춰 섰다.저녁 식사 전에 도운이 알려주었던 뒷마당의 길고양이 집이 생각나 찾아왔다.낮은 나무가 우거져 가로등 불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도운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은호의 땀에 젖은 흰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은 채, 그는 도운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여기 계셨네요!”고양이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도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은호를 본 도운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나 찾으러 온 거야?”은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도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 괜히 바닥을 긁적였다.“아윤 씨는 울면서 나갔죠, 형은 돌아오질 않죠. 걱정돼서 여기저기 한참 찾으러 다녔어요.”도운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아윤 씨가… 울었어?”“하아… 네.”무거운 한숨이 섞인 대답에 도운의 표정이 한층 더 굳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말을 마친 아윤은 예리에게 짧게 목인사를 남긴 채 가방을 고쳐 들었다.뛰다시피 대문 밖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예리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소진과 은호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어 깨웠다.“강 비서님! 유 이사님!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한가하게 주무실 때가 아니라고요!”“팀장님…? 무슨 일 났어요…?”눈을 게슴츠레 뜬 소진이 기우뚱하게 몸을 일으켰다. 은호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예리를 올려다보았다.“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이사님은 도운 씨 좀 찾아봐 주세요! 강 비서님은 저 따라 오시고요! 빨리요!”예리가 평소답지 않게 조바심을 내자, 은호는 올라오는 술기운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찾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고개를 대충 끄덕인 예리는 소진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아윤이 뛰어나간 방향으로 바쁘게 달려나갔다.변변찮은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인 밤의 시골길은 바로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혹여 아윤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맞닥뜨리지 않았을까 걱정된 예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저 멀리 노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홀로 쓸쓸히 걷는 실루엣이 보였다.“아윤 씨! 잠시만요! 멈춰봐요!”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윤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윤의 앞에 선 예리는 가쁘게 터져 나오는 숨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눈가와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예리는 아윤의 볼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물었다.“아윤 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저… 저 그냥 그만할래요. 이제 와서 말해봤자 의미 없어요….”고개를 가로젓던 아윤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다시는 오늘처럼 찾아오지 말래요….”아윤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착각하지 말라고… 저를 보면 오히려 화가 난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어떻게 더 해요!”울분을 터뜨린
도운의 손목 위 문양은 이미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표정은 정반대였다.“아윤 씨, 오랜만에 뵙네요.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요.”도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리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아윤 씨, 상담 이후로 무슨 일 있었어요? 도운 씨 표정이 화난 사람 같아서요.”“아니요… 아, 전에 도운 씨가 바쁠 때 고양이들 밥을 한 번 대신 챙겨준 적이 있긴 한데, 그 뒤로 계속 저렇게 굳은 표정이에요. 그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예리 씨, 혹시 제가 뭘 크게 잘못한 걸까요?”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윤이 예리의 소매 끝을 와락 붙들었다. 예리는 아윤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은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은호는 고양이 좋아해? 보니까 무서워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사실 제가 랜선… 집사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럼, 이리 와서 자세 낮추고, 이렇게 주먹을 슬쩍 내밀어봐.”은호가 도운을 따라 웅크려 앉아 조심스럽게 주먹을 내밀었다.살금살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은호의 손가락 마디에 머리를 꾹 비벼대더니, 금세 기분이 좋은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핑크빛 배를 까뒤집었다.“와, 은호 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얘도 은근히 얼굴 보거든. 눈이 아주 정확해, 우리 밤순이.”도운이 삼색 고양이의 말랑한 배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은호 역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밤순이의 배를 살살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털이 보드랍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은호는 손을 거두지 못한 채 밤순이의 배를 가만히 쓸어내렸다.은호를 대견한 동생 보듯 바라보던 도운이 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여기 말고 집 뒤쪽에도 몇 마리 더 있는데, 밥 주러 같이 갈래?”“아… 그래도 되겠습… 될까요?”“그럼, 당연하지!”도운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은호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둘렀다.은호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이런 거리의 온기가 낯설기만 했다.“가자. 우리 애기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도운이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는 걸 보고서야, 은호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며 단단히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도운의 걸음에 맞춰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형, 이건 여기 두면 될까요?”“어, 은호야. 거기다 내려놔.”본채 마당을 가로지르던 예리의 눈이 샐쭉 접혔다.‘또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나 팀장님, 오셨네요?”그릇을 정갈하게 내려놓던 은호가 다가온 예리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셔서 어디 나간 줄 알았더니, 여기 계셨네요?”“아
탁.도운이 차 문을 닫고 내린 뒤 세 사람에게 걸어왔다.“세 분 다 다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오셨네요!”“네. 그런데 대표님, 집이 정말 근사하네요.”예리가 대문에서부터 마당 반대편까지 천천히 둘러보며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따스한 오후 햇살을 품은 주황색 기와지붕이 예리의 눈동자 가득 담겼다.“제가 실은 건축 전공이라서요. 예전부터 직접 지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귀농하기 전부터 부지런히 땅부터 알아봤죠.”“아, 건축 전공이셨군요. 어쩐지 전체적인 동선이나 자재 쓰임이 예사롭지 않다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직접 지은 정성을 알아봐 주시니 기분 좋네요. 자,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안내해 드릴게요.”도운이 본채 옆에 자리 잡은 아담하고 아늑한 별채로 세 사람을 이끌었다.“별채라 그리 넓지는 않지만, 세 분 지내시기엔 모자람 없으실 겁니다.”도운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원목과 화이트 톤이 어우러진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담한 크기였지만 특유의 포근함이 감돌았다.“이쪽 큰 방은 여자 두 분이 쓰시면 되고요. 남자분은 이쪽으로 오시겠어요?”도운이 건너편 방으로 은호를 안내하자, 예리와 소진은 챙겨온 커다란 보스턴백을 침대 옆에 풀어놓았다.방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소진이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집을 보면 주인의 성격이 보인다던데, 그 말이 딱 맞네요. 어쩜 이렇게 정갈하고 따뜻할까? 어머, 조명도 깜찍해라.”소진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앙증맞은 무드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러게요. 집이 꼭 대표님 닮았어요.”예리가 대꾸하기 무섭게 문가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예리가 뒤를 돌자, 은호에게 안내를 마쳤는지 도운이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방은 마음에 드십니까?”“네, 보기만 해도 잠이 솔솔 올 것 같아요. 숙소 때문에 걱정 많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에이, 별말씀을요. 그럼 깨끗이 씻고 편하게 쉬시다가, 저녁때쯤 마당으로 나오세요. 맛있는 거 준비해 둘 테니까요
“제가 가겠습니다. 사장님은 기계부터 보러 가시죠.”소진이 도운의 어깨를 손으로 툭 치더니 빠르게 지나쳐 아이에게 다가갔다.“저, 감사합니다…!”도운은 잠시 멈칫하며 소진을 한 번 돌아보고는 창고로 전력 질주했다.소진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발버둥 치는 아이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아이고, 많이 아프지? 잠깐만 이렇게 있어봐.”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소진은 피부를 따라 가볍게 밀었다. 몇 번 반복하자 거짓말처럼 자그마한 검은색 벌침이 딸려 나왔다.“자, 이제 안 아플 거야. 다 됐어.”소진은 빨갛게 부어오른 팔을 놓아주며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아버님,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까운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아이 아빠는 연신 고개를 깊게 숙이며 감사를 표하더니, 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주차장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강 비서님, 어떻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렇게 능숙하게 대처하셨습니까? 저 정말 감탄했습니다. 대단하시네요.”은호가 진심 어린 얼굴로 작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소진이 뿌듯함이 가득 담긴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이 정도는 기본입니다.”자신만만하게 대꾸한 소진이 지갑 속으로 카드를 척 집어넣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도운이 땀범벅이 된 채 돌아왔다. 옷자락 여기저기에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에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도운이 소진의 앞으로 성큼 달려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아이 아버지는 주차장에서 만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당장 가봐야 하는 상황이라 눈앞이 캄캄했는데… 선생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공장 일은 잘 해결하셨나요? 아까 꽤 위험해 보이던데요.”소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도운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덕분에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기계도 기계지만, 선생님이 아이를 돌봐주신 덕분에 온전히 공장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저한테 은
주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거 말고는 더 들은 게 없는 거 같은데…."예리는 말없이 제 접시 위의 음식을 뒤적였다.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정치계까지 발이 넓은 주은조차 이 정도라면 유은호라는 남자를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될 것 같았다.“아트센터 행사 말고는 외부 활동도 아예 없는 것 같던데. 친구도 없고, 모임도 안 하는 것 같고… 아! 유은호 아는 사람, 딱 한 명 있다!”주은의 실낱같은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예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누구?”순간 주은이 대답 대신 미간을 잔뜩 찌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